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좌진

군인, 독립운동가, 교육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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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5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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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은 대한제국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기의 독립운동가이자 군인입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며 교육사업에 헌신했고, 만주로 망명하여 무장 독립운동의 선봉에 섰습니다. 특히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일제에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공산주의자에게 피살되었으나, 사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어 그의 업적이 기려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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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

[김좌진 출생]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김형규와 한산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자는 명여, 호는 백야입니다.

김좌진은 1889년 11월 24일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김형규와 한산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입니다. 흔히 청산리 대첩의 대표 장군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892

[아버지 김형규 사망]

만 3살 때 아버지 김형규를 여의었으나, 넉넉한 살림 덕분에 경제적으로는 어려움 없이 성장했습니다.

김좌진은 만 3살 때인 1892년 아버지 김형규를 여의었습니다. 하지만 넉넉한 살림 덕분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일은 없었으며, 어머니 한산 이씨의 엄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1904

[오숙근과 혼인]

해주 오씨 오숙근과 혼인하며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김좌진은 1904년 해주 오씨 오숙근과 혼인하였습니다.

1905

[육군무관학교 입학 및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고, 같은 해 집안의 가노들을 해방시키고 그들에게 땅을 무상으로 분배하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습니다.

김좌진은 1905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같은 해 나이 17세(1906년)에 집안의 가노들을 해방시키고 땅을 분배하는 등 민족적 자립을 위한 무장 독립운동의 선봉에 서는 동시에 국가의 미래를 위한 교육사업도 활발히 펼치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습니다.

1907

[호명학교 설립]

호서(충청도) 지방을 밝게 한다는 뜻의 호명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자신의 가산을 정리하여 학교 운영에 충당하고, 90여 칸에 달하는 자신의 집을 학교 교사로 제공했습니다.

김좌진은 1907년 호서(충청도) 지방을 밝게 한다는 뜻의 호명학교를 설립했습니다. 그는 가산을 정리하여 학교 운영에 충당하게 하고 90여 칸으로 된 자신의 집을 학교 교사로 제공했습니다. 또한 홍성에 대한협회 지부와 기호흥학회를 조직하여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909

[애국 계몽 운동 활발]

기호흥학회 장학재단을 설립하고 한성신보 이사를 역임했습니다. 안창호, 이갑 등과 서북학회를 세우고 산하 교육기관으로 오성학교를 설립하여 교감을 맡았으며, 청년학우회 설립에도 협력했습니다.

김좌진은 1909년 기호흥학회 장학재단을 설립하고 한성신보 이사를 역임했습니다. 안창호, 이갑 등과 서북학회를 세우고 산하 교육기관으로 오성학교를 설립하여 교감을 역임하는 한편, 청년학우회 설립에도 협력하는 등 활발한 애국 계몽 운동을 펼쳤습니다.

1911

[독립군 자금 조달 시도 중 투옥]

동간도에 독립군 사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 조달을 시도하다가 발각되어 2년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습니다. 복역 중 김구와 만나 교류하기도 했습니다.

김좌진은 1911년 동간도에 독립군 사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하여 자금조달을 시도한 것이 원인이 되어, 2년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습니다. 복역 중 김구와도 조우하여 독립운동에 대한 깊은 인연을 맺었습니다.

1913

[서대문형무소 출소]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소하며 “사나이가 실수하면 용납하기 어렵고 지사가 살려고 하면 다시 때를 기다려야 한다.”라는 시를 지어 독립 의지를 다졌습니다.

김좌진은 1913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소하며 “사나이가 실수하면 용납하기 어렵고 지사가 살려고 하면 다시 때를 기다려야 한다.”라는 시를 지었습니다.

1917

[대한광복단 조직]

박상진 등과 함께 대한광복단을 조직하여 항일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김좌진은 1917년 박상진 등과 함께 대한광복단을 조직하여 항일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1918

[만주 망명 및 무장 독립운동 본격화]

만주 길림으로 망명하여 “칼 머리 바람에 센데 관산 달은 밝구나”라는 비장한 시를 지었습니다. 대한정의단에 합류하여 군사부문 책임자가 되었고, 단체를 군정부로 개편한 후 사령관으로 추천되며 무장 독립운동의 중심에 섰습니다. 또한 길림에서 무오 독립선언에 서명했습니다.

김좌진은 1918년 만주 길림으로 망명하면서 “칼 머리 바람에 센데 관산 달은 밝구나 칼끝에 서릿발 차가워 고국이 그립도다 삼천리 무궁화 동산에 왜적이 웬 말이냐 진정 내가 님의조국을 찾고야 말것이다.”라는 비장한 시를 지었습니다. 대한정의단에 합류한 후 군사부문 책임자가 되었고, 동 단체를 군정부로 개편한 후 사령관으로 추천되며 무장 독립운동의 중심에 섰습니다. 같은 해 길림에서 무오 독립선언에 서명하여 항일 의지를 세계에 천명했습니다.

1919

[북로군정서 사단장 겸임]

북로군정서 사단장과 사관연성소 소장을 겸임하며 독립군 양성에 매진했습니다.

김좌진은 1919년 북로군정서 사단장과 사관연성소 소장을 겸임하며 독립군 양성에 매진했습니다.

1920

[청산리 전투 승리]

청산리 전투를 지휘하여 일본군을 대파하는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는 일제 강점기 독립군의 최대 전과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김좌진은 1920년 10월 21일 청산리 전투를 지휘하여 일본군을 대파하는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전투는 일제 강점기 독립군의 최대 전과 중 하나로 기록되며, 김좌진은 이 승리로 김동삼, 오동진과 함께 3대 맹장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1921

[대한독립군단 결성 및 자유시 참변 회피]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고, 우수리강을 넘어 이만까지 갔다가 다시 북만주로 돌아와 자유시 참변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김좌진은 1921년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했습니다. 같은 해 우수리강을 넘어 이만까지 갔다가 다시 북만주로 돌아왔기 때문에, 많은 독립군들이 희생된 자유시 참변을 겪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1925

[신민부 창건 및 사관학교 운영]

군사위원장 겸 사령관을 겸임한 신민부를 창건했습니다. 또한 북간도 목릉현에 성동사관학교를 세워 부교장으로서 정예사관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김좌진은 1925년 군사위원장 겸 사령관직을 겸임한 신민부를 창건했습니다. 또한 북간도 목릉현에 성동사관학교를 세워 부교장으로서 정예사관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이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무위원으로 임명했으나, 그는 취임하지 않고 독립군 양성에만 전념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1928

[한국유일독립당 조직]

한국유일독립당을 조직하여 독립운동 역량을 결집하려 노력했습니다.

김좌진은 1928년 한국유일독립당을 조직했습니다.

1929

[한족총연합회 주석 취임]

한족총연합회 주석이 되어 민족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김좌진은 1929년 한족총연합회 주석이 되어 민족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1930

[공산주의자에 의한 피살]

민족주의 계열과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간의 갈등이 격화되던 중, 고려공산청년회 회원 박상실에게 피살당했습니다. 사망 직전 “할 일이…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김좌진은 1930년 1월 24일, 민족주의 계열과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사이에 갈등이 격화되던 과정에서 고려공산청년회 회원 박상실에게 피살당했습니다. 그는 사망하기 직전 “할 일이….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란 말을 남겨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1933

[아내 오숙근의 유해 밀장]

사후 3년 뒤, 아내 오숙근이 일제를 피해 만주에서 김좌진의 유해를 수습하여 고향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임시로 밀장했습니다.

김좌진 사망 사후 3년 뒤인 1933년, 경성에 있던 부인 오숙근이 일제를 피해 만주로 다시 가서 상자에 김좌진의 유해를 위장하여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밀장했습니다.

1957

[유해 이장 및 부인과 합장]

아들 김두한에 의해 유해가 지금의 장소로 이장되었고, 이듬해 사망한 부인 오숙근과 합장되었습니다.

1957년 김두한에 의해 유해가 지금의 장소로 이장되었습니다. 이듬해 사망한 부인 오숙근은 남편 김좌진과 함께 합장되었습니다.

1962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김좌진 장군의 고귀한 희생과 공헌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습니다.

1974

[성역화 사업 추진 및 기념행사 개최]

보령시에서 김좌진 장군의 성역화 사업이 추진되었고, 그의 업적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매년 10월 22일에 기념행사가 개최되고 있습니다.

1974년 보령시에서 김좌진 장군의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고, 이와 동시에 그의 업적과 정신을 후세에 계승하고자 매년 10월 22일에 기념행사가 개최되고 있습니다.

1999

[기념사업회 설립]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그의 뜻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1999년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습니다.

2013

2013.08 사후 83년

[해군 잠수함 '김좌진함' 명명]

대한민국 해군 손원일급 잠수함 4번함이 '김좌진함'으로 명명되어 그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2013년 8월, 대한민국 해군 손원일급 잠수함 4번함이 '김좌진함'으로 명명되어 그의 굳건한 정신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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