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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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보른
연혁 피인용 수 5
물리학자, 수학자, 노벨상 수상자, 양자역학 + 카테고리

- 독일 출신 세계적인 물리학자이자 수학자.

- 양자 역학 발전에 결정적 역할 특히 파동 함수의 확률통계적 해석으로 1954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 괴팅겐 대학교를 세계적인 물리학 연구의 중심지로 만들고 수많은 저명한 과학자들을 지도.

- 나치 정권 피해 영국으로 이주 후에도 연구와 집필 활동 지속.

- 상대성 이론 결정 격자 역학 등 다양한 분야에 기여하며 현대 물리학의 거장으로 추앙받음.

주요사건만
최신순

연표

1882

[막스 보른 탄생]

독일 제국의 브레슬라우(현 폴란드 브로츠와프)에서 발생학 교수 구스타프 보른과 마르가레테 카우프만 사이에서 태어났다.

유대인 혈통이었으며, 그의 아버지는 브레슬라우 대학교 발생학 교수였다.

1886

[어머니 사망]

막스 보른이 4살 때 어머니 마르가레테 카우프만이 사망했다.

1901

[브레슬라우 대학교 입학]

쾨니히-빌헬름-김나지움에서 교육받은 후 브레슬라우 대학교에 입학하여 학업을 시작했다.

1902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수학]

독일 대학 시스템의 유연성을 활용하여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여름 학기를 보냈다.

1903

[취리히 대학교 수학]

취리히 대학교에서 여름 학기를 보냈다.

1904

[괴팅겐 대학교 입학]

오토 퇴플리츠와 에른스트 헬린저의 추천으로 괴팅겐 대학교에 입학하여 펠릭스 클라인, 다비드 힐베르트, 헤르만 민코프스키 등 저명한 수학자들을 만났다.

1905

[민코프스키와 상대성 이론 연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이론 논문에 흥미를 느껴 헤르만 민코프스키와 함께 상대성 이론 연구를 시작했다.

1906

[박사학위 논문 수상 및 인정]

'평면과 공간에서 탄성의 안정성'에 대한 논문으로 권위 있는 괴팅겐 대학교 철학 교수상(Philosophy Faculty Prize)을 수상하고, 이를 박사학위 논문으로 인정받았다.

[수학 박사학위 취득]

구두 시험에 합격하여 우등('magna cum laude')으로 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07

[캐번디시 연구소 물리학 수학]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 곤빌 키이즈 대학에 입학하고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J.J. 톰슨 등 저명한 학자들의 지도 아래 6개월간 물리학을 공부했다.

[군 복무 및 의병 전역]

학생 시절 미루었던 군 복무를 시작했으나 천식 발작으로 짧은 기간 복무 후 의병 전역했다.

1909

[보른 강성 개념 도입]

상대성의 운동학에서의 강체 전자 이론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며 '보른 강성(Born rigidity)' 개념을 처음으로 소개했다.

보른 강성은 물리학에서 강체의 특수 상대론적 변형을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고속으로 움직이는 물체의 거동을 이해하는 데 기여했다.

[멘토 헤르만 민코프스키 사망]

함께 특수 상대성 이론을 연구했던 멘토 헤르만 민코프스키가 맹장염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1913

[결정 격자 역학 등 논문 발표]

이 해 말까지 상대성 이론과 결정 격자의 역학에 관한 중요한 연구를 포함하여 총 27편의 논문을 발표하며 활발한 연구 활동을 펼쳤다.

[헤드비히 에렌베르크와 결혼]

칼 룽게 교수의 딸 이리스의 친구인 헤드비히(헤디) 에렌베르크와 결혼했다.

그의 아내 역시 유대인 혈통이었으나 결혼 당시 루터교 신자가 되었다.

1914

[첫째 딸 이레네 출생]

아내 헤드비히와의 사이에 첫째 딸 이레네가 태어났다.

(후일 손녀는 유명 가수 올리비아 뉴턴존).

[베를린 대학교 교수직 수락]

막스 플랑크의 제안으로 베를린 대학교 이론물리학 특임교수 자리를 수락했으나, 폰 라우에와의 조정으로 프랑크푸르트 대학교로 가게 된다.

[루터교 세례]

종교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내를 존중하고 독일 사회에 동화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루터교로 세례를 받았다.

1915

[제1차 세계 대전 중 군 복무]

제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베를린에 도착하자마자 육군 통신 부대에 징집되었으며, 이후 음파 사정 기술 연구 특수부대에서 복무했다.

[둘째 딸 마르가레테 출생]

아내 헤드비히와의 사이에 둘째 딸 마르가레테가 태어났다.

1918

[보른-하버 주기 이론 제안]

제1차 세계 대전 휴전 직후 프리츠 하버와의 우연한 만남에서 금속이 할로겐과 반응할 때 이온 화합물이 형성되는 방식에 대한 논의를 시작, 오늘날 '보른-하버 주기(Born–Haber cycle)'로 알려진 이론을 제안했다.

보른-하버 주기는 이온 결합 화합물의 격자 에너지를 간접적으로 계산하는 방법으로, 열역학 법칙을 기반으로 화학 결합의 안정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1919

[원자 빔 개발 조력]

이론물리학 연구소에 엘리자베스 보르만을 조교로 영입했다.

그녀는 최초의 원자 빔을 개발하고 기체 내 원자의 자유 행로와 분자 크기를 측정하는 데 기여했다.

[상대성 이론 옹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대한 수많은 반대에 대응하여 아인슈타인을 지지하는 연설을 했으며, 이 내용은 1920년에 책으로 출판되었다.

[프랑크푸르트 대학교 교수 취임]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의 막스 폰 라우에와의 직업 교환으로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요한 볼프강 괴테 대학교 이론물리학 전임교수 겸 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했다.

1921

[괴팅겐 대학교 이직 및 괴팅겐 물리학 황금기 개막]

괴팅겐 대학교의 제안을 받아 이론물리학 교수로 부임했으며, 친구 제임스 프랑크를 위한 실험물리학 교수직도 마련했다.

그의 지도 아래 괴팅겐은 세계 최고의 물리학 센터 중 하나가 되었다.

12년 동안 보른과 프랑크는 괴팅겐 대학교에서 함께하며 양자 이론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곳에서 보른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막스 델브뤼크, 파스쿠알 요르단, 마리아 괴퍼트메이어, 로버트 오펜하이머, 빅토어 바이스코프 등 수많은 미래의 노벨상 수상자 및 저명한 물리학자들을 지도하며 학문적 황금기를 이끌었다.

[아들 구스타프 출생]

아내 헤드비히와의 사이에 아들 구스타프가 태어났다.

1922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조수로 영입]

미국 위스콘신 대학교 매디슨에서 강의하던 중 아르놀트 조머펠트의 제자인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를 괴팅겐으로 불러들여 조수로 삼았다.

1925

[양자역학 행렬 역학 공식화]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양자 이론 논문을 행렬 대수학으로 전사하고 확장하여 '양자역학의 행렬 역학' 표현을 공식화했다.

이는 양자역학 발전에 세계 최초로 수학적 기초를 제공한 중대한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하이젠베르크의 논문이 7월 9일 제출된 후, 보른은 그의 조수 파스쿠알 요르단과 함께 이 이론을 행렬 대수학의 체계적인 언어로 확장하여 양자 점프의 전이 확률과 같은 매개변수를 사용하여 관찰할 수 없는 전자 궤도 표현을 피하는 혁신적인 방법을 제시했다. 이 논문은 하이젠베르크의 논문 발표 60일 만에 출판되었으며, 이들 세 명의 저자는 연내 후속 논문을 제출하여 다음의 놀라운 공식을 발표했다: pq-qp = h / 2πi I

1926

[파동 함수 통계적 해석 제시]

슈뢰딩거 방정식의 파동 함수(ψ*ψ)에 대한 현재 표준 해석인 확률 밀도 함수를 공식화했다.

이는 양자역학의 확률적 본질을 명확히 한 세계 최초의 업적으로, 훗날 1954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의 핵심적인 이유가 된다.

보른은 파동 함수의 제곱이 입자를 특정 위치에서 발견할 확률 밀도를 나타낸다고 해석함으로써, 양자역학이 본질적으로 확률적인 현상을 다룬다는 점을 확립했다. 이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표현하며 반대했던 결정론적 물리학과의 결별을 의미했다.

1933

[영국 망명 및 연구 활동]

나치 정권의 박해를 피해 영국 케임브리지 세인트 존스 칼리지로 이주하여 연구 활동을 계속했으며, 대중 과학서 《쉬임없는 우주》와 교과서 《원자 물리학》을 저술했다.

[나치 정권으로 인한 교수직 정직]

독일에서 나치당이 집권하면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괴팅겐 대학교 교수직에서 무급 정직 처분을 받았다.

이로 인해 괴팅겐의 황금기는 막을 내렸다.

1935

[괴팅겐 대학교 교수직 종료]

괴팅겐 대학교에서의 임시직 임기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독일 시민권 박탈]

나치 정권에 의해 가족 모두 독일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무국적자가 되었다.

괴팅겐은 그의 박사학위마저 취소했다.

1936

[에든버러 대학교 교수 취임]

찰스 갈톤 다윈의 제안으로 에든버러 대학교의 테이트 자연 철학 교수로 취임하여 물리학 연구를 계속했다.

1937

[에든버러 왕립학회 석학회원 선출]

에든버러 왕립학회(Royal Society of Edinburgh)의 석학회원(Fellow)으로 선출되었다.

1939

[런던 왕립학회 석학회원 선출]

영국 런던 왕립학회(Royal Society)의 석학회원(Fellow)이 되었다.

[영국 시민으로 귀화]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하루 전, 무국적자였던 그는 귀화 증명서를 받아 영국 시민이 되었다.

1948

[막스 플랑크 메달 수상]

독일 물리학회(der Deutschen Physikalischen Gesellschaft)로부터 막스 플랑크 메달을 수상했다.

1950

[휴즈 메달 수상]

런던 왕립학회로부터 휴즈 메달(Hughes Medal)을 수상했다.

1952

[에든버러 대학교 정년 은퇴]

70세의 정년이 되어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은퇴하고 서독의 바트피르몬트로 돌아왔다.

1953

[괴팅겐 명예시민]

과거 나치 정권으로 인해 박해받았던 괴팅겐 시의 명예시민이 되었다.

1954

[노벨 물리학상 수상]

'양자역학의 기초 연구, 특히 파동 함수의 통계적 해석에 관한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 수상 소식을 접했다.

수십 년간 끊임없이 추천된 끝에 마침내 그 업적을 인정받았다.

그는 노벨 강연에서 '절대적 확실성, 절대적 정확성, 최종적 진리 등과 같은 아이디어는 어떤 과학 분야에서도 용납되어서는 안 되는 상상의 산물'이라고 언급하며 과학적 사고의 유연성을 강조했다.

[노벨상 수상 강연]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양자역학의 통계적 해석'에 대한 강연을 진행했다.

1955

[러셀-아인슈타인 선언 서명]

전쟁의 위험과 핵무기 확산에 반대하는 러셀-아인슈타인 선언문에 서명하며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을 다했다.

1959

[독일 연방 공로훈장 수훈]

독일 연방 공로훈장 대십자장(Order of Merit of the Federal Republic of Germany)을 수훈했다.

1970

[막스 보른 별세]

서독 괴팅겐의 한 병원에서 87세의 나이로 영면에 들었다.

괴팅겐 슈타트프리드호프에 월터 네른스트, 오토 한, 막스 플랑크 등 다른 위대한 과학자들과 함께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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