조병옥
독립운동가, 교육자, 경찰관,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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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교육자, 경찰관, 정치인으로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관통한 인물이다. 미국 유학 중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흥사단 등에서 활동하며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미군정 경무부장으로서 경찰 재건을 주도했으나 친일 경찰 등용 논란에 휩싸였다. 이후 내무부 장관을 거쳐 야당의 주요 지도자로 이승만 정권에 맞섰으며, 1960년 제4대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선거운동 중 급서했다. 협상과 타협의 민주주의 원칙을 강조하며 한국 민주화의 초석을 놓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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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
[독립운동가 조병옥 탄생]
충청남도 천안에서 독립운동가 조인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며 유년기를 보냈다.
조재형의 셋째 아들인 독립운동가 조인원과 남양 홍씨 부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잔병치레가 잦았으나, 동몽선습을 40일 만에 독파하는 등 학문적 재능이 뛰어났다. 7세부터 서당에서 수학하며 사서삼경을 독파했다.
1903
[근대 교육의 시작, 영명학교 입학]
케블 목사의 추천으로 공주 영명학교에 입학하여 근대 교육을 받기 시작했으며, 5년제 소학교 4학년에 편입하여 1908년에 졸업했다.
1903년 케블 목사의 추천으로 공주 영명학교에 입학했다. 영명학교는 5년제 소학교와 2년제 특별중학교가 있었는데, 특별 배려로 영명소학교 4학년 과정에 편입하였다. 공주로 유학하여 하숙했으며, 1908년 영명소학교 6학년을 졸업했다.
1910
1908년 영명중학교를 졸업한 조병옥은 1910년 4년제 숭실중학교 3학년 과정에 편입하여 1912년 봄 졸업했다. 숭실중학교 재학 중에는 연설과 토론 대회에도 출전했으며, 영어 교사이자 수사학 교사인 김규식 박사를 따랐다고 회상했다. 숭실중학교 편입학 길에 경성 대한문 앞에서 을사조약 조칙문을 듣고 격분하여 통곡하기도 했다.
1912
[배재전문학교에서 교육 활동과 미국 유학 꿈]
이승만 등 미국 유학파의 영향으로 미국 유학을 결심하고 영어를 배우기 위해 배재전문학교에 입학했다. 또한 배재학당의 시간강사로 활동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1912년 봄 숭실중학교 졸업 후 서울로 상경, 이승만, 신흥우, 김규식 등의 미국 유학파에 감화되어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 배재전문학교에 입학했으며, 배재학교 교장이었던 신흥우의 요청으로 1911년 6월부터 학교 학생으로 시간강사직을 맡았다. 한자 과목을 가르치며 어린 나이에도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1914
[독립운동의 꿈을 안고 미국으로 유학]
약혼자 노정면과 함께 일본 유학 대신 미국 유학길에 올라 와이오밍 대학교에 입학했다. 이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미국에 대한 동경심 때문이었다.
1914년 배재학당 대학부를 마치고(졸업 여부 불확실), 약혼자 노정면과 함께 미국 유학을 결정했다. 당초 일본 유학을 결정했으나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미국에 대한 동경심으로 미국 유학길을 택했다. 아버지 조인원은 논밭을 팔아 3천 원의 비용을 마련해 학비 겸 여비로 주었으며, 와이오밍 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1918
[와이오밍 대학 졸업 후 컬럼비아 대학원 진학]
와이오밍 대학교 학사 과정을 졸업하고 뉴욕 컬럼비아 대학교 경제학 대학원에 진학하여 학업을 이어갔다.
1918년 와이오밍 대학 학사과정을 졸업하고 뉴욕 컬럼비아 대학교 경제학 대학원으로 진학하여 학문에 매진했다.
1919
[3.1운동 소식에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 참여]
미국에서 3.1운동 소식을 접한 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이승만 주최 제1차 한인연합회의에 연사로 참여하며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19년 4월, 미국 현지에서 3.1운동 소식을 접했으며, 이승만이 만세운동에 호응하기 위해 필라델피아에서 소집한 제1차 한인연합회의에 4월 13일부터 15일까지 3일간 참석하여 연사로 활동했다. 이 시기 아우내 장터 만세 시위에서 아버지와 동생이 체포,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1925
[한국의 토지제도 연구로 경제학 박사학위 취득]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한국의 토지제도' 논문으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학문적 성과를 이루었다.
1925년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한국의 토지제도'라는 논문으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 유학 과정에서 만난 노정면과 결혼을 약속했다.
[독립운동 단체 신간회 창립에 참여]
귀국 후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기독신우회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신간회 창립위원으로 참가하여 재정부장과 총무부장을 지냈다.
귀국 후 연희전문에서 교편을 잡고 기독교여자청년회(YWCA) 이사와 비밀독립단체인 기독신우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1925년 신간회 창립위원으로 참여하여 신간회 재정부장, 총무부장 등을 지내며 독립운동에 기여했다.
1929
[광주학생운동 옹호로 3년간 옥고]
광주학생운동을 옹호하는 민중대회를 열었다는 배후조종 혐의로 한용운 등과 함께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며 독립운동가로서의 길을 걸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옹호하는 민중대회를 개최한 배후 조종 혐의로 한용운 등과 함께 3년형을 언도받아 3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이후 안창호가 지도하는 흥사단에서 활동하다 또다시 옥고를 치렀다.
1932
[경영난 조선일보 인수 참여, 언론 활동]
조만식과 함께 경영난에 시달리던 조선일보 인수 운동에 참여하여 조만식이 사주가 되고 본인은 전무 겸 영업국장이 되어 언론 활동에 나섰다.
1932년 조만식과 함께 경영난에 시달리던 조선일보 인수운동에 참여했다. 조만식이 사주가 되고 조병옥은 조선일보 전무 겸 영업국장이 되어 언론 활동을 펼쳤다.
1937
안창호가 윤봉길 의거 관련자로 지목되어 투옥되자 그의 석방과 보석을 위해 노력했다. 이후 이광수 등과 국내에 흥사단 지부를 결성하려 했으나, 1937년 수양동지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2년간 복역했다. 1939년 3심에서 무죄가 확정되어 석방되었다.
1940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 거부, 고향 천안으로]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를 거부하고 조선총독부 통치에 비타협적인 태도를 일관하여, 압력과 감시를 피해 고향인 천안 용두리로 내려가 해방까지 지냈다.
출감 후 조선총독부와 일제의 협력 요구를 거부했으며, 1940년대 이후 창씨개명을 강요당했으나 이를 거부하는 등 비타협적인 태도를 보였다. 일제의 압력과 감시가 심해지자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인 천안군 용두리로 내려가 해방이 될 때까지 지냈다.
1945
[광복 후 한국민주당(한민당) 조직 참여]
광복 직후 김성수, 장덕수 등과 함께 반공, 반탁을 기치로 내건 한민당 창당에 참여하며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1945년 광복 직후 김성수, 장덕수 등과 한민당을 조직하여 반공, 반탁을 기치로 내걸었다.
[미군정 경무국장 내정 및 활동: 경찰 재건 주도와 친일 논란]
1945년 10월부터 미군정청 경무국 국장으로 내정되어 1948년까지 경찰 총수를 지냈으며, 해방 정국 치안 유지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이 시기 친일 경찰 채용 논란에 휩싸였다.
1945년 10월부터 1948년까지 미군정청 경무국 국장을 맡아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등과 좌파 척결을 주도했다. 이승만과 하지 사령관 사이의 갈등을 중재했고, 임시정부의 미군정 전복 계획에 대해 정부 참칭이라며 자제할 것을 촉구했다. 12월 31일에는 하지 중장에게 임시정부 요인 강제 추방 계획을 중단하도록 설득하고 김구와 하지의 면담을 주선하기도 했다. 이 시기 친일파 경찰의 채용을 추진하여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1946
[미군정청 경무부장 공식 발령]
1945년 10월부터 내정되어 업무를 수행하던 미군정청 경무국 국장 직에 1946년 1월 13일 공식 발령을 받았다.
1945년 10월부터 미군정청 경무국 국장으로 내정되어 활동하던 그는 1946년 1월 13일 정식으로 경무부장으로 발령받았다.
[친일 경찰 채용 문제로 조미공동위원회 출석]
대구 10월 사태 이후 조미공동위원회에 출석하여 친일 경찰 채용 원인을 진술하며 직업적인 친일과 연명책을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사국장 최능진으로부터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
1946년 10월 대구 10월 사태 조속한 수습을 위해 구성된 조미공동위원회에 출석하여 친일 경찰 채용 원인을 진술했다. 그는 친일 행위를 직업적인 것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연명책으로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수사국장 최능진은 경찰이 부패한 경찰관과 반역자들의 피난처라고 강력히 반박했으며, 조병옥은 최능진에게 사직을 요구했다. 결국 최능진은 조병옥을 비난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하며 친일 경찰 채용 문제를 강하게 비판했다.
1947
[우익단체의 중도좌파 암살 계획 미군정청에 보고]
5월 말 장택상과 함께 우익 진영이 여운형, 김규식 등 중도좌파 인물 암살을 계획하고 있다고 미군정청에 보고했다.
1947년 5월 말 장택상과 함께 우익 진영이 미소공위 파탄을 위해 관련자 암살을 계획중이며 첫 대상자로 여운형과 김규식, 허헌 등을 꼽고 있다고 미군정청에 보고했다. 또한 김석황 등 임정 계열이 이들 외에 미소공위 소련 측 대표와 조병옥, 장택상 본인에 대한 암살 계획도 꾸미고 있다고 주장했다.
[우익 테러 사건에 대한 담화 발표]
우익에 의한 테러 사건이 민족적 애국단체의 공동방위적 입장에서 출발한 행동이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1947년 7월 7일 우익에 의한 테러 사건이 민족적 애국단체의 공동방위적 입장에서 출발한 행동이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1948
1948년 3월부터 4월 4일까지 김규식에게 여러 차례 전화하여 남북협상은 무익하며 정치적 자살 행위가 될 것이라고 만류했다. 김규식도 그의 의견을 존중하여 불참할 뜻을 밝혔으나, 결국 4월 14일 문화예술인들의 지지 성명 등으로 북행하게 되자 안타까워했다.
[5.10 선거 앞두고 향토보위단 조직]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거를 앞두고 선전과 동원을 위해 경찰보조대인 향토보위단을 백만 명 규모로 조직했다.
1948년 4월,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거를 앞두고 선전과 동원을 위해 경찰보조대인 향토보위단(약칭: 향보단)을 백만 명 규모로 조직하였다.
[제주 4.3항쟁 진압 회의 중 김익렬과 난투극]
제주 4.3항쟁 해결을 위한 비밀 회의에서 김익렬 연대장과 진압 방식에 대한 의견 충돌로 난투극을 벌이며 논란을 빚었다.
1948년 5월 5일, 군정장관 윌리엄 F. 딘의 주도로 제주중학교에서 제주 4.3항쟁 해결을 위한 비밀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최천 경찰감찰청장과 김익렬 연대장의 진압 방식에 대한 의견이 엇갈리자, 조병옥은 김익렬을 공산주의자로 몰아갔다. 이에 격분한 김익렬과 단상에서 몸싸움을 벌였고, 회의는 결말을 보지 못한 채 혼란 속에서 종료되었다.
1948년 6월 22일 서재필 등에게 대한민국 경찰관 추도식 초청장을 발송했고, 6월 25일 오전 10시 1947년 1월 1일~1948년 1월 1일의 기간 동안 순직한 대한민국 경찰관 추도식을 주관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국가 건설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으며 이후 그는 UN 대표단으로 활동하게 된다.
1948년 7월 22일 이승만이 대한민국 국회의 간접선거에 의해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승만은 조병옥에게 문교부 장관직을 제의했으나, 그는 내무부나 국방부 장관을 원하며 거절하고 미국에 특사로 파견해 군사원조 필요성을 주장했다.
[대통령 특사 단장으로 자유우방국 순방, 정부 승인 요청]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7개 자유우방국에 대통령 특사 단장으로 파견되어 새로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의 승인을 요청하는 외교 활동을 펼쳤다.
1948년 9월 1일 대통령 특사 단장으로 17개 자유우방국에 파견되어 대한민국 정부 승인을 요청하는 중요한 외교 임무를 수행했다.
1948년 10월 9일 여순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이범석의 강경 진압론에 동조하였다.
[파리 UN총회 한국 대표단으로 국제 승인 노력]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파리에서 열린 제3차 UN 총회에 한국 대표단으로 참석하여 대한민국의 국제 연합 승인을 위한 홍보 활동에 주력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2월 7일부터 12일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3차 국제 연합 총회에 장면 단장 등과 함께 한국 대표단으로 참석하여 대한민국에 대한 국제 연합의 승인을 위한 홍보 사절 역할을 수행했다.
1949
[제4차 국제 연합 총회 한국 대표단 단장 역임]
제4차 국제 연합 총회에 한국 대표단 단장으로서 장면과 함께 참석하며 국제 외교 활동을 지속했다.
1949년 제4차 국제 연합 총회에서는 조병옥이 한국 대표단 단장으로서, 장면과 함께 참석하며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국제 외교 무대에서 활동했다.
[한국민주당·대한국민당 통합, 민주국민당 창당 참여]
한국민주당과 대한국민당의 신익희, 지청천 계열이 통합하여 민주국민당을 창당할 때 참여했다.
1949년 2월 10일 한국민주당과 대한국민당의 신익희, 지청천 계열이 통합하여 민주국민당을 창당, 결성할 때 참여하여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미국에 한국 군사원조 절실함 호소]
딘 애치슨을 만난 후 미국 기자들에게 북한 공산주의자들에 비해 열세인 한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원조가 절실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1949년 3월 24일 딘 애치슨을 만나고 나온 특사 조병옥은 미국 기자들에게 한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원조가 절실하다는 점을 설명하며, "우리는 한 명의 미국 군인도 요구하지 않는다. 전투가 필요하게 되면 우리 자신이 하겠다. 그러나 우리는 20만 명의 병력을 갖고 있는 북한 공산주의자들보다 모든 면에서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공산주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 물질적인 원조뿐이다."라고 말했다. 3월 뉴욕타임스에 방문하여 '만약 미국의 대한 군사원조가 없다면 한국은 공산화 된다'는 요지의 연설을 하기도 했다.
1950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조소앙에게 패배]
서울 성북구 지역에 출마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남북협상파 정치인 조소앙과 맞붙었으나, 경찰 동원 및 허위 사실 유포 논란에도 불구하고 크게 패해 낙선했다.
1950년 5월 초 고향 천안 대신 서울 성북구에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남북협상파 정치인 조소앙과 맞붙었으며, 경찰을 동원하여 조소앙 측 선거운동원 83명을 구금하는 등 압력과 테러 행위를 했다는 논란이 있었다. 선거 전날인 5월 29일에는 "조소앙이 공산당 자금을 받아 월북했다"는 허위 벽보를 뿌렸음에도 불구하고 조소앙에게 크게 패해 낙선했다.
[한국 전쟁 발발, 정부와 함께 피난길에 오르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가족들을 피신시킨 뒤 정부를 따라 대전, 대구, 부산으로 이동하며 전시 상황에 대처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생하자 그는 가족들을 피신시킨 뒤 바로 대전으로 내려갔다. 이후 피난 가는 정부를 따라 대구와 부산으로 함께 이동하며 전시 활동에 참여했다.
[한국 전쟁 중 대한민국 내무부 장관 임명]
한국 전쟁 중 대한민국 내무부 장관에 임명되어 대구 철수 방침을 시달한 워커 미8군사령관을 설득, 낙동강 전선 방어에 기여했다.
1950년 7월 대한민국 내무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내무장관 재직 시 대구 철수 방침을 시달한 워커 미8군사령관을 설득하여 대구 철수를 보류시켜 낙동강 전선을 방어하도록 계획을 수정하게 했다.
1951
[거창 양민 학살 및 국민방위군 사건 책임으로 내무장관직 사임]
거창 양민 학살 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의 책임을 지고 신성모 국방장관, 김준연 법무장관과 함께 내무장관직에서 물러났다.
1951년 5월 거창 양민 학살 사건에 책임을 지고 신성모 국방장관, 김준연 법무장관과 함께 내무장관직에서 물러났다. 이는 거창 사건과 국민방위군 아사의 책임자로 신성모를 지목하고 사직서를 제출하는 과정에서 이승만의 노여움을 사서 사표를 제의받았기 때문이다.
[대한체육회 및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역임 시작]
1951년 6월부터 1952년 9월까지 제16대 대한체육회 회장과 제5대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며 체육계에도 기여했다.
1951년 6월부터 1952년 9월까지 제16대 대한체육회 회장과 제5대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며 스포츠 외교와 체육 발전에 힘썼다.
1952
[제2대 대통령 선거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
민주국민당 사무총장으로서 제2대 대통령 선거에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신익희와의 사전 협의 없이 입후보하여 관계가 틀어지는 등 난관을 겪으며 낙선했다.
1952년 제2대 정·부통령 선거에 부통령 후보자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 당시 민주국민당의 사무총장으로서 당수였던 신익희와 상의 없이 스스로를 부통령 후보로 등록하여 신익희와의 관계가 틀어지기도 했다.
1953
[내무부 장관으로 다시 임명되다]
1953년 대한민국 내무부 장관에 재임명되어 대구 방위전선을 진두지휘하는 등 다시 주요 직책을 맡아 국정에 참여했다.
1953년 대한민국 내무부 장관이 되었다. 내무부장관으로 재직하면서 대구 방위전선에 진두지휘를 담당해 이 지역을 사수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후 이승만과의 의견 충돌로 장관직을 사임하게 되었다.
[이승만 반공포로 석방 비판 후 테러 및 수감]
이승만의 반공포로 일방적 석방을 비판하다 벽보와 테러를 당하고 서대문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이로 인해 기억력을 거의 상실하는 위기를 겪었다.
1953년 이승만이 반공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하자, 유엔 정책에 반하는 지나친 행동이며 외교상의 큰 손실을 가져올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 발언이 널리 알려지자 그를 규탄하는 벽보가 나붙었고, 심야에 쇠뭉치로 머리를 맞아 실신하는 테러를 당했다. 응급 치료 후 수원으로 피신했으나 6월 25일 연행되어 서대문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약 한 달 뒤인 7월 20일 풀려났으나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기억력을 거의 상실, 한때 폐인이 될 위기까지 겪었다.
1954
[이승만 정권과 결별, 호헌동지회와 민주당 창당 주도]
이승만 정권과 결별하고 범야 신당 창당 준비 조직인 호헌동지회 창설에 참여했으며, 이후 민주당을 조직하여 최고위원으로 선출되며 야당의 주요 지도자로 자리매김했다.
1954년 이승만 정권과 결별하고, 범야 신당 창당 준비 조직인 호헌동지회 창설에 참여했다. 이때 조봉암의 신당 참여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1955년에는 곽상훈, 장면, 정일형 등과 함께 민주당을 조직하여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신익희, 윤보선, 유진산 등과 함께 민주당 구파의 리더로 활동하며 야당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신익희의 뉴델리 밀사 사건 의혹에 대한 회의 주재]
신익희가 인도 뉴델리에서 조소앙을 만났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민주국민당 간부들을 소집하여 이에 대한 논의를 주재했다.
1953년 10월 신익희가 인도 뉴델리에서 북한의 조소앙을 만나 영세중립화 음모를 꾀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함상훈의 폭로에도 민주국민당은 적극 부정했다. 그러나 조병옥은 신익희를 의심했고, 이듬해 1954년 3월 16일 신익희와 최두선을 제외한 민주국민당 간부들을 소집하여 신익희가 조소앙을 만난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는 당내 갈등을 심화시켰으나, 구체적인 증거 부족으로 함상훈은 당에서 제명되었다.
[제3대 민의원의원 선거 대구에서 당선]
내무부 장관으로 재직하며 대구 방위전선에 크게 기여한 공로로 대구에서 제3대 민의원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4년 5월 대구에서 제3대 민의원의원 선거에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당시 내무부장관으로 재직하면서 대구 방위전선에 진두지휘를 담당해 이 지역을 사수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이 공로가 선거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후 이승만과의 의견 충돌로 장관직을 사임했다.
1956
1956년 3월 대통령 선거를 불과 한 달여 앞두고 신익희 후보가 급서하자, 그 뒤를 이어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직을 맡아 당을 이끌게 되었다.
[자유당 선거 방해 항의 집회 참석]
자유당의 선거 방해와 금권 정치에 항의하는 집회에 참석하여 야당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1956년 7월 27일 자유당의 선거 방해와 금권 정치에 항의하는 집회에 참석하여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야당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자유당 선거방해 항의 연좌시위 주도]
자유당의 선거방해에 항의하여 윤보선, 김도연 등과 서울 태평로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며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투쟁에 나섰다.
1956년 8월 자유당의 선거방해에 항의하여 윤보선, 김도연, 현석호, 양일동 등과 서울 태평로에서 연좌시위를 벌였다.
1956년 10월 13일 배재학원 운동장에서 열린 제1차 여야 민의원의원 친선 야구대회를 참관하며 정치 활동 외적인 면모를 보였다.
1957
1957년 장택상의 초대를 받고, 장택상의 경기도 시흥 별장에서 이기붕과 여야 영수회담을 하였다.
1958
[제4대 민의원의원 선거 서울 성동구 을에서 재선]
서울 성동구 을 지역에서 제4대 민의원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며 재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1958년 5월 2일 치러진 제4대 민의원의원 선거에서 서울 성동구 을에 출마하여 당선되며 다시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당시 민주당은 구파와 신파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는 신익희, 유진산, 김도연, 윤보선 등과 함께 민주당 구파의 리더로 활동했다.
[민주당 경남도당대회 폭력 사태 후 대통령 후보 경쟁 포기]
민주당 경남도당대회에서 신·구파 간 폭력 사태가 발생하자 도의적 책임을 지고 대통령 후보 경쟁 포기를 선언했다.
1958년 10월 열린 민주당 경남도당대회에서 괴한이 난입하는 등 신·구파 간 갈등이 폭력으로 번지며 유혈극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당 중앙당까지 비화되어 신파측 최고위원 곽상훈, 박순천이 사퇴했으며, 조병옥도 도의적 책임을 지고 대통령 후보 경쟁 포기를 선언한 뒤 자취를 감추었다.
1959
[일본 재일교포 북송반대 궐기대회 참석]
1959년 2월 일본의 재일교포 북송에 반대하는 전국민 궐기대회에 참석하여 교포들의 인권 문제에 목소리를 냈다.
1959년 2월 일본의 재일교포 북송반대 전국민 궐기대회에 참석하여 일본 정부의 정책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재일교포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노력했다.
[민주당 정·부통령 선거 지명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
민주당 정·부통령 선거 지명대회에서 장면 후보를 3표 차로 누르고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1959년 11월 26일 민주당 정·부통령 선거 지명대회 표결 결과, 총투표자 966명 중 484표를 얻어 481표를 얻은 장면 후보를 3표 차로 누르고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이 날 대회에서 장면은 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1960
1959년 말 민주당 대선 후보로 등록을 마쳤으나, 1960년 1월 갑자기 질병이 발생했다. 그는 제4대 대통령 선거 유세 도중 신병 치료를 위해 도미하여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 입원했다.
[제4대 대통령 선거 유세 중 미국에서 급서]
제4대 대통령 선거를 불과 며칠 앞두고 신병 치료를 위해 입원해 있던 미국 월터리드 육군의료센터에서 급서하여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1960년 2월 15일, 제4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로 출마했으나 선거 유세 중 신병으로 도미하여 미국 워싱턴 D.C. 월터리드 육군병원에 입원한 지 23일 만에 급서했다. 그의 사망은 선거 판도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으로 이어지는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국민장으로 영결, 서울 수유동에 안장]
시신은 비행기 편으로 대한민국에 운구되어 국민장으로 거행되었고, 서울운동장을 들러 서울 수유동에 안장되었다.
1960년 2월 25일, 그의 시신은 비행기 편으로 대한민국에 운구되어 장례식은 국민장으로 거행되었다. 운구 행렬은 시가행진과 서울운동장을 들러 서울특별시 성북구 수유동(현재 강북구)에 안장되었다.
1962
[건국공로훈장 단장 추서, 독립유공자로 인정]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단장(독립장으로 개정)이 추서되며 독립유공자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았다.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단장(뒤에 독립장으로 개정)이 추서되어 독립운동가로서의 공로를 국가로부터 공식 인정받았다. 후에 생가가 복원되고 기념비가 세워졌다.
2008
[건국 60주년, 대한민국을 세운 인물로 선정]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의 정치 부문 인물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을 선발할 때 정치 부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며 재조명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