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 주지사, 영화배우, 정치인, 보수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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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대 미국 대통령이자 제33대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낸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주의 정치인이다.젊은 시절 영화배우로 활동하다 정치에 입문했으며, 1980년대 미국의 경제 부흥과 냉전 종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강력한 '레이거노믹스'와 반공주의 외교 정책으로 지지받았으나, 빈부격차 심화 등의 비판도 존재한다.미국 역사상 최고령 대통령이자 최초의 이혼 경력 대통령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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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

[로널드 레이건 출생]

미국의 제40대 대통령 로널드 윌슨 레이건이 일리노이주 탬피코에서 가난한 구두 판매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로널드 레이건은 일리노이주 탬피코에서 카운티 팀페러리 출신의 가톨릭 아일랜드 이민자 아버지와 잉글랜드 및 스코틀랜드 혼혈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로널드의 헤어스타일을 보고 '네덜란드'라는 별명을 붙였으며, 어린 시절 내내 이 별명으로 불렸다. 가족은 일리노이의 여러 도시를 옮겨 다니다 딕슨에 정착했다. 레이건의 아버지는 가톨릭 신자로서 KKK단의 인종주의에 강력히 반대했고, 이는 레이건이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신념을 가지는 데 영향을 주었다.

1932

[대학 졸업 및 아나운서 데뷔]

유레카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라디오 방송국에서 스포츠 아나운서로 일하며 경력을 시작했다.

일리노이주 유레카 대학에서 경제학 및 사회학 문학사를 취득한 후, 아이오와주로 건너가 라디오 방송국에서 아나운서로 활동했다. 이 시기에 그의 특유의 소통 능력을 길렀다.

1937

[할리우드 배우 데뷔]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로 자리를 옮겨 할리우드에 입성했으며, 이후 약 5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배우로서 활동했다.

일리노이주를 떠나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레이건은 배우로서 다양한 작품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비록 특별한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이 시기의 경험은 그의 대중적 이미지 형성과 정치 활동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1940

[제인 와이먼과 결혼]

배우 제인 와이먼과 첫 번째 결혼을 했다.

레이건은 동료 배우 제인 와이먼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으나, 이들의 결혼 생활은 9년 뒤 이혼으로 막을 내렸다.

1947

[미국배우조합 회장 역임]

미국 배우 조합의 회장에 선출되어 할리우드 내 공산주의 영향력을 근절하기 위해 노력했다.

레이건은 미국배우조합 회장으로서 할리우드 내에서 공산주의의 영향력을 차단하려는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공산주의 반대 세력과 대항하는 정치적 신념을 강화했으며, 이는 그의 이후 정치 경력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1949

[첫 번째 이혼]

배우 제인 와이먼과 이혼했다. 레이건은 미국 대통령 중 최초로 이혼 경력이 있는 인물이 되었다.

레이건은 제인 와이먼과의 결혼 생활을 정리하고 이혼했다. 이는 그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후, 최초로 이혼 경력이 있는 대통령으로 기록되는 배경이 된다.

1950

[주 상원의원 후보 지지]

캘리포니아 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리처드 닉슨에게 패배했던 헬렌 가하건 더글러스를 지지하며 정치적 활동을 이어갔다.

정치 입문 초기에 레이건은 좌파 성향의 정치 위원회에 가입하고 헬렌 가하건 더글러스를 지지하는 등 당시에는 초당파적인 행보를 보였다. 그는 공산주의가 정치권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1952

[낸시 데이비스와 재혼]

배우 낸시 데이비스와 재혼하여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

첫 번째 이혼 후, 레이건은 당시 배우였던 낸시 데이비스와 가까워져 결혼했다. 낸시 레이건은 이후 그의 정치적 삶의 중요한 동반자가 되었다.

[배우조합 회장 임기 종료]

미국배우조합 회장으로서의 첫 임기를 마쳤다.

1947년부터 시작된 미국배우조합 회장으로서의 첫 임기를 마쳤다. 이 기간 동안 레이건은 할리우드 내 공산주의 영향력에 맞서며 정치적 경험을 쌓았다.

1959

[배우조합 회장 재임]

다시 한번 미국배우조합 회장으로 재선임되어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다.

레이건은 미국배우조합의 회장직을 1959년부터 1960년까지 재역임하며 연예계 활동과 더불어 노동조합 운영 경험을 쌓았다.

1960

[배우조합 회장 재임 종료]

미국배우조합 회장으로서의 두 번째 임기를 마쳤다.

1959년 재선임된 미국배우조합 회장직에서 퇴임하며 연예계에서의 공식적인 활동을 마무리하고 정치권 입문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1961

[메디케어 법안 반대]

메디케어 법안이 도입될 당시, 이 법안이 미국의 자유를 종말시킬 것이라 경고하며 반대 연설을 했다.

레이건은 자신의 라디오 방송에서 메디케어 법안이 사회주의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하며, 청취자들에게 항의할 것을 촉구했다. 이와 함께 푸드 스탬프 프로그램, 최저 임금 인상, 평화봉사단 설립 등 다른 민주당 정책에도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1962

[공화당 입당]

정치적 신념 변화에 따라 공화당에 입당하며 본격적인 보수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레이건은 1950년대 초 우파로 전향한 후, 1962년에 공식적으로 공화당에 입당했다. 이는 그의 정치 경력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그가 추구하는 자유 시장, 반공산주의, 낮은 세금, 제한된 정부라는 보수주의의 핵심 신조를 명확히 했다.

1964

['선택의 시간' 연설]

공화당 대통령 후보 배리 골드워터를 지지하는 "선택의 시간" 연설을 통해 전국적인 주목을 받으며 보수주의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이 연설에서 레이건은 작은 정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우리는 좌와 우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들었지만 저는 좌나 우와 같은 것은 없다고 제안합니다. 위 또는 아래만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연설은 골드워터 캠페인을 뒤집지는 못했지만, 레이건의 국가적 정치적 가시성을 확립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1966

[캘리포니아 주지사 당선]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선출되어 조세 감면, 복지 제도 축소 등의 정책을 추진하며 재정을 흑자로 전환시키는 데 기여했다.

"선택의 시간" 연설로 얻은 지지를 바탕으로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선출되었다. 그는 재임 기간 동안 경제적 자유주의 정책을 펼치며 주 정부의 재정 건전성을 개선하는 데 주력했고, 이는 그의 행정 능력을 입증하며 향후 대선 출마의 발판이 되었다.

1967

[캘리포니아 주지사 취임]

제33대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취임하여 주정부의 재정 개선과 보수적인 행정 개혁을 시작했다.

주지사로서 레이건은 조세 감면, 복지 지출 축소, 고등 교육 정책 개혁 등을 단행했다. 그의 정책은 캘리포니아주의 재정을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하는 데 기여하며 그의 행정 능력을 입증했다.

1968

[첫 대선 도전 실패]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으나 낙마하며 첫 번째 대선 도전의 고배를 마셨다.

캘리포니아 주지사로서의 성공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1968년 대선에 도전했으나, 당내 경선에서 고배를 마셨다. 그러나 이 경험은 그에게 더 큰 정치적 야망을 심어주었다.

1970

[주지사 재선]

캘리포니아 주지사 재선에 성공하며 대중의 지속적인 지지를 확인했다.

1966년 첫 당선 이후, 1970년 선거에서 다시 한번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선출되며 그의 보수적인 정책과 리더십에 대한 유권자들의 신뢰를 얻었다.

1975

[주지사 퇴임]

캘리포니아 주지사로서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다.

8년간의 주지사 임기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퇴임했다. 이 경험은 그가 이후 대통령 선거에 도전하는 데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1976

[두 번째 대선 도전 실패]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다시 한번 낙마하며 대통령직을 향한 도전을 이어갔다.

1968년에 이어 1976년에도 대통령 선거에 나섰으나 당내 경선에서 패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포기하지 않고 다음 대선을 준비했다.

1980

[제40대 미국 대통령 당선]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현직 민주당 대통령 지미 카터를 압도적인 표차로 꺾고 제40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경기침체와 인플레이션이 심화된 시기에, 레이건은 '강력한 미국'을 내세우며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69세의 나이로 당선되어 미국 대통령 취임 최고령자 기록을 세웠으며, 선거인단 538표 중 525표를 얻는 압승을 거두어 미국 역사상 가장 편파적인 대통령 선거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1981

[제40대 미국 대통령 취임]

제40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레이거노믹스'로 불리는 경제적 자유주의 정책과 강경한 외교 정책을 본격적으로 펼쳤다.

취임과 동시에 레이건은 방만한 재정 지출 축소와 대규모 감세를 단행하고, 산업 부문에 경쟁 체제를 도입하여 스태그플레이션을 벗어나 경제 호황을 이끌었다. 이는 '레이거노믹스'라 불리며 미국 경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암살 시도 피격]

힐튼 호텔에서 오찬을 마치고 나오던 중 정신질환자 존 힝클리 주니어의 저격 시도로 중상을 입었으나,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져 '테쿰세의 저주'를 피한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저격 당시 총알이 심장에서 불과 12cm 떨어진 곳을 통과하는 위급한 상황이었으나, 수술 후 성공적으로 회복했다. 범인은 조디 포스터의 관심을 끌기 위한 범행이었다고 자백했으며, 정신병을 이유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은 대통령 경호 시스템에 대한 재평가로 이어졌다.

1982

[암살 시도범 무죄 판결]

레이건 암살 시도범 존 힝클리 주니어가 정신질환을 이유로 무죄 판결을 받고 정신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암살 시도 사건의 범인 존 힝클리 주니어는 법정에서 정신병을 앓고 있었다는 점과 대통령이 무사하다는 점이 참작되어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 판결은 미국 사회에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1983

[타임 올해의 인물 (두 번째)]

타임지에서 그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며 그의 영향력을 인정했다.

1980년에 이어 1983년에도 타임지에서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었다. 이는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미국 사회와 국제 정세에 미친 지대한 영향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984

[제40대 미국 대통령 재선]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월터 먼데일에게 압승을 거두며 재선에 성공하여 강경 보수 외교 정책과 내치 정책을 이어갔다.

'레이거노믹스'를 통한 경제 활성화와 강력한 대외 정책으로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아 압도적인 표차로 재선에 성공했다. 그의 두 번째 임기 동안 냉전 종식과 관련된 중요한 외교 활동이 펼쳐졌다.

1985

[소련 고르바초프와 정상회담]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첫 정상회담을 가지며 냉전 완화를 위한 대화를 시작했다.

이란-콘트라 사건으로 인기가 떨어지자 소련과의 유화 정책을 펴기 시작한 레이건은 고르바초프 서기장과의 회담을 통해 양국 관계의 새로운 장을 열었고, 이는 이후 냉전 종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1986

[이란-콘트라 사건 발발]

비밀리에 이란에 무기를 팔고 그 대금으로 니카라과 반군을 지원한 '이란-콘트라 사건'이 드러나면서 인기가 크게 떨어졌다.

이 사건은 레이건 행정부의 도덕성과 신뢰도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대외 정책의 정당성에 대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이로 인해 그는 소련에 대한 유화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1987

[베를린 장벽 연설]

베를린 장벽 앞에서 "고르바초프 서기장님, 이 장벽을 허무십시오!"라는 연설로 냉전 종식의 메시지를 강력히 전달했다.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행한 이 연설은 냉전 시대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촉구하며 전 세계에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다시 한번 강조했다. 이는 훗날 베를린 장벽 붕괴의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INF 조약 체결]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중거리핵전력폐기조약'(INF Treaty)을 맺어 냉전 종식의 결정적인 초석을 마련했다.

이 조약은 미국과 소련이 보유한 사정거리 500~5,500km의 지상 발사 중거리 핵미사일을 전면 폐기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양국 간 군비 경쟁 완화와 냉전 해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88

[부시 대통령 당선 기여]

부통령이었던 조지 H. W. 부시의 대통령 선거를 적극적으로 도우며 공화당의 재집권에 기여했다.

레이건은 자신의 인기를 바탕으로 후임 조지 H. W. 부시가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었다. 이는 그의 보수주의적 유산이 계승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89

[제40대 미국 대통령 퇴임]

제40대 미국 대통령으로서의 8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여 캘리포니아 자택으로 돌아갔다.

퇴임 후 그는 공화당을 더욱 강경한 보수주의로 이끌었던 미국 보수주의 운동 진영에서 배출한 최초의 대통령으로 평가받았다. 퇴임 이후 그의 유산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1993

[대통령 자유 훈장 수여]

전임 대통령 조지 H. W. 부시로부터 미국 시민에게 수여되는 최고 영예의 민간인 훈장인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받았다.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퇴임을 앞두고 로널드 레이건에게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하며 그의 국가에 대한 봉사와 업적을 기렸다.

1994

[알츠하이머병 진단 공개]

본인이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았음을 대중에게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레이건 전 대통령은 뇌의 퇴행성 질환인 알츠하이머병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치료법 연구를 촉진하기 위해 자신의 병을 공개했다. 이 용기 있는 고백은 알츠하이머병 연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크게 증가시켰다.

1995

[알츠하이머병 연구소 창설]

부인 낸시 여사와 함께 국립 알츠하이머병 재단과 협력하여 알츠하이머병 연구를 위한 '로널드 낸시 레이건 연구소'를 창설했다.

알츠하이머병 진단 이후, 레이건 부부는 이 질병의 치료법을 찾기 위한 노력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연구소 창설은 알츠하이머병 극복을 위한 그의 염원과 의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행보였다.

2004

[로널드 레이건 서거]

10년간 알츠하이머병과 투병해 온 그는 캘리포니아 자택에서 폐렴 합병증으로 향년 93세의 일기로 서거했다.

레이건은 1994년 알츠하이머병 진단 이후 파킨슨병까지 겹쳐 대중과의 노출을 일체 차단한 채 투병 생활을 해왔다. 그의 사망 후 시신은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치되었으며, 그의 생애와 정치적 유산은 학자들과 대중 사이에서 계속해서 활발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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