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1-15- 03:17:29
국호 '고려(高麗)'는 고구려의 제국적 정체성에서 발현된 이름으로, 1천 년 이상 한민족의 정통성을 상징해왔습니다.
고씨 고려 멸망 후에도 대씨와 왕씨가 '고려'라는 이름을 계승함으로써 고구려의 상속자임을 천명했습니다.
이 왕씨 고려가 13세기 'Cauli', 16세기 'Corea' 로 세계에 알려져 현재 'Korea'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가우리, 고구려, 고려라 불리우던 국호는 현재 K-POP, K-Beauty, K-Drama 등의 이름으로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3:07:59
고려 태조 왕건은 후삼국 시대를 통일하고 고려를 건국한 초대 국왕이다. 궁예 휘하에서 무공을 세우고 918년 고려를 세워 송악으로 천도하며 국가 기틀을 다졌다. 발해 유민을 흡수하고 신라와 연대하여 후백제 견훤과 맞서 싸워 대패를 극복하고 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호족 포섭 북진 정책 숭불 정책으로 민심을 수습했으며 거란의 수교 요청을 단호히 거부했다. 임종 직전 훈요 10조를 남겨 후대 왕들의 통치 지침을 제시했다.
본 문서는 위키백과 태조 (고려) 문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편집되었으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배포됩니다.
BC 1C
[추모왕의 '고구려' 건국]
부여(扶餘)에서 남하한 추모왕(주몽)이 기원전 37년경 고구려(高句麗)를 건국했습니다.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으로 통합했던 시기에, 오랜 전통의 강국 부여와의 갈등까지 겪으며 군사적 긴장감이 넘치는 도전적인 건국이었습니다.
고구려라는 이름의 차용은 추모왕이 천제(天帝)의 자손임을 강조하여 신성한 권위를 부여하고, 기존의 지역 패권국이었던 부여로부터의 분리 및 대체를 정당화합니다.
주몽의 건국은 한(漢)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여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에 이루어졌습니다. 주몽 집단은 이러한 기존 세력(부여, 한사군)과의 긴장 및 경쟁 관계 속에서 국가를 세워야 했습니다. 따라서 건국 신화 는 '하늘의 자손'이라는 신성성(神聖性)과 '부여를 극복한다'는 정복의 정당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3대에 걸친 서사 는 국가가 단순한 성립(주몽)을 넘어, 내부적 안정(유리왕)과 외부적 팽창(대무신왕 '무휼'의 부여 정복)을 통해 완성됨을 상징합니다.
'고구려'라는 국호는 주몽의 신성한 혈통과 결부되어, 단순한 지역명이나 부족명을 넘어선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이후 고구려가 수백 년간 동아시아의 패권 국가로 성장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BC 1C
12
[고구려(국, 國) 의 고구려(현, 縣) 침공]
추모왕(주몽)이 '고구려(국가)'를 건국하기 이전부터 '고구려'라는 명칭은 존재했습니다.
중국의 정사인 '한서' 지리지에 따르면, 한나라는 기원전 107년경 현도군(玄菟郡)을 설치하며 그 아래에 3개의 현(縣)을 두었는데, 그중 첫 번째 현의 이름이 '고구려현(高句驪縣)'이었습니다. 이는 '고구려'가 본래 특정 지역과 그곳의 주민 집단을 지칭하는 고유 명사였음을 시사합니다.
결정적으로, '삼국사기' 유리명왕 33년(서기 12년) 조에는 주몽의 '고구려(국가)'가 "한(漢)나라의 고구려현을 공격하여 차지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주몽의 국가와 한의 행정구역이 명백히 다른 실체로서 일정 기간 공존했음을 증명합니다.
이 기록은 고구려 초기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일부 중국 사서(예: Houhanshu(후한서))는 '한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현으로 삼아 현도에 속하게 했다'고 기록하여, 마치 고구려가 한사군의 일부에서 시작된 것처럼 서술합니다. 그러나 Samguk Sagi의 기록은 이를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즉, '고구려(국가)'가 '고구려현(한의 행정구역)'을 공격하여 복속시킨 것입니다.
이는 고구려가 한의 지방정권이 아닌, 독자적인 주권 국가로서 오히려 한의 세력을 축출하며 성장했음을 보여줍니다. '고구려'라는 이름은 이미 존재하던 지역명이었고, 주몽 집단은 이 이름을 채택하여 자신들의 국가명으로 삼았으며, 나아가 같은 이름을 쓰던 한의 행정구역까지 병합한 것입니다.
'고구려 국가'와 '고구려현'의 구분은 고구려가 건국 초기부터 한의 군현 체제와는 독립적인 주권 국가였음을 입증하는 핵심적인 근거가 됩니다. '고구려'라는 명칭의 연원은 국가 성립 이전으로 소급됩니다.
12
397
[광개토대왕 '고려(高麗)'국호 공식 사용]
오랫동안 학계는 5세기 장수왕(재위 413~491) 대에 '고구려(高句麗)'가 공식적으로 '고려(高麗)'라는 국호로 변경되었다고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충주 고구려비(중원 고구려비)에 대한 2019년 3D 스캐닝 및 RTI 촬영 등 최첨단 기법을 동원한 재판독 연구 결과, 비석의 첫머리 제액(題額)에서 'Yongle 7년(永樂七年)'이라는 연호가 판독되었습니다.
'영락(永樂)'은 광개토대왕의 연호이며, 영락 7년은 서기 397년에 해당합니다. 이 비석이 '고려태왕(高麗太王)'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어, '고려'라는 국호의 공식 사용 시점이 장수왕이 아닌 광개토대왕 대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충주 고구려비의 397년 건립설 이 학계의 정설로 확고히 자리 잡는다면, 이는 고대사 연구의 판도를 바꾸는 발견입니다. 광개토대왕은 '태왕(太王)'(황제급 군주) 칭호, '영락'이라는 독자 연호를 사용하며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天下觀)을 선포했습니다.
만약 이때 '고구려'가 아닌 '고려'라는 국호를 공식화한 데 이어 별도의 연호까지 사용했다면 중국과 대등한 제국으로서의 정체성을 한층 더 강화하려는 의도였을 수 있습니다. 즉, '고려'라는 국호의 사용은 광개토대왕의 고려 제국화 프로젝트와 맞물려 있었던 것입니다.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이 국호를 변경했다는 가설은 현재까지의 통설이지만, 397년설 이 대두되면서 '고려'라는 국호의 사용 시점은 고구려의 최전성기인 광개토대왕 시기까지 소급될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이는 '고려'라는 이름이 가진 제국적 함의를 더욱 부각시킵니다. 물론, 학계에서는 이 판독 결과에 대해 '7년'이라는 글자는 인정하지만, 전체적인 연대 해석에는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는 입장도 공존합니다.
397
698
[대씨 고려(발해)의 '고려 국왕' 칭호 사용]
고구려 멸망(668년) 이후, 고구려 장군 대조영이 새로이 건립한 왕조는 멸망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스스로를 '고려'라 칭하며 고구려의 정통 계승자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당시 동아시아의 패권국이었던 당(唐)나라는 발해가 고구려의 영토와 역사를 계승하는 것을 견제했습니다.
대조영이 이끄는 고려 유민 세력을 무력으로 와해하는 데 실패한 측천무후는 '고려' 대신 '발해군(渤海郡, 대씨고려 접경 당나라 관할 군)'이라는 지명으로 부르는 등 다른 별칭으로 표기하며 고려가 멸망하였음을 내외로 공표하며, 구 고씨 고려와의 연결고리를 의도적으로 축소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발해는 이러한 당의 외교적 압력과 무관하게, 특히 일본(日本)에 보낸 외교 문서(國書)에서는 일관되게 스스로를 '고려 국왕(高麗國王)', '고려국'이라 칭했습니다.
당나라가 발해와 고구려의 연관성을 애써 무시하고 고구려의 흔적을 지우려 했던 것은, 역설적으로 당시 '고려'라는 이름이 가진 정치적 무게감(고구려 영토에 대한 소유권 주장)이 얼마나 막대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발해가 '대씨 고려(大氏 高麗)'로서 '고려'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었기 때문에, 훗날 멸망했을 때 그 유민들을 흡수한 왕건의 '왕씨 고려'가 진정한 통일 국가로 인정받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698
877
877
[태조 왕건 탄생]
신라 한산주 송악의 호족 왕륭과 위숙왕후 한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총명함과 슬기로움이 남달랐으며, 도선대사의 예언과 가르침을 받으며 성장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고려사에는 왕건이 태어날 때 신비한 광채와 자주빛 기운이 방 안 가득 빛나고 하루 종일 뜰에 서려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도선대사의 예언대로 아들이 태어나자 이름을 '건'이라 지었다.
896
896
[궁예 휘하로 합류]
아버지 왕륭과 함께 중부 지방의 강자로 떠오르던 궁예를 찾아가 송악을 바치고 그의 휘하에 들어가 장수가 되었다.
이는 후고구려 세력 확장에 중요한 첫걸음이었다.
왕륭과 왕건 부자는 궁예의 휘하에 들어가면서 후고구려의 장군으로서 전장에서 무공을 세우고 세력 확장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898
898
[정기대감 임명]
궁예로부터 정기대감에 임명되어 양주와 견주를 공격했다.
이후 광주, 충주, 당성, 청주, 괴양 등 충청도와 경상북도 일부 지역을 평정하며 태봉국의 세력권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했다.
초기 양주와 견주 공격은 큰 성과가 없었으나, 이후 광주, 충주 등을 평정하며 아찬 위계를 받고 뛰어난 지략과 통솔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903
903
[나주 지역 최초 점령]
전라남도 지역으로 진격하여 나주와 주변 지역들을 점령, 후백제의 배후를 위협하고 중국과의 해상 뱃길을 차단하여 태봉의 국력 확장에 기여했다.
나주 호족 오다련의 딸 오씨(장화왕후)와 결혼하여 후일 혜종을 낳았다.
이 시기 왕건은 해양 세력을 이끌며 견훤과의 대결에서 중요한 거점을 확보했다. 이 공로들로 알찬으로 승진하며 궁예의 총애를 받았다. 909년에 나주를 재점령했다는 설도 있다.
906
906
[상주 사화진 전투 승리]
궁예의 명을 받아 정기장군 금식 등을 거느리고 상주의 사화진에서 견훤과 여러 번 싸운 끝에 그의 군대를 격파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를 통해 왕건은 후백제군과의 육전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입증하며 태봉의 세력을 더욱 확장시켰다.
909
909
[진도와 나주 재점령]
진도 부근의 도서를 공격하고 나주 금성을 정복했다.
덕진포에서 소수의 전함으로 견훤의 대함대를 화공으로 대파하며 나주 민심을 안정시켰고, 서남해안의 해적 '수달'을 체포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나주와 주변 지역을 점령하여 후백제의 배후를 위협하고, 후백제와 중국과의 뱃길을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통해 태봉은 후백제와 신라에 의해 사방이 가로막히는 형세를 만들었다. 이러한 공로로 왕건은 궁예에 이은 태봉국의 제2인자로 자리매김했다.
913
913
[시중에 오르다]
변방에서의 거듭된 공로를 인정받아 문무백관의 최고 우두머리인 시중의 지위에 올랐다.
공정한 정사를 펼치고 억울한 사람들을 구제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으나, 궁예의 견제를 받기 시작했다.
시중이 된 왕건은 청주 사람 아지태의 간특한 행위를 밝혀내 처벌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이로 인해 군부 장교들과 호족, 공신들이 그를 따르자 궁예가 자신에게 철퇴를 겨눌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918
[왕씨고려 건국, 두 개의 고려]
918년, 왕건은 궁예의 태봉(泰封)을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열면서 국호를 '고려(高麗)'로 정했습니다.
이는 "동명성왕(추모왕)이 세운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명백한 정치적 선언이었으며, 동시에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평양을 '서경(西京)'으로 승격시키는 등 강력한 고씨 고려 계승 의지를 표명했습니다.
당시, 북방에는 대조영의 후예들이 이끄는 대씨 고려(발해(渤海))가 역시 스스로를 '고려국'이라 칭하며 존속하고 있었기에 '두 개의 고려'가 약 8년 간 일시적으로 공존했습니다.
왕건의 '고려' 건국은 후삼국(신라, 후백제)의 경쟁자들을 압도하는 독보적인 정통성을 선점하는 행위였습니다. 신라나 후백제와 달리 '고구려 계승'을 내세움으로써 , 한반도 중부와 북부 고토(故土)에 대한 역사적 연고권을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왕건은 즉위 직후부터 "평양 옛 서울이 황폐해졌다"며 서경(西京) 개척을 강력히 추진하는 등 , 고구려 계승을 단순한 국호가 아닌 국가 핵심 정책으로 삼았습니다.
이처럼 왕건의 '고려' 건국은 북방의 '대씨 고려(발해)'와 정통성을 다투는 경쟁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는 '누가 진정한 고구려의 후계자인가'라는 역사적 질문을 던졌으며, 이 질문은 8년 뒤 발해의 멸망과 그 유민들의 행보에 따라 극적으로 귀결됩니다.
918
[이흔암 숙청]
궁예에게 충성심이 깊었던 공주 출신 이흔암을 숙청했다.
염장의 고변과 염탐꾼의 보고를 빌미로 이흔암을 잡아 심문, 자백을 받아낸 후 시장에서 목을 베어 처형했다.
이흔암은 궁예 집권 말기에 웅주를 점령했던 인물로, 왕건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사에 이흔암의 처형이 6월에 일어났다는 기록도 있으나, 왕건이 즉위한 후 발생한 일련의 정적 숙청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918
918
[고려 건국]
궁예의 독단과 폭정에 반발한 신숭겸, 복지겸, 홍유, 배현경 등 무장들과 호족들의 지지로 거병, 궁예를 축출하고 철원의 포정전에서 왕으로 추대되었다.
국호를 '고려'로, 연호를 '천수'로 정하며 새 나라를 건국했다.
왕건은 '고구려'의 뒤를 잇는다는 뜻에서 국호를 '고려'로 정하고, 즉위 교서를 통해 궁예의 잘못된 정치를 비판하고 새로운 규율을 세울 것을 천명했다.
918
918
[임춘길 등 반란 진압]
환선길의 난 직후, 청주 출신 순군리 임춘길 등이 반란을 도모했으나 복지겸의 정보망에 의해 발각되었다.
왕건은 처음에는 회유하려 했으나, 마군대장군 염상의 주장을 받아들여 경종을 비롯한 역모 혐의자들을 처형했다.
염상은 경종이 조카를 도성에서 데려가려 한 것이 볼모를 통한 호족 견제 정책에 대한 반역이라 주장했고, 왕건은 이를 수용했다.
918
918
[환선길의 난 진압]
고려 건국 4일 만에 마군장군 환선길이 반란을 일으켜 왕권을 노렸으나, 복지겸의 보고와 왕건의 태연한 대처로 실패했다.
환선길은 추격 끝에 붙잡혀 처형되었다.
왕건은 환선길의 역모를 알았음에도 증거 부족으로 무마했으나, 환선길이 직접 칼을 겨누자 꾸짖어 복병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는 왕건의 뛰어난 위기 대처 능력을 보여준다. 학자들은 환선길 형제의 반란이 건국 후 논공행상 불만 때문으로 추정한다.
919
919
[수도 송악으로 이전]
자신의 고향이자 정치적, 군사적 기반인 송악(개성)으로 수도를 이전했다.
이는 궁예의 터전이었던 철원에 대한 주민들의 반감을 해소하고 황권을 안정시키기 위함이었다.
왕건은 빈민 구제 기구인 흑창 설치, 세금 인하로 민심을 안정시키고, 호족 세력과의 정략 결혼, 자제들을 도성으로 유학시켜 중앙 집권적 지배 체제를 구축했다. 또한 고구려 계승을 내세워 북진 정책을 추진하고 불교를 건국 이념으로 삼았다.
920
920
[견훤의 신라 침략]
견훤이 신라의 합천(대야성)을 점령하자, 고려와 후백제 간의 평화가 깨졌다.
신라가 고려에 원병을 요청했고, 왕건이 군대를 보내 견훤이 퇴각하면서 신라와 고려의 우호 관계가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견훤은 왕건의 즉위 초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신라 침략으로 관계가 악화되었다. 고려의 박수경 장군이 견훤군을 패배시켰다는 기록도 있다. 견훤은 웅진(공주)까지 진출하며 고려의 혼란을 이용하기도 했다.
924
924
[견훤, 조물성 1차 공격]
견훤이 아들 수미강과 양검을 보내 대야성과 문소성 군사로 조물성을 공격했다.
고려에서 구원군으로 보낸 장수들이 전사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나, 조물성 사람들의 강한 저항으로 후백제는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925
925
[발해 유민 유입 시작]
거란에 의해 발해가 멸망하자, 대규모 발해 유민들이 고려로 망명해 오기 시작했다.
이는 고려의 인구 증가와 병력 확보에 기여하며, 고구려 계승을 자처하는 왕건에게 정통성을 부여했다.
발해 멸망 후 후발해, 정안국 등이 세워졌으나 불안감을 느낀 발해 유민들은 계속 고려로 유입되었다.
925
925
[견훤, 조물성 2차 공격]
견훤이 다시 3천 기를 이끌고 조물성을 내습했다.
고려군이 상군과 중군이 패하며 수세에 몰렸으나, 유금필이 구원군으로 달려오면서 전세가 역전되어 고려는 간신히 승리했다.
이후 견훤과 왕건은 화친을 결정하고 왕신과 진호를 인질로 교환했으나, 진호의 죽음을 독살로 규정한 견훤이 왕신을 죽이고 공주성을 기습하며 평화는 깨졌다.
926
926
[대광현 등 발해 유민 흡수]
거란족의 요나라에게 무너져 망명해 온 발해의 왕자 대광현을 포함한 발해 유민들을 대거 흡수했다.
이는 고려의 국력 증강과 고구려 계승국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발해 유민의 유입은 왕건이 병사들의 수를 늘리고 견훤과의 싸움에도 동원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또한 왕건이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는 데 큰 명분을 얻었다.
927
927
[견훤, 경주 기습 및 경애왕 살해]
견훤이 경상북도 북부를 공략하다 갑자기 경주로 기습하여 경애왕을 비롯한 신라 왕족들을 죽이고 김부를 새 왕으로 앉혔다.
신라의 원병 요청에 왕건이 출병했으나 경주 함락을 막지 못했다.
경주를 유린한 견훤은 고려 원병을 의식해 대구 공산(팔공산)에서 왕건의 군사와 마주쳤다. 이로 인해 공산 동수 전투가 발발하게 된다.
927
927
[공산 동수 전투 대패]
공산(팔공산)에서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배했다.
신숭겸이 왕건으로 변장하여 전사하고, 김락 등 개국공신들을 잃는 등 5천여 명의 병력을 잃으며 왕건은 겨우 목숨만 건져 개경으로 후퇴했다.
공산 전투는 고려군이 겪은 가장 큰 패배 중 하나로, 왕건은 크게 슬퍼하여 신숭겸의 시신에 금으로 만든 머리 모형을 끼워 넣어 장사지내고 장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 패배로 고려의 힘은 한동안 열세에 놓이게 된다.
929
929
[의성부 함락, 홍술 전사]
공산 전투 이후 기세가 오른 후백제군이 의성부를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왕건의 부장인 성주 홍술이 전사했다.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은 "나는 양손을 모두 잃었다"며 비통해하며 직접 출정을 결심하게 된다.
후백제군은 경상도 지역에서 승승장구했으나, 오히려 경상도 주민들의 원한을 사 왕건에게 귀순하는 호족들이 늘어나는 결과를 빚었다.
930
930
[고창 전투 대승]
후백제군이 교통 요충지 고창(안동)을 포위하자, 왕건은 유금필의 강력한 주장으로 출정하여 저수봉 전투와 고창병산 전투에서 견훤군을 대파했다.
견훤은 8천여 명의 사상자와 참모 김악을 잃으며 삼한 패권을 급속히 상실하기 시작했다.
이 전투의 승리는 경상도 일대의 친고려 호족들의 막판 참전도 영향을 미쳤으나, 유금필의 활약이 결정적이었다. 이 승리로 경상도 일대 호족들이 고려로 대거 귀순하고 신라 또한 왕건을 서라벌로 초대하는 등 고려가 한반도 패권을 장악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932
932
[일모산성 공격 개시]
왕건의 친정으로 단행된 일모산성 공격이 시작되어 11월에 함락되었다.
이 시기 후백제 해군이 고려 내해와 섬들을 침략하기도 했으나, 이들은 결국 유금필에게 격파당했다.
일모산성 함락은 후백제 해군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본토 내지를 잃지 않고 오히려 확보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933
933
[유금필, 신검군 격퇴]
견훤의 맏아들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이 경주 근처까지 진군해 신라가 멸망 위기에 처하자, 왕건은 유금필을 긴급히 출동시켰다.
유금필은 결사대 80명으로 신검의 군대를 격퇴하고 경주 주민들을 안심시켰다.
유금필은 사탄과 자도에서 신검의 군대를 연달아 대파하며 후백제 장군들을 사로잡는 전설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왕건은 "우리 장군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겠는가"라며 크게 감탄했다.
934
[대씨고려 마지막 왕자 대광현, 왕건에게 귀순]
926년, 북방의 '대씨 고려'(발해)가 거란(契丹)의 침공으로 허무하게 멸망했습니다.
왕건은 대씨 고려 유민들을 '형제의 나라' 백성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으로 포용하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 흐름의 정점이 바로 934년(태조 17년), 발해의 마지막 세자(太子) 대광현(大光顯)이 수만 명의 무리를 이끌고 왕건의 '고려'로 귀순한 사건입니다.
왕건이 이들을 극진히 대우하며 대광현에게 '왕계(王繼)'라는 이름과 왕실 족보(宗籍)를 하사함으로써 비로소 고려 계승의 두 흐름(대씨 고려, 왕씨 고려)이 하나로 합쳐졌습니다.
대광현의 귀순은 단순한 망명이 아닌, '대씨 고려'의 정통성이 '왕씨 고려'로 공식적으로 이양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왕건은 대광현에게 왕족의 지위와 토지를 부여하고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했습니다.
이로써 왕건은 신라나 후백제가 감히 넘볼 수 없는 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유일무이한 정통 계승자가 되었습니다.
왕건이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짐승(禽獸)의 나라'라 칭하며 극단적으로 적대하고, 거란 사신이 보낸 낙타를 만부교(萬夫橋)에서 굶겨 죽인 사건 은 이러한 정통성에서 비롯된 외교적 선언이었습니다. '두 개의 고려'는 '하나의 고려'로 통합되었습니다.
이는 935년 신라의 평화적 병합과 936년 후백제 멸망 으로 이어지는 후삼국 통일의 결정적인 이데올로기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934
934
934
[운주 전투 대승]
왕건이 운주 일대 진공 소식을 들은 견훤이 화의를 청했으나, 유금필의 주장으로 고려군은 공격을 감행했다.
유금필이 강력한 기병 수천 명을 이끌고 후백제군을 대파하여 3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이 전투의 패배로 후백제는 웅진 이북의 30여 개 성을 고려에 항복시켰다. 견훤의 약해진 모습을 간파하고 적극적인 공격을 주장한 유금필의 역할이 컸다.
935
935
[신라 경순왕 항복]
견훤의 고려 귀부 이후, 신라 경순왕이 마의태자 등 일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건에게 투항할 의사를 피력하고 귀순했다.
왕건은 경순왕을 극진히 대우하며 사위로 맞아들여 신라를 평화적으로 합병했다.
경순왕의 귀순은 왕건에게 통일 전쟁의 정통성을 부여했다. 왕건은 자신을 고구려와 신라의 계승자로 천명하고 견훤을 반란자로 지목하여 통일의 명분을 확고히 했다.
[나주 지역 재수복]
유금필에게 명하여 929년에 후백제군에게 빼앗겼던 나주 지역을 다시 수복했다.
이는 신검 형제의 반란 직후 이루어진 기습적인 작전으로, 견훤을 고려로 데려오기 위한 포석으로 짐작된다.
나주 지역은 후백제의 해상 교통로를 차단하고 배후를 위협하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935
935
[견훤, 고려에 귀부]
후백제 왕실 내분으로 금산사에 갇혀 있던 견훤이 막내 아들 능예 등과 함께 탈출하여 나주를 통해 고려에 귀부했다.
왕건은 그를 상부의 예로 극진히 대우했다.
견훤의 귀부는 후삼국 통일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왕건은 이를 통해 후백제를 반역 집단으로 규정할 명분을 얻었다. 견훤은 이후 왕건의 신검 정벌에 동참했다.
936
936
[후삼국 통일]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를 반역 집단으로 규정하고, 10만 명에 가까운 대군을 거느리고 출병하여 '일리천 전투'에서 신검의 군대를 대파했다.
이후 신검이 항복하며 후삼국을 통일하고 발해 유민까지 포함한 민족의 재통일을 이룩했다.
일리천 전투에서는 고려 2대 황제가 되는 혜종 왕무와 강공훤, 그리고 명주의 김순식이 결정적으로 활약했다. 고려는 후삼국뿐만 아니라 발해의 유민까지 포용하여 민족의 재통일을 이루었다.
940
940
[개태사 완공]
불교 장려 정책의 일환으로 충청도에 개태사를 완성시켰다.
이외에도 신흥사를 중수하고 공신탑을 설치했으며, 무차대회를 개최하여 신분, 귀천, 지역에 상관없이 불법을 듣게 했다.
왕건은 불교를 공식 국교로 삼고 숭불정책을 적극 실시하여 민간의 정신적 통일을 꾀했다. 이는 국민들의 사상적 단결을 이끌어내는 데 효과를 발휘했다.
942
942
[거란과의 수교 거부]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이 화친을 요청하며 낙타를 선물했으나, 왕건은 거란을 형제국인 발해와의 맹약을 어긴 신의 없는 나라로 규정하고 사신을 귀양 보내고 낙타를 굶겨 죽이는 강경한 태도로 수교를 거부했다.
왕건은 유언을 통해서도 거란의 풍습을 따르지 말고 경계할 것을 명했다. 또한 중국의 오대 십국에 꾸준히 사절을 파견하며 거란과 여진족을 견제하는 외교 정책을 펼쳤다.
943
943
[태조 왕건 승하]
임종을 눈앞에 두고 고명대신 박술희에게 후세 왕들이 치국의 귀감으로 삼을 '훈요 10조'를 유훈으로 남겼다.
향년 67세로 붕어하며 고려의 기틀을 다진 생애를 마감했다.
훈요 10조는 불교 진흥, 서경 중시, 연등회와 팔관회 유지, 상벌 공정, 백성 신망 유지 등 고려 왕조의 통치 원칙을 담고 있다. 왕건은 혜종의 외가 세력이 미약한 점을 우려해 박술희에게 혜종의 앞날을 부탁했다.
1400
['Corea' 서방 기록의 등장]
'고려'라는 이름이 유럽에 전파된 경로는 크게 두 갈래입니다.
첫째는 13세기 몽골 제국을 통한 육상 경로로, 원(元)나라에 체류했던 마르코 폴로(Marco Polo)가 1295년 귀국 후 쓴 Dongfang Jianwenlu(동방견문록)에 원나라에 복속된 지역 중 하나로 'Cauli'를 언급합니다. 이는 중국인들이 '고려(高麗)'를 '가우리' 또는 '가오리'에 가깝게 발음하는 것을 듣고 표음한 것으로 분석됩니다.
둘째는 16세기 초 대항해시대를 통한 해상 경로입니다. 1510년경 포르투갈인들은 동남아시아 말라카(Malacca)에서 무역 활동을 하는 'Gores'(고려 사람들)를 기록했으며, 이후 'Gori'(1514년), 'Coree'(1549년) 등의 표기가 등장합니다.
11~12세기 고려의 벽란도(碧瀾渡)는 송나라, 아라비아 상인들이 드나들던 국제 무역항으로 '고려'라는 이름을 아시아권에 널리 알린 1차 확산지였습니다. 이후 유럽인들이 이 이름을 '발견'한 것은 13세기(육로)와 16세기(해로)였습니다. 'Gores', 'Gori', 'Coree' 등은 모두 '고려' 또는 '고리'의 발음을 각자의 언어로 표기하려 한 시도였습니다. 1571년, 포르투갈인 두라도(F. Dourado)의 해도에 처음으로 'Core'라는 표기가 등장하며, 같은 해 예수회 빌렐라(G. Vilela) 신부가 "China와 Japan 사이에 있는 'Corea'라고 불리는 왕국"이라고 기록합니다.
이는 'Core'라는 어근에 나라를 뜻하는 라틴계 여성형 접미사 '-a'가 결합하여 'Corea'로 정착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다양한 표기는 16세기 후반 'Corea'로 수렴 및 통일되었고, 이 이름이 이후 약 300년간 서양 세계에서 한반도를 지칭하는 표준 명칭이 되었습니다.
1400
1890
['Corea'에서 'Korea'로의 철자 변천]
'Corea'는 16세기 말부터 19세기 말까지 표준적인 표기였습니다.
조선이 서양과 맺은 최초의 공식 조약인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의 공식 영어 명칭은 'Corea'였습니다. 1883년 영국과의 조약(조영수호통상조약) 역시 'Corea'를 사용했습니다. 'Korea'라는 표기는 1671년 하멜 표류기의 독일어 번역판 이나 18세기 러시아 지도 등에서 간헐적으로 등장했지만 주류는 아니었습니다.
'K' 표기가 확산된 것은 19세기 말부터입니다. 일각에서는 일제강점기 일본이 'Corea'를 'Japan'보다 알파벳 순서에서 뒤로 보내기 위해 'Korea'로 고의로 바꾸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 이는 여러 복합적인 요인 중 하나일 뿐입니다.
'C'에서 'K'로의 변화는 일본의 의도라기보다는, 영어권의 언어적 편의성이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분석됩니다. 영어에서 'C'는 's'(시옷) 발음(예: City)과 'k'(키읔) 발음(예: Cat)으로 혼용되어 혼동을 줄 수 있었습니다. 반면 'K'는 'ㅋ' 발음을 명확하게 표기할 수 있었기에, 미국무부와 영국 왕립지리학회 등 영어권에서 'Korea' 표기를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이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나 1910년 한일병합 선언문에서 'Korea'를 사용한 것 은 이러한 영어권의 추세를 따른 것이거나 확산에 기여한 것일 수 있으나, 그들이 '발명'한 것은 아닙니다.
조선 정부의 공식 표기 'Corea'는 점차 영어권의 'Korea' 표기에 밀려났습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영향력이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면서 , 미국식 영어 표기인 'Korea'가 국제 표준으로 완전히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1890
1937
['고려인(카레이스키)'의 정체성과 강제이주]
러시아와 구소련 중앙아시아(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에 거주하는 한민족 디아스포라를 '고려인(高麗人, Koryo-saram)' 또는 러시아어로 '카레이스키(Корейцы)'라고 부릅니다.
이 명칭은 그들의 고유한 민족적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이 '고려인'이라는 정체성은 19세기 중후반 농업 이민으로 연해주(沿海州)에 정착했던 한인들에게서 기원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운명은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Deportation) 정책 으로 인해 비극적으로 바뀌었습니다.
1937년, 스탈린은 연해주의 고려인들이 일본의 첩자가 될 수 있다는 의심 하에, 약 17만 명에 달하는 고려인 전체를 하루아침에 화물 열차에 태워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중앙아시아의 황무지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이주 과정과 초기 정착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들은 척박한 환경에서 집단농장(콜호스)을 이루며 생존해야 했습니다. 이처럼 '고려인'이라는 이름은 고대의 영광스러운 '고려'에서 유래했지만, 20세기 제국주의와 전체주의의 가장 큰 희생양이 되었던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비극적이고 강인한 정체성을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1937
1948
[남북한의 공통 영문 국호 'Korea']
1948년 한반도 분단 이후, 남과 북은 각기 다른 정통성을 내세우며 별개의 국호를 채택했습니다.
남한은 '대한민국(大韓民國, Republic of Korea)'을 국호로 하여 삼한(三韓)과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정통성을 계승했습니다.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 DPRK)'을 국호로 하여 고조선(古朝鮮)과 이씨조선(李氏朝鮮)의 계승을 표방했습니다.
그러나 두 국가는 대외적인 공식 영문 국호로는 '고려(高麗)'에서 유래한 'Korea'를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남한의 공식 영문 명칭은 'Republic of Korea' (ROK) 이며, 북한의 공식 영문 명칭은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DPRK) 입니다. 이는 남북한이 내부적으로는 '한(韓)'과 '조선(朝鮮)'이라는 서로 다른 역사적 정통성을 주장하면서도, 국제 사회에서는 '고려'가 서양에 알려져 굳어진 'Korea'라는 단일한 이름의 정통성을 두고 경쟁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고려'라는 이름은 고대(발해 vs 당), 중세(왕건 vs 후백제/신라)에 이어 현대(남한 vs 북한)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전체의 역사적 정통성을 상징하는 가장 강력하고 상징적인 이름으로 남아있습니다. 'Korea'는 분단된 두 국가가 공유하는 유일한 이름이자, 동시에 그 이름의 유일한 합법적 상속자임을 두고 다투는 '경합하는 유산(Contested Inheritance)'입니다.
19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