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 정치인, 군인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29:48
제럴드 포드는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선거 없이 대통령과 부통령직을 모두 역임한 인물이다.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리처드 닉슨을 사면하여 큰 논란을 빚었으며, 재임 중 심각한 경제 위기에 직면했다. 비록 짧은 대통령 임기였지만, 93세까지 장수하며 기록적인 생애를 살았다.
본 문서는 위키백과 제럴드 포드 문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편집되었으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배포됩니다.
1913
[출생 및 성명 변경]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레슬리 린치 킹 주니어로 태어났으나, 부모의 별거와 모친의 재혼 후 계부의 이름을 물려받아 제럴드 루돌프 포드 주니어라는 이름을 얻고 성장했다.
제럴드 포드는 1913년 7월 14일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레슬리 린치 킹 주니어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그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별거했고, 모친은 그를 데리고 미시간주 그랜드래피즈로 옮긴 후 남편과 이혼했다. 이후 모친은 제럴드 루돌프 포드와 재혼했고, 그는 계부의 가문에 입적되어 계부의 이름을 물려받아 제럴드 루돌프 포드 주니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17세가 될 때까지 계부를 친부로 알고 자랐다.
1945
미시간 대학교와 예일 로스쿨을 졸업한 후 잠시 변호사로 활동하던 제럴드 포드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존 F. 케네디, 리처드 M. 닉슨처럼 해군으로 참전하여 국가에 봉사했다.
1948
[연방 하원의원 당선 및 주요 당직 역임]
1948년 미시간주 제5선거구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되며 본격적인 정치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여러 차례 재선되어 13선 의원이 되었고, 1965년에는 하원 공화당 소수당 원내대표로 선출되어 당내 주요 리더십을 맡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후 1948년 미시간주 제5선거구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되며 정치 생활을 시작했다. 성실하고 정직하다는 평판을 바탕으로 하원의원에 여러 차례 재선되었고, 자신의 정치적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1965년 1월 3일에는 미국 하원의 공화당 소수당 원내대표로 선출되어 당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49
1948년 미시간주 제5선거구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된 제럴드 포드는 1949년 1월 3일 정식으로 취임하며 의정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이 지역구에서 13선을 역임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63
1963년 1월 3일, 제럴드 포드는 미국 하원 공화당 의원총회 의장으로 취임하며 당내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후 1965년 소수당 원내대표로 선출되기 전까지 의장직을 수행했다.
1973
[수정 헌법 25조에 따른 부통령 취임]
1973년 12월 6일, 부통령 스피로 애그뉴가 뇌물 사건에 연루되어 사임하자,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 의해 수정 헌법 제25조에 따라 최초로 부통령직에 지명되어 취임했다.
1973년 12월 6일, 스피로 T. 애그뉴 부통령이 뇌물 사건으로 사임하면서 공석이 된 부통령 자리에 리처드 M. 닉슨 대통령은 당시 하원의 공화당 대표였던 제럴드 포드를 지명했다. 그는 미국 수정 헌법 제25조에 따라 처음으로 부통령직에 지명된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1974
[선거 없이 대통령 취임]
1974년 8월 9일,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탄핵 위기에 몰려 사임하자, 선거 없이 미국의 제38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로써 그는 선출직 없이 부통령과 대통령을 모두 역임한 최초이자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1974년 8월 9일,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탄핵당하기 직전 사임하자, 제럴드 포드는 백악관에서 선서를 하고 미국의 제38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선거에 당선되지 않은 채 대통령과 부통령이 된 최초의 인물로,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기록을 세웠다.
[워터게이트 관련 닉슨 전 대통령 사면]
대통령 취임 30일 뒤인 1974년 9월 8일, 재임 기간 중 가장 논란이 많았던 결정으로 워터게이트 사건과 관련된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의 모든 혐의를 사면했다. 이는 국민들의 거센 비난과 재선 실패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제럴드 포드는 대통령 취임 꼭 30일 뒤인 1974년 9월 8일, 워터게이트 사건과 관련된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의 모든 혐의를 사면했다. 그는 국민들에게 호소했지만, 닉슨을 용서하기에는 너무 이른 때였고, 이 결정은 그의 재임 중 가장 논란이 많았으며 결국 재선 실패의 결과를 가져왔다.
[통학버스 흑백차별 금지]
취임 직후인 1974년 9월 12일, 흑백차별 문제 해결을 위해 통학버스의 흑인과 백인 차별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다. 이에 불만을 품은 백인 부모들의 폭동에 군대를 동원하여 흑인 학생들을 보호하기도 했다.
제럴드 포드는 취임 직후인 1974년 9월 12일, 흑백차별 문제에 대한 조처로 통학버스의 흑인과 백인 차별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이에 불만을 품은 백인 부모들이 등교를 거부하고 폭동까지 일으키자, 포드는 군대를 동원하여 통학버스에서 흑인 학생들을 보호하도록 조치하는 등 사회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소련 지도자와 데탕트 논의]
1974년 11월 24일, 소련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를 만나 헬싱키 협정에 서명하는 등 냉전 체제에서 데탕트 움직임을 보였다.
1974년 11월 24일, 제럴드 포드 대통령은 소련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를 만났다. 이 만남을 통해 헬싱키 협정에 서명하는 등 냉전 체제 속에서 긴장 완화를 위한 데탕트 움직임을 주도했다.
1975
[심각한 경제 위기 직면]
재임 기간 동안 대공황 이후 최악의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를 겪으며 경제 위기에 직면했다. 유류 파동 등으로 물가는 급등하고 소비는 침체되며 실업률이 높아지는 악성 스태그플레이션이 지속되었다.
포드 정부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역시 경제였고, 1975년 4월 베트남 전쟁은 멎었지만, 막대한 전쟁비용으로 경제는 거의 파탄 상황에 이르러 미국 역사상 전쟁이 아닌 때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최악의 인플레이션을 기록했다. 물가는 상승하고, 소비는 침체되고, 실업률은 높아만 가는 악성 스태그플레이션이 계속되어 미국은 1930년 이래 최악의 불경기에 시달리고 있었다. 1973년, 1974년에 일어난 제1차 유류 파동으로 원유가격이 폭등하기도 했다.
1975년 4월, 베트남 전쟁의 총성이 멎었지만, 남베트남이 북베트남에 사이공 함락되면서 미국은 최종적으로 베트남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베트남 전쟁에 퍼부은 막대한 전쟁 비용은 미국 경제에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두 차례의 저격 미수 사건]
1975년 9월 5일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에서, 그리고 같은 해 9월 22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두 차례에 걸쳐 저격 미수 사건을 겪으며 국민들의 거센 불만을 마주했다.
재임 기간 동안 제럴드 포드는 백인들의 흑백 정책에 대한 불만 등으로 인해 두 차례의 저격 미수 사건을 겪었다. 1975년 9월 5일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에서 라넷 프롬에게, 그리고 같은 해 9월 22일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사라 제인 무어에게 저격당할 뻔했다. 그는 미국 대통령 중 유일하게 두 번 암살당할 뻔 한 대통령으로 기록되었다.
1976
[조지 워싱턴 대원수 추서]
1976년 7월 4일을 기하여 조지 워싱턴 초대 미국 대통령에게 명예역 미국 대원수 계급을 추서하여 사회적 채무를 갚는 의례를 치렀다.
1976년 7월 4일, 제럴드 포드 대통령은 조지 워싱턴 초대 미국 대통령에게 명예역 미국 대원수 계급을 추서했다. 이는 선거 없이 당선된 전무후무한 미국 대통령으로서 사회적 채무를 갚는 의례였다.
[지미 카터와 대선 토론]
1976년 9월 23일, 민주당 지미 카터 후보와의 대통령 선거 토론에 참여하며 재선을 위한 노력을 펼쳤다.
제럴드 포드는 1976년 9월 23일, 민주당 후보 지미 카터와 대통령 선거 토론에 참여했다. 경제난과 닉슨 사면에 대한 따가운 시선 등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공화당 예비경선에서 로널드 레이건을 꺾고 후보에 지명된 후 재선을 위해 노력했다.
[대선 패배 및 최장수 대통령 기록]
1976년 대선에서 공화당 예비경선을 뚫고 후보에 지명되었으나, 11월 2일 선거에서 민주당의 지미 카터 후보에게 패배하여 재선에 실패했고 1977년 1월 20일 짧은 대통령 임기를 마쳤다. 이후 93세 165일의 나이로 2006년 12월 26일 사망하며 세 번째 최장수 대통령으로 기록되었다.
1976년 대선에서 제럴드 포드는 공화당 예비경선에서 로널드 레이건을 꺾고 후보에 지명되었다. 그러나 1976년 11월 2일 선거일에 민주당의 지미 카터 후보에게 패배하여 재선에 실패했으며, 1977년 1월 20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895일이라는 5번째로 짧은 대통령 임기를 지냈지만, 93세 165일 동안 살았고 2006년 12월 26일 사망하며 현재까지 세 번째로 가장 장수한 대통령으로 기록되었다. 워싱턴 D.C.에서 국장이 치러진 후 그가 성장한 미시간주 그랜드래피즈에 묻혔다.
1977
[대통령직 퇴임]
1976년 대선에서 지미 카터 후보에게 패배한 후, 1977년 1월 20일 미국의 제38대 대통령직에서 퇴임했다.
1976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지미 카터 후보에게 패배한 제럴드 포드는 1977년 1월 20일 미국의 제38대 대통령직에서 퇴임하며 2년 반이라는 짧은 임기를 마쳤다. 그는 선거로 당선된 적 없이 대통령에 재임한 후 물러나게 되었다.
1982
[베티 포드 센터 설립]
그의 부인 베티 포드 여사가 1982년에 마약 및 알코올 중독자 구제 활동을 위한 사회사업단체인 베티 포드 센터를 설립했다.
제럴드 포드의 부인 베티 포드 여사는 미국민의 큰 사랑을 받은 퍼스트 레이디로 낙태문제와 여성의 권리증진 등을 위해 노력했다. 1974년 자신이 유방암에 걸린 사실을 공개하기도 했으며, 1982년에 마약, 알코올 중독자 구제 활동을 벌이는 사회사업단체인 베티 포드 센터를 설립하여 선두를 달리고 있다.
2006
[사망]
캘리포니아주 랜초미라지에서 93세 165일의 나이로 사망하여, 현재까지 세 번째로 가장 장수한 미국 대통령으로 기록되었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공화당 내에서 활동하던 제럴드 포드는 건강 악화를 겪기 시작한 후 2006년 12월 26일 캘리포니아주 랜초미라지에서 93세 165일을 일기로 사망했다. 그는 현재까지 세 번째로 가장 장수한 미국 대통령으로 기록되었다.
제럴드 포드의 사망 후 2006년 12월 30일 워싱턴 D.C.에서 국장으로 장례식이 치러졌다. 이후 그의 유해는 그가 성장한 미시간주 그랜드래피즈에 안장되어 영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