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두희

군인, 기업인, 정치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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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군인이자 기업인.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 암살의 실행범으로 알려져 있다. 암살 후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한국 전쟁 중 석방되어 군에 복귀했고, 이후 군납업체 사장으로 활동했다. 김구 암살의 배후에 대한 의혹이 끊이지 않았으나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1996년 백범 김구를 존경하던 박기서에게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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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

[평안북도 용천 출생]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지주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으며, 처음 이름은 덕희였으나 후에 두희로 개명했다.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지주 안병서의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덕희(德熙)였는데 뒤에 두희(斗熙)로 고쳤다. 1934년 신의주고등상업학교를 졸업했다.

1939

[메이지 대학교 법학과 중퇴]

일본으로 유학해 메이지 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했으나 3학년 때 중퇴하고 귀국하여 중국 등지에서 상업 활동을 했다.

일본에 유학, 메이지 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3학년 때 중퇴하고 귀국, 그 뒤 중국 등에서 장사를 하였는데 그 당시 중국에서 '강두희(姜斗熙)'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1947

[서북청년회 가입]

북한에서 지주들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월남하여 서북청년회에 가입, 총무부장으로 활동하며 우익 단체 활동을 시작했다.

북한에서 지주들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그는 월남해서 서북청년회에 가입, 서청 총무부장으로 있는 등 우익 단체 활동을 했다. 서북청년회 활동을 기반으로 경찰 및 군 수뇌부의 지원을 받았으며, 김지웅, 홍종만 등 백범 암살 핵심 실무 담당자들과 연결되었다.

1948

[육군사관학교 특8기 입교 및 임관]

육군사관학교 특8기로 입교하여 이듬해 졸업하고 포병사령부 연락장교 소위를 맡았다.

1948년 육군사관학교 특8기로 입교하고 이듬해 졸업하여 포병사령부 연락장교 소위를 맡았다.

1949

[백범 김구 암살]

정오경 김창룡의 지령으로 경교장에 찾아가 권총으로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를 암살했다. 이 사건으로 특무대에 연행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1949년 6월 26일 정오 경에 김창룡의 지령으로 경교장에 찾아가 권총으로 김구를 암살하였다. 특무대에 연행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김구를 한독당에 입당시키고 김구에게 소개한 것은 김학규였다는 설이 있으며, 이승만의 지시로 암살을 저질렀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암살형량 감형 및 한국 전쟁 중 군 복귀]

김구 암살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지 석 달 만에 15년으로 감형되었고,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잔형 집행정지 처분으로 포병 장교로 복귀했다.

김구 암살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지 석 달 뒤 15년으로 감형되었고,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잔형 집행정지 처분(1950년 6월 27일)을 받고 포병 장교로 복귀하였다. 1950년 7월 10일 육군 소위로 복직하고 9월 15일 육군 중위로 진급하였다.

1953

[완전 복권 및 소령 예편]

1951년 2월 잔형을 면제받은 후 완전 복권되었고, 같은 해 12월 육군 대위로 진급했으며 1953년 육군 소령으로 예편했다.

1951년 2월 15일 잔형 면제를 받고 12월 15일 육군 대위로 진급, 그로부터 2년 뒤인 1953년 12월 15일 육군 소령으로 예편하였다. 1953년 2월 15일에 완전 복권되었다.

1958

[신의기업사 사장 재직]

육군 소령 예편 후 군납 기업 신의기업사의 사장을 지냈다.

육군 소령으로 예편한 뒤 군납기업 신의기업사 사장을 지낸 바 있다.

1960

[4.19 혁명 후 잠적 및 테러 위협]

4.19 혁명 이후 김구 선생 살해 진상 규명 위원회가 발족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잠적했고, 여러 차례 길거리에서 테러를 당했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김구 선생 살해 진상 규명 위원회가 발족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잠적하였다. 1960년과 1961년 여러 차례 길거리에서 테러를 당하였다. 1960년 4월 29일 새벽1시경 양구농고 학생 30여명에게 자택이 전파되고 가구 일체가 소각됐다.

1961

[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검거 및 석방]

진상 규명 위원회 간사 김용희에게 붙잡혀 경찰에 넘겨졌으나, 공소시효 소멸로 풀려나고 5.16 군사정변 이후 귀가 조치되었다.

1961년 4월 18일 진상 규명 위원회 간사 김용희에게 붙잡혀 경찰에 넘겨졌으나 공소시효 소멸로 풀려나고,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에 귀가 조치되었다.

1962

[특수 폭행 치상죄로 실형 선고]

1956년 길종하 순경을 폭행한 혐의로 진상규명위원회의 권유로 고소당해 징역 8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1956년 10월 안두희에게 폭행당한 양구경찰서 순경 길종하는 진상규명위원회의 권유로 안두희를 고소했으며, 결국 1962년 1월 25일 특수 폭행 치상죄로 징역 8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1965

[백범 독서회장 곽태영에게 습격 당해 중상]

백범 독서회장 곽태영으로부터 칼로 목을 찔리는 등 중상을 입었으나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1965년 12월 22일 오전 11시 양구군 군납 업체 신의기업 내에 돌 1개를 들고 침입하여 머리를 때리고 재크 나이프로 목과 머리 등을 찌르는 등으로 중상을 입었다.

1987

[권중희에게 폭행 당하며 다시 세인의 주목을 받음]

약 20년간 '안영준'이라는 가명으로 은신 생활을 하던 중, 그를 알아본 민족정기 구현회장 권중희에게 서울 마포구청 앞에서 몽둥이로 폭행당하며 다시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약 20년 동안 안영준이라는 가명으로 필사적인 은신 생활을 했으나, 1987년 3월 27일 그를 알아본 민족 정기 구현회장 권중희에게 서울 마포구청 앞에서 몽둥이로 폭행당하면서 다시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92

[김구 묘소 강제 참배 및 김창룡 배후 증언]

김구 묘소에서 강제 참배한 후,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백범 암살의 배후가 전 육군 소장 김창룡이었다고 증언하며 큰 화제가 되었다.

1992년 2월 28일에는 김구 묘소에서 강제 참배하기도 하였다. 4월 13일 동아일보 지면을 통하여 백범 암살의 배후가 전 육군 소장 김창룡이었다고 증언하여 큰 화제가 되었으나, 증언의 세부 내용이 번복되거나 내용의 진위가 의심되는 부분들이 있어 논란이 되었다.

1996

[박기서에게 피살 당함]

인천 자택에서 백범 김구를 존경하던 버스 운전기사 박기서가 휘두른 '정의봉'에 맞아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경 인천 중구 신흥동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경기도 부천 소신여객 소속 버스 운전 기사였던 당시 49세의 박기서의 몽둥이에 맞아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박기서는 김구를 살해한 안두희를 응징할 기회를 노리다가 살해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시신 화장 후 한강에 뿌려짐]

사망 후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한강에 뿌려졌으며, 가족들은 이미 그의 정체를 알고 이혼하면서 해외로 출국한 상태였다.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한강에 뿌려졌다. 가족들은 이미 그의 정체를 알고 이혼하면서 미국과 유럽의 다른 나라로 출국한 상태였다. 안두희 역시도 전처와 자녀들처럼 이민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정체를 알아본 출입국관리 담당자들이 출국을 허락하지 않아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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