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거릿 대처
정치인, 영국 총리, 보수당 당수, 화학자, 변호사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6- 21:06:49
마거릿 대처는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이자 보수당 당수로, '철의 여인'으로 불리며 11년 7개월간 집권했습니다. 신자유주의 경제 개혁인 '대처리즘'을 추진하여 경제를 회복시키고 포클랜드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의 정책은 영국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오늘날까지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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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
[그랜섬에서 출생]
잉글랜드 링컨셔주 그랜섬에서 식료품점 둘째 딸로 태어났으며, 결혼 전 성은 로버츠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서 '검소 검약', '자기책임', '자조노력' 정신을 계승했습니다.
1925년 10월 13일 링컨셔주 그랜섬에서 식료품집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결혼 전 성은 로버츠이며, 어린 시절을 그랜섬에서 보내며 아버지가 운영하는 식료품점을 도왔습니다. 아버지는 현지 명사이자 시장을 지냈으며, 대처는 대대로 독실한 감리교 신자인 집안의 가훈이었던 '검소 검약', '자기책임', '자조노력' 정신을 뚜렷하게 계승했습니다. 그녀는 아버지를 매우 존경하며 '인간으로서 필요한 것은 모두 아버지에게서 배웠다'고 자주 말했습니다.
1947
[옥스퍼드 대학교 졸업]
옥스퍼드 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했습니다. 대학 시절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경제학에 심취했으며, 이 시기에 품었던 경제에 대한 생각이 훗날 신자유주의 경제 개혁인 '대처리즘'의 원류가 되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했습니다. 대학 시절에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경제학에 깊이 심취해 있었는데, 이때 품었던 경제에 대한 사상은 이후 그녀가 추진할 신자유주의 경제 개혁, 즉 '대처리즘'의 중요한 사상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1951
[데니스 대처와 결혼]
10세 연상의 데니스 대처와 결혼했습니다. 결혼 후 독학으로 법률을 공부해 29세 때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는 등 여성의 권리 확대를 강하게 호소하며 활동했습니다.
1951년 10세 연상의 데니스 대처와 결혼했습니다. 결혼 후에도 학업에 매진하여 독학으로 법률을 공부해 1954년에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습니다. 이 시기에 여성의 권리 확대를 강하게 호소하며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1959
[하원의원 당선으로 정계 입문]
보수당 공천으로 출마하여 영국 하원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 본격적으로 입문했습니다. 이는 그녀의 길고 강력한 정치 경력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1959년 보수당 공천으로 출마하여 영국 하원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이는 1950년 하원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후 이룬 성공으로, 그녀의 길고 영향력 있는 정치 경력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1970
['우유 강탈자' 논란에 휩싸인 교육부 장관]
히스 내각의 교육과학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 시기 교육 예산 삭감의 필요성으로 학교 우유 무상급식 폐지를 결정하여 '우유 강탈자'라는 비난을 받으며 맹렬한 항의에 직면했습니다.
1970년 에드워드 히스 총리에 의해 교육과학부 장관에 임명되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교육 관련 예산을 삭감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고, 학교에서 우유 무상급식을 폐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결정으로 인해 그녀는 '마거릿 대처, 우유 강탈자(Margaret Thatcher, Milk Snatcher)'라는 비난을 받으며 맹렬한 항의의 폭풍에 휩싸였습니다. 그녀는 교육시설물 개보수와 교원 인건비를 절감할 수는 없다고 맞대응했습니다.
1975
[영국 최초 여성 보수당 당수 취임]
보수당 당대표 선거에서 에드워드 히스를 물리치고 영국 최초의 여성 당수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그녀는 영국의 주요 정당을 이끄는 첫 여성이라는 역사적인 기록을 세웠습니다.
1974년 총선 패배 후 1975년 2월 실시된 보수당 당대표 선거에 출마했습니다. 당내 우파의 키스 요셉이 문제성 발언으로 출마를 포기하자 대처가 우파 대표로 나섰고, 에드워드 히스를 물리치고 보수당 대표로 취임하며 영국 최초의 여성 당수라는 타이틀을 얻었습니다. 같은 해 채택된 헬싱키 선언을 통렬하게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1976
[소련으로부터 '철의 여인' 별명 획득]
소련 국방부 기관지 '크라스나야 즈붸즈다'에 의해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이 붙여졌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별명은 그녀의 강인한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키며 대처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1976년 1월 24일, 소련의 국방부 기관지 '크라스나야 즈붸즈다'(빨간별)는 문제의 기사에서 마거릿 대처를 '철의 여인'이라고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대처 본인도 이 별명을 마음에 들어 했고, 모든 미디어에서 다루어지면서 '철의 여인'은 그녀의 강인하고 단호한 이미지를 상징하는 대명사로 자리 잡았습니다.
1979
[영국 최초 여성 총리 취임]
총선거에서 노동당의 제임스 캘러헌 전 수상을 누르고 승리하여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로 취임했습니다. 이로써 그녀는 영국의 정치 지형에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1979년 5월 4일 총선거에서 노동당의 제임스 캘러헌 전 수상을 누르고 승리하며 영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로 취임했습니다. 집권 후 즉시 긴축재정을 실시하여 물가 인상을 억제하고, 소득세 감면, 소비세와 간접세 증가, 은행 금리와 이자율 증가, 정부 규모 축소 등의 신자유주의 경제 개혁인 '대처리즘'을 추진했습니다.
1982
[포클랜드 전쟁 승리]
아르헨티나의 침공으로 발발한 포클랜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이 승리는 그녀의 강력한 리더십을 국내외에 각인시켰고, 이후 국민들의 지속적인 지지를 얻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1982년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제도 침공으로 발발한 포클랜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이 전쟁에서의 승리는 그녀의 '철의 여인' 이미지를 더욱 강화하고, 국내외적으로 강력한 리더십을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같은 해 아들 마크가 파리 다카르 랠리에서 실종된 뒤 구조되었을 때 눈물을 보이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1987
[총선 3선 성공, 최장수 총리 기록]
총선거에서 3선에 성공하며 20세기 영국 총리 중 가장 긴 11년 7개월의 재임 기간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그녀의 강력한 리더십과 정책이 국민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음을 보여줍니다.
국민의 지속적인 지지에 힘입어 1987년 총선거에 의해 3선에 성공했습니다. 이로써 그녀는 20세기 영국 총리 중 가장 긴 11년 7개월의 재임 기간을 기록한 최장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펼친 과감한 시장주의 경제 정책은 인플레이션을 잡고 경제 성장률을 회복시켰다는 평가를 받지만, 빈부 격차와 제조업 붕괴를 초래했다는 비판도 받습니다.
1990
[유럽 통합 반대로 총리직 사퇴]
유럽 통합에 대한 강한 반대 입장을 고수하다 보수당 지도부의 반발을 샀고, 결국 당수 경선에서 실패한 후 총리직에서 사퇴하며 11년 7개월간의 재임을 마무리했습니다.
1990년 유럽 통합 여론에 대해 마거릿 대처는 줄곧 반대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이로 인해 보수당 지도부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그해 11월 보수당 당수 경선에 나섰다가 1차 투표에서 당선에 실패하자 1990년 11월 28일 총리직에서 사퇴했습니다. 이는 20세기 영국 총리 중 최장수 재임을 기록한 그녀의 정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991
[보수당 당수직 사퇴 및 은퇴 후 활동]
총리직 사퇴 이후 1991년 5월 보수당 당수직에서도 사퇴했습니다. 이후 필립 모리스사 고문을 거쳐 1993년 미국 윌리엄 앤 메리 대학교 총장으로 초빙되어 2000년까지 재직하며 다양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91년 5월 보수당 당수직에서도 사퇴하며 공식적인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습니다. 이후 필립 모리스사 고문으로 활동했고, 1993년 미국 버지니아주의 윌리엄 앤 메리 대학교 총장으로 초빙되어 2000년까지 재직했습니다. 또한 1991년에는 오더 오브 메리트(Order of Merit, OM)를, 1992년에는 남작 작위(Baroness Thatcher of Kesteven)를 서임 받아 상원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1995년에는 가터 훈장(The Order of the Garter, LG)을 수훈했습니다.
2002
[뇌졸중 이후 건강 악화 및 남편 사망]
경미한 뇌졸중을 겪은 이후 대외 활동을 자제하고 자택에서 칩거하는 등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듬해 2003년에는 남편 데니스 대처가 사망하며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2002년 경미한 뇌졸중을 겪은 이후 대외 활동을 자제하고 자택에 칩거하며 건강이 악화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듬해인 2003년에는 오랜 기간 함께했던 남편 데니스 대처가 사망하는 개인적인 슬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이후 2012년에는 방광에 생긴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는 등 노년의 건강 문제가 이어졌습니다.
2013
[87세의 나이로 사망]
향년 87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녀의 사망은 영국 내에서 극명하게 엇갈리는 반응을 불러일으켰으며, 그녀의 정책에 대한 찬반 논쟁이 다시 한번 부각되었습니다.
2013년 4월 8일, 향년 87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녀의 사망 소식은 영국 사회에서 극명하게 갈리는 반응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일부는 그녀의 민영화 정책에 불만을 품고 죽음을 '쌤통'이라며 자축하거나 장례식의 민영화를 주장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영국을 대표하는 수상으로 평가하며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그녀의 삶과 정책은 오늘날까지도 영국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