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Korea) 국호의 역사

국호, 역사,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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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국가, 왕조, 고구려 계승국, 다민족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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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호 '고려(高麗)'는 고구려의 제국적 정체성에서 발현된 이름으로, 1천 년 이상 한민족의 정통성을 상징해왔습니다.

고씨 고려 멸망 후에도 대씨와 왕씨가 '고려'라는 이름을 계승함으로써 고구려의 상속자임을 천명했습니다.   


이 왕씨 고려가 13세기 'Cauli', 16세기 'Corea' 로 세계에 알려져 현재 'Korea'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가우리, 고구려, 고려라 불리우던 국호는 현재 K-POP, K-Beauty, K-Drama 등의 이름으로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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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왕조, 고구려 계승국, 다민족 국가

- 698년 고구려 유민 대조영이 건국한 다민족 국가 - 한반도 북부와 만주 연해주 일부를 아우르며 동아시아의 주요 세력으로 성장 - 특히 선왕 시기에는 해동성국이라 불리며 최대의 영토와 전성기를 구가 - 926년 거란의 기습적인 침공으로 멸망했으나 끈질긴 부흥 운동은 1116년까지 이어짐 - 오늘날 발해의 역사 귀속 문제와 정체성에 대해 국제적인 논란이 지속되는 흥미로운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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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1C

[추모왕의 '고구려' 건국]

부여(扶餘)에서 남하한 추모왕(주몽)이 기원전 37년경 고구려(高句麗)를 건국했습니다.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으로 통합했던 시기에, 오랜 전통의 강국 부여와의 갈등까지 겪으며 군사적 긴장감이 넘치는 도전적인 건국이었습니다.

고구려라는 이름의 차용은 추모왕이 천제(天帝)의 자손임을 강조하여 신성한 권위를 부여하고, 기존의 지역 패권국이었던 부여로부터의 분리 및 대체를 정당화합니다.

주몽의 건국은 한(漢)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여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에 이루어졌습니다. 주몽 집단은 이러한 기존 세력(부여, 한사군)과의 긴장 및 경쟁 관계 속에서 국가를 세워야 했습니다. 따라서 건국 신화 는 '하늘의 자손'이라는 신성성(神聖性)과 '부여를 극복한다'는 정복의 정당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3대에 걸친 서사 는 국가가 단순한 성립(주몽)을 넘어, 내부적 안정(유리왕)과 외부적 팽창(대무신왕 '무휼'의 부여 정복)을 통해 완성됨을 상징합니다. 


'고구려'라는 국호는 주몽의 신성한 혈통과 결부되어, 단순한 지역명이나 부족명을 넘어선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이후 고구려가 수백 년간 동아시아의 패권 국가로 성장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BC 1C

12

[고구려(국, 國) 의 고구려(현, 縣) 침공]

추모왕(주몽)이 '고구려(국가)'를 건국하기 이전부터 '고구려'라는 명칭은 존재했습니다.

중국의 정사인 '한서' 지리지에 따르면, 한나라는 기원전 107년경 현도군(玄菟郡)을 설치하며 그 아래에 3개의 현(縣)을 두었는데, 그중 첫 번째 현의 이름이 '고구려현(高句驪縣)'이었습니다. 이는 '고구려'가 본래 특정 지역과 그곳의 주민 집단을 지칭하는 고유 명사였음을 시사합니다.


결정적으로, '삼국사기' 유리명왕 33년(서기 12년) 조에는 주몽의 '고구려(국가)'가 "한(漢)나라의 고구려현을 공격하여 차지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주몽의 국가와 한의 행정구역이 명백히 다른 실체로서 일정 기간 공존했음을 증명합니다.  

이 기록은 고구려 초기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일부 중국 사서(예: Houhanshu(후한서))는 '한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현으로 삼아 현도에 속하게 했다'고 기록하여, 마치 고구려가 한사군의 일부에서 시작된 것처럼 서술합니다. 그러나 Samguk Sagi의 기록은 이를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즉, '고구려(국가)'가 '고구려현(한의 행정구역)'을 공격하여 복속시킨 것입니다.


이는 고구려가 한의 지방정권이 아닌, 독자적인 주권 국가로서 오히려 한의 세력을 축출하며 성장했음을 보여줍니다. '고구려'라는 이름은 이미 존재하던 지역명이었고, 주몽 집단은 이 이름을 채택하여 자신들의 국가명으로 삼았으며, 나아가 같은 이름을 쓰던 한의 행정구역까지 병합한 것입니다.


'고구려 국가'와 '고구려현'의 구분은 고구려가 건국 초기부터 한의 군현 체제와는 독립적인 주권 국가였음을 입증하는 핵심적인 근거가 됩니다. '고구려'라는 명칭의 연원은 국가 성립 이전으로 소급됩니다.

12

397

[광개토대왕 '고려(高麗)'국호 공식 사용]

오랫동안 학계는 5세기 장수왕(재위 413~491) 대에 '고구려(高句麗)'가 공식적으로 '고려(高麗)'라는 국호로 변경되었다고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충주 고구려비(중원 고구려비)에 대한 2019년 3D 스캐닝 및 RTI 촬영 등 최첨단 기법을 동원한 재판독 연구 결과, 비석의 첫머리 제액(題額)에서 'Yongle 7년(永樂七年)'이라는 연호가 판독되었습니다.


'영락(永樂)'은 광개토대왕의 연호이며, 영락 7년은 서기 397년에 해당합니다. 이 비석이 '고려태왕(高麗太王)'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어, '고려'라는 국호의 공식 사용 시점이 장수왕이 아닌 광개토대왕 대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충주 고구려비의 397년 건립설 이 학계의 정설로 확고히 자리 잡는다면, 이는 고대사 연구의 판도를 바꾸는 발견입니다. 광개토대왕은 '태왕(太王)'(황제급 군주) 칭호, '영락'이라는 독자 연호를 사용하며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天下觀)을 선포했습니다.


만약 이때 '고구려'가 아닌 '고려'라는 국호를 공식화한 데 이어 별도의 연호까지 사용했다면 중국과 대등한 제국으로서의 정체성을 한층 더 강화하려는 의도였을 수 있습니다. 즉, '고려'라는 국호의 사용은 광개토대왕의 고려 제국화 프로젝트와 맞물려 있었던 것입니다.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이 국호를 변경했다는 가설은 현재까지의 통설이지만, 397년설 이 대두되면서 '고려'라는 국호의 사용 시점은 고구려의 최전성기인 광개토대왕 시기까지 소급될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이는 '고려'라는 이름이 가진 제국적 함의를 더욱 부각시킵니다. 물론, 학계에서는 이 판독 결과에 대해 '7년'이라는 글자는 인정하지만, 전체적인 연대 해석에는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는 입장도 공존합니다.

397

668

668

[고구려의 그림자, 발해 건국의 씨앗이 되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던 고구려가 당나라에 의해 멸망합니다.

이때, 고구려 장군 걸걸중상과 그의 아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당나라의 통제 지역인 영주로 강제 이주당하며 새로운 역사의 서막을 준비합니다.

696

696

[폭정에서 벗어나, 만주를 향한 대탈출극]

당나라 영주 도독의 폭정에 불만을 품은 거란추장들이 봉기하자, 이 혼란을 틈타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들을 이끌고 영주를 탈출합니다.

추격하는 당군을 천문령에서 대파하며 만주 동부로 향하는 길을 열었습니다.

대조영이 이끄는 무리는 이동 도중 말갈인을 이끌던 걸사비우와 고구려 유민을 이끌던 대사리 걸걸중상이 전사하면서, 대조영이 모든 무리를 이어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추격해오는 당나라 군대를 천문령 전투에서 크게 무찌르는 뛰어난 전술을 보여주었습니다.

698

[대씨 고려(발해)의 '고려 국왕' 칭호 사용]

고구려 멸망(668년) 이후, 고구려 장군 대조영이 새로이 건립한 왕조는 멸망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스스로를 '고려'라 칭하며 고구려의 정통 계승자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당시 동아시아의 패권국이었던 당(唐)나라는 발해가 고구려의 영토와 역사를 계승하는 것을 견제했습니다.

대조영이 이끄는 고려 유민 세력을 무력으로 와해하는 데 실패한 측천무후는 '고려' 대신 '발해군(渤海郡, 대씨고려 접경 당나라 관할 군)'이라는 지명으로 부르는 등 다른 별칭으로 표기하며 고려가 멸망하였음을 내외로 공표하며, 구 고씨 고려와의 연결고리를 의도적으로 축소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발해는 이러한 당의 외교적 압력과 무관하게, 특히 일본(日本)에 보낸 외교 문서(國書)에서는 일관되게 스스로를 '고려 국왕(高麗國王)', '고려국'이라 칭했습니다.

당나라가 발해와 고구려의 연관성을 애써 무시하고  고구려의 흔적을 지우려 했던 것은, 역설적으로 당시 '고려'라는 이름이 가진 정치적 무게감(고구려 영토에 대한 소유권 주장)이 얼마나 막대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발해가 '대씨 고려(大氏 高麗)'로서 '고려'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었기 때문에, 훗날 멸망했을 때 그 유민들을 흡수한 왕건의 '왕씨 고려'가 진정한 통일 국가로 인정받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698

[고구려의 후예, 마침내 '진국'을 세우다!]

천문령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대조영은 만주 동부 동모산에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규합하여 '진국'을 건국하고 스스로 진국왕이 됩니다.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며 독자적인 연호 '천통'을 사용,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진국은 당시 당나라의 안동도호부를 정복하며 그곳의 한족들을 노비로 강등시키는 대담함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국호 '진(振)' 또는 '진단(震旦)'은 '해 뜨는 동쪽 나라'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705

705

[당나라, 발해의 성장을 인정하려다...]

대조영이 건국한 발해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당나라는 초기 진압 방침을 바꾸고 발해를 인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발해인들을 달래기 위해 책봉을 시도했으나, 돌궐과 거란의 국경 침략 등으로 인해 불발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713

713

[강성해진 발해, 당의 굴복을 얻어내다!]

당나라는 결국 발해의 급속한 성장에 굴복하여, 대조영을 '좌효위원외대장군 발해군왕'으로 책봉하고, 홀한주 도독 벼슬까지 추가했습니다.

이때부터 공식 국호를 '발해(渤海)'로 변경하며 국제적으로 더욱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일부 학설에 따르면 국호 변경은 문왕대부터 이루어졌다고도 하나, 일반적으로 713년을 국호 '발해' 사용의 시작점으로 봅니다. 이로써 발해는 당의 세계질서에 편입되면서도 독자적인 국가로서의 안정성을 확보하게 됩니다.

719

719

[제2대 무왕 즉위,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다]

발해의 기틀을 세운 고왕 대조영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대무예가 무왕으로 즉위했습니다.

그는 독자 연호 '인안'을 사용하며 주변 말갈족들을 복속시키고 만주 북부 일대를 장악하는 등 영토 확장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무왕은 영토 확장의 편리성과 왕권 강화를 위해 수도를 동모산에서 중경 현덕부로 옮겼습니다. 이러한 발해의 급속한 세력 확대는 주변국들을 긴장시켰습니다.

727

727

[일본과의 문을 열다: 대외 관계 확장]

발해 무왕은 당나라와 신라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 등으로 일본에 첫 사신을 파견하며 새로운 외교 관계를 수립했습니다.

이는 발해가 동아시아 국제 관계에서 중요한 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후 발해와 일본은 919년까지 발해가 34차례, 일본이 13차례 방문하는 등 총 47회에 걸쳐 긴밀한 교류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이는 발해의 외교적 역량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입니다.

728

728

[우리는 고구려의 후예! 당당히 밝히다]

무왕은 일본에 보낸 국서에 '무예는 황송스럽게도 대국을 맡아 외람되게 여러 번을 함부로 총괄하며 고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습속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명시하며, 스스로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대외적으로 천명했습니다.

발해는 일본 사신에게 '이 땅은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이었으니 너희 일본은 우리를 옛 고구려를 대하듯 하라'고 호통을 치기도 했습니다. 이는 발해의 강력한 고구려 계승 의식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732

732

[당나라 등주를 전격 습격! 발해의 강성함을 떨치다]

흑수말갈과 당의 연합에 반발한 무왕은 장군 장문휴에게 수군을 이끌게 하여 산둥반도 등주를 기습 공격, 자사를 죽이는 대담한 작전을 성공시킵니다.

같은 해 요서 마도산에서는 당에 망명한 아우 대문예가 이끄는 당나라 군과 격돌하며 발해의 군사력을 과시했습니다.

당시 신라는 당나라의 지원 요청을 받아 발해에 출병했으나, 혹독한 겨울 날씨와 폭설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고 퇴각하며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734

734

[신라, 발해 견제를 위한 단독 군사 행동]

발해의 지속적인 세력 확장에 위기감을 느낀 신라는 당나라의 요청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단독으로 발해를 공격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발해와 신라의 관계는 더욱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당나라는 733년에 신라에게 발해 공격을 요구하며 성덕왕에게 최고위 관직을 하사하는 등 신라를 통해 발해를 견제하려는 등거리 외교를 펼쳤습니다.

736

736

[적대에서 화해로, 당과 발해의 외교 변화]

등주 공격 이후 악화되었던 당과 발해의 관계는 상호 표류하던 사신과 포로들을 교환하며 점차 화해 분위기로 접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양국 간의 긴장이 완화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737

737

[제3대 문왕의 등극, 안정과 성장을 이끌다]

강성한 군주였던 무왕이 세상을 떠나고, 문왕 대흠무가 즉위했습니다.

그는 '대흥'과 '보력'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며 당나라와 친선 관계를 맺고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문왕 시기에도 영토 확장은 계속되었습니다.

756

756

[수도 '상경'으로 이동, 발해 발전의 박차를 가하다]

문왕은 수도를 중경 현덕부에서 만주 지역의 주요 이동로이자 물자 교류의 중심지인 상경 용천부로 옮겼습니다.

이 천도를 통해 농업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인구가 크게 늘어나 발해의 국력이 한층 더 강화되었습니다.

상경 용천부는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성을 모방하여 외성, 내성을 두고 시가지가 바둑판처럼 구획되었으며, '전조후시(前朝後市)' 원칙이 적용된 계획 도시였습니다. 이는 발해의 발달된 도시 계획을 보여줍니다.

759

759

[일본에 다시 한번, '고려국왕'임을 천명하다]

문왕은 일본에 조문사를 보내면서 스스로를 '고려국왕 대흠무'라고 칭했습니다.

이는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국이라는 정체성을 대외적으로 끊임없이 강조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762

762

[당나라, 발해의 국력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다]

발해의 발전과 대외적 국력 과시를 지켜본 당나라는 문왕에게 한 등급 높은 관직인 '발해국공'을 수여했습니다.

이는 당이 발해를 단순한 번국이 아닌, 동아시아의 주요 강국으로 인정했음을 의미합니다.

793

793

[문왕 사후, 잠시 찾아온 혼란의 그림자]

발해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문왕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동생 대원의가 즉위했으나 곧 폐위되고 수 개월 만에 사망했습니다.

이후 강왕, 정왕, 희왕, 간왕이 차례로 왕위를 계승하며 잠시 지배층의 내분으로 국력이 약화되는 시기를 겪습니다.

문왕의 말년에 수도를 일시적으로 동경 용원부로 천도했으나, 5대 성왕 때 다시 상경 용천부로 천도했습니다.

[성왕 즉위, 수도 상경으로의 재천도]

문왕 사후 잠시 혼란기를 거쳐 대화여가 성왕으로 즉위했습니다.

그의 재위 중 언제인지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으나, 수도를 다시 상경 용천부로 옮기며 국가의 안정을 꾀했습니다.

연호 '중흥'을 사용했습니다.

794

794

[성왕의 죽음과 강왕의 즉위]

성왕이 세상을 떠나고, 대숭린이 강왕으로 즉위했습니다.

그는 '정력'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습니다.

802

802

[북방 민족의 움직임: 말갈족의 당나라 교섭]

발해 북쪽에 위치한 월희와 우루 말갈족이 당나라와 교섭을 시도했습니다.

이는 훗날 선왕대에 발해에 복속되기 전의 북방 민족들의 활동을 보여줍니다.

809

809

[강왕 붕어와 정왕의 즉위]

강왕이 세상을 떠나고, 대원유가 정왕으로 즉위했습니다.

그는 '영덕'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습니다.

812

812

[정왕 붕어와 희왕의 즉위]

정왕이 세상을 떠나고, 대언의가 희왕으로 즉위했습니다.

그는 '주작'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습니다.

815

815

[북방 민족의 움직임: 흑수말갈족의 당나라 교섭]

발해 북쪽의 흑수말갈족이 당나라와 교섭을 시도했습니다.

이 역시 선왕대에 발해에 복속되기 전의 북방 민족들의 동향을 보여줍니다.

흑수말갈은 동아무르 지역에서 서아무르 지역으로 이동하며 발해의 영향권 밖에 있었으나, 선왕 시기 다시 발해의 통제 하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됩니다.

817

817

[희왕 붕어와 간왕의 즉위]

희왕이 세상을 떠나고, 대명충이 간왕으로 즉위했습니다.

그는 '태시'라는 연호를 사용했습니다.

818

818

[제10대 선왕 즉위, '해동성국' 전성기를 열다!]

간왕이 세상을 떠나고, 대야발의 4대손 대인수가 선왕으로 즉위했습니다.

그는 '건흥'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며 신라와 북쪽 부락을 공략, 요동을 점령하고 5경 15부 62주의 지방 제도를 정비하는 등 발해의 영토를 최대로 확장하며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당나라조차 발해를 '해동성국'이라 불렀습니다.

선왕 시기 발해는 흑수말갈을 비롯한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당의 지배가 약해진 요하 유역을 기습 점령하여 목저주, 현토주를 설치했습니다. 이는 발해 역사상 가장 넓은 영역을 확보한 시기였습니다.

820

820

[베일에 싸인 소고구려 병합의 기록]

선왕이 소고구려를 병합했다는 설이 전해지지만, 역사적인 기록이 불확실하여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발해의 전성기 확장과 관련된 흥미로운 가설 중 하나입니다.

830

830

[해동성국을 이끈 선왕의 죽음]

발해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선왕 대인수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사후 약 100여 년간의 발해 역사에 대해서는 뚜렷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멸망 원인에 대한 여러 가설을 낳기도 했습니다.

831

831

[선왕의 뒤를 이은 대이진의 즉위]

선왕의 뒤를 이어 대이진이 발해의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함화'라는 연호를 사용했습니다.

832

832

[발해 군사력의 비약적 발전, 당에 보고되다]

내양왕 왕종우가 발해에서 돌아와 당 문종에게 '발해에 좌우신책군, 좌우삼군, 그리고 120사가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이는 발해가 초기의 10위 제도를 넘어 당나라를 모방한 대규모의 군사 조직을 갖추었음을 보여줍니다.

발해의 군대는 초기 수만 명에서 후기에는 수십만 명으로 확대되었으며, 군사와 행정을 겸직하는 등 효율적인 체계를 갖추었습니다. 발해인은 장정 3명이면 호랑이도 잡을 정도로 용맹했다고 전해집니다.

857

857

[대이진 붕어와 대건황의 즉위]

대이진이 세상을 떠나고, 대건황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대정'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습니다.

871

871

[대건황 붕어와 대현석의 즉위]

대건황이 세상을 떠나고, 대현석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연호는 '대정'을 계속 사용했습니다.

894

894

[대현석 붕어와 대위해의 즉위]

대현석이 세상을 떠나고, 대위해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천복'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습니다.

903

903

[강대해지는 거란,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위협으로 떠오르다]

거란은 여진족을 정벌하고 3백 호를 포로로 잡았으며, 해와 습, 동북여진을 토벌하는 등 주변 민족들을 복속시키며 세력을 키워나갔습니다.

이는 발해에 대한 위협이 커지고 있음을 알리는 전조였습니다.

906

906

[대인선, 새로운 시대를 열다]

대위해가 세상을 떠나고, 대인선이 발해의 새로운 왕으로 즉위했습니다.

그는 혼란한 국제 정세 속에서 요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신라와 비밀리에 연계하는 등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대인선은 군사적인 대응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와의 결속을 통해 요나라의 침략에 대비하는 균형 외교를 펼쳤습니다.

908

908

[거란, 발해와의 교통로를 끊다]

거란은 진동해구에 성을 쌓아 발해와의 중요한 교통로를 차단했습니다.

이는 거란이 발해를 상대로 본격적인 압박을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909

909

[거란, 요동으로의 침략 시작]

거란이 요동 지방으로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요동은 발해에게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으므로, 이는 양국 간의 충돌을 예고했습니다.

915

915

[거란, 압록강까지 도달하며 발해를 압박하다]

거란의 세력이 압록강 유역까지 미치면서 발해는 더욱 큰 위협에 직면하게 됩니다.

거란은 발해 정복을 위한 계획을 본격적으로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916

916

[야율아보기, '대거란국'을 건국하며 발해의 운명을 흔들다]

거란의 야율아보기가 부족들을 통일하고 '대거란국'을 건국했습니다.

그는 서방의 유목민 평정 후 다음 목표인 중국으로 나아가기 전, 항상 근심거리였던 발해를 먼저 정복하기로 결심합니다.

이후 발해와 거란은 요동을 두고 10년간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고, 결국 발해가 소모전에서 패하며 요동을 잃게 됩니다. 이는 발해 멸망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됩니다.

918

[왕씨고려 건국, 두 개의 고려]

918년, 왕건은 궁예의 태봉(泰封)을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열면서 국호를 '고려(高麗)'로 정했습니다. 

이는 "동명성왕(추모왕)이 세운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명백한 정치적 선언이었으며, 동시에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평양을 '서경(西京)'으로 승격시키는 등 강력한 고씨 고려 계승 의지를 표명했습니다.

당시, 북방에는 대조영의 후예들이 이끄는 대씨 고려(발해(渤海))가 역시 스스로를 '고려국'이라 칭하며  존속하고 있었기에 '두 개의 고려'가 약 8년 간 일시적으로 공존했습니다.

왕건의 '고려' 건국은 후삼국(신라, 후백제)의 경쟁자들을 압도하는 독보적인 정통성을 선점하는 행위였습니다. 신라나 후백제와 달리 '고구려 계승'을 내세움으로써 , 한반도 중부와 북부 고토(故土)에 대한 역사적 연고권을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왕건은 즉위 직후부터 "평양 옛 서울이 황폐해졌다"며  서경(西京) 개척을 강력히 추진하는 등 , 고구려 계승을 단순한 국호가 아닌 국가 핵심 정책으로 삼았습니다.


이처럼 왕건의 '고려' 건국은 북방의 '대씨 고려(발해)'와 정통성을 다투는 경쟁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는 '누가 진정한 고구려의 후계자인가'라는 역사적 질문을 던졌으며, 이 질문은 8년 뒤 발해의 멸망과 그 유민들의 행보에 따라 극적으로 귀결됩니다.

918

[발해, 거란과의 화친을 시도했으나 실패하다]

발해는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강대해진 거란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도모했으나, 거란의 야율아보기는 발해 정복을 결심한 상태였기에 화친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919

919

[요동을 잃었지만, 거란 침입을 막아내다]

거란이 요동을 병합한 후 발해에 침입했으나, 발해는 이를 성공적으로 격파하며 여전히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거란에게 큰 경각심을 주었습니다.

924

924

[멸망 직전의 그림자, 발해 내부의 흔들림]

요동 탈환 이후 발해에는 남경남해부 상실과 장군 등 고위 관직자들이 고려로 망명하는 등 심각한 내부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발해의 쇠퇴를 가속화시키는 요인이 됩니다.

924

924

[발해, 요동의 요충지를 되찾다!]

발해는 거란의 요주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거란인들을 포로로 잡으며 요동 방어선을 강화했습니다.

이는 발해의 군사력이 건재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거란과의 재충돌을 예고했습니다.

925

925

[거란, 발해 멸망을 위한 전격적인 침공 시작]

거란은 4월에 발해의 신주를 공격하여 요동 방어선으로 군사를 유인하고, 12월에는 발해와의 무역로인 거란도를 통해 기습적으로 발해를 침공하며 발해 멸망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요나라 야율아보기는 20여 년간의 전쟁 경험을 바탕으로 발해의 방어 체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수도 급습 전술을 계획했습니다.

926

926

[해동성국 발해, 228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다]

거란의 기습적인 침공으로 발해는 건국 228년 만에 멸망했습니다.

거란은 발해의 옛 땅에 '동단국'을 세우고 거란 태자 야율배가 이를 지배하게 했습니다.

926

926

[거란의 파상 공세, 부여부 3일 만에 무너지다]

발해를 기습 침공한 거란군은 불과 3일 만에 발해의 주요 거점인 부여부를 함락시켰습니다.

이는 거란의 빠르고 강력한 침공 속도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926

926

[발해 수도 상경용천부, 끝내 함락되다]

부여부 함락에 이어 거란군은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로 직진하여 침공 9일 만에 수도를 함락시키는 경이로운 속도를 보여주었습니다.

'해동성국' 발해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발해는 노상(늙은 재상)에게 3만 명(혹은 5천 명)의 군사를 주어 저지케 했으나, 이 결사대조차 맥없이 무너지는 비극을 맞았습니다.

926

926

[거란, 멸망한 발해 백성들을 회유하려 했으나...]

발해 수도가 함락된 후, 야율아보기는 옛 발해의 군현에 조서를 내려 백성들을 회유하려 했습니다.

이는 발해 지배가 쉽지 않을 것임을 예상한 거란의 전략이었습니다.

926

926

[강말달 피살, 발해 유민들의 끈질긴 저항]

야율아보기가 거란 장수 강말달을 성으로 보내 수색하도록 지시했으나, 옛 발해 병사들이 그를 살해했습니다.

이는 멸망한 발해 백성들의 거란에 대한 강한 저항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926

926

[마지막 왕 대인선, 부흥의 불씨를 지피려다]

발해의 마지막 왕 대인선은 남아있는 발해 유민들을 모아 부흥 운동을 펼치려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성난 야율아보기의 재공격으로 상경용천부는 다시 함락되었고, 발해의 공식적인 멸망이 확정되었습니다.

926

926

[발해의 마지막 왕, 모욕적인 포로 생활을 시작하다]

거란군이 회군할 때, 발해의 마지막 왕 대인선과 그의 부인은 포로로 잡혀 거란 본토로 끌려갔습니다.

야율아보기는 그들에게 모욕적인 이름(대인선은 '오로고' - 마부, 부인은 '아리지' - 야율아보기 말 이름)을 지어주며 굴욕감을 주었습니다.

이후 그들은 거란이 정해준 상경임황부의 서쪽에 성을 쌓고 살아야 했습니다. 이는 멸망한 국가의 마지막 왕이 겪어야 했던 비극적인 최후를 상징합니다.

929

929

[거란, 발해인들을 대규모로 강제 이주시키다]

거란은 발해 멸망 후 발해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발해의 도성 홀한성의 백성들을 요하 유역의 임황부로 대규모 이주시켰습니다.

이는 발해 유민들에게 거대한 공포감을 조성하려는 의도였습니다.

934

[대씨고려 마지막 왕자 대광현, 왕건에게 귀순]

926년, 북방의 '대씨 고려'(발해)가 거란(契丹)의 침공으로 허무하게 멸망했습니다.

왕건은 대씨 고려 유민들을 '형제의 나라' 백성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으로 포용하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 흐름의 정점이 바로 934년(태조 17년), 발해의 마지막 세자(太子) 대광현(大光顯)이 수만 명의 무리를 이끌고 왕건의 '고려'로 귀순한 사건입니다.


왕건이 이들을 극진히 대우하며 대광현에게 '왕계(王繼)'라는 이름과 왕실 족보(宗籍)를 하사함으로써 비로소 고려 계승의 두 흐름(대씨 고려, 왕씨 고려)이 하나로 합쳐졌습니다.

대광현의 귀순은 단순한 망명이 아닌, '대씨 고려'의 정통성이 '왕씨 고려'로 공식적으로 이양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왕건은 대광현에게 왕족의 지위와 토지를 부여하고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했습니다.

이로써 왕건은 신라나 후백제가 감히 넘볼 수 없는 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유일무이한 정통 계승자가 되었습니다.


왕건이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짐승(禽獸)의 나라'라 칭하며 극단적으로 적대하고, 거란 사신이 보낸 낙타를 만부교(萬夫橋)에서 굶겨 죽인 사건 은 이러한 정통성에서 비롯된 외교적 선언이었습니다. '두 개의 고려'는 '하나의 고려'로 통합되었습니다.


이는 935년 신라의 평화적 병합과 936년 후백제 멸망 으로 이어지는 후삼국 통일의 결정적인 이데올로기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934

[발해 유민, 고려로 향하는 새로운 길을 찾다]

발해의 왕자 대광현이 발해 유민들을 이끌고 고려에 귀순했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은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왕실 제사를 지내게 하며, 왕씨 성을 하사하는 등 안정적인 정착을 지원했습니다.

이는 발해의 고구려 계승 의식과 고려의 통합 정책을 보여줍니다.

10~20만 명으로 추정되는 많은 발해 유민이 고려로 망명했습니다. 고려는 발해 후계국들과의 군사적 동맹보다는 유민 수용을 통한 인적 통합 정책을 펼쳤습니다.

1011

1011

[고려 정착 발해 유민, 또 다시 고난을 겪다]

거란은 고려에 정착했던 발해 유민들을 대거 포로로 잡아 귀주와 영주에 편호시켰습니다.

이는 고려 서북 지역의 발해 유민 사회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1029

1029

[발해 부흥의 불씨, 다시 꺼지다]

발해 왕족의 후예인 대연림이 무리를 이끌고 요나라에 반기를 들었으나, 결국 패망했습니다.

이에 거란은 반란에 참여한 발해인들을 각 지역으로 대규모로 이주시켰습니다.

대규모 이주는 929년 홀한성 발해인 이주 이후 두 번째였습니다. 이는 발해 유민들의 끈질긴 부흥 운동과 거란의 통제 정책이 충돌하는 양상을 보여줍니다.

1116

1116

[수십 년간 이어진 발해 부흥의 꿈, 끝내 좌절되다]

발해 멸망 이후 후발해, 정안국, 흥료국, 대발해국 등 여러 나라를 세우며 끈질기게 이어졌던 발해 부흥운동은 건국 188년 후인 1116년 최종적으로 실패했습니다.

이들 국가는 모두 요나라와 금나라에 병합되며 발해의 명맥은 완전히 끊기게 되었습니다.

발해 유민들은 고려, 후당, 북주, 북송, 여진족 등 다양한 통치권 내로 도망치거나, 거란에 의해 다른 지역으로 분산 이주되어 결국 거란, 여진족들과 융합하며 새로운 종족 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1400

['Corea' 서방 기록의 등장]

'고려'라는 이름이 유럽에 전파된 경로는 크게 두 갈래입니다.


첫째는 13세기 몽골 제국을 통한 육상 경로로, 원(元)나라에 체류했던 마르코 폴로(Marco Polo)가 1295년 귀국 후 쓴 Dongfang Jianwenlu(동방견문록)에 원나라에 복속된 지역 중 하나로 'Cauli'를 언급합니다. 이는 중국인들이 '고려(高麗)'를 '가우리' 또는 '가오리'에 가깝게 발음하는 것을 듣고 표음한 것으로 분석됩니다.


둘째는 16세기 초 대항해시대를 통한 해상 경로입니다. 1510년경 포르투갈인들은 동남아시아 말라카(Malacca)에서 무역 활동을 하는 'Gores'(고려 사람들)를 기록했으며, 이후 'Gori'(1514년), 'Coree'(1549년) 등의 표기가 등장합니다.

11~12세기 고려의 벽란도(碧瀾渡)는 송나라, 아라비아 상인들이 드나들던 국제 무역항으로 '고려'라는 이름을 아시아권에 널리 알린 1차 확산지였습니다. 이후 유럽인들이 이 이름을 '발견'한 것은 13세기(육로)와 16세기(해로)였습니다. 'Gores', 'Gori', 'Coree' 등은 모두 '고려' 또는 '고리'의 발음을 각자의 언어로 표기하려 한 시도였습니다. 1571년, 포르투갈인 두라도(F. Dourado)의 해도에 처음으로 'Core'라는 표기가 등장하며, 같은 해 예수회 빌렐라(G. Vilela) 신부가 "China와 Japan 사이에 있는 'Corea'라고 불리는 왕국"이라고 기록합니다. 


이는 'Core'라는 어근에 나라를 뜻하는 라틴계 여성형 접미사 '-a'가 결합하여 'Corea'로 정착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다양한 표기는 16세기 후반 'Corea'로 수렴 및 통일되었고, 이 이름이 이후 약 300년간 서양 세계에서 한반도를 지칭하는 표준 명칭이 되었습니다.

1400

1890

['Corea'에서 'Korea'로의 철자 변천]

'Corea'는 16세기 말부터 19세기 말까지 표준적인 표기였습니다.

조선이 서양과 맺은 최초의 공식 조약인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의 공식 영어 명칭은 'Corea'였습니다. 1883년 영국과의 조약(조영수호통상조약) 역시 'Corea'를 사용했습니다. 'Korea'라는 표기는 1671년 하멜 표류기의 독일어 번역판 이나 18세기 러시아 지도  등에서 간헐적으로 등장했지만 주류는 아니었습니다.


'K' 표기가 확산된 것은 19세기 말부터입니다. 일각에서는 일제강점기 일본이 'Corea'를 'Japan'보다 알파벳 순서에서 뒤로 보내기 위해 'Korea'로 고의로 바꾸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 이는 여러 복합적인 요인 중 하나일 뿐입니다.

'C'에서 'K'로의 변화는 일본의 의도라기보다는, 영어권의 언어적 편의성이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분석됩니다. 영어에서 'C'는 's'(시옷) 발음(예: City)과 'k'(키읔) 발음(예: Cat)으로 혼용되어 혼동을 줄 수 있었습니다. 반면 'K'는 'ㅋ' 발음을 명확하게 표기할 수 있었기에, 미국무부와 영국 왕립지리학회 등 영어권에서 'Korea' 표기를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이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나 1910년 한일병합 선언문에서 'Korea'를 사용한 것 은 이러한 영어권의 추세를 따른 것이거나 확산에 기여한 것일 수 있으나, 그들이 '발명'한 것은 아닙니다.


조선 정부의 공식 표기 'Corea'는 점차 영어권의 'Korea' 표기에 밀려났습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영향력이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면서 , 미국식 영어 표기인 'Korea'가 국제 표준으로 완전히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1890

1937

['고려인(카레이스키)'의 정체성과 강제이주]

러시아와 구소련 중앙아시아(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에 거주하는 한민족 디아스포라를 '고려인(高麗人, Koryo-saram)' 또는 러시아어로 '카레이스키(Корейцы)'라고 부릅니다. 

이 명칭은 그들의 고유한 민족적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이 '고려인'이라는 정체성은 19세기 중후반 농업 이민으로 연해주(沿海州)에 정착했던 한인들에게서 기원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운명은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Deportation) 정책 으로 인해 비극적으로 바뀌었습니다.

1937년, 스탈린은 연해주의 고려인들이 일본의 첩자가 될 수 있다는 의심 하에, 약 17만 명에 달하는 고려인 전체를 하루아침에 화물 열차에 태워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중앙아시아의 황무지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이주 과정과 초기 정착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들은 척박한 환경에서 집단농장(콜호스)을 이루며 생존해야 했습니다. 이처럼 '고려인'이라는 이름은 고대의 영광스러운 '고려'에서 유래했지만, 20세기 제국주의와 전체주의의 가장 큰 희생양이 되었던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비극적이고 강인한 정체성을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1937

1948

[남북한의 공통 영문 국호 'Korea']

1948년 한반도 분단 이후, 남과 북은 각기 다른 정통성을 내세우며 별개의 국호를 채택했습니다.

남한은 '대한민국(大韓民國, Republic of Korea)'을 국호로 하여 삼한(三韓)과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정통성을 계승했습니다.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 DPRK)'을 국호로 하여 고조선(古朝鮮)과 이씨조선(李氏朝鮮)의 계승을 표방했습니다. 


그러나 두 국가는 대외적인 공식 영문 국호로는 '고려(高麗)'에서 유래한 'Korea'를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남한의 공식 영문 명칭은 'Republic of Korea' (ROK) 이며, 북한의 공식 영문 명칭은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DPRK) 입니다. 이는 남북한이 내부적으로는 '한(韓)'과 '조선(朝鮮)'이라는 서로 다른 역사적 정통성을 주장하면서도, 국제 사회에서는 '고려'가 서양에 알려져 굳어진 'Korea'라는 단일한 이름의 정통성을 두고 경쟁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고려'라는 이름은 고대(발해 vs 당), 중세(왕건 vs 후백제/신라)에 이어 현대(남한 vs 북한)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전체의 역사적 정통성을 상징하는 가장 강력하고 상징적인 이름으로 남아있습니다. 'Korea'는 분단된 두 국가가 공유하는 유일한 이름이자, 동시에 그 이름의 유일한 합법적 상속자임을 두고 다투는 '경합하는 유산(Contested Inheritance)'입니다.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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