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독립운동가, 군인,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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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독립운동가, 군인,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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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격술에 능한 사냥꾼 출신으로, 조선 말 의병장부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군인으로 활약한 인물입니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에서 일본군에 대승을 거두며 독립군의 영웅으로 부상했습니다. 이후 소련으로 이주하여 고려인 강제 이주를 겪었으며, 카자흐스탄에서 여생을 마쳤습니다. 광복절에 그의 유해가 대한민국으로 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며 최고 훈장을 추서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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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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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

[평양에서 출생, 고아가 되다]

평안도 평양부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9살에는 아버지마저 사망하여 고아가 되면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홍범도는 1868년 평안남도 평양부 서문(보통문) 내 문열사 부근에서 빈농이었던 홍윤식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일주일만에 사망했고, 아버지는 머슴살이를 하며 젖동냥을 얻어 먹이며 어린 아들을 길렀지만 홍범도가 9살이 되던 해 아버지마저도 사망하여 고아가 되었다. 이후 숙부의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고 부잣집 머슴살이를 하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883

[군인 생활 시작과 탈영]

15세의 나이로 17세라 속이고 평양 감영 소속 부대의 나팔수가 되었으나, 부대 내의 차별과 폭행에 시달리다 상관을 살해하고 군생활 4년 만에 탈영했습니다.

1883년 15살이 되던해 머슴살이를 청산하고자 17살로 나이를 속이고 평양 감영 소속 부대의 나팔수가 되었다. 군인이 되었지만 부대 내 차별과 폭행이 난무하자 자신을 괴롭히던 상관을 살해하고 군생활 4년만에 탈영했다.

1887

[공장주 살해 및 도주]

탈영 후 황해도 수안의 제지공장에 취직했으나, 임금 체불 문제로 공장주와 말다툼 끝에 공장주를 살해하고 도주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이어갔습니다.

탈영 후 황해도 수안의 제지공장에 취직했지만 임금 체불 문제로 말다툼 끝에 공장주를 살해하고 도주하였다.

1890

[승려 생활과 항일 의식 함양]

살인 후 금강산 신계사에서 승려 지담의 상좌승으로 수도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때 지담 스님으로부터 이순신 장군 등의 위인들의 활약상을 듣고 항일 의식을 함양했습니다.

1890년 금강산 신계사(神溪寺)에서 승려 지담(止潭)의 상좌승으로 절의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수도생활을 하였다. 이 때 이순신의 후손이기도 한 지담 스님에게서 이순신 장군을 비롯한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등의 활약상을 듣게 되었다.

1895

[을미의병 참여, 철령에서 일본군 격퇴]

을미의병이 일어나던 시기에 강원도 회양군에서 포수 김수협과 함께 의병을 조직했습니다. 철령에서 일본군 12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린 후 유인석 의병 부대에 합류하며 본격적인 의병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895년 11월 을미의병이 일어나던 시기에 강원도 회양군에서 포수였던 김수협과 의병을 일으켰다. 철령에서 일본군 12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소총과 탄약 등 전리품을 노획하여 함경도 안변의 학포(鶴浦)로 이동한 뒤, 여기에서 14명의 의병 부대를 조직한 후, 의병대장 유인석을 만나 합류하였다. 일본군과 세 차례의 전투를 치르기도 하였다. 동지였던 김수협이 전사하고 나머지 의병들 또한 전사하거나 도주하여 의병들의 기세가 사그러지자 유인석과 훗날을 기약하며 의병을 해체하고 황해도 연풍에서 금광 노동자로 은신했지만 일본군의 감시가 끊이지 않아 함경도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박말령에서 일본군 3명을 때려눕히고 총 3자루를 빼았고, 황해도 지경산을 거쳐 도착한 함경도 덕원에서 덕원읍에 탐관오리였던 좌수 전성준을 공격하여 금품을 빼았아 나눠주고 1897년 함경남도 북청에 갔다.

1897

[아내와 재회 및 포연대 활동]

의병 활동 중 헤어졌던 아내 이옥구(또는 이옥녀)와 5년 만에 극적으로 재회하여 함경남도 북청에 정착했습니다. 이후 안산사 일대 포수들의 동업 조직인 포연대 대장으로서 포수들의 권익 보호에 힘썼습니다.

그곳에서 죽은 줄 알았던 아내를 만났다. 헤어진지 5년만에 재회였다. 1907년 후반까지 북청군 안산사 노은리에 거주하며 사냥과 화전농에 종사하였다. 특히 이 때 선생은 안산사 일대 포수들의 동업조직인 포연대(捕捐隊)의 대장으로서 포수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07

[총포 단속법에 맞선 산포대 조직]

일제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하고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려 하자, 차도선 등 70여 명의 산포수와 함께 산포대를 조직했습니다. 북청 후치령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적군 2명과 일본인 순사 1명을 사살하며 본격적인 항일 무장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1907년 9월 3일 일제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하고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려 하자, 11월 차도선(車道善) 등과 산포수 70명으로 산포대(山砲隊)를 조직한 뒤 포수들의 총을 압수하여 북청으로 반출하는 일본군을 북청의 후치령(厚峙嶺)에서 습격하여 적군 2명과 일본인 순사 1명을 사살하였다.

[후치령 대첩에서 일본군 대파]

북청 후치령에서 미야베 대위가 지휘하는 일본군 70여 명과 3시간 동안 격전을 벌여 적군 30여 명을 살상하는 대대적인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후 갑산, 삼수, 혜산, 풍산 등지에서 유격전으로 일본 수비대를 격파하며 활약했습니다.

같은 달 25일에도 이곳에서 미야베(宮部) 대위가 지휘하는 일본인 군경 70여 명과 3시간 동안 격전을 벌여 적군 30여 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갑산(甲山) · 삼수(三水) · 혜산(惠山) · 풍산(豊山) 등지에서 유격전으로 일본 수비대를 격파하였다.

1908

[아내와 아들의 희생]

일본군이 의병 해산을 회유하며 아내 단양 이씨와 아들 홍양순을 인질로 삼았으나, 아내는 모진 고문 끝에 옥사했습니다. 아들 홍양순은 아버지와 함께 정평배기 전투에 참가하여 전사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홍범도는 500여명이 넘는 의병들을 포진해 있었다. 의병을 해산하라는 순종의 칙령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을 계속 공격해오자 홍범도의 아내인 단양 이씨와 그의 아들 양순을 인질로 삼고 홍범도에게 백작 벼슬을 준다는 식으로 회유하였지만 단양이씨는 이를 거절하고 모진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 이에 아들 양순을 내세워 홍범도를 회유하려했지만 홍범도는 아들에게 총을 겨눌 만큼 항일투쟁 의지 꺾지 않았다. 아들 홍양순은 이후 아버지와 함께 전투에 참가하였고 1908년 6월 16일 정평배기 전투에서 아들 홍양순이 전사하였다.

[연해주로 활동 거점 이동]

동지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길림성을 거쳐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으로 근거지를 옮겼습니다. 연해주와 두만강을 넘나들며 일본군을 공격하는 유격전을 펼쳤습니다.

1908년 10월 동지 세 사람과 함께 압록강을 넘고 길림성을 거쳐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그는 연해주에서 두만강을 넘나들며 일본군을 공격했다.

1909

[국내 복귀 및 항일 활동 지속]

일본의 끈질긴 추적에도 불구하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북청, 갑산, 혜산 일대에서 포수들과 함께 항일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이는 유인석 의병장의 격려 속에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일본의 끈질긴 추적 끝에 1909년 6월 무렵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 소식을 듣고 다시 포수들이 모여들어 북청, 갑산, 혜산 일대에서 항일활동을 전개했다. 이 소식을 들은 유인석이 편지를 보내 격려하면서 역량을 키우라는 권고를 했다.

1910

[만주 망명과 독립군 양성]

한일 병합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장백현 일대에서 독립군 양성에 힘썼습니다. 이는 향후 대규모 항일 무장 투쟁의 기반을 다지는 중요한 과정이었습니다.

1910년 한일 병합 후 만주로 망명하여 장백현 일대에서 독립군 양성에 힘썼으며, 1919년 간도 국민회의 대한 독립군 사령관이 되어 국내로 들어와서 일본군을 습격하였다.

1919

[대한독립군 사령관 취임 및 국내 진공]

간도 국민회의 대한 독립군 사령관이 되어 국내로 진입, 일본군을 습격하는 등 본격적인 독립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독립군의 통합 운동을 벌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김좌진과 함께 부총재가 되었습니다.

1919년 간도 국민회의 대한 독립군 사령관이 되어 국내로 들어와서 일본군을 습격하였다. 후에 독립군의 통합 운동을 벌여 대한독립군단 조직, 김좌진과 함께 부총재가 되었다.

1920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 대승]

일본군이 봉오동을 공격해 오자 3일간의 봉오동 전투에서 120명을 사살하며 독립군 역사상 최대의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어서 청산리 대첩에서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함께 일본군을 대파하는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1920년 일본군이 봉오동을 공격해 오자 3일간의 봉오동 전투에서 120명을 사살하며 최대의 전과를 올렸고, 이어서 청산리 대첩에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함께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1921

[자유시 참변 연루 의혹]

간도 참변 이후 자유시를 새로운 근거지로 삼고 러시아군과 협력했으나, 한인 공산주의자들 간의 분란 속에서 상하이파 독립군을 무장해제시키는 자유시 참변에 가담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역사학계는 이를 빠른 통합을 통해 항일 무장투쟁에 나서고자 한 의도로 해석합니다.

간도 참변으로 자유시(自由市)를 새로운 근거지로 삼고 러시아군과 교섭하여 협조를 얻었다. 그러나 한인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분란이 일어났을 때 이르쿠츠크파 공산주의자 편에 서서 상하이파 공산주의자와 간도 독립군을 무장해제시키는 자유시 참변에 가담했는 의혹이 있으나 이는 홍범도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통합이 마무리되어 항일무장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역사학계의 해석이다. 당시 홍범도에게는 대한의용군, 고려혁명군 그 어느 쪽과도 이해관계가 없었다고 한다.

1922

[코민테른 국제대회 참석]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공산당(코민테른) 국제대회에 원동(遠東)의 식민지·반식민지 혁명가 자격으로 참석하여 독립 투쟁의 국제적 연대를 모색했습니다.

1922년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공산당(코민테른) 국제대회에 국제공산당이 지휘한 원동(遠東)의 식민지·반식민지 혁명가로 참석한다.

1927

[소련 볼셰비키당 입당]

소련의 볼셰비키당에 입당하여 사회주의 활동에 참여하며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안을 모색했습니다.

1927년 소련의 볼셰비키당에 입당하였다.

1937

[고려인 강제 이주와 카자흐스탄 정착]

이오시프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으로 인해, 일본인과 닮았다는 이유로 많은 고려인들과 함께 황량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키질로르다로 강제 이주당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1937년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고려인이 일본인과 닮았다는 이유로 강제로 이주 당했다. 당시 소련은 극동아시아 지역에서 일본인 및 일본군 간첩을 차단한다는 차원에서 많은 고려인들을 황량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키기도 하였다.

1943

[카자흐스탄 키질로르다에서 서거]

카자흐스탄 키질로르다로 강제 이주된 후, 그곳에서 집단 농장을 운영하고 고려극장 관리인으로 일하며 여생을 보내다가 향년 76세의 나이로 타계하여 키질로르다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키질로르다로 옮겨온 그는 거기서 집단 농장을 운영하기도 했고, 말년에는 고려극장의 관리인으로 일하며 여생을 보내다가 1943년에 향년 76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이후 키질로르다의 한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1962

1962.03.01 사후 19년

[건국공로훈장 추서]

윤보선 대통령 시절인 3.1절에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수여되어, 그의 독립운동 공적이 사후에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윤보선 대통령 시절인 1962년 3.1절에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 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수여되었다.

1993

[북한의 유해 봉환 시도 무산]

북한이 홍범도가 평양 출신임을 내세우며 유해 봉환을 시도했으나, 고려인 사회의 반대로 무산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유해에 대한 각자의 역사적 관점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1993년에 북한은 홍범도가 평양 출신이라는 점을 내세우며 봉환 시도를 하였지만, 고려인 사회의 반대로 무산되었던 적이 있었다.

2021

2021.08.15 사후 78년

[대한민국으로 유해 봉환]

광복절에 그의 유해가 카자흐스탄에서 대한민국으로 봉환되었습니다. 이는 고국에서 그의 희생과 공헌을 기리기 위한 오랜 염원이 실현된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2021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으로 유해가 봉환되어 8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에 다시 안장되었다.

2021.08.18 사후 78년

[국립대전현충원 안장 및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대한민국으로 봉환된 유해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고, 최고 등급의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이로써 그는 비로소 고국에서 영면하게 되었으며, 그의 위대한 공적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2021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으로 유해가 봉환되어 8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에 다시 안장되었다. 광복절에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고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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