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플랑크
연표
1858
[양자론의 아버지, 막스 플랑크 탄생]
막스 카를 에른스트 루트비히 플랑크, 독일 홀슈타인 공국 킬에서 태어나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지식인 계층으로, 조부와 부친 모두 대학교수였다.
세례명은 '카를 에른스트 루트비히 마르크스'였으나, 10세부터 평생 '막스'라는 이름으로 서명하며 사용했다.
1864
[어린 시절의 전쟁 경험]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 중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군대가 킬로 행진하는 모습을 목격하며 전쟁에 대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갖게 된다.
1867
[뮌헨 이사 및 학문적 관심 형성]
가족과 함께 뮌헨으로 이사하여 막시밀리안 김나지움에 입학한다.
이곳에서 수학자 헤르만 뮐러에게 수학, 천문학, 역학을 배우며 에너지 보존 원리를 처음 접하게 된다.
1874
[물리학의 길을 걷다]
뮌헨 대학교에 입학하여 물리학 연구를 시작한다.
당시 교수였던 필립 폰 욜리는 물리학 분야에 더 이상 발견할 것이 없다고 조언했으나, 플랑크는 기존 지식의 근본을 이해하겠다는 목표로 연구에 몰두한다.
1877
[베를린 유학 및 열역학과의 만남]
베를린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에서 헤르만 폰 헬름홀츠, 구스타프 키르히호프 등 저명한 물리학자들과 함께 1년간 수학한다.
이 시기 클라우지우스의 저작을 독학하며 열역학을 자신의 주요 연구 분야로 삼게 된다.
1879
[열역학 연구로 박사 학위 취득]
박사 학위 논문 '열역학 제2법칙에 관하여(Über den zweiten Hauptsatz der mechanischen Wärmetheorie)'를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이 논문은 그의 열역학 연구의 중요한 시작점이었다.
1880
[교수 자격 획득]
'서로 다른 온도에서 등방성 물체의 평형 상태'라는 논문으로 하빌리타치온(교수 자격)을 획득하며 독일 대학에서 강의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다.
1885
[킬 대학교 부교수 임명]
킬 대학교의 이론 물리학 부교수로 임명되어 학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한다.
이 시기 엔트로피와 그 응용에 대한 심층 연구를 수행하며 열역학 분야에서의 입지를 다진다.
1887
[마리 머르크와의 결혼]
학교 친구의 여동생인 마리 머르크(1861-1909)와 결혼하여 킬에 신혼집을 꾸린다.
그들은 슬하에 카를, 엠마, 그레테, 에르빈 등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1889
[베를린 대학교 교수 임명]
베를린 프리드리히-빌헬름스-대학교의 키르히호프 교수직을 승계하여 물리학 교수로 임명된다.
이는 그의 학문적 경력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1894
[흑체 복사 문제에 몰두]
흑체 복사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당시 기존 이론들은 실험 결과와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는 한계를 보였고, 이는 플랑크의 혁명적인 발견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된다.
1897
[대표 저서 '열역학' 출판]
그의 주요 저작 중 하나인 '열역학에 관한 논문'을 출판한다.
이 책은 열역학 분야에서의 그의 깊은 이해와 기여를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1898
[독일 물리학회(DPG) 통합 주도]
독일의 다양한 지역 물리 학회들을 통합하여 '독일 물리학회(DPG)'를 형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그는 1905년부터 1909년까지 DPG의 회장을 역임하며 독일 물리학계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한다.
1900
[혁명적 '흑체 복사 법칙' 발표]
독일 물리학회 회의에서 '플랑크 흑체 복사 법칙'의 첫 버전을 발표한다.
이는 실험적으로 관찰된 흑체 스펙트럼을 설명하는 데 성공했으나, 아직 에너지 양자화 개념이 명확히 포함되지는 않았다.
[양자 물리학의 탄생, 플랑크 가설 발표 (세계 최고)]
독일 물리학회에 '플랑크 가설'을 공식 제출한다.
이 가설은 전자기 에너지가 'E = hν'와 같은 불연속적인 '양자' 형태로만 방출될 수 있다는 개념을 포함하며, 이는 세계 최초로 양자 물리학의 서막을 알리는 가장 위대한 지적 성취로 평가된다.
플랑크 상수가 이 때 도입되었으며, 이 발견으로 그는 플랑크 길이, 플랑크 질량과 같은 새로운 보편적인 물리적 단위 집합을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1901
[플랑크 흑체 복사 법칙 공식 출판]
자신의 혁명적인 '플랑크 흑체 복사 법칙'을 공식 출판한다.
이로써 빛과 물질의 상호작용에 대한 고전 물리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현대 물리학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1905
[아인슈타인 상대성 이론의 조력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획기적인 '특수 상대성이론' 논문들이 발표되자, 그 중요성을 즉시 인식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통해 독일 과학계에 이 이론이 널리 받아들여지도록 크게 기여한다.
1909
[컬럼비아 대학교 초빙 강사 활동]
베를린 대학교 교수 재직 중, 뉴욕시 컬럼비아 대학교의 어니스트 켐프턴 아담스 강사로 초빙되어 이론물리학 강의 시리즈를 진행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드높인다.
[첫 번째 부인 마리 플랑크 사망]
첫 번째 부인 마리 플랑크가 사망한다.
행복했던 결혼 생활에 찾아온 비극이었지만, 그는 꿋꿋하게 자녀들을 돌본다.
1911
[제1차 솔베이 회의 조직]
물리학계의 점증하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발터 네른스트와 함께 제1차 솔베이 회의를 조직한다.
이 회의에서 아인슈타인은 플랑크를 양자론의 중요한 개념에 대해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마르가 폰 회슬린과 재혼]
두 번째 부인 마르가 폰 회슬린(1882–1948)과 재혼한다.
같은 해 12월, 다섯 번째 자녀인 헤르만이 태어나 가족에게 새로운 행복을 가져다준다.
1914
[아인슈타인을 베를린으로 초빙]
베를린 대학교 학장으로서 아인슈타인을 베를린으로 초빙하여 새로운 교수직을 개설한다.
두 위대한 과학자는 이때부터 더욱 가까운 친구가 되어 학문적 교류뿐 아니라 함께 음악을 연주하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및 '93인의 성명서' 서명]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대중적인 애국적 흥분에 동조하며 논쟁적인 전쟁 선전 소책자인 '93인의 성명서'에 서명한다.
1916
[장남 카를, 베르됭 전투에서 전사]
제1차 세계대전 중 장남 카를이 베르됭 전투에서 전사하는 비극을 겪는다.
둘째 아들 에르빈은 프랑스군에게 포로로 잡혀갔다.
1917
[딸 그레테의 사망]
딸 그레테가 첫 아이를 낳다가 사망하는 또 다른 개인적인 비극을 맞는다.
그의 가족은 전쟁과 질병으로 큰 고통을 겪는다.
1918
[에너지 양자 발견으로 노벨 물리학상 수상 (세계 최고)]
에너지 양자의 발견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다.
이는 그의 세계 최초 양자 이론 창시자로서의 업적을 전 세계적으로 공인받은 순간으로, 현대 물리학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이다.
실제 수상은 1919년에 이루어졌다. 노벨상 위원회는 그의 양자론이 원자 및 아원자 과정에 대한 인간의 이해에 혁명을 일으켰다고 평가했다.
1920
[독일 과학 비상기구 설립 주도]
전후 혼란 속에서 과학 연구를 위한 재정 지원을 위해 프리츠 하버와 함께 '독일 과학 비상기구(Notgemeinschaft der Deutschen Wissenschaft)'를 설립한다.
이 기구는 해외에서도 상당한 자금을 모아 독일 과학계에 큰 도움을 주었다.
1926
[주요 학술원 외국인 회원 선출]
미국 국립 과학원 및 네덜란드 왕립 예술 과학 아카데미의 외국인 회원으로 선출되며, 그의 국제적인 학문적 명성을 다시 한번 인정받는다.
[베를린 대학교 교수직 은퇴]
베를린 대학교 교수직에서 공식적으로 은퇴한다.
그의 후임으로는 에르빈 슈뢰딩거가 임명되었다.
플랑크는 은퇴 후에도 독일 물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서 활발히 활동한다.
1928
[최고 영예의 '막스 플랑크 메달' 설립 (세계 최고)]
독일 물리학회(DPG)는 그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최고 영예의 상인 '막스 플랑크 메달'을 설립한다.
이 메달은 이후 많은 저명한 물리학자들에게 수여되었다.
1929
[코플리 메달 및 막스 플랑크 메달 수상]
영국 왕립학회의 '코플리 메달'과 독일 물리학회의 '막스 플랑크 메달'을 동시에 수상하며 그의 학문적 업적을 다시 한번 인정받는다.
1933
[나치 집권과 과학자 박해 목격]
나치 정권이 집권하자 74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많은 유대인 친구와 동료들이 직위에서 추방당하는 현실을 목격하며 깊은 우려를 표한다.
그는 과학자들에게 독일에 남아달라고 요청한다.
[히틀러와의 직접 대면 (유대인 과학자 문제)]
아돌프 히틀러를 직접 만나 유대인 과학자 강제 이민 문제가 독일 과학을 죽일 것이라고 경고하며 유대인에 대한 탄압 중단을 호소했으나, 히틀러는 유대인을 모두 공산주의자로 규정하며 그의 요청을 거부한다.
1934
[프리츠 하버 사망과 간접 저항]
히틀러와의 면담에서 언급했던 유대인 과학자 프리츠 하버가 망명 중 사망한다.
플랑크는 하버를 기리는 공식 기념 회의를 조직하며 간접적으로 나치 정권에 대한 저항을 보인다.
1936
[카이저 빌헬름 협회 회장 사임]
카이저 빌헬름 협회(KWG) 회장 임기가 만료되자 나치 정부의 압력으로 연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비밀리에 많은 유대인 과학자들이 KWG 연구소에서 계속 일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성공한다.
1938
[80세 생일과 프로이센 아카데미 회장직 사임]
80세 생일을 맞이하여 물리학회(DPG)의 축하 행사에 참여한다.
연말에는 프로이센 아카데미가 나치에 의해 장악되자 항의의 의미로 회장직을 사임하며 독립성을 지키려 노력한다.
1944
[자택 파괴와 기록 소실]
베를린에 있던 그의 자택이 연합군의 공습으로 완전히 파괴되어 평생의 과학 기록과 서신이 모두 소실되는 큰 피해를 입는다.
[아들 에르빈, 히틀러 암살 음모로 체포]
아들 에르빈 플랑크가 히틀러 암살 시도('7·20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게슈타포에 체포된다.
이는 노년의 플랑크에게 엄청난 고통으로 다가온다.
1945
[아들 에르빈, 나치에 의해 처형 (가장 큰 비극)]
아들 에르빈이 히틀러 암살 시도 가담 혐의로 베를린 플뢰첸제 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한다.
사랑하는 아들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플랑크는 삶에 대한 의지를 상당 부분 상실했다.
1947
[현대 물리학의 거장, 막스 플랑크 서거]
괴팅겐에서 89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의 무덤은 괴팅겐의 구 시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죽음은 현대 물리학의 한 시대를 마감하는 것이었다.
1948
[카이저 빌헬름 협회, '막스 플랑크 협회'로 개칭 (최대)]
플랑크가 두 번 회장을 역임했던 독일의 과학 기관 '카이저 빌헬름 협회'는 그의 공로를 기려 '막스 플랑크 협회(MPG)'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이 협회는 현재 독일의 가장 크고 권위 있는 과학 연구 기관으로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