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연표
1879
1880
[뮌헨 이주 및 사업 시작]
아인슈타인 가족이 뮌헨으로 이사했고, 그의 아버지와 삼촌은 직류 기반 전기 장비 제조 회사를 설립했다.
1884
1887
1891
[수학 독학 및 피타고라스]
12세의 어린 나이에 대수와 유클리드 기하학을 독학으로 배웠다.
또한 피타고라스 정리에 대한 독자적인 증명을 발견하며 수학적 재능을 드러냈다.
1892
1893
1894
[가족 이탈리아 이주]
아버지 회사의 전기 조명 공급 입찰 실패로 가족은 이탈리아로 이주했고, 아인슈타인은 학업을 위해 뮌헨에 남았다.
[이탈리아 가족 합류]
학교의 통제와 교수법에 불만을 가졌던 아인슈타인은 의사의 진단서를 이용해 뮌헨 학교를 설득하고 이탈리아의 가족에게 합류했다.
1895
[ETH 입학 시험 낙방]
16세의 나이로 취리히 연방 폴리테크닉 학교 입학 시험에 응시했으나, 일반 부분에서 요구되는 기준에 미달하여 낙방했다.
1896
[스위스 마투라 합격]
물리학 및 수학 과목에서 최고 등급을 포함한 좋은 성적으로 스위스 마투라 시험에 합격하고, 취리히 연방 폴리테크닉 학교의 4년제 수학 및 물리학 교육 디플로마 프로그램에 등록했다.
1900
[ETH 졸업 및 첫 논문]
취리히 연방 폴리테크닉 학교에서 수학과 물리학 시험에 합격하고 연방 교육 디플로마를 받았다.
이후 '모세관 현상으로부터의 결론'이라는 첫 논문을 물리학 연보에 게재했다.
1901
1902
[특허국 취직 및 딸 출생]
베른의 스위스 특허국 사무소에 보조 심사관으로 취직하며 생계를 꾸렸다.
이 무렵 첫째 딸 '리제를'이 태어났으며, 친구들과 '올림피아 아카데미'라는 소규모 토론 그룹을 시작했다.
1903
1904
1905
[기적의 해 논문 발표]
그의 '기적의 해(Annus Mirabilis)'로 묘사되는 해에 광전 효과, 브라운 운동, 특수 상대성이론, 그리고 E=mc²에 관한 4편의 획기적인 논문을 발표하며 현대 물리학의 기초를 뒤흔들었다.
1906
1907
[중력 이론 연구 시작]
특수 상대성이론 내에서 관성 운동의 선호가 만족스럽지 않다고 느껴, 가속도와 등가 원리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며 일반 상대성이론의 기초를 다지기 시작했다.
1908
1909
1910
1911
[빛의 굴절 예측]
무거운 물체에 의한 빛의 굴절 정도를 추정하는 논문을 발표하여, 일반 상대성이론의 이론적 예측이 처음으로 실험적으로 테스트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프라하 대학교 정교수]
프라하에 있는 독일 찰스 페르디난트 대학교의 정교수가 되었으며, 이를 위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오스트리아 시민권을 받아들였다.
1912
[ETH 이론물리학 교수]
취리히에 있는 모교인 취리히 공과대학교로 돌아와 1914년까지 이론물리학 교수로 재직하며 분석 역학과 열역학을 가르쳤다.
1913
1914
[밀레바와 별거 시작]
베를린으로 이주한 뒤, 아내 밀레바 마리치가 아들과 함께 취리히로 돌아가 별거에 들어갔다.
아인슈타인은 사촌 엘사 뢰벤탈과 낭만적인 관계를 시작했다.
[평화 선언 서명]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군국주의를 정당화하는 '93인의 성명서'에 반대하며 평화적인 '유럽인들에게의 성명서'에 서명한 몇 안 되는 독일 지식인 중 한 명이었다.
1915
[일반 상대성이론 완성]
자신의 특수 상대성이론을 확장하여 중력을 기하학적으로 설명하는 일반 상대성이론을 성공적으로 완성했으며, 시공간의 곡률에 잔물결이 발생하는 중력파를 예측했다.
[아인슈타인-드 하스 효과]
오언 윌런스 리처드슨이 예측한 자기 모멘트 변화에 따른 물체 회전 현상인 '아인슈타인-드 하스 효과'에 대한 최초의 실험적 관찰 논문을 반더르 요하너스 더 하스와 함께 발표했다.
1916
1917
[우주론 및 자극 방출]
일반 상대성이론을 우주 전체의 구조에 적용하며 동적인 우주 예측을 위해 새로운 개념인 '우주 상수'를 장방정식에 도입했다.
또한 메이저와 레이저의 원리가 되는 '자극 방출'의 가능성을 제안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 소장]
카이저 빌헬름 물리학 연구소의 소장이 되었고, 이로 인해 다시 프로이센인으로서 독일 시민이 되었다.
1919
[밀레바 마리치와 이혼]
5년 동안 떨어져 살았던 아내 밀레바 마리치와 공식적으로 이혼했다.
이혼 합의의 일환으로 노벨상 상금을 주기로 동의했다.
[에딩턴의 이론 증명]
아서 에딩턴 경이 일식 관측을 통해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 예측(중력에 의한 빛의 굽힘)을 확인했다.
이 관측은 국제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며 아인슈타인을 세계적인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과학의 혁명' 보도]
에딩턴의 발표 후, 영국의 주요 신문인 《더 타임즈》는 '과학의 혁명 – 우주의 새로운 이론 – 전복된 뉴턴적 아이디어'라는 배너 헤드라인을 인쇄했다.
1920
1921
[뉴욕시 첫 방문]
존 프랜시스 하일런 시장의 공식 환영을 받으며 뉴욕시를 처음 방문했다.
이후 3주간의 강의와 리셉션에 참여했다.
['미국 첫인상' 출판]
미국 방문 경험을 바탕으로 '미국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라는 에세이를 출판하여 미국인의 몇 가지 특징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1922
[아시아 순회 강연]
싱가포르, 실론, 일본, 팔레스타인 등 아시아 지역을 6개월간 순회하며 수많은 강연을 진행했다.
일본에서는 황제와 황후를 만나는 등 국빈급 환영을 받았다.
[국제 지적 협력 위원회]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 연맹의 국제 지적 협력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 단체는 과학자, 연구원, 교사, 예술가, 지식인 간의 국제 교류를 촉진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노벨상 시상식 불참]
극동 여행으로 인해 스톡홀름 노벨상 시상식에 직접 참석하지 못했고, 독일 외교관이 대신 만찬 연설을 진행했다.
1923
[스페인 방문]
2주 동안 스페인을 방문하여 산티아고 라몬 이 카할을 만났고, 알폰소 13세로부터 스페인 과학 아카데미 회원 디플로마를 받았다.
1924
[보스-아인슈타인 통계]
인도의 물리학자 사티엔드라 나트 보스의 통계 모형을 지지하고 이를 확장하여, 일부 입자가 매우 낮은 온도에서 나타나야 하는 '보스-아인슈타인 응축' 현상을 예측했다.
[루이 드 브로이의 물질파 가설 지지 및 학계 공론화]
입자의 파동성을 주장한 드 브로이의 물질파 이론의 혁명적 가치를 일찍이 알아보고, 학계에 그 중요성을 널리 알리는 강력한 후원자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드 브로이의 박사 학위 논문을 읽고 "거대한 장막의 한 귀퉁이를 걷어냈다"고 극찬하며 동료 물리학자들에게 일독을 권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이러한 전폭적인 지지는 무명이었던 드 브로이의 가설이 학계의 주류 의제로 부상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에르빈 슈뢰딩거가 이를 바탕으로 파동 역학을 창시하게 만드는 학문적 가교가 되었습니다.
1925
1926
[아인슈타인 냉장고 발명]
그의 전 제자인 실라르드 레오와 함께 움직이는 부품 없이 열만으로 작동하는 혁신적인 '아인슈타인 냉장고'를 공동 발명하고 1930년에 특허를 받았다.
[막스 보른에게 보낸 편지와 "주사위 놀이" 선언]
양자 역학의 확률적 해석을 정립한 학문적 동료 막스 보른에게 자신의 결정론적 세계관을 피력하며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습니다.
막스 보른이 파동 함수를 확률적으로 해석하는 지평을 열자, 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양자 역학은 정말 인상적이지만, 내면의 목소리는 이것이 진짜가 아니라고 말하네. 어쨌든 나는 신이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확신하네"라는 유명한 문장을 남겼습니다. 보른과는 평생에 걸쳐 깊은 우정과 학문적 존경을 나누었으나, 우주의 근본 원리가 '우연'인가 '인과'인가를 두고는 끝까지 타협하지 않는 평행선을 달렸습니다.
1927
[제5차 솔베이 회의와 '주사위 놀이' 논쟁의 시작]
양자 역학의 확률론적 해석에 반대하며 닐스 보어와 평생에 걸친 학문적 논쟁을 시작했습니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로 양자 역학의 불확정성 원리를 비판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자연 법칙이 우연이 아닌 결정론적 인과관계에 기반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보어의 코펜하겐 해석이 물리적 실재를 온전히 설명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이론'임을 증명하기 위해 정교한 사고실험들을 제시하며 치열하게 대립했습니다.
1929
[우주 상수 폐기]
에드윈 허블이 성운의 후퇴를 발견한 후, 우주 상수가 '이론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주장하며 정적 우주 모형을 포기했다.
1930
[두 번째 미국 방문]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의 연구원으로 두 번째 미국 방문을 시작했다.
전국적인 관심 속에서도 사생활 보호를 위해 공개 연설과 상 수여를 거절했다.
1931
[평화주의자 친구 사귐]
평화주의자로 유명한 작가 업턴 싱클레어와 영화배우 찰리 채플린과 친구가 되었다.
그는 채플린의 영화 '시티 라이트' 시사회에 특별 게스트로 참석하기도 했다.
[옥스포드 대학 제안]
옥스포드 대학교를 포함한 여러 유럽 대학에서 제의를 받았으며, 특히 크라이스트 처치에서는 5년 연구 장학금까지 제안받았다.
1933
[독일 귀국 포기]
미국을 방문하던 중,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정부가 집권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독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인지했다.
[나치의 아파트 습격]
미국에 있는 동안 게슈타포가 베를린에 있는 그의 가족 아파트를 반복적으로 습격했으며, 그의 개인 범선도 압수당했다.
[독일 시민권 공식 포기]
벨기에 앤트워프에 도착하자마자 독일 영사관으로 가서 여권을 양도하고 공식적으로 독일 시민권을 포기했다.
[유대인 공직 금지 확인]
독일 정부가 유대인의 공직 진출을 금지하는 법률을 통과시켰음을 알게 되었다.
수천 명의 유대인 과학자들이 갑자기 대학 직위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나치 분서 사건]
그의 저술이 나치 책 불태우기에서 독일 학생회의 표적이 되었고, 나치 선전 장관 요제프 괴벨스는 '유대인 지식주의는 죽었다'고 선언했다.
[영국 망명]
학술 지원 위원회의 도움으로 독일을 떠나 벨기에에서 몇 달 살다가, 영국 의원 올리버 로커-램슨의 초청으로 약 6주간 영국에 머물렀다.
로커-램슨은 그를 보호하기 위해 경호원을 배치했다.
[학문적 자유 연설]
런던 로열 앨버트 홀에서 가득 찬 청중 앞에서 학문적 자유의 중요성에 대해 연설하며, 독일의 유대인 대우를 비난했다.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미국으로 돌아와 나치 독일을 탈출한 과학자들의 피난처가 된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상주 학자가 되었다.
1935
[미국 영구 거주 및 웜홀]
미국에 영구적으로 남아 시민권을 신청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나단 로젠과 협력하여 '아인슈타인-로젠 다리'(웜홀)의 모형을 만들었다.
[EPR 역설 발표 및 양자 역학의 불완전성 주장]
포돌스키, 로젠과 함께 양자 역학의 비논리성을 지적하는 EPR 논문을 발표하며 닐스 보어에게 다시 한번 학술적 도전장을 던졌습니다.
멀리 떨어진 두 입자가 즉각적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양자 얽힘' 현상을 '유령 같은 원거리 작용'이라 비판하며, 양자 역학이 놓치고 있는 '숨은 변수'가 존재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비록 훗날 보어의 해석이 우세해졌으나, 이 논쟁은 양자 역학의 철학적 기반을 다지고 양자 정보 과학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태동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실험 지지 및 양자 역학 비판 공조]
양자 역학의 확률론적 해석이 가진 불완전함을 지적하는 자신의 입장에 동조하며,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 등으로 뜻을 같이한 학문적 동료 에르빈 슈뢰딩거를 적극 지지했습니다.
슈뢰딩거가 코펜하겐 해석의 모순을 드러내기 위해 고안한 '죽었으면서 동시에 살아있는 고양이' 비유를 접하고, 이를 "가장 완벽한 반박"이라며 극찬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슈뢰딩거와 수많은 서신을 교환하며 미시 세계의 물리적 실재가 관측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에 맞서, 결정론적 세계관을 수호하기 위한 논리적 근거를 함께 구축했습니다.
1936
1939
[핵무기 개발 편지 서명]
망명한 물리학자 실라르드 레오의 설득으로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독일의 잠재적인 핵무기 프로그램에 대해 경고하고 미국이 유사한 연구를 시작할 것을 권고하는 편지에 서명했다.
1940
1946
[인종차별 비판]
역사적으로 흑인 대학이었던 펜실베니아 링컨 대학교를 방문하여 명예 학위를 받았고, 미국의 인종차별을 '최악의 질병'으로 간주하며 강하게 비판했다.
1948
[이스라엘 건국 반대]
독립된 유대 국가인 이스라엘의 창설에 반대하며,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있는 기존 아랍인들과 함께 살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51
[NAACP 활동]
전미 유색인종 발전 협회(NAACP)에 가입하여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시민권을 위한 캠페인을 벌였고, 인권 운동가 W.
E.
B.
듀보이스의 재판에서 증언할 준비를 했다.
['메롱' 사진 촬영]
기자가 차에 탑승한 아인슈타인을 촬영하자 장난스럽게 '메롱' 표정을 지었다.
이 사진은 훗날 경매에서 7만 4324달러에 낙찰되며 그의 재미있는 성격을 상징하게 되었다.
1952
[이스라엘 대통령직 거절]
이스라엘 대통령 하임 바이츠만 사망 후,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으로부터 이스라엘 대통령직을 제안받았으나, 자신이 그 자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정중히 거절했다.
1954
[종교적 견해 표명]
철학자 에릭 거트킨드에게 보낸 독일어 편지에서 '신이란 단어는 인간의 나약함의 표현이자 산물에 지나지 않으며, 성경은 유치한 원시적인 전설의 모음집'이라고 자신의 종교적 견해를 밝혔다.
[채식주의 시작]
삶의 마지막 시기에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편지에서 '지방도, 고기도, 생선도 없이 살고 있지만, 이런 식으로 꽤 기분이 좋다'고 언급했다.
1955
[아인슈타인 사망]
수술을 거부하고 '원할 때 가고 싶다.
인위적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무미건조하다'며 다음 날 아침 펜 메디신 프린스턴 병원에서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뇌 적출 및 화장]
부검 중 토머스 스톨츠 하비 병리학자가 가족의 허락 없이 지능 연구를 위해 아인슈타인의 뇌를 적출했다.
그의 유해는 트렌턴에서 화장되었고 유골은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 뿌려졌다.
2016
[중력파 최초 관측 발표]
아인슈타인이 약 100년 전 예측했던 중력파가 레이저 간섭계 중력파 관측소(LIGO)에 의해 최초로 직접 관측되었음이 발표되었다.
이는 일반 상대성이론의 핵심 예측을 입증한 역사적인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