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레오 갈릴레이

철학자, 과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

num_of_likes 0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8- 22:22:46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갈릴레오 갈릴레이
연혁 피인용 수 1
철학자, 과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
report
Edit

이탈리아의 철학자, 과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입니다. 근대 과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실험적 검증을 통한 물리학의 선구자였습니다. 망원경을 개량하여 천체 관측에 응용하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강력히 지지했습니다. 이로 인해 로마 가톨릭 교회와 대립, 종교 재판에 회부되어 가택 연금되는 고난을 겪었으나, 운동 법칙 확립, 목성 위성 및 금성 위상 발견 등 다수의 획기적인 과학적 업적을 남겼습니다.


본 문서는 위키백과 갈릴레오 갈릴레이 문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편집되었으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배포됩니다.

연관 연혁
주요사건만
최신순

1564

[갈릴레오 갈릴레이 탄생]

이탈리아 피사에서 유명한 류트 연주가 빈센초 갈릴레이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15세기의 조상인 갈릴레오 보냐우티의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564년 2월 15일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피사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빈센초 갈릴레이는 유명한 류트 연주가이자 음악 이론가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조상인 갈릴레오 보냐우티의 명예를 기리기 위해 가문이 성을 '갈릴레이'로 바꾼 것과, 당시 맏아들의 이름을 성을 변형하여 붙이는 관습에 따라 지어졌습니다.

1575

[수도원 학교 입학 및 초기 학문적 불만]

11세에 피렌체 근처 발롬브로사 수도원 학교에 입학하여 인문학을 배웠으며, 이곳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갈릴레오는 11세경 피렌체 근처의 발롬브로사 수도원 학교에 입학하여 인문학을 공부했습니다. 이 시기,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대해 처음으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1세에'라는 표현은 추정 연도에 해당합니다.

1586

['작은 천칭' 저술]

공기 및 수중 물질의 무게를 측정하는 정확한 저울에 대한 소책자 '작은 천칭'(The Little Balance)을 저술하며 그의 초기 과학적 연구 성과를 보여주었습니다.

갈릴레오는 1586년 공기 중과 수중에서 물질들의 무게를 측정하기 위한 정확한 저울을 설명한 '작은 천칭'(The Little Balance)이라는 소책자를 저술했습니다. 이 저서는 그의 초기 과학적 문서 중 하나입니다.

1589

[피사 대학 수학 교수 부임 및 '운동에 대하여' 저술]

피사 대학교의 수학 교수로 부임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낙체 이론에 반박하는 내용의 '운동에 대하여'를 저술했습니다.

갈릴레오는 1589년 피사 대학교의 수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운동에 대하여'(Pisan De Motu, On Motion)를 저술했으며, 이 책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낙체의 속도가 무게에 비례한다'는 이론이 잘못되었음을 논리적으로 추론하여 반박했습니다.

1600

[첫째 딸 비르지니아 출생]

베네치아 공화국 시민 마리나 감바와의 사실혼 관계에서 첫째 딸 비르지니아가 태어났습니다.

갈릴레오는 마리나 감바와의 사실혼 관계에서 1600년에 첫째 딸 비르지니아를 얻었습니다. 당시 혼외자였기 때문에, 후에 비르지니아는 수녀원에 들어가게 됩니다.

1601

[둘째 딸 리비아 출생]

마리나 감바와의 사실혼 관계에서 둘째 딸 리비아가 태어났습니다.

갈릴레오는 마리나 감바와의 사실혼 관계에서 1601년에 둘째 딸 리비아를 얻었습니다. 리비아 역시 혼외자였기에 후에 수녀원에 들어가 아르찬젤라 수녀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1606

[막내 아들 빈센초 출생 및 '컴퍼스의 작동' 발행]

마리나 감바와의 사실혼 관계에서 막내 아들 빈센초가 태어났으며, 같은 해 '기하학 및 군사 영역에서의 수행을 다룬 컴퍼스의 작동' 입문서를 발행했습니다.

갈릴레오는 1606년에 마리나 감바와의 사실혼 관계에서 막내 아들 빈센초를 얻었습니다. 같은 해, 그는 기하학 및 군사 영역에서의 컴퍼스 활용법을 다룬 입문서인 '기하학적 및 군사적 컴퍼스의 작동'(Le Operazioni del Compasso Geometrico et Militare)을 발행하여 과학 기술 분야에 기여했습니다.

1609

[망원경 개량 및 대중에 첫 공개]

네덜란드에서 제작된 3배율 망원경을 개량하여 30배율 망원경을 만들고, 베네치아 입헌자들에게 최초로 설명하며 그의 혁신적인 관측 시대를 열었습니다.

갈릴레오는 1609년 네덜란드 망원경을 개량하여 30배율 망원경을 제작했습니다. 그는 이를 천체 관측에 응용하며 혁신적인 발견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8월 25일, 그는 베네치아 입헌자들에게 자신의 개량된 망원경을 설명하며 그 유용성을 알렸습니다.

1610

[피렌체 부임]

피렌체의 대공 메디치 가문의 코지모 2세의 초청을 받아 피렌체에 부임하여 계속해서 천문학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1610년, 갈릴레오는 피렌체의 대공인 메디치 가문의 코지모 2세의 초청을 받아 피렌체에 부임하여 그의 과학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이로써 그는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으며 연구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목성의 4대 위성 발견]

망원경을 이용해 목성 주위를 도는 세 개의 '별'(위성)을 처음 관측하였고, 며칠 후 네 번째 위성 가니메데를 발견하여 목성의 4대 위성을 확인했습니다. 이는 모든 천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우주관에 반하는 중대한 발견이었습니다.

갈릴레오는 1610년 1월 7일 밤중에 망원경으로 목성 주위를 도는 세 개의 별을 관측했습니다. 다음 날 관측을 통해 이 별들의 위치가 변하는 것을 확인했고, 1월 13일에는 네 번째 위성인 가니메데를 발견했습니다. 이로써 이오, 유로파, 칼리스토, 가니메데로 이루어진 목성의 4대 위성(갈릴레이 위성)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는 지구중심설에 대한 중요한 반박 증거가 되었습니다.

['별에서 온 메신저' 출판]

그의 초기 망원경 관측 결과를 담은 '별에서 온 메신저'(Sidereus Nuncius)를 출판했습니다. 이 책에는 달의 반점, 목성의 위성 등이 서술되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하는 중요한 증거를 제시했습니다.

1610년 3월, 갈릴레오는 '별에서 온 메신저'(Sidereus Nuncius)라는 제목의 소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책에는 그가 망원경으로 관측한 달의 표면, 목성의 4대 위성, 그리고 은하수가 수많은 별들의 집합체라는 사실 등이 담겨 있었으며, 이는 당시 지배적이던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설에 강력히 반박하며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지지하는 첫 번째 과학적 저서로 평가됩니다.

[금성의 위상 변화 관찰 시작]

금성의 위상이 달처럼 변하는 현상을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금성이 태양 주위를 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예측과 일치하며,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설에 결정적인 반박 증거가 되었습니다.

갈릴레오는 1610년 9월부터 금성의 위상이 달의 위상 변화와 유사하게 변하는 것을 관찰했습니다. 이 관측 결과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 모델이 금성의 모든 위상을 예측할 수 있는 반면,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 모델은 금성의 초승달 같은 위상만을 예측할 수 있다는 점에서 태양중심설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1611

[로마 방문 및 린체이 아카데미 회원 활동]

뛰어난 학자들이 많았던 예수회 철학자 및 수학자들에게 로마에서 자신의 망원경 성능과 목성의 위성 관측 사실을 증명했으며, 린체이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1611년, 갈릴레오는 로마에 방문하여 예수회의 영향력 있는 학자들에게 자신의 망원경 성능을 시연하고, 목성의 4대 위성과 관련된 사실들을 직접 관측하게 했습니다. 이 방문 동안 그는 저명한 린체이 아카데미(Accademia dei Lincei)의 회원이 되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1612

[지동설 반대 부상 및 토성, 해왕성 관찰]

태양 중심 이론에 대한 반대가 수면 위로 부상했으며, 토성의 고리를 처음 관찰했으나 3개의 계로 오인했습니다. 또한 해왕성을 관찰했지만 행성임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1612년, 갈릴레오가 지지했던 우주의 태양 중심 이론에 대한 반대가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 시기에 토성을 관찰하며 고리를 발견했지만, 처음에는 이를 세 개의 계로 착각했습니다. 또한 해왕성을 관찰했으나, 이것이 행성인지는 깨닫지 못하고 희미한 별 중 하나로 기록했습니다.

1613

['흑점에 관한 편지들' 출간]

태양의 흑점에 대해 설명한 '흑점에 관한 편지들'(Letters on Sunspots)을 출간하며 태양이 변할 수 있다는 주장을 지지하고 천동설을 반박했습니다.

1613년, 갈릴레오는 태양 흑점의 존재와 그것이 태양의 표면이 변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흑점에 관한 편지들'(Letters on Sunspots)을 출간했습니다. 이 저서는 천동설의 완벽한 천체 개념에 대한 도전을 더욱 강화했으며, 금성 위상 관측과 함께 지동설 전환을 촉진했습니다.

1614

[카치티 사제의 이단 주장]

산타 마리아 노벨라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 사제 토마소 카치티가 갈릴레오의 지구 운동 이론을 비난하며 그의 이론이 이단에 가깝다고 주장했습니다.

1614년, 산타 마리아 노벨라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사제 토마소 카치티는 설교를 통해 갈릴레오의 지구 운동에 대한 의견을 강하게 비난하며, 그의 이론들이 위험하고 이단에 가깝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갈릴레오와 교회의 대립이 본격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615

[검사성성 고발 및 로마 방문, '크리스티나 공작부인에게 보내는 편지' 준비]

검사성성에 고발되자 자신과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변호하기 위해 로마를 방문했으나, 이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또한 '크리스티나 공작부인에게 보내는 편지' 원고를 준비했습니다.

1615년, 갈릴레오는 검사성성에 고발되었고, 이를 알게 되자 자신과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변호하기 위해 로마를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이 방문은 그의 주장을 인정받는 데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이 해에 그는 코페르니쿠스주의를 옹호하고 성서와 일치한다고 주장하는 '크리스티나 공작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의 원고를 준비했습니다. 이 편지는 1636년에야 발표되었습니다.

1616

[지동설 금지 및 경고]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가 로마 교황청의 금서 목록에 올랐으며, 갈릴레오는 추기경 로베르토 벨라르미노로부터 지동설을 옹호하거나 가르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1616년, 코페르니쿠스의 주요 저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가 로마 교황청에 의해 금서 목록에 지정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추기경 로베르토 벨라르미노는 갈릴레오에게 개인적인 서신을 보내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을 옹호하거나 가르치지 말 것을 공식적으로 명령했습니다. 이는 갈릴레오에게 지동설 주장을 포기하라는 강력한 압박이었습니다.

['Discourse on the Tides' 저술]

코페르니쿠스적 지구에 입각한 조석 현상에 대한 논문인 'Discourse on the Tides'를 저술했습니다.

1616년, 갈릴레오는 지동설을 바탕으로 조석 현상을 설명하는 논문인 'Discourse on the Tides'(Discorso del flusso e reflusso del mare)를 저술했습니다. 이 저서는 그의 코페르니쿠스주의적 관점을 반영한 것입니다.

1619

['혜성에 관한 논설' 발간]

혜성에 대한 해석을 두고 예수회와 논쟁하는 과정에서 제자 마리오 귀두치가 갈릴레오의 강의를 정리한 '혜성에 관한 논설'을 발간했습니다.

1619년, 갈릴레오가 혜성 해석을 두고 예수회와 논쟁을 벌이자, 그의 제자 마리오 귀두치(Mario Guiducci)가 갈릴레오의 강의 내용을 바탕으로 '혜성에 관한 논설'(Discourse on the Comets)이라는 책을 발간했습니다.

1623

[우르바노 8세 교황 선출 및 '분석자' 출판]

그와 친분이 두터웠던 마페오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교황 우르바노 8세로 선출되었습니다. 같은 해,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을 비판하고 과학적 사고의 수학적 체계를 발전시킨 '분석자'(The Assayer)를 출판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623년, 갈릴레오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던 마페오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새로운 교황 우르바노 8세로 선출되었습니다. 같은 해, 갈릴레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에 기반한 이론들을 비판하고 실험 방법과 과학적 사고의 수학적 체계를 발전시킨 '분석자'(Il Saggiatore)를 출판했습니다. 이 책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가톨릭교회 계층의 지지까지 받았습니다.

1624

[로마 재방문 및 교황 환대]

로마를 다시 방문하여 교황 우르바노 8세의 환대를 받으며, 자신의 지동설 이론을 '추론 수준'에서라면 발표해도 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1624년, 갈릴레오는 다시 로마를 방문하여 교황 우르바노 8세로부터 환대를 받았습니다. 교황과의 변함없는 우정을 확인한 그는 자신의 지동설 이론을 추론 수준에서 발표하는 것은 허용될 것이라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1630

['두 가지 주요 세계관에 관한 대화' 출판 허가 요청]

'두 가지 주요 세계관에 관한 대화'의 출판 허가를 받기 위해 로마를 방문했습니다.

갈릴레오는 1630년,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옹호하는 내용을 담은 '두 가지 주요 세계관에 관한 대화'(Dialogo sopra i due massimi sistemi del mondo)의 출판 허가를 받기 위해 로마를 방문했습니다. 이 책은 이후 그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1632

['두 가지 주요 세계관에 관한 대화' 발간 및 배포 금지]

'두 가지 주요 세계관에 관한 대화'가 피렌체에서 발간되었으나, 갈릴레오 반대 세력의 격렬한 항의와 교황 우르바노 8세의 배신감으로 인해 곧바로 배포가 금지되었습니다.

1632년, 갈릴레오의 '두 가지 주요 세계관에 관한 대화'(Dialogue Concerning Two Chief World System)가 피렌체에서 인쇄, 발간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코페르니쿠스 이론에 우호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고, 교황 우르바노 8세가 이를 자신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하면서 갈릴레오 반대 세력의 격렬한 항의를 받았습니다. 결국 교황청은 이 책의 배포를 금지시켰습니다.

[로마 종교재판소 소환 명령]

'두 가지 주요 세계관에 관한 대화' 문제로 로마의 종교재판소에 출두할 것을 명령받았습니다.

1632년 10월, 갈릴레오는 '두 가지 주요 세계관에 관한 대화'의 내용으로 인해 로마의 종교재판소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는 그의 지동설 주장에 대한 교황청의 강력한 제재 조치였습니다.

1633

[종교 재판 유죄 판결 및 가택 연금]

로마 종교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지동설 주장을 철회하도록 강요받았으며, 종신 징역형을 감형받아 가택 연금에 처해지고 그의 모든 저서가 금서 목록에 올랐습니다.

1633년, 갈릴레오는 종교재판소에서 궐석재판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맹세코 포기하며, 저주하고 혐오한다'고 선언하도록 강요받았으며, 건강상의 이유와 고령임을 감안하여 종신 징역형이 가택 연금으로 감형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그의 모든 저서는 금서 목록에 오르는 처분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은 과학과 종교의 대립을 상징하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634

[가택 연금 시작 및 큰딸 사망]

피렌체 근교 아르체트리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 머무르며 가택 연금 생활을 시작했으며, 큰딸 마리아 첼레스테(비르지니아)가 사망했습니다.

1634년부터 갈릴레오는 피렌체 근교 아르체트리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서 가택 연금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같은 해 4월 2일, 수녀원에 있던 그의 큰딸 비르지니아(마리아 첼레스테 수녀)가 사망하여 갈릴레오와 함께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대성당에 묻혔습니다.

1636

['크리스티나 공작부인에게 보내는 편지' 발표]

1615년에 준비했던 '크리스티나 공작부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마침내 발표되었습니다.

갈릴레오가 1615년에 원고를 준비했던 '크리스티나 공작부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1636년에 발표되었습니다. 이 편지는 코페르니쿠스주의를 물리적인 사실이며 성서와 일치한다고 옹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1638

[실명 및 '두 가지 새로운 과학에 관한 논술' 출판]

가택 연금 중 완전히 실명했으며, 네덜란드에서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두 가지 새로운 과학에 관한 논술'(Discourses and Mathematical Demonstrations Relating to Two New Sciences)을 완성하고 출판했습니다.

1638년, 갈릴레오는 가택 연금 생활 중 완전히 실명하게 되었으나, 집필 활동을 계속하여 네덜란드에서 '두 가지 새로운 과학에 관한 논술'(Discourses and Mathematical Demonstrations Relating to Two New Sciences)을 완성하고 출판했습니다. 이 책은 그의 역학 연구를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1642

[갈릴레오 갈릴레이 사망]

가택 연금 상태에서 발열과 심계항진을 겪다가 피렌체 근교 아르체트리 별장에서 77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642년 1월 8일, 피렌체 근교 아르체트리 별장에서 가택 연금 상태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말년에는 실명과 건강 악화로 고통받았지만, 죽을 때까지 손님을 접대하며 학문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습니다.

1965

[갈릴레오 재판 재평가 시작]

로마 교황 바오로 6세가 갈릴레오 재판에 대해 언급하며 재평가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1965년, 로마 교황 바오로 6세가 갈릴레오 재판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가톨릭 교회가 과거의 과오를 인정하는 첫걸음이었습니다.

1992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갈릴레이 재판 오류 공식 인정 및 사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갈릴레이 재판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죄했습니다. 이는 갈릴레이 사망 350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1992년,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종교 재판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죄했습니다. 이는 갈릴레이가 사망한 지 350년 만에 이루어진 역사적인 화해 조치로, 과학과 종교의 오랜 대립에 종지부를 찍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2003

[우르바노 8세의 박해 부정 주장]

로마 교황청 교리성성의 안젤로 아마토 대주교가 우르바노 8세가 갈릴레이를 박해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2003년 9월, 로마 교황청 교리성성의 안젤로 아마토 대주교는 우르바노 8세가 갈릴레오를 박해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갈릴레이 재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습니다.

비교 연혁 검색
search
키워드 중복 확인
close
댓글 게시판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