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Korea) 국호의 역사
국호, 역사, 외교
최근 수정 시각 : 2025-11-15- 03:17:29
국호 '고려(高麗)'는 고구려의 제국적 정체성에서 발현된 이름으로, 1천 년 이상 한민족의 정통성을 상징해왔습니다.
고씨 고려 멸망 후에도 대씨와 왕씨가 '고려'라는 이름을 계승함으로써 고구려의 상속자임을 천명했습니다.
이 왕씨 고려가 13세기 'Cauli', 16세기 'Corea' 로 세계에 알려져 현재 'Korea'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가우리, 고구려, 고려라 불리우던 국호는 현재 K-POP, K-Beauty, K-Drama 등의 이름으로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BC 1C
[추모왕의 '고구려' 건국]
부여(扶餘)에서 남하한 추모왕(주몽)이 기원전 37년경 고구려(高句麗)를 건국했습니다.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으로 통합했던 시기에, 오랜 전통의 강국 부여와의 갈등까지 겪으며 군사적 긴장감이 넘치는 도전적인 건국이었습니다.
고구려라는 이름의 차용은 추모왕이 천제(天帝)의 자손임을 강조하여 신성한 권위를 부여하고, 기존의 지역 패권국이었던 부여로부터의 분리 및 대체를 정당화합니다.
주몽의 건국은 한(漢)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여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에 이루어졌습니다. 주몽 집단은 이러한 기존 세력(부여, 한사군)과의 긴장 및 경쟁 관계 속에서 국가를 세워야 했습니다. 따라서 건국 신화 는 '하늘의 자손'이라는 신성성(神聖性)과 '부여를 극복한다'는 정복의 정당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3대에 걸친 서사 는 국가가 단순한 성립(주몽)을 넘어, 내부적 안정(유리왕)과 외부적 팽창(대무신왕 '무휼'의 부여 정복)을 통해 완성됨을 상징합니다.
'고구려'라는 국호는 주몽의 신성한 혈통과 결부되어, 단순한 지역명이나 부족명을 넘어선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이후 고구려가 수백 년간 동아시아의 패권 국가로 성장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12
[고구려(국, 國) 의 고구려(현, 縣) 침공]
추모왕(주몽)이 '고구려(국가)'를 건국하기 이전부터 '고구려'라는 명칭은 존재했습니다.
중국의 정사인 '한서' 지리지에 따르면, 한나라는 기원전 107년경 현도군(玄菟郡)을 설치하며 그 아래에 3개의 현(縣)을 두었는데, 그중 첫 번째 현의 이름이 '고구려현(高句驪縣)'이었습니다. 이는 '고구려'가 본래 특정 지역과 그곳의 주민 집단을 지칭하는 고유 명사였음을 시사합니다.
결정적으로, '삼국사기' 유리명왕 33년(서기 12년) 조에는 주몽의 '고구려(국가)'가 "한(漢)나라의 고구려현을 공격하여 차지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주몽의 국가와 한의 행정구역이 명백히 다른 실체로서 일정 기간 공존했음을 증명합니다.
이 기록은 고구려 초기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일부 중국 사서(예: Houhanshu(후한서))는 '한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현으로 삼아 현도에 속하게 했다'고 기록하여, 마치 고구려가 한사군의 일부에서 시작된 것처럼 서술합니다. 그러나 Samguk Sagi의 기록은 이를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즉, '고구려(국가)'가 '고구려현(한의 행정구역)'을 공격하여 복속시킨 것입니다.
이는 고구려가 한의 지방정권이 아닌, 독자적인 주권 국가로서 오히려 한의 세력을 축출하며 성장했음을 보여줍니다. '고구려'라는 이름은 이미 존재하던 지역명이었고, 주몽 집단은 이 이름을 채택하여 자신들의 국가명으로 삼았으며, 나아가 같은 이름을 쓰던 한의 행정구역까지 병합한 것입니다.
'고구려 국가'와 '고구려현'의 구분은 고구려가 건국 초기부터 한의 군현 체제와는 독립적인 주권 국가였음을 입증하는 핵심적인 근거가 됩니다. '고구려'라는 명칭의 연원은 국가 성립 이전으로 소급됩니다.
397
[광개토대왕 '고려(高麗)'국호 공식 사용]
오랫동안 학계는 5세기 장수왕(재위 413~491) 대에 '고구려(高句麗)'가 공식적으로 '고려(高麗)'라는 국호로 변경되었다고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충주 고구려비(중원 고구려비)에 대한 2019년 3D 스캐닝 및 RTI 촬영 등 최첨단 기법을 동원한 재판독 연구 결과, 비석의 첫머리 제액(題額)에서 'Yongle 7년(永樂七年)'이라는 연호가 판독되었습니다.
'영락(永樂)'은 광개토대왕의 연호이며, 영락 7년은 서기 397년에 해당합니다. 이 비석이 '고려태왕(高麗太王)'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어, '고려'라는 국호의 공식 사용 시점이 장수왕이 아닌 광개토대왕 대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충주 고구려비의 397년 건립설 이 학계의 정설로 확고히 자리 잡는다면, 이는 고대사 연구의 판도를 바꾸는 발견입니다. 광개토대왕은 '태왕(太王)'(황제급 군주) 칭호, '영락'이라는 독자 연호를 사용하며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天下觀)을 선포했습니다.
만약 이때 '고구려'가 아닌 '고려'라는 국호를 공식화한 데 이어 별도의 연호까지 사용했다면 중국과 대등한 제국으로서의 정체성을 한층 더 강화하려는 의도였을 수 있습니다. 즉, '고려'라는 국호의 사용은 광개토대왕의 고려 제국화 프로젝트와 맞물려 있었던 것입니다.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이 국호를 변경했다는 가설은 현재까지의 통설이지만, 397년설 이 대두되면서 '고려'라는 국호의 사용 시점은 고구려의 최전성기인 광개토대왕 시기까지 소급될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이는 '고려'라는 이름이 가진 제국적 함의를 더욱 부각시킵니다. 물론, 학계에서는 이 판독 결과에 대해 '7년'이라는 글자는 인정하지만, 전체적인 연대 해석에는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는 입장도 공존합니다.
698
[대씨 고려(발해)의 '고려 국왕' 칭호 사용]
고구려 멸망(668년) 이후, 고구려 장군 대조영이 새로이 건립한 왕조는 멸망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스스로를 '고려'라 칭하며 고구려의 정통 계승자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당시 동아시아의 패권국이었던 당(唐)나라는 발해가 고구려의 영토와 역사를 계승하는 것을 견제했습니다.
대조영이 이끄는 고려 유민 세력을 무력으로 와해하는 데 실패한 측천무후는 '고려' 대신 '발해군(渤海郡, 대씨고려 접경 당나라 관할 군)'이라는 지명으로 부르는 등 다른 별칭으로 표기하며 고려가 멸망하였음을 내외로 공표하며, 구 고씨 고려와의 연결고리를 의도적으로 축소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발해는 이러한 당의 외교적 압력과 무관하게, 특히 일본(日本)에 보낸 외교 문서(國書)에서는 일관되게 스스로를 '고려 국왕(高麗國王)', '고려국'이라 칭했습니다.
당나라가 발해와 고구려의 연관성을 애써 무시하고 고구려의 흔적을 지우려 했던 것은, 역설적으로 당시 '고려'라는 이름이 가진 정치적 무게감(고구려 영토에 대한 소유권 주장)이 얼마나 막대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발해가 '대씨 고려(大氏 高麗)'로서 '고려'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었기 때문에, 훗날 멸망했을 때 그 유민들을 흡수한 왕건의 '왕씨 고려'가 진정한 통일 국가로 인정받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918
[왕씨고려 건국, 두 개의 고려]
918년, 왕건은 궁예의 태봉(泰封)을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열면서 국호를 '고려(高麗)'로 정했습니다.
이는 "동명성왕(추모왕)이 세운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명백한 정치적 선언이었으며, 동시에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평양을 '서경(西京)'으로 승격시키는 등 강력한 고씨 고려 계승 의지를 표명했습니다.
당시, 북방에는 대조영의 후예들이 이끄는 대씨 고려(발해(渤海))가 역시 스스로를 '고려국'이라 칭하며 존속하고 있었기에 '두 개의 고려'가 약 8년 간 일시적으로 공존했습니다.
왕건의 '고려' 건국은 후삼국(신라, 후백제)의 경쟁자들을 압도하는 독보적인 정통성을 선점하는 행위였습니다. 신라나 후백제와 달리 '고구려 계승'을 내세움으로써 , 한반도 중부와 북부 고토(故土)에 대한 역사적 연고권을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왕건은 즉위 직후부터 "평양 옛 서울이 황폐해졌다"며 서경(西京) 개척을 강력히 추진하는 등 , 고구려 계승을 단순한 국호가 아닌 국가 핵심 정책으로 삼았습니다.
이처럼 왕건의 '고려' 건국은 북방의 '대씨 고려(발해)'와 정통성을 다투는 경쟁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는 '누가 진정한 고구려의 후계자인가'라는 역사적 질문을 던졌으며, 이 질문은 8년 뒤 발해의 멸망과 그 유민들의 행보에 따라 극적으로 귀결됩니다.
934
[대씨고려 마지막 왕자 대광현, 왕건에게 귀순]
926년, 북방의 '대씨 고려'(발해)가 거란(契丹)의 침공으로 허무하게 멸망했습니다.
왕건은 대씨 고려 유민들을 '형제의 나라' 백성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으로 포용하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 흐름의 정점이 바로 934년(태조 17년), 발해의 마지막 세자(太子) 대광현(大光顯)이 수만 명의 무리를 이끌고 왕건의 '고려'로 귀순한 사건입니다.
왕건이 이들을 극진히 대우하며 대광현에게 '왕계(王繼)'라는 이름과 왕실 족보(宗籍)를 하사함으로써 비로소 고려 계승의 두 흐름(대씨 고려, 왕씨 고려)이 하나로 합쳐졌습니다.
대광현의 귀순은 단순한 망명이 아닌, '대씨 고려'의 정통성이 '왕씨 고려'로 공식적으로 이양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왕건은 대광현에게 왕족의 지위와 토지를 부여하고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했습니다.
이로써 왕건은 신라나 후백제가 감히 넘볼 수 없는 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유일무이한 정통 계승자가 되었습니다.
왕건이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짐승(禽獸)의 나라'라 칭하며 극단적으로 적대하고, 거란 사신이 보낸 낙타를 만부교(萬夫橋)에서 굶겨 죽인 사건 은 이러한 정통성에서 비롯된 외교적 선언이었습니다. '두 개의 고려'는 '하나의 고려'로 통합되었습니다.
이는 935년 신라의 평화적 병합과 936년 후백제 멸망 으로 이어지는 후삼국 통일의 결정적인 이데올로기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1400
['Corea' 서방 기록의 등장]
'고려'라는 이름이 유럽에 전파된 경로는 크게 두 갈래입니다.
첫째는 13세기 몽골 제국을 통한 육상 경로로, 원(元)나라에 체류했던 마르코 폴로(Marco Polo)가 1295년 귀국 후 쓴 Dongfang Jianwenlu(동방견문록)에 원나라에 복속된 지역 중 하나로 'Cauli'를 언급합니다. 이는 중국인들이 '고려(高麗)'를 '가우리' 또는 '가오리'에 가깝게 발음하는 것을 듣고 표음한 것으로 분석됩니다.
둘째는 16세기 초 대항해시대를 통한 해상 경로입니다. 1510년경 포르투갈인들은 동남아시아 말라카(Malacca)에서 무역 활동을 하는 'Gores'(고려 사람들)를 기록했으며, 이후 'Gori'(1514년), 'Coree'(1549년) 등의 표기가 등장합니다.
11~12세기 고려의 벽란도(碧瀾渡)는 송나라, 아라비아 상인들이 드나들던 국제 무역항으로 '고려'라는 이름을 아시아권에 널리 알린 1차 확산지였습니다. 이후 유럽인들이 이 이름을 '발견'한 것은 13세기(육로)와 16세기(해로)였습니다. 'Gores', 'Gori', 'Coree' 등은 모두 '고려' 또는 '고리'의 발음을 각자의 언어로 표기하려 한 시도였습니다. 1571년, 포르투갈인 두라도(F. Dourado)의 해도에 처음으로 'Core'라는 표기가 등장하며, 같은 해 예수회 빌렐라(G. Vilela) 신부가 "China와 Japan 사이에 있는 'Corea'라고 불리는 왕국"이라고 기록합니다.
이는 'Core'라는 어근에 나라를 뜻하는 라틴계 여성형 접미사 '-a'가 결합하여 'Corea'로 정착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다양한 표기는 16세기 후반 'Corea'로 수렴 및 통일되었고, 이 이름이 이후 약 300년간 서양 세계에서 한반도를 지칭하는 표준 명칭이 되었습니다.
1890
['Corea'에서 'Korea'로의 철자 변천]
'Corea'는 16세기 말부터 19세기 말까지 표준적인 표기였습니다.
조선이 서양과 맺은 최초의 공식 조약인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의 공식 영어 명칭은 'Corea'였습니다. 1883년 영국과의 조약(조영수호통상조약) 역시 'Corea'를 사용했습니다. 'Korea'라는 표기는 1671년 하멜 표류기의 독일어 번역판 이나 18세기 러시아 지도 등에서 간헐적으로 등장했지만 주류는 아니었습니다.
'K' 표기가 확산된 것은 19세기 말부터입니다. 일각에서는 일제강점기 일본이 'Corea'를 'Japan'보다 알파벳 순서에서 뒤로 보내기 위해 'Korea'로 고의로 바꾸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 이는 여러 복합적인 요인 중 하나일 뿐입니다.
'C'에서 'K'로의 변화는 일본의 의도라기보다는, 영어권의 언어적 편의성이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분석됩니다. 영어에서 'C'는 's'(시옷) 발음(예: City)과 'k'(키읔) 발음(예: Cat)으로 혼용되어 혼동을 줄 수 있었습니다. 반면 'K'는 'ㅋ' 발음을 명확하게 표기할 수 있었기에, 미국무부와 영국 왕립지리학회 등 영어권에서 'Korea' 표기를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이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나 1910년 한일병합 선언문에서 'Korea'를 사용한 것 은 이러한 영어권의 추세를 따른 것이거나 확산에 기여한 것일 수 있으나, 그들이 '발명'한 것은 아닙니다.
조선 정부의 공식 표기 'Corea'는 점차 영어권의 'Korea' 표기에 밀려났습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영향력이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면서 , 미국식 영어 표기인 'Korea'가 국제 표준으로 완전히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1937
['고려인(카레이스키)'의 정체성과 강제이주]
러시아와 구소련 중앙아시아(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에 거주하는 한민족 디아스포라를 '고려인(高麗人, Koryo-saram)' 또는 러시아어로 '카레이스키(Корейцы)'라고 부릅니다.
이 명칭은 그들의 고유한 민족적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이 '고려인'이라는 정체성은 19세기 중후반 농업 이민으로 연해주(沿海州)에 정착했던 한인들에게서 기원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운명은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Deportation) 정책 으로 인해 비극적으로 바뀌었습니다.
1937년, 스탈린은 연해주의 고려인들이 일본의 첩자가 될 수 있다는 의심 하에, 약 17만 명에 달하는 고려인 전체를 하루아침에 화물 열차에 태워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중앙아시아의 황무지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이주 과정과 초기 정착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들은 척박한 환경에서 집단농장(콜호스)을 이루며 생존해야 했습니다. 이처럼 '고려인'이라는 이름은 고대의 영광스러운 '고려'에서 유래했지만, 20세기 제국주의와 전체주의의 가장 큰 희생양이 되었던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비극적이고 강인한 정체성을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1948
[남북한의 공통 영문 국호 'Korea']
1948년 한반도 분단 이후, 남과 북은 각기 다른 정통성을 내세우며 별개의 국호를 채택했습니다.
남한은 '대한민국(大韓民國, Republic of Korea)'을 국호로 하여 삼한(三韓)과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정통성을 계승했습니다.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 DPRK)'을 국호로 하여 고조선(古朝鮮)과 이씨조선(李氏朝鮮)의 계승을 표방했습니다.
그러나 두 국가는 대외적인 공식 영문 국호로는 '고려(高麗)'에서 유래한 'Korea'를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남한의 공식 영문 명칭은 'Republic of Korea' (ROK) 이며, 북한의 공식 영문 명칭은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DPRK) 입니다. 이는 남북한이 내부적으로는 '한(韓)'과 '조선(朝鮮)'이라는 서로 다른 역사적 정통성을 주장하면서도, 국제 사회에서는 '고려'가 서양에 알려져 굳어진 'Korea'라는 단일한 이름의 정통성을 두고 경쟁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고려'라는 이름은 고대(발해 vs 당), 중세(왕건 vs 후백제/신라)에 이어 현대(남한 vs 북한)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전체의 역사적 정통성을 상징하는 가장 강력하고 상징적인 이름으로 남아있습니다. 'Korea'는 분단된 두 국가가 공유하는 유일한 이름이자, 동시에 그 이름의 유일한 합법적 상속자임을 두고 다투는 '경합하는 유산(Contested Inheritance)'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