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H. W. 부시

정치인, 군인, 외교관, 정보기관장,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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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H. W. 부시는 미국의 41대 대통령이자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참전 용사 대통령으로 기록됩니다. 그는 텍사스주 의원, 유엔 대사, CIA 국장 등 다양한 공직을 거쳐 부통령과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냉전의 평화로운 종식을 이끌고 걸프 전쟁에서 국제 연합을 성공적으로 지휘하며 '신세계 질서'를 주창했습니다. 재선에는 실패했지만, 퇴임 후에도 활발히 자선 활동에 참여하며 깊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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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

[미국의 41대 대통령, 부시 가문의 시작]

매사추세츠주 밀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가치 있는 삶의 중요성을 배웠습니다.

프레스콧과 도로시 워커 부시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외조부 조지 허버트 워커 시니어의 이름을 땄습니다. 부시는 자신이 특권의 남자였음을 인정하면서도, 돈보다는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도록 결심한 부모에게서 받은 '가치의 특권'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그리니치 컨트리 데이 학교와 필립스 아카데미에서 정규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1942

[해군 비행가로 조국에 봉사]

필립스 아카데미 졸업 후 18세 생일에 해군에 자원입대하여 비행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1941년 진주만 공격 소식을 들은 후, 1942년 6월 필립스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18세 생일에 미국 해군에 입대하여 비행가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1943

[미 해군 역사상 최연소 비행사 탄생]

10개월간의 비행 훈련을 마치고 19세 생일을 며칠 앞둔 시점에 미국 예비 해군 소위로 위촉되어 최연소 해군 비행사 기록을 세웠습니다.

10개월 과정을 완료한 후, 19세 생일이 오기 며칠 전에 그 날짜로 자신을 최연소 해군 비행사로 만든 미국 예비 해군 소위로 위탁되었습니다. 비행 훈련을 끝낸 후, 그해 9월 사진술 사관으로서 토피도 소함대 VT-51로 임명되었습니다.

1944

[제2차 세계대전 영웅적인 활약]

USS 샌재신토 호에서 58개의 전투 임무를 수행하며 수훈 비행 십자장과 3개의 에어 메달을 받았고, 적 화물선을 가라앉히는 공을 세웠습니다.

1944년 USS 샌재신토 호에 기지를 둔 공중 그룹 51의 일부로서 마커스섬, 웨이크섬, 마리아나 제도에 대항하는 작전들에 참가했습니다. 6월 19일 가장 큰 공중전 중 하나에 승리했으나 전투기는 손실되었고 어린 조종사는 잠수함에 의해 구출되었습니다. 7월 25일에는 다른 조종사와 함께 팔라우에서 일본 화물선을 가라앉혔습니다. 58개의 전투 임무를 수행하며 수훈 비행 십자장과 3개의 에어 메달을 받았고, 대통령 감사장도 수여받았습니다.

1945

[바버라 부시와의 평생 인연 시작]

컨트리클럽 댄스에서 만난 바버라 피어스와 결혼하여 평생의 동반자가 되었고, 훗날 조지 W. 부시 대통령 등 여섯 자녀를 두었습니다.

1941년 컨트리클럽 댄스에서 당시 16세였던 바버라 피어스를 만났습니다. 해군 복무 기간 동안 주로 편지를 통해 관계를 발전시켰고, 1945년 1월 6일 결혼했습니다. 바버라 여사는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키스한 남자라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종료와 함께 해군 제대]

일본 항복 후 미국 해군에서 명예롭게 제대하며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적인 임무를 마쳤습니다.

자신의 가치 있는 전투 경험을 활용하기 위해 노퍽 해군 기지로 재임명되어 새로운 수뢰 조종사들을 위한 훈련 비행단에 배치되었습니다. 이후 새로운 수뢰 소함대 VT-153으로 임명되었고,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자 미국 해군으로부터 명예롭게 제대했습니다.

1953

[석유 사업가로서의 성공적인 변신]

예일대학교 졸업 후 텍사스주에서 성공적인 석유 탐사 사업을 시작했으며, 리트커 형제와 함께 자파타 코퍼레이션을 설립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예일 대학교에 입학하여 델타 카파 엡실론 친목회 회장과 예일 야구팀 주장을 맡았습니다. 1940년대에 그는 텍사스주의 석유 탐사 사업을 시작하여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드레슬러 산업과 직위를 지냈습니다. 부시와 리트커 형제는 1953년 자파타 석유로서 자파타 코퍼레이션을 창조했습니다.

1964

[첫 상원의원 도전 실패]

미국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당시 현직 민주당 상원의원 랠프 야보러에게 패배했습니다.

1964년 미국 상원 선거에 출마했습니다.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44.1%의 득표율로 1위를 차지했으나 과반수를 얻지 못해 결선 투표에서 승리했습니다. 이후 현직 민주당 상원의원 랠프 야보러에 대항하는 선거 운동을 벌였으나, 야보러의 1964년 공민권법 성원을 비판하는 등 치열한 공방 끝에 민주당 압승 분위기 속에서 패배했습니다.

1966

[미국 연방 하원의원으로서 정치 경력 시작]

상원의원 선거 패배 후 정치 활동을 포기하지 않고, 텍사스주 7회 의회 구역에서 미국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1964년 상원의원 선거 패배 후에도 정치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고, 1966년과 1968년에 텍사스주 7회 의회 구역으로부터 미국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의회 경력 동안 피임약과 가족 계획에 매우 성원적이었으며, 미국 가족계획협회의 성원자이기도 했습니다.

1967

[텍사스 연방 하원의원 임기 시작]

미국 연방 하원의원으로 취임하여 텍사스주를 대표하며 의정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66년 선거에서 당선되어 1967년 1월 3일 연방 하원의원으로 취임했습니다. 텍사스주 7구역을 지역구로 활동했습니다.

1968

[연방 하원의원으로서 재선 성공]

텍사스주 7회 의회 구역에서 미국 하원의원으로 재선되었습니다.

1968년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하여 텍사스주 7회 의회 구역 연방 하원의원직을 이어갔습니다.

1971

[상원의원 도전을 위한 하원의원직 사임]

재선을 위해 텍사스주 상원 의석에 도전하기 위해 연방 하원의원직을 그만두었습니다.

1970년 텍사스주 상원 의석을 위한 공화당 후보 지명을 추구하기 위해 자신의 하원 의석을 그만두었습니다.

[국제 외교 무대, 유엔 대사로 진출]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 의해 유엔 주재 미국 대사로 임명되어 2년간 국제 외교 무대에서 활동했습니다.

1970년 상원의원 선거 패배에 이어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부시를 유엔 주재 미국 대사로 임명했고, 그는 1971년부터 1973년까지 그 직위를 지냈습니다.

1973

[유엔 대사 임기 종료]

유엔 대사직에서 물러나 공화당 전국위원회 의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971년 3월 1일부터 1973년 1월 18일까지 유엔 주재 미국 대사로 근무했습니다.

[워터게이트 시기 공화당 의장 역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요청으로 공화당 전국위원회 의장을 맡아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당을 방어하는 데 전념했습니다.

1972년 재선 후 닉슨 대통령은 부시에게 공화당 전국위원회 의장이 되는 것을 요청했습니다. 부시는 닉슨과 공화당 둘 다의 인기가 폭락하던 워터게이트 사건 동안 이 직위를 보유했습니다. 그는 꾸준히 닉슨을 방어하려 했으나, 닉슨의 공모가 명확해지면서 닉슨에게 충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공화당을 방어하는 데 더욱 전념했습니다.

1974

[공화당 전국위원회 의장 임기 종료]

공화당 전국위원회 의장직에서 물러났습니다.

1973년 1월 19일부터 1974년 9월 16일까지 공화당 전국위원회 의장직을 수행했습니다.

[베이징 연락사무소 소장으로 중국 외교 담당]

제럴드 포드 대통령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 주재 미국 국무부 연락사무소 소장으로 임명되어 외교적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1974년 닉슨의 사임 후, 부시는 대체 부통령으로서 고려되었으나 새 대통령 제럴드 포드는 넬슨 록펠러를 대신 선택했습니다. 포드 대통령은 대신 부시를 중화인민공화국에 있는 미국 국무부 연락사무소의 소장으로 임명했습니다.

1975

[베이징 연락사무소 소장 임기 종료]

베이징 연락사무소 소장직에서 퇴임한 후 CIA 국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974년 9월 26일부터 1975년 12월 7일까지 베이징 연락사무소 소장직을 수행했습니다.

1976

[CIA 국장으로서 정보 기관 재건]

포드 대통령에 의해 미국 중앙 정보국(CIA) 국장으로 임명되어 스캔들로 흔들리던 정보국의 도덕과 공공의 입장을 복구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1976년 포드 대통령은 부시를 미국 중앙 정보국 국장이 되는 데 워싱턴 D.C.로 불러들였습니다. 부시는 그해 2월부터 1977년 1월 20일까지 355일간 그 역할에 근무했습니다. 부시의 임명에 앞서 미국 중앙 정보국은 상원의 교회 위원회에 의한 조사를 포함한 스캔들로 흔들리고 있었으며, 부시는 정보국의 도덕과 공공의 입장을 복구하는 데 도움을 주어 영예를 얻었습니다.

1977

[퍼스트 인터내셔널 은행 의장 및 겸임교수 활동]

공공 생활을 떠나 휴스턴에 있는 퍼스트 인터내셔널 은행의 의장이 되었고, 라이스 대학교에서 겸임교수로도 활동했습니다.

지미 카터 행정부 출범 후 공공 생활을 떠나 휴스턴의 퍼스트 인터내셔널 은행 의장이 되었으며, 1978년 라이스 대학교 존스 경영 대학원에서 겸임교수로 조직이론을 강의했습니다.

[CIA 국장 임기 종료 및 민간으로 복귀]

CIA 국장직에서 물러난 후 퍼스트 인터내셔널 은행 의장으로 취임하며 공공 생활을 잠시 떠났습니다.

1976년 1월 30일부터 1977년 1월 20일까지 CIA 국장으로 근무했습니다. 1977년 지미 카터의 민주당 행정부가 들어선 후, 부시는 휴스턴에서 퍼스트 인터내셔널 은행의 의장이 되는 데 공공 생활을 떠났습니다.

1980

[대통령 선거 첫 도전]

넓은 정부 경험을 바탕으로 1980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며 공화당 경선에 참여했습니다.

1980년 대통령을 위해 출마하기로 결정하고 자신의 넓은 정부 경험을 인용했습니다. 공화당 내에서는 레이건이 보수적 자유지상주의 당파를 대표한 반면, 부시는 전통적인 동부 해안의 자유주의 당파를 대표했습니다. 그는 레이건을 "너무 보수적"이라 공격하고 대량 세금 감면 계획을 "부두 경제"라고 조롱했습니다. 아이오와주 간부 회의에서 승리하며 강하게 시작했으나, 뉴햄프셔주 예비선거에서 레이건에게 패배한 후 레이건이 남은 경선을 대부분 승리했습니다.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의 부통령으로 당선]

로널드 레이건의 러닝메이트로 선발되어 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레이건은 부시를 자신의 러닝메이트로 선발했습니다. 부시는 장기적 공화당원, 전투 베테랑, 유엔 및 국제주의자, 중앙 정보국장, 중국과의 경험 등 레이건이 가지지 않은 많은 경험을 갖춘 인물로, 두 후보는 서로 완전히 대조적이었습니다.

1981

[43대 미국 부통령으로 역사적인 임기 시작]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아래 43대 미국 부통령으로 취임하여 8년간 레이건 행정부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습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아래 43대 미국 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부통령으로서 레이건에 충성적이었고 정책에 대한 어떠한 다른 점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레이건 행정부 안에서 강한 권력을 휘두르지는 않았지만, 레이건은 부시에게 해외 외교 순방을 바쁘게 맡기며 중요한 책임들을 주었습니다.

1984

[레이건과 함께 부통령으로 재선 성공]

198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레이건-부시 후보조가 민주당 월터 먼데일 후보조를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부통령에 재선되었습니다.

레이건/부시 공천 후보가 민주당의 월터 먼데일/제럴딘 페라로 공천 후보를 상대로 198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미네소타주를 제외한 모든 주에서 큰 압도적 대승리를 거두며 재선되었습니다.

1985

[미국 역사상 첫 대통령 대행 임무 수행]

레이건 대통령의 수술로 인해 약 8시간 동안 대통령 대행을 맡아 미국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 대행을 지낸 부통령이 되었습니다.

부통령으로서 자신의 2번째 기간 동안, 1985년 7월 13일 레이건 대통령이 결장에서 용종을 빼내는 수술을 받을 때 대통령 대행이 되는 데 첫 부통령이 되었습니다. 부시는 대략 8시간 동안 대통령 대행을 지냈습니다.

1988

[41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

부통령으로서 8년 가까이 근무한 후, 레이건의 후원 아래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하여 승리했습니다.

1988년 부통령으로서 8년 가까이 후에 부시는 다시 대통령을 위하여 나갔으며 이번에는 레이건의 후원과 함께였습니다. 아이오와주 간부 회의에서 3위를 하며 고전했으나, 뉴햄프셔주 예비선거에서 승리하며 회복했습니다. 공화당 전당 대회에서 "내 입술을 읽으셔요: 새로운 세금들이 없다"는 유명한 약속을 담은 수락 연설로 지지를 얻어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 후보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1989

[부통령 임기 종료]

부통령직에서 물러나며 8년간의 레이건 행정부 부통령으로서의 임기를 마쳤습니다.

1981년 1월 20일부터 1989년 1월 20일까지 43대 미국 부통령으로 재임하며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을 보좌했습니다.

[미국의 41대 대통령으로 공식 취임]

미국의 4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평화롭고, 번영하는 시간"을 이끌 새로운 시대를 약속했습니다.

과격적으로 부정적인 1988년 대통령 선거 운동에 이어 부시는 긍정적인 원고에 자신의 행정을 시작하려고 노력했습니다. 1989년 1월 20일 자신의 취임식에서 부시는 소련과 그 종속국들이 무너지고 있었고, 새로운 시기가 떴다는 사실을 암시했습니다. 그는 평화와 번영의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며, 자유가 세상에 스며들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마약 독재자 노리에가 축출을 위한 파나마 침공]

파나마 독재자 마누엘 노리에가의 마약 밀매 및 민주적 억압에 대응하여 파나마 침공을 명령, 베트남 전쟁 이래 최대 규모의 미군 작전을 펼쳤습니다.

1989년 12월 부시는 미군 사망과 마약 밀매, 민주적 억압 등 파나마 독재자 마누엘 노리에가의 다양한 위반에 응답하여 파나마 침공을 명령했습니다. 이는 25,000명의 군인과 최고 기술 수준의 군용 장비를 동원하여 베트남 전쟁 이래 가장 큰 미국의 군사 작전이었습니다. 노리에가는 한때 미국의 동맹이었으나, 남아메리카에서 미국으로 마약을 파는 데 파나마를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침공은 성공적으로 노리에가를 권력에서 물러나게 했습니다.

1990

[냉전 종식의 서막을 알리는 미소 정상 회담]

헬싱키에서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회담을 가졌으며, 이는 냉전 종식을 향한 중요한 발걸음이었습니다.

외교 정책은 특히 소련과 그 전 종속 국가들에 관계에서 그 첫 날들로부터 부시 대통령직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는 1990년 헬싱키에서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만나 냉전이 그 종말에 있음을 인식하고 "신세계 질서"로의 전환에 중요성을 부여했습니다.

[유엔, 걸프 전쟁 개입의 공식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 대응하여 유엔은 이라크군 철수 마감 시한을 설정하고, 불응 시 모든 필요한 수단을 사용할 것을 승인했습니다.

1990년 사담 후세인에 의해 지도된 이라크가 석유 부유한 이웃 국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유엔은 1991년 1월 15일까지 이라크가 쿠웨이트에서 철수하지 않을 경우 "필요한 전부의 의미들"을 이용하는 데 쿠웨이트와 연합한 국가들을 정식으로 허가하는 마감 시한 설정을 통과시켰습니다.

1991

[걸프 전쟁 시작, '사막의 폭풍' 작전 돌입]

이라크가 유엔의 철수 요구를 거부하자, 미국이 이끄는 연합 공군 부대가 이라크에 대항하는 '사막의 폭풍' 작전을 개시하며 걸프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라크는 유엔의 요구에 응하는 데 거부하였고, 미국이 이끄는 공군 부대가 이라크에 대항하는 공중 공격들의 지독한 일련을 발포하였을 때 1991년 1월 17일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작전은 "사막의 폭풍"으로 알려졌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쿠웨이트 해방과 이라크군 철수라는 목표 달성 후 전투 작전 중지를 명령했으며, 사담 후세인은 권력을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냉전 종식과 '신세계 질서' 선언]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전략적 파트너십을 선언하며 냉전의 종식을 공식화하고, 새로운 세계 질서를 구축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부시 대통령과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1991년 7월 정상 회담에서 미국-소련 간 전략적 파트너십을 선언하여 결정적으로 냉전의 종말에 특징을 지었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양자와 세계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파트너십을 위하여 기초를 놓은 1990년~1991년 걸프 전쟁 동안 미국-소련 간 협력을 선언했습니다. 냉전이 그 종말에 있으면서 부시는 "신세계 질서"로 전환에 중요함으로서 자신의 직위를 보았습니다.

1992

[이란-콘트라 사건 관련자 대거 사면]

직무 마지막 논쟁적 소행으로 이란-콘트라 사건에 연루된 전 국방부 장관 캐스퍼 와인버거를 포함한 6명의 전직 공무원들을 사면했습니다.

직무에서 부시의 마지막 논쟁적 소행은 1992년 12월 24일 이란-콘트라 사건에서 연루된 6명의 전직 공무원들에 그의 사면이었으며 가장 현저하게 전 국방부 장관 캐스퍼 와인버거였습니다. 와인버거는 이란에 무기 판매에 관한 상식을 숨기고 의회에 거짓말을 한 혐의로 재판에 설 예정이었습니다.

1993

[41대 미국 대통령 임기 종료]

빌 클린턴에게 대통령직을 넘기고 퇴임하며, 재선 실패 후 주로 공공 생활에서 물러났습니다.

1992년 재선에서 패배한 후 1993년 1월 20일 대통령직을 퇴임했습니다. 재선에 실패한 후, 부시는 대부분 공공 생활로부터 퇴직을 하였습니다. 그와 부인 바버라 여사는 텍사스주 휴스턴과 메인주 케너벙크포트에서 생활했습니다.

[이라크의 전 대통령 암살 시도 발생]

퇴임 후 쿠웨이트 방문 중 이라크 첩보 기관에 의해 자동차 폭발을 통한 암살 시도가 있었으나, 쿠웨이트 보안부에 의해 저지되었습니다.

1993년 4월 이라크의 첩보 기관이 부시의 쿠웨이트 방문 중에 자동차 폭발을 통하여 그를 암살하려는 시도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쿠웨이트의 보안부가 음모를 꾸몄습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6월 26일 미국은 바그다드의 첩보 기관 본부를 목표로 미사일 공격을 발포했습니다.

[암살 시도에 대한 미국의 보복 공격]

이라크의 암살 시도에 대한 앙갚음으로 미국은 바그다드의 첩보 기관 본부를 목표로 미사일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1993년 4월 이라크 첩보 기관이 조지 H. W. 부시 전 대통령의 쿠웨이트 방문 중 자동차 폭발을 통해 암살을 시도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6월 26일 미국은 바그다드의 첩보 기관 본부를 목표로 미사일 공격을 발포했습니다.

2004

[80세 생일 기념, 담대한 스카이다이빙 도전]

80세 생일을 기념하여 스카이다이빙을 하며 활동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세 번째 낙하산 점프였습니다.

2004년 6월 12일 그는 자신의 80세 생일의 명예에 스카이다이빙을 하러 갔습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이래 그의 3번째 낙하산 점프였습니다. 그는 또한 자신의 75세 생일 전 1999년 6월 9일에 낙하산 점프를 이루었고, 2년 일찍이 애리조나주에서도 낙하산 점프를 하였다고 말했습니다. 80세 생일 하루 전에 그와 그의 아들은 로널드 레이건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찬사를 보냈습니다.

2005

[클린턴과 함께 쓰나미 구호 활동 주도]

조지 W. 부시 대통령에 의해 빌 클린턴과 함께 인도양 쓰나미 지진 피해자들을 돕는 전국 캠페인을 지도했습니다.

2005년 1월 3일 부시와 클린턴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에 의하여 인도양의 쓰나미 지진의 피해자들을 돕는 전국 캠페인을 지도하는 데 임명되었습니다. 부시와 클린턴은 둘 다 부시가 "초월 정치"로 묘사한 USA 프리덤 코어를 통하여 재앙의 구제를 위한 돈을 모으는 자신들의 이당 노력의 성원에서 폭스 텔레비전에 슈퍼볼 XXXIX 프리게임 쇼에 나왔습니다. 12일 후에 그들은 둘 다 구제 노력들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던 것을 보는 데 영향을 받은 지역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 재난 복구에 적극 참여]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폐허가 된 걸프 해안의 피해 복구를 위해 다시 빌 클린턴과 팀을 이루어 개인적 구제 기부를 협동했습니다.

2005년 8월 31일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의하여 걸프 해안의 폐허에 이어 부시는 다시 개인적 구제 기부에 협동하는 데 다시 클린턴과 팀을 이루었습니다. 리포터들은 후임자가 1992년 선거에서 전임자를 꺾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시와 클린턴은 우정을 개발하였다는 것을 주석하였습니다. 거의 1년 후 2006년 5월 13일 그들은 툴레인 대학교의 졸업식에서 대학으로부터 자신들의 구호 노력들로 명예 학사를 받았습니다.

2018

[미국의 41대 대통령, 94세로 영면]

말년 파킨슨병으로 고통받다가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94세의 나이로 사망하며 격동의 시기를 평화롭게 이끈 삶을 마감했습니다.

말년 파킨슨병과 시달려 온 부시는 2018년 11월 30일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노환으로 인하여 94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아내 바버라 여사가 사망한 지 7개월 만이었으며, 칼리지스테이션에 있는 텍사스 A&M 대학교의 서부 캠퍼스에 위치한 조지 H. W. 부시 대통령 도서관·박물관 옆에 부인 곁으로 안장되었습니다. 그는 미국 역대 대통령 부부 중 유일하게 동년에 세상을 떠난 부부로 기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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