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Korea) 국호의 역사

국호, 역사,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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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고대 왕조 국가,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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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호 '고려(高麗)'는 고구려의 제국적 정체성에서 발현된 이름으로, 1천 년 이상 한민족의 정통성을 상징해왔습니다.

고씨 고려 멸망 후에도 대씨와 왕씨가 '고려'라는 이름을 계승함으로써 고구려의 상속자임을 천명했습니다.   


이 왕씨 고려가 13세기 'Cauli', 16세기 'Corea' 로 세계에 알려져 현재 'Korea'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가우리, 고구려, 고려라 불리우던 국호는 현재 K-POP, K-Beauty, K-Drama 등의 이름으로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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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왕조 국가, 한국사

고구려는 한국의 고대 왕조 국가 중 하나로 주몽이 건국했다.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아우르는 광대한 영토를 정복하며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성장했다. 특히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기에 전성기를 맞이하며 넓은 대륙을 호령했다. 고구려 문화는 씨름 온돌 거문고 등 한민족 전통문화의 뿌리가 되었다. 수 당나라와의 전쟁으로 국력이 쇠퇴하고 내부 분열을 겪으며 668년에 멸망했지만 발해와 고려 등 후대 국가들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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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1C

[추모왕의 '고구려' 건국]

부여(扶餘)에서 남하한 추모왕(주몽)이 기원전 37년경 고구려(高句麗)를 건국했습니다.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으로 통합했던 시기에, 오랜 전통의 강국 부여와의 갈등까지 겪으며 군사적 긴장감이 넘치는 도전적인 건국이었습니다.

고구려라는 이름의 차용은 추모왕이 천제(天帝)의 자손임을 강조하여 신성한 권위를 부여하고, 기존의 지역 패권국이었던 부여로부터의 분리 및 대체를 정당화합니다.

주몽의 건국은 한(漢)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여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에 이루어졌습니다. 주몽 집단은 이러한 기존 세력(부여, 한사군)과의 긴장 및 경쟁 관계 속에서 국가를 세워야 했습니다. 따라서 건국 신화 는 '하늘의 자손'이라는 신성성(神聖性)과 '부여를 극복한다'는 정복의 정당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3대에 걸친 서사 는 국가가 단순한 성립(주몽)을 넘어, 내부적 안정(유리왕)과 외부적 팽창(대무신왕 '무휼'의 부여 정복)을 통해 완성됨을 상징합니다. 


'고구려'라는 국호는 주몽의 신성한 혈통과 결부되어, 단순한 지역명이나 부족명을 넘어선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이후 고구려가 수백 년간 동아시아의 패권 국가로 성장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BC 1C

[부여 대소왕의 고구려 침공]

부여의 강력한 국력을 의식해 유리명왕은 태자를 볼모로 보내려 했으나, 태자의 거부로 대소왕이 5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습니다.

그러나 기록적인 폭설로 인해 대소왕의 대군이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하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기원전 6년, 부여의 대소왕은 고구려에 볼모를 요청했습니다. 유리명왕은 부여의 강력한 국력을 꺼려하여 태자 도절을 인질로 보내려 하였으나, 도절이 두려워 가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소왕은 군사 5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폭설로 많은 군사를 잃고 퇴각했습니다.

3

3

[국내성 천도]

부여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압록강 근처의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이는 고구려의 방어 체계를 강화하고 영토 확장의 기반을 다지는 중요한 결정이었습니다.

유리명왕은 부여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압록강 근처의 국내성(지금의 지안)으로 도읍을 천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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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국, 國) 의 고구려(현, 縣) 침공]

추모왕(주몽)이 '고구려(국가)'를 건국하기 이전부터 '고구려'라는 명칭은 존재했습니다.

중국의 정사인 '한서' 지리지에 따르면, 한나라는 기원전 107년경 현도군(玄菟郡)을 설치하며 그 아래에 3개의 현(縣)을 두었는데, 그중 첫 번째 현의 이름이 '고구려현(高句驪縣)'이었습니다. 이는 '고구려'가 본래 특정 지역과 그곳의 주민 집단을 지칭하는 고유 명사였음을 시사합니다.


결정적으로, '삼국사기' 유리명왕 33년(서기 12년) 조에는 주몽의 '고구려(국가)'가 "한(漢)나라의 고구려현을 공격하여 차지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주몽의 국가와 한의 행정구역이 명백히 다른 실체로서 일정 기간 공존했음을 증명합니다.  

이 기록은 고구려 초기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일부 중국 사서(예: Houhanshu(후한서))는 '한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현으로 삼아 현도에 속하게 했다'고 기록하여, 마치 고구려가 한사군의 일부에서 시작된 것처럼 서술합니다. 그러나 Samguk Sagi의 기록은 이를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즉, '고구려(국가)'가 '고구려현(한의 행정구역)'을 공격하여 복속시킨 것입니다.


이는 고구려가 한의 지방정권이 아닌, 독자적인 주권 국가로서 오히려 한의 세력을 축출하며 성장했음을 보여줍니다. '고구려'라는 이름은 이미 존재하던 지역명이었고, 주몽 집단은 이 이름을 채택하여 자신들의 국가명으로 삼았으며, 나아가 같은 이름을 쓰던 한의 행정구역까지 병합한 것입니다.


'고구려 국가'와 '고구려현'의 구분은 고구려가 건국 초기부터 한의 군현 체제와는 독립적인 주권 국가였음을 입증하는 핵심적인 근거가 됩니다. '고구려'라는 명칭의 연원은 국가 성립 이전으로 소급됩니다.

12

[신나라와의 전쟁 발발]

후한을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세운 왕망이 흉노 정벌을 위해 고구려군을 징발하려 했으나, 고구려가 이를 거절하자 신나라가 공격해왔습니다.

고구려 장수 연비가 전사했지만, 고구려는 신나라를 공격하며 강력한 대응을 보여주었습니다.

12년,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세운 왕망이 흉노 정벌을 위해 고구려군을 징발하려 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자 장수를 보내 공격하여 고구려 장수 연비(延丕)를 죽였습니다. 이에 고구려는 신나라를 공격하였습니다.

22

22

[부여 대소왕 살해]

대무신왕의 부여 정벌 감행 후, 장수 괴유가 부여의 대소왕을 죽였습니다.

이는 부여의 분열과 1만여 명의 부여 백성이 고구려에 귀순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사실상 부여를 흡수하는 결정적인 승리였습니다.

3대 왕 대무신왕(재위: 4년~44년)은 21년 부여 정벌을 감행하여 22년 2월 장수인 괴유가 부여 대소왕을 죽였습니다. 왕을 잃은 부여는 분열되어 대소의 동생은 압록곡 부근에 갈사부여를 세웠으며 7월에는 대소왕의 사촌동생이 부여 백성 1만 여 명을 데리고 고구려에 귀순해 사실상 부여를 흡수했습니다.

37

37

[고구려 건국]

부여에서 내려온 주몽이 졸본 지역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로 명명하며 1대 왕 추모성왕으로 즉위했습니다.

해씨에서 고씨로 왕실 성을 변경했습니다.

이것은 고구려의 위대한 여정의 시작이자, 한민족 역사에 길이 남을 대국의 탄생이었습니다.

시조 고주몽은 기원전 58년 출생이며 북부여 해모수의 아들이며, 강을 다스리는 신 하백의 외손자입니다. 이름 주몽(朱蒙)은 부여어로 활을 잘 쏘는 사람, 즉 신궁(神弓)이라는 뜻입니다. 어릴 때부터 활쏘기 재능이 탁월했던 그는 금와왕의 일곱 아들들의 시기를 받아 죽음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이에 협보, 오이, 마리와 함께 부여를 탈출해 엄리대수에 이르렀고, 자라와 물고기가 다리를 놓아줘 무사히 강을 건너 추격자들을 따돌렸습니다(어별성교). 졸본에 정착해 세력가 연타발의 둘째 딸 소서노와 결혼했으며, 비류국의 군장 송양을 활싸움으로 제압하고 투항을 받아냈습니다. 기원전 37년, 오녀산성(환런현)을 도읍으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 왕실 성을 고씨로 변경해 고주몽이 되었으며, 대관식에서 고구려 1대 왕 추모성왕(동명성왕)이 되었습니다. 즉위 후 송양의 비류국을 다물도라 바꾸고 관리를 임명했으며, 근방의 말갈족을 복속시켰습니다. 기원전 34년에는 졸본성과 궁궐을 완성했고, 기원전 32년 오이와 부분노를 보내 행인국을, 기원전 28년에는 부위염을 보내 북옥저를 정복했습니다. 기원전 24년 가을 8월, 부여에 남았던 어머니 하유화가 죽었습니다. 추모성왕의 전 소생 왕후 예씨의 아들 해유리는 기원전 37년 부여에서 태어나, 기원전 19년 추모성왕이 남긴 부러진 칼 조각을 찾아내 고구려로 찾아와 고유리가 되었고, 그해 4월 태자로 책봉되었습니다. 1년 후인 기원전 18년 소서노는 온조, 비류 등 자식 2명과 함께 남하하여 온조는 위례성에 백제를 건국했습니다. 고유리는 기원전 19년 동명성왕이 서거하자 고구려 2대 왕 유리명왕이 되었습니다. 기원전 18년 7월 다물후 송양의 딸을 왕비로 맞이했습니다. 기원전 9년, 고구려를 위협하던 선비족을 부분노의 계책으로 토벌했습니다.

[낙랑군 병합 및 한사군 정복 시작]

고구려는 한사군 중 하나인 낙랑군을 정벌하여 병합했습니다.

이는 오랜 기간 한반도인들을 지배하거나 공물을 받던 한사군을 정복하는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이었습니다.

이후 고구려군은 한사군을 완전히 정복하여 지배했고, 한사군 주민들은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32년 낙랑국을 정벌하여 지배했습니다. 37년에도 낙랑을 정벌하여 병합한 기사가 있는데, 이를 32년 낙랑 정벌의 연장선으로 보기도 하며, 독립적인 기록으로 판단하여 고구려가 한사군 가운데 하나인 낙랑군을 정벌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실상 낙랑군은 한반도인을 수장으로 삼고 고구려, 백제에 굴복한 뜻으로 공물을 바치는 등 고구려의 입장에서 긴 시간동안 한사군을 정복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고구려군은 한사군을 정복하여 지배해 한사군민들은 전멸하였습니다.

194

194

[진대법 제정]

고국천왕 시기에 평민 출신 을파소를 국상에 임명하고, 빈민 구제를 위한 사회보장제도인 '진대법'을 제정했습니다.

이는 후에 고려의 의창과 조선의 환곡에 영향을 준, 한국 최초의 의미 있는 제도였습니다.

제9대왕 고국천왕은 191년 평민 출신의 을파소(乙巴素)를 제2대 국상에 임명하였습니다. 194년에는 사회보장제도인 진대법(賑貸法)을 제정하여 빈민을 구제하였습니다. 후에 고려의 의창과 조선의 환곡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244

244

[관구검의 환도성 함락]

위나라의 관구검이 대규모로 고구려를 침공하여 환도성이 함락되고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동천왕은 유유의 계책으로 위나라 장수를 죽여 혼란을 일으키며 위기를 모면했지만, 수도를 임시로 평양성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고구려 역사상 가장 큰 위기 중 하나였습니다.

242년 동천왕은 장군 득래를 보내 조위의 요동지역 서안평을 침략하였습니다. 244년 유주자사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침공하였습니다. 동천왕은 관구검의 군대를 비류수(沸流水)에서 한 번, 양맥곡(梁貊谷)에서 한 번씩 격파했으나, 그 다음 벌어진 전투에서 아군이 패해 1만 8천 명이 죽었습니다. 동년 10월 관구검은 환도성(丸都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사람을 죽였으며, 현도태수 왕기(王頎)를 보내 도망친 왕을 추격했습니다. 동천왕은 유유(고구려)의 계책으로 위나라 장수 하나를 죽여 적을 혼란시킴으로써, 왕기의 군대를 물리치는 데 성공했습니다. 수도로 귀환한 동천왕은 환도성이 전화(戰火)를 입어 도읍으로 적당하지 않다고 여겨, 247년에 임시로 평양성(平壤城)을 쌓고, 수도를 임시로 옮겼습니다. 이때의 평양성은 지금의 평양직할시 일대가 아니라 독로강(將子江) 유역의 강계 지역으로 보거나 지안(집안)의 평지 지대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분명치 않습니다. 248년에 동천왕이 죽었으니 나라 사람들이 슬퍼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가 많았다고 합니다.

300

300

[봉상왕 폐위 및 미천왕 옹립]

흉년에도 백성을 돌보지 않고 궁궐 증축을 강행하던 폭군 봉상왕이 신하들의 불만을 사 결국 폐위되었습니다.

압록강에서 소금장수를 하던 고을불(미천왕)이 옹립되어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이는 고구려의 민생을 중시하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298년 9월, 흉년이 들었으나 봉상왕은 궁궐을 증축하는 공사를 강행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습니다. 봉상왕은 신하들의 간언을 듣지 않고, 백성들을 살피지 않았습니다. 300년에도 흉년이 들었으나 다시 궁궐을 증축하니 백성들이 흩어졌습니다. 이에 국상 창조리가 왕에게 백성을 돌볼 것을 간언하였으나 봉상왕은 오히려 왕권의 지엄함을 역설하며 창조리를 위협했습니다. 이에 창조리는 여러 신하들과 모의하여 봉상왕을 폐위하고 압록강에서 소금장수였다던 설이 있는 고을불을 맞이하여 왕으로 삼았습니다. 제15대 왕 미천왕이었습니다. 봉상의 들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봉상이라 했습니다.

315

315

[한사군 완전 정복]

미천왕은 즉위 초부터 한사군을 맹렬히 공격하여 302년 현도군 공격, 311년 서안평 정복으로 낙랑군을 고립시켰습니다.

313년 낙랑군, 314년 대방군을 정복했고, 315년 현도성을 재공격하며 마침내 한반도에서 한사군을 모두 멸망시켰습니다.

이로써 한사군 사람들은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미천왕이 등극하자마자 고구려에 의해 한사군은 존망을 거는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미천왕은 즉위 초부터 한사군을 치열하게 공격하였습니다. 한사군은 후한 멸망 이후 사실상 북쪽으로는 고구려 남쪽으로는 백제에 굴복하여 오랜 기간 한반도인들을 한사군의 지배자로 두거나 굴복의 뜻으로 공물을 보내는 등 생존하기 위해 여러 방면을 책을 썼지만 미천왕의 공격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302년에는 고구려군이 현도군을 공격하여 적 8천여 명을 사로잡았으며 311년에는 서안평(西安平)을 정복하여 낙랑군(樂浪郡)을 고립시키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미천왕은 313년에는 낙랑군을, 314년에는 대방군을 정복하여 한사군을 멸망시켰습니다. 미천왕은 315년에도 다시 현도성을 공격하여 한반도에서 한사군을 모두 정복하였고 끝내 요동까지 정벌하여 한사군 사람들은 절멸돼 역사에 나타나지 않게 됩니다.

342

342

[모용황의 고구려 침공]

전연의 모용황이 5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여 환도성을 함락시켰습니다.

고국원왕은 단신으로 피신해야 했고, 고구려 백성 5만 명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이는 고구려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패배 중 하나로 기록되었습니다.

뒤를 이어 왕이 된 제16대 왕 고국원왕 때 339년에 전연이 쳐들어와 신성에 이르렀습니다. 고국원왕이 동맹을 청하자 전연은 물러갔습니다. 이때 맺은 동맹 관계에 따라, 340년에 전연에 조회하기도 했습니다. 342년 겨울에 모용황은 용성(龍城)으로 천도한 후,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로 쳐들어왔습니다. 모용황은 왕우가 이끄는 1만 5천의 소수 군대를 평탄한 북쪽 길로 보내고, 자신은 한수와 함께 5만 대군을 이끌고 험난한 남쪽 길을 택해 공격하는, 기만전술을 썼습니다. 하지만 이를 알아채지 못한 고국원왕은 북쪽으로 왕제 무(武)가 이끄는 정병 5만을 파견하고, 자신은 소수의 군대로 남쪽을 지켰습니다. 결국, 남쪽 전투에서 크게 패한 고구려군 중에서 장군 아불화도가(阿佛和度加)가 전사하고, 환도성(위나암성)이 함락되었으며, 고국원왕은 단신으로 단웅곡(斷熊谷)으로 피신하였습니다. 고국원왕을 추격한 전연군은 북쪽 길에서 고국원왕의 동생 무(武)의 군대를 만나 크게 패하여 퇴각했습니다. 전연군은 퇴각하는 길에 고구려 백성 5만 명을 잡아갔습니다. 343년에 고국원왕은 동생 무를 보내 전연에 신하의 예를 갖추고, 부왕인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받았으며, 그 해 평양의 동황성(東黃城)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371

371

[고국원왕, 백제와의 전투 중 전사]

백제의 근초고왕이 평양으로 진격해오자 고구려는 치열하게 맞섰으나, 결국 고국원왕이 백제와의 전투 중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고구려 왕이 적국의 침공으로 전사한 비극적인 사건으로, 백제와의 오랜 악연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369년에 백제가 마한을 정복하러 간 틈을 타, 고국원왕은 보·기병 2만 명을 이끌고 치양성(현 황해남도 배천군)으로 진격하였습니다. 그러나 근초고왕의 말 말굽을 상하게 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달아났던 백제인 사기(斯紀)가 다시 백제에 투항하여, ‘고구려의 군사가 많기는 하나 모두 숫자만 채운 허세일 뿐 날래고 용감한 자들은 붉은 깃발의 군대뿐’이라는 고구려의 군사정보를 백제의 근구수 태자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이에 고구려군의 주력부대는 백제군의 집중공격을 받고 무너져 내려 5000여명의 피해를 입고 고국원왕은 목적을 달성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백제에게 수곡성(지금의 황해도 신계군)까지 영토를 내주고 말았습니다. 371년에 고국원왕은 복수를 위해 군사를 일으켜 백제에 재침공하였습니다. 하지만 패하(대동강) 강가에 군사를 매복한 근초고왕이 기습적으로 공격하자, 고구려군은 크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기세를 탄 근초고왕은 동년 10월에 정예 군사 3만을 이끌고 평양으로 진격해 왔고, 고구려군은 이를 어렵게 물리쳤으나 고국원왕이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고국원왕은 고국(故國)의 들原에 모셔졌습니다. 이때부터 백제와의 악연이 시작되어 백잔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372

372

[소수림왕의 국가 기틀 마련]

소수림왕은 한국 최초로 불교와 도교를 도입하고, 한국 최초의 교육기관인 태학을 설립하여 유교 이념을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중앙집권국가의 토대인 율령을 반포하여 고구려를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로 완성했습니다.

이는 고구려 전성기의 기틀을 마련한 매우 중요한 업적이었습니다.

고국원왕의 맏아들 제17대 왕 소수림왕은 전진과 교류하여 한국 최초로 불교와 도교 등을 도입하고 한국 최초의 교육기관인 태학(太學)을 받아들여 유교의 이념을 받아들이고 인재를 육성해 관리를 뽑았습니다. 또한 중앙집권국가의 토대인 율령을 반포하여 고구려를 중앙집권국가로 완성하였습니다. 소수림왕이 닦아놓은 이러한 제도들을 바탕으로 후임인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강력한 국력으로 정복전쟁을 펼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전연을 공격하였고 전연의 존망이 걸린 전쟁이 시작되었으나 결국 고구려는 요동지역을 정복하게 됩니다.

391

391

[광개토왕 즉위 및 독자적 연호·칭호 사용]

광개토왕은 1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한국 최초의 연호 '영락'을 반포하고, 군주 칭호를 '태왕'으로 격상했습니다.

이는 고구려가 더 이상 중국의 제후국이 아닌,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진 자주적인 대제국임을 선포한 대사건입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정복 활동에 나섰습니다.

소수림왕의 손자이자 고국양왕의 아들로 태어난 광개토왕은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 호태왕(好太王)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광개토대왕은 17살에 나이에 391년 왕위에 올라 즉위하면서 한국 최초의 연호를 반포해 영락(永樂)이라 명명하고, 또한 군주를 왕에서 태왕(太王)으로 격상해 부르게 하였습니다. 그 후 바로 정복활동에 나섰습니다.

396

396

[광개토왕, 백제를 속방화하다]

광개토왕은 대규모로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이북의 58개 성과 700여 개 촌락을 점령하고 위례성을 포위했습니다.

백제 아신왕에게 '영원한 노객이 되겠다'는 항복을 받아내고, 그의 동생과 대신 10명을 인질로 잡으며 백제를 사실상 속방으로 만들어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이는 고구려의 남진 정책의 큰 성공이었습니다.

고담덕은 18살이던 392년 7월 군사 4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여 석현성 등 10여 개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백제의 왕 진사왕은 광개토대왕이 군사를 부리는 데 능하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막지 못하니 한수(漢水) 북쪽의 여러 부락들이 다수 함락되었습니다. 승기를 탄 고구려는 10월에 백제 북방의 천혜의 요새이자 중요지인 관미성을 20일에 걸친 포위 끝에 쳐서 함락시켰습니다. 395년에는 패수에서 백제군 8000여 명을 생포하거나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396년 고구려는 대대적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아리수 이북의 58개 성, 700여 개 촌락을 점령하고 위례성을 포위하였습니다. 이때 백제 아신왕에게서 '영원한 노객(奴客)이 되겠다.'는 항복을 받아 아신왕의 동생과 백제의 대신 10명을 인질로 잡고 백제를 사실상 속방으로 만들어 개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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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 '고려(高麗)'국호 공식 사용]

오랫동안 학계는 5세기 장수왕(재위 413~491) 대에 '고구려(高句麗)'가 공식적으로 '고려(高麗)'라는 국호로 변경되었다고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충주 고구려비(중원 고구려비)에 대한 2019년 3D 스캐닝 및 RTI 촬영 등 최첨단 기법을 동원한 재판독 연구 결과, 비석의 첫머리 제액(題額)에서 'Yongle 7년(永樂七年)'이라는 연호가 판독되었습니다.


'영락(永樂)'은 광개토대왕의 연호이며, 영락 7년은 서기 397년에 해당합니다. 이 비석이 '고려태왕(高麗太王)'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어, '고려'라는 국호의 공식 사용 시점이 장수왕이 아닌 광개토대왕 대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충주 고구려비의 397년 건립설 이 학계의 정설로 확고히 자리 잡는다면, 이는 고대사 연구의 판도를 바꾸는 발견입니다. 광개토대왕은 '태왕(太王)'(황제급 군주) 칭호, '영락'이라는 독자 연호를 사용하며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天下觀)을 선포했습니다.


만약 이때 '고구려'가 아닌 '고려'라는 국호를 공식화한 데 이어 별도의 연호까지 사용했다면 중국과 대등한 제국으로서의 정체성을 한층 더 강화하려는 의도였을 수 있습니다. 즉, '고려'라는 국호의 사용은 광개토대왕의 고려 제국화 프로젝트와 맞물려 있었던 것입니다.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이 국호를 변경했다는 가설은 현재까지의 통설이지만, 397년설 이 대두되면서 '고려'라는 국호의 사용 시점은 고구려의 최전성기인 광개토대왕 시기까지 소급될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이는 '고려'라는 이름이 가진 제국적 함의를 더욱 부각시킵니다. 물론, 학계에서는 이 판독 결과에 대해 '7년'이라는 글자는 인정하지만, 전체적인 연대 해석에는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는 입장도 공존합니다.

397

400

400

[광개토왕, 신라 구원 및 가야 연맹 재편]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광개토대왕은 5만 대군을 파견하여 신라를 침공한 백제, 가야, 왜의 연합군을 금관가야 종발성까지 추격하여 격파했습니다.

이로 인해 금관가야의 세력이 붕괴하고 대가야 중심의 후기 가야 연맹이 시작되었으며, 신라는 고구려의 보호국이 되어 조공을 바치는 등 약 백여 년간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됩니다.

이는 동북아시아의 판도를 바꾼 대사건이었습니다.

광개토대왕은 399년에 평양으로 순행하였습니다. 백제와 왜, 가야는 신라를 공격하고, 신라는 평양으로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습니다. 광개토대왕은 400년에 신라에 5만 대군을 파견하여 백제ㆍ가야ㆍ왜의 연합군을 물리쳤습니다. 이때 연합군은 금관가야 종발성까지 퇴각하였고, 고구려군은 금관가야 지역까지 쫓아가 연합군을 격퇴시킵니다. 학계에서는 이때 금관가야의 세력이 급속도로 약해져, 금관가야가 주도하던 전기 가야 연맹이 붕괴하고 대가야가 주도하는 후기 가야 연맹이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고담덕은 400년에 신라를 구원하면서 신라 왕을 내물 마립간에서 실성 마립간으로 교체합니다. 이후 고구려군은 백여 년 동안 신라 땅에 머물려 신라에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신라는 고구려에게 조공하는 보호국이 됩니다. 404년에는 대방(帶方) 지역으로 쳐들어 온 백제와 왜, 가야의 연합군을 궤멸시켰습니다.

404

404

[광개토왕, 후연 정벌 및 요동 확보]

후연의 용성까지 정벌하여 모후와 왕비를 사로잡았고, 연군(현 베이징 근방)까지 공격했습니다.

이후 요동성과 목저성에서 후연군을 격파하며 요동 점령을 확고히 하고, 5만 군대로 후연군을 대파해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하고 6개 성을 점령했습니다.

후연은 고구려에 한족 공녀를 상납하는 굴욕을 겪으며 고구려의 압도적인 위력을 인정했습니다.

400년 2월에 고구려 주력군이 신라에서 왜군을 격퇴하고 있을 때 후연 왕 모용성은 신성(新城)과 남소성(南蘇城)을 공격합니다. 하지만 모용성은 내부에서 살해당했고 이에 고담덕은 보복전을 펼쳐 402년에 후연의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며 404년에도 후연의 용성(現朝阳)을 정벌하여 모용성 모후 정씨(丁氏)와 난왕비를 사로잡고 철수하였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연군(燕郡)까지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 연군은 지금의 베이징 근방에 위치한 지역으로 이 기록에 따라 베이징 일대까지 정복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를 회복하기 위해 쳐들어온 후연군을 405년 요동성, 406년 목저성(木抵城)에서 격파하여 요동 점령을 확고히 하였습니다. 또한 407년에는 5만 군대를 동원하여 후연 군대를 격파하여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하고 돌아오는 길에 후연의 6개 성을 점령하였습니다. 후연(後燕)은 광개토대왕에게 한족(漢族) 공녀들을 상납하였습니다. 후연을 더욱 압박하기 위해서 남연(南燕)과 우호관계를 맺기도 하였습니다. 고구려의 압박을 받은 후연은 고구려계인 고운(북연)이 모용희를 죽이고 후연을 멸망시켰고 북연을 건국하자 408년에 우호관계를 맺음과 동시에 사실상 북연을 속방으로 삼아 서쪽 국경을 안정시켰습니다.

410

410

[동부여 완전 복속]

광개토왕은 이미 고구려의 속방이던 동부여를 완전히 굴복시켰습니다.

이로써 고구려는 만주 지역의 패권을 확고히 하고, 북방 영토를 안정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410년에는 이미 고구려의 속방이던 동부여(東夫餘)를 완전히 굴복시켰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동부여가 이미 고구려의 속국으로 존속하고 있었으며, 이때의 동부여 정벌로 완전히 멸망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또한, 일반적으로 광개토왕 평생의 업적으로 해석되는 64개 성, 1,400촌의 정복 기록을 5개의 압노(鴨盧), 즉 동부여의 5부 전체를 복속시켜 동부여를 완전히 멸망시켜서 얻은 결과로 보는 주장도 있습니다.

427

427

[장수왕의 평양 천도]

장수왕은 국내성의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종묘사직을 평양성으로 옮겼습니다.

이는 수도를 남쪽으로 천도함으로써 한반도 남부 지역으로의 진출 기반을 마련한 동시에, 고구려가 대륙의 강자로 발돋움하는 중요한 전략적 전환점이었습니다.

장수왕은 광개토대왕의 아들로, 연가(延嘉), 연수(延壽), 건흥(建興) 등의 연호가 새겨진 유물이 일부 발견되고 있어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414년에 광개토왕릉비를 건립하여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렸으며, 장수왕은 내부적으로 왕권의 위상을 높여서 국내성(지금의 지안)의 귀족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427년 종묘사직을 평양성(平壤)으로 천도하였습니다. 장수왕은 대성산성(大城山城)을 쌓고 안학궁(安鶴宮)을 건설해 왕실의 위엄을 높이고 왕권을 강화하였습니다.

435

435

[장수왕, 북연 멸망시키고 주민 이주]

북위의 위협을 받던 북연의 왕 풍홍이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하자, 장수왕은 수만 명의 고구려군을 이끌고 북연의 수도 용성을 침공했습니다.

풍홍과 모용씨 황족, 용성 주민들까지 모두 고구려 국내성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로써 고구려는 북연에 대한 종주권을 확고히 했고, 중국 대륙 정세에도 깊숙이 개입했습니다.

435년, 북위는 북연을 위협하였고 북연의 왕 풍홍(馮弘)은 종주국 고구려에 밀사를 보내 장수왕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이에 장수왕은 장군 갈로맹광(葛盧孟光)으로 하여금 고구려군 수만 명을 이끌고 쳐들어가서 북연의 수도 용성(龍城)에 있던 모용씨 황제 일가족과 풍홍 그리고 용성 주민들을 전부 고구려 국내성으로 끌고 갔습니다. 고구려로 끌려온 풍홍은 미천한 대접을 받자 행패를 부렸고 몰래 사신을 보내 송나라에 망명을 요청하였으나, 이 사실을 알게 된 장수왕은 풍홍을 살해하였습니다. 이때 송나라 사신 왕백구가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군을 공격하여 장수 고구가 죽었는데, 장수왕은 다시 왕백구를 토벌하여 인질로 붙잡았습니다. 송나라는 왕백구를 송으로 보내달라고 간청하였고 장수왕은 왕백구를 송으로 압송하였습니다. 고구려와 외교 관계를 망칠 수 없었던 송나라에서는 왕백구를 감옥에 가둬 고구려의 눈치를 보았습니다.

475

475

[장수왕, 백제 위례성 함락 및 개로왕 살해]

북위에 도움을 요청하며 고구려를 자극했던 백제의 개로왕에게 장수왕은 승려 도림을 첩자로 보내 국력을 소모시켰습니다.

철저한 준비 끝에 장수왕은 백제의 수도 위례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사로잡아 살해하는 전무후무한 대승을 거두며 백제를 다시 속방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는 고구려의 남진 정책의 절정이자, 삼국 정세의 결정적인 전환점이었습니다.

중국과의 외교 관계가 안정된 가운데 장수왕은 백제를 정벌하는 남진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어 대항하였기 때문에 454년부터 신라와 적대관계가 되었습니다. 468년에는 신라의 실직주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백제가 남쪽 변경을 침공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유연(나라)과 지금의 내몽골 대흥안령 산맥 인근에 위치한 지두우를 분할 점령하려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472년, 백제 개로왕은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해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북위는 이 사실을 고구려에 알려주었습니다. 이에 고구려는 백제와 전면전을 준비하는 한편 승려 도림(道琳)을 첩자로 보내 백제의 내정을 정탐하였습니다. 도림은 바둑으로 개로왕의 환심을 사고 개로왕에게 무리한 토목공사를 일으키게 사주하여 백제의 국력을 소모시켰습니다. 이러한 물밑작업을 마친 장수왕은 475년에 백제를 공격하여 수도 위례성(위례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사로잡아 살해하는 큰 승리를 거두고 백제를 다시 속방으로 만들었습니다. 481년에는 신라를 공격하여 호명성 등 7개 성을 함락시키고 미질부까지 진격하였습니다.

491

491

[장수왕 서거]

고구려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장수왕이 98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사망 소식에 북위 효문제조차 직접 애도를 표하고 '강왕'이라는 시호를 내릴 정도로, 장수왕은 대내외적으로 압도적인 위상을 가졌던 군주였습니다.

말년의 장수왕은 정복 전쟁을 그만두고 내치에 힘썼으며, 중국과의 외교 관계도 계속 우호적으로 유지하여 안정을 구가하였습니다. 그리고 491년 12월, 9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북위 효문제는 특별히 직접 애도를 표했으며 관작을 추증하고 강왕(康王)이라 시호를 내렸습니다.

494

494

[문자명왕, 부여 복속 및 최전성기]

장수왕의 뒤를 이은 문자명왕이 부여의 왕이 처자를 데리고 고구려에 항복함으로써 부여를 복속시켰습니다.

문자명왕 치세에 고구려는 최전성기를 구가하며 광대한 영토와 국력을 자랑했습니다.

장수왕의 뒤를 이은 문자명왕 휘 고나운(高羅雲)은 494년 부여의 왕이 처자를 데리고 고구려에 항복하여 부여를 복속시키는 등 장수왕의 정책을 이었으며 문자명왕 치세에 고구려는 최전성기를 구가하였습니다. 문자명왕의 뒤를 이은 안장왕대까지 고구려는 태평성대를 이뤘으나 안원왕대에 결국 고구려의 외척인 추군 세력과 세군 세력이 자기네 소생의 왕자를 옹립하려고 대판 싸움을 벌이기에 이르렀는데 추군 측이 승리를 거두었으며 결과 세군 측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이 족히 2,000명이 넘었다고 전합니다. 신라의 한강유역 점령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598

598

[수 문제의 1차 고구려 침공 실패]

중국을 통일한 수 문제가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했습니다.

수군은 평양으로 향하던 중 기록적인 폭풍을 만나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철수했으며, 수륙 병진책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 전쟁으로 고구려는 수나라의 엄청난 국력을 실감했지만, 강력한 방어력으로 침략을 막아냈습니다.

제25대왕 평원왕은 559년 즉위하여 도읍을 대성산성에서 평양성으로 이전하였습니다. 한편 북주의 우문옹이 침략해오자 평원왕의 부마인 온달이 막아냈습니다. 온달은 후에 한국 온(溫)씨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한편 북주(北周)에서는 568년 양견의 아버지에 양충이 죽자 양견이 대장군과 수국공을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양견은 우문옹과 뒤를 이은 우문윤의 총애를 받았으며 우문윤이 죽자 권력을 독점하였습니다. 이미 북주 우문옹이 중국 통일을 진행했었으나, 신중한 양견은 세밀하게 준비했고, 장성을 복구하여 북쪽 돌궐에 대한 방어를 강화했고, 한구(邗溝) 개착(開鑿)으로 회수와 장강을 연결해서 보급로를 확보합니다. 뒤이어, 곧 북조 괴뢰정권인 후량을 병합하여 전초기지로 삼았고. 588년 문제는 기어코 진나라에 원정군을 파견하였습니다. 이 시기 원정군 총사령관은 차남 진왕 양광(후에 수 양제)이었고, 과장이지만 51만 8천이라는 대군으로 다음해(589년) 진나라의 수도 건강을 손쉽게 함락했습니다. 진나라 황제 진숙보는 우물에 숨지만 잡혔습니다. 진나라 멸망 이후(184년 황건적의 난 때부터로~ 약 405년) 기나긴 분열 시대가 종결되었고, 수 문제는 마침내 중국을 통일하였습니다. 사회가 안정되자 인구는 2천600여 만 명(멸망 무렵)에 이르도록 증가했습니다. 그 해 말에 양견은 수국공에서 수왕(隋王)의 자리에 오른 뒤, 이윽고 다음해 우문천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수나라를 건국해 수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수 문제의 치세를 당시 연호에 의거해 개황(開皇)의 치(治) 라고 불렀습니다. 수는 변방을 안전시키기 위해 돌궐과 고구려를 견제하였습니다. 수나라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의 영토를 염탐하였고, 그 후에도 몇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내 지형을 알아보게 하였습니다. 이에 평원왕 역시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동태를 살폈으며, 마침내 수 문제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비밀리에 군대를 양성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평원왕은 이에 대비하여 방어 준비를 하였습니다. 수 문제는 이 사실을 듣고 글을 보내 이를 꾸짖었습니다. 수 문제는 그해 6월에 한왕 양량과 왕세적을 대원수로 임명하고, 주라후에게 수군을 맡겨 수륙군 30만 명을 동원하여 수륙 병진책으로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하였습니다. 주라후의 수군은 동래에서 출발하여 평양으로 향하였으나 도중에 폭풍을 만나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철수했습니다.

612

612

[수 양제의 세계 최대 규모 1차 고구려 침공]

수 양제가 총 113만 3800명이라는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세계 최대 규모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습니다.

행렬 길이가 1천여 리에 달했고, 병참 지원군까지 합치면 300만 명에 육박하는 엄청난 병력이었습니다.

이 대규모 원정은 고구려의 수성전, 청야전술, 그리고 요동의 혹독한 기후에 부딪혀 사실상 와해되었습니다.

양제는 604년 즉위하자마자 대대적인 토목 공사를 일으켰습니다. 만리장성을 새로이 쌓게 하였으며, 아버지가 중단시킨 대운하의 공사를 재개시켰습니다. 이 대운하는 북경에서 항주까지 짓는 대공사로, 이에 백성들의 불만이 커져 갔지만 그것도 모자라 양광은 수도 장안 대신 낙양에 동경(東京)을 쌓게 하여 백성들의 노고를 더욱 크게 만들었습니다. 대운하는 이후 남쪽의 장강과 북쪽의 황하를 연결시켜서 남북 융합에 크게 이바지하기도 했습니다. 양제는 대외적으로 강경한 입장을 취했습니다. 북방에서 중국을 넘보는 돌궐과 토욕혼을 공략하는 데 성공하여 영토는 넓어졌습니다. 그러나 양제는 이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했고,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요구했으나 고구려의 영양왕은 이러한 요구를 부당하다 생각하고 거절하였습니다. 그 후 수차례 사신을 보내 조공과 입조하라고 압력을 넣었지만 고구려는 이에 전혀 응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양제는 아버지 문제가 축적한 모든 부를 탕진해서 고구려를 공격하고자 했습니다. 양제는 총3번에 걸쳐 고구려를 공격하였습니다. 612년 정월 수 양제는 113만 3800명을 이끌고 대대적인 고구려 공격에 나섰습니다. 출발만 해도 40일이 걸렸으며 그 행렬이 자그마치 1천여리(400km)가 되었습니다. 좌장군 우문술의 군사 45만명, 우장군 우중문이 이끄는 군사 45만명의 대규모 출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수 양제 자신이 이끄는 군사 수만해도 26만명, 행렬이 200(73km)여리에 달했습니다. 거기다 병참지원까지하면 약 300만명에 달했습니다.

612

612

[세계 군사사 빛낸 살수대첩 대승]

고구려의 막리지 을지문덕이 살수(청천강)에서 수나라 우문술, 우중문이 이끄는 30만 5천 명의 별동대를 괴멸시켰습니다.

이는 세계 군사 역사에 길이 남을 압도적인 대승으로, 수나라의 거대한 침공을 좌절시키고 고구려의 건재함을 보여준 결정적인 전투였습니다.

이후 을지문덕의 후손들은 한국의 목천 돈씨가 되었습니다.

612년 7월 고구려의 막리지(현 총리) 을지문덕이 살수(薩水, 청천강)에서 우문술, 우중문에 30만 5000명을 괴멸시키고 이어 강이식(姜以式), 고건무(高建武, 영류왕)등 고구려 명장들의 맹활약으로 원정은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을 통해 고건무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영양왕의 뒤를 이어 영류왕이 되었습니다. 이후 을지문덕의 남은 후손들은 한국의 목천 돈씨(木川 頓氏)가 되었습니다.

617

617

[고구려 전쟁의 여파로 수나라 멸망]

고구려와의 전쟁에 필요 이상의 국력을 쏟아부은 수나라는 결국 내부의 반란으로 멸망했습니다.

수나라의 멸망은 고구려가 대제국을 상대로 승리하여 동북아시아의 질서를 재편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이후에도 수 양제는 고구려를 3차, 4차 침입하였으나 수나라 내부의 반란으로 철수하거나 무마되었습니다. 고구려와의 전쟁에 필요 이상의 국력을 몰아넣은 수나라는 617년 당 고조 이연(李淵, 당 고조)등의 반란으로 멸망하였습니다.

642

642

[연개소문의 막리지의 난]

영류왕의 친당 노선과 당나라 간첩의 활동에 불만을 품은 연개소문이 '막리지의 난'을 일으켜 영류왕과 온건파 귀족들을 살해했습니다.

그는 '대막리지'라는 새로운 직위를 신설하고 사실상의 1인자가 되어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이는 고구려의 대외 정책을 강경 노선으로 전환시키고, 연씨정권의 시작을 알리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고구려-수 전쟁에서 2인자에 해당하는 막리지에 있던 을지문덕과 함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등공신 영류왕은 강경노선이었던 영양왕에 뒤를 이어 즉위한 후 줄곧 친당나라 노선을 유지해왔습니다. 왕을 중심으로 국내성과 온건파들이 득세하여 여론을 좌지우지하였습니다. 영류왕은 당나라와 고구려-수 전쟁 당시 잡혀갔던 양국의 포로들을 교환하고 도교를 수입하는 등 다방면에서 서로 교류하였습니다. 624년에는 당나라로부터 상주국 요동군공 고구려왕(上柱國遼東郡公高句麗王)에 책봉되기도하여 평양성내의 강경파들의 반감을 샀습니다. 626년 황태자 이건성을 죽이고 당 고조를 압박해 선위로써 찬탈한 당 태종 이세민이 제위에 오르자 영류왕은 발맞춰 사신을 보내 교류하였습니다. 백제와 신라가 당에 고구려가 당나라로 가는 길을 막는다고 호소하자, 당은 고구려에 백제와 신라와 화친하라고 종용했습니다. 영류왕은 당 태종이 한 요구를 수용해 백제와 신라와 화친했습니다. 641년 당 태종은 왕태자의 예방에 답하고자 직방낭중 진대덕을 고구려에 보내겠다는 서신을 보낸 문제로 강경파와 온건파는 재대립하였습니다. 당의 직방낭중 진대덕은 고구려에 들어와 요수에서 평양성(요양시)까지 고구려의 지리를 자세히 관찰하고 각 성에 배치된 군사력까지 면밀하게 조사하는 등 간첩으로서 활동하였습니다. 사신 진대덕은 고구려에 머물며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고구려가 이긴 사건을 기념하는 승전탑을 허물고, 전사자의 유골을 모아 장례를 치러서 고구려의 민족감정을 자극하고, 고구려군에 잡힌 수나라 군사들을 만나며 고구려의 실정을 면밀히 조사하였습니다. 영류왕은 이에 항의하거나 추방을 하지 않고 진대덕에 대한 강경파들의 불만을 무시했습니다. 당에 귀국한 진대덕은 곧바로 당 태종에게 고구려를 공격하라고 간언했습니다. 고구려는 수나라를 뒤이은 당나라와도 대치하였습니다. 고구려는 당의 공격에 대비하여 천리장성을 쌓았는데, 연개소문은 이 공사를 감독하면서 세력을 키웠습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중앙 귀족이 연개소문을 제거하려 하자 연개소문은 642년 10월 평양성(고구려)에서 막리지의 난을 일으켜 영류왕을 비롯한 귀족을 모두 살해하고, 보장왕을 왕으로 세운 뒤 2인자였던 막리지보다 더 높은 사실상의 1인자 대막리지라는 직위를 신설하고 그 자리에 올라 정권을 찬탈해 이후 642년부터 668년까지 26년간 연남생, 연남건 등이 대대로 권력을 세습하는 연씨정권을 수립했습니다. 642년 안시성주(양만춘)이 반기를 들자 연개소문이 군대를 보내 공격하였습니다.

643

643

[연개소문의 불교 탄압 및 도교 장려]

연개소문은 불교를 탄압하고 도교를 국교로 장려했습니다.

이는 300년간 고구려 국교였던 불교 세력을 견제하고, 당나라와의 관계에서 실리를 추구하려는 연개소문의 강력한 통치 의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불교 승려 보덕이 백제로 이민가는 등 불교 세력이 축출되기도 했습니다.

고구려는 4세기경 소수림왕대에 불교를 도입하고 6세기경까지 국교로 유지해왔으나 7세기경 연개소문이 불교를 탄압하고 승려들을 추방하여 한편으론 당나라로부터 도교를 수입하여 도교를 국교로 장려하였습니다. 643년(보장왕 2년) 3월 연개소문이 왕에게 아뢰기를, “삼교(三敎)는 비유하자면 솥의 발과 같아서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유교와 불교는 모두 흥하는데 도교는 아직 성하지 않으니, 이른바 천하의 도술(道術)을 갖추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엎드려 청하오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교를 구하여 와서 나라 사람들을 가르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대왕이 매우 그러하다고 여기고 표(表)를 올려서 도교를 요청하였습니다. 당 태종이 도사(道士) 숙달(叔達) 등 8명을 보내고, 이와 함께 노자의 도덕경을 보내주었습니다. 왕이 기뻐하여 불교 사찰을 빼앗아 이들을 머물도록 하였습니다. 연개소문이 불교를 탄압한 것에 대해선 여러 가지 시각이 있으나 4세기 소수림왕이 불교를 들여오고 300년의 기간동안 고구려의 국교였기 때문에 그 세력이 강하고 정계에도 그 힘이 깊숙히 뿌리내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연개소문은 도교를 통해 불교세력을 견제하려하였고, 이에 650년 고구려의 반룡사 승려 보덕이 백제로 이민가는등 고구려에서 불교세력이 축출되었습니다. 이후 고구려 역사에서 불교인이 등장하는 것은 연씨정권의 3대 대막리지였던 연남건의 책사(군사)로 활동한 신성(승려)이 있습니다.

645

645

[안시성 전투 승리]

당 태종이 5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여 요동성을 점령하고 안시성으로 진군했습니다.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군 15만 명이 대패했지만, 안시성주 양만춘의 뛰어난 지휘로 안시성 전투에서 당 태종의 수만 명 병력을 괴멸시키며 침략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당 태종이 양만춘의 화살에 눈을 잃었다는 야설이 전해질 만큼, 안시성 전투는 고구려의 불굴의 의지를 보여준 역사적인 대승이었습니다.

이후 연개소문은 대외 강경책을 펼쳐 648년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는 빌미를 제공하였습니다. 644년 11월, 당 태종은 옛 한군현을 되찾고 난신적자 연개소문을 치겠다며 수륙 양면으로 약 5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해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이때 당군은 각종 공성용(攻城用) 기구를 총동원했습니다. 당 태종은 다음해 2월에 낙양(洛陽)을 출발하여 직접 원정길에 올랐습니다. 이세적이 이끄는 선발대와 당 태종이 직접 지휘하는 친정군, 그리고 장량이 지휘하는 수군으로 크게 3갈래로 침입해 왔으며 요동성을 점령한 뒤 안시성 방면으로 진군하였습니다. 645년 6월 20일 고구려는 고정의, 고연수, 고혜진이 이끄는 15만의 대군을 주필산에 보내 당 태종의 10만 대군과 싸우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 태종의 전술에 속아 고구려군이 패배하여 3만여 고구려군이 투항하였습니다. 당 태종의 도합 20만 대군은 주필산 전투에서 승리한 후 안시성으로 진군하였습니다. 그러나 안시성 전투에서 안시성주(양만춘)에게 가로막혀 실패하였습니다. 이날 토산 전투, 그리고 그 뒤 펼쳐진 토산 쟁탈전에서 당군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고구려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또 3일간의 토산 쟁탈전 이전의 석달간 공방전에서 당군은 하루 2~3천 명의 피해를 입었다고 전해집니다. 하루 피해인원을 평균 2500명이라 쳐도 무려 20만이 넘는 사상자를 낸 것이었습니다. 고구려측도 안시성 군사 중 요서전에 따라갈 수 있을만한 인원이 3만이 채 안되었다고 합니다. 전투는 그만큼 치열했는데, 당 태종이 안시성주 양만춘의 화살에 맞아 한쪽 눈을 잃었다는 야설도 있습니다. 당의 공격을 막아낸 안시성의 성주에 대하여 역사서에는 어떠한 자료도 없이 그냥 "안시성의 성주"로만 기록되고 있었습니다. 특히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안시성주에 대해 크게 칭송하면서 이름이 남아있지 않은 것을 한탄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 시대 송준길(宋浚吉)의 동춘당선생별집과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는 안시성 성주의 이름을 "양만춘(梁萬春)" 혹은 "양만춘(楊萬春)"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668

668

[연씨정권 내분과 고구려 멸망]

연개소문 사후, 그의 아들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형제 간에 권력 다툼이 발생했습니다.

연남생이 당나라에 투항하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마저 신라에 투항하는 등 지배층의 심각한 내분으로 고구려는 약해졌습니다.

결국 668년, 나·당 연합군의 총공격으로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고구려인들은 당나라 내륙으로 강제 이주되었고, 안동도호부가 설치되어 고구려 영토를 통치했습니다.

위대한 제국의 비극적인 최후였습니다.

이후에는 당나라가 소모전으로 지속적으로 고구려를 공격해 왔으나 그 때마다 격퇴하였습니다. 하지만 동맹국인 백제가 신라·당 연합군에게 패하였고 고구려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었습니다. 백제를 멸망시킨 그 이듬해인 661년(보장왕 20년)에 당나라는 고구려를 공격하였고 평양성이 포위되는 위기를 처했으나 당나라군을 패망시키고 고구려는 승리하였습니다. 고구려의 국력은 쇠퇴해 가고 있었고 무천진 선비족이 한족들을 예속시켜 세운 당나라는 국력이 세지고 있었습니다. 60여 년에 걸친 수·당과의 전쟁으로 백성의 생활은 파탄에 직면했고, 국가 재정은 파탄하였습니다. 그 위에 동맹국인 백제의 멸망과 고구려 지배층의 내분은 더욱 그 국력을 약화시키고 있었습니다. 664년에서 666년 사이, 보장왕 23년 ~ 25년 연개소문이 죽고 맏아들 연남생이 부친을 대신하여 막리지가 되었습니다. 연남생은 아버지의 대를 이어 대권을 장악한 뒤, 지방의 여러 성을 순시하였습니다. 이 틈을 타 동생 2남 연남산·3남 연남건이 정변을 일으켜 수도를 장악하였습니다. 이후 형 연남생의 아들 연헌충을 죽이고 왕명을 빌려 소환하자, 연남생은 국내성으로 달아났습니다. 그 곳 세력을 규합해 고구려 중앙정부에 대한 반격에 나섰습니다. 먼저 오골성(烏骨城)을 치는 한편 당나라에 대형(大兄) 불덕(弗德)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려 하였으나 요동을 통과하지 못하였습니다. 고구려 중앙정부의 압력이 가해지자, 연남생은 남으로 내려가 고구려 수도 평양을 치는 대신 서북 요동방면으로 진로를 바꾸었습니다. 연남생은 또다시 대형 염유(冉有)를 다시 당나라에 보내 구원을 청하였으나 회답이 없자, 이번에는 아들 연헌성(淵獻誠)을 당나라에 보내어 거듭 구원을 청하였습니다. 666년 6월, 마침내 당 고종이 좌효위 대장군 계필하력(契苾何力)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연남생을 맞이하게 하였습니다. 연남생은 이에 고질, 고현, 책성도독 이타인, 고족유 등 국내성의 귀족들 및 부하들을 데리고 탈출하여 당 나라로 도주하였습니다. 666년 6월 7일, 우효위대장군 계필하력을 요동도안무대사로 임명하여 병사를 이끌고 연남생을 지원합니다. 연헌성을 우무위장군으로 임명하여 길안내를 맡게 합니다. 한편 고구려에서는 666년 8월, 보장왕이 연남건을 대막리지로 삼아 내외의 군사에 대한 직무를 겸직하도록 하였습니다. 666년 12월, 고구려가 형제간 내부 권력투쟁이 발생하는 동안 연개소문의 동생이자, 연남생·연남건 형제의 숙부인 고구려의 대신 연정토가 고구려 남쪽의 12성, 763호, 3,543명을 데리고 신라에 투항해 버렸습니다. 북쪽에서는 연남생이 당에게, 남쪽에서는 연정토가 신라에게 각각 투항하여 고구려 심각한 내부 분열로 위기를 맞게 됩니다. 연남산과 보장왕은 끝내 항복해 결국 668년 고구려는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하였습니다. 그 후 고구려인들은 당나라 내륙으로 이동되었고 당나라는 안동도호부를 설치해 중앙에서 고구려 영토를 통치했습니다.

[고구려 부흥운동의 전개와 실패]

고구려 멸망 후, 왕족 안승과 검모잠 등이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내부 갈등으로 안승이 검모잠을 살해하고 신라에 귀순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신라는 안승을 '보덕왕'에 봉하고 유민들을 금마저(익산)에 정착시켜 '보덕국'을 세웠습니다.

보덕국은 신라의 번속국으로 나당 전쟁에 참전하고 일본과 교류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으나, 683년 신라에 흡수되며 고구려 부흥운동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훗날 발해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선언했습니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뒤 고구려 왕족 안승과 검모잠 등이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내분이 일어나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고구려 백성 4천호(추산 2만명)와 함께 신라에 귀순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신라의 문무왕은 안승과 고구려 유민들을 금마저(전라북도 익산)으로 옮겨 살게 하고 안승을 보덕왕(報德王)에 봉했습니다. 보덕국은 신라의 번속국(藩屬國)으로 있으면서 고구려와 동일한 5부와 관등 체계를 갖추고 나당 전쟁에 참전하거나 일본과는 견고려사(遣高麗使)라는 이름으로 사신을 주고받는 등 대내외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683년 신라 신문왕이 안승을 수도 경주로 불러 소판(蘇判) 관등과 김씨성을 부여하고 집과 토지를 주며 수도에 거주하게 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보덕국의 장수 대문(大文)이 금마저에서 난을 일으켰지만 신라에 진압되어 흡수되었습니다. 보덕국 멸망 후 고구려 귀족과 유민들은 신라의 9주5소경 중 하나인 남원경(전라북도 남원)으로 이전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의 현악기인 거문고가 전래되었습니다. 한편 8세기 말~9세기 초에는 요동 지역에서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나라(소고구려)가 등장하기도 했지만 고려국에서 사신을 보냈다.같은 단편적인 기록 외에는 관련 기록이 없어서 국가 성립 과정과 배경, 멸망 시기 등은 알 수 없습니다. 고구려 부흥 운동은 실패로 끝났으나 698년에 성립된 발해와 918년에 성립된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입니다.

669

669

[고구려 지배층의 강제 이주]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는 고구려 지배층 약 3만 호를 중국의 오르도스 지역 등으로 집단 이주시켰습니다.

이들의 흔적은 실크로드에서도 발견될 정도로 대규모였으며, 고구려 문화를 이어가는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669년 당나라는 고구려 지배층을 중심으로 약 3만호를 중국의 오르도스 지역 등으로 집단 이주시켰고, 그 흔적이 실크로드에 남아 있습니다.

698

[대씨 고려(발해)의 '고려 국왕' 칭호 사용]

고구려 멸망(668년) 이후, 고구려 장군 대조영이 새로이 건립한 왕조는 멸망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스스로를 '고려'라 칭하며 고구려의 정통 계승자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당시 동아시아의 패권국이었던 당(唐)나라는 발해가 고구려의 영토와 역사를 계승하는 것을 견제했습니다.

대조영이 이끄는 고려 유민 세력을 무력으로 와해하는 데 실패한 측천무후는 '고려' 대신 '발해군(渤海郡, 대씨고려 접경 당나라 관할 군)'이라는 지명으로 부르는 등 다른 별칭으로 표기하며 고려가 멸망하였음을 내외로 공표하며, 구 고씨 고려와의 연결고리를 의도적으로 축소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발해는 이러한 당의 외교적 압력과 무관하게, 특히 일본(日本)에 보낸 외교 문서(國書)에서는 일관되게 스스로를 '고려 국왕(高麗國王)', '고려국'이라 칭했습니다.

당나라가 발해와 고구려의 연관성을 애써 무시하고  고구려의 흔적을 지우려 했던 것은, 역설적으로 당시 '고려'라는 이름이 가진 정치적 무게감(고구려 영토에 대한 소유권 주장)이 얼마나 막대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발해가 '대씨 고려(大氏 高麗)'로서 '고려'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었기 때문에, 훗날 멸망했을 때 그 유민들을 흡수한 왕건의 '왕씨 고려'가 진정한 통일 국가로 인정받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698

703

703

[고구려 유민의 일본 망명과 정착]

고구려 멸망 후 1,799명의 고구려인들이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일본 조정은 고구려 왕족 고약광에게 '고마노고키시'라는 성을 부여하고, 이후 광개토대왕 후손들에게 '고마노아손'이라는 이례적인 카바네를 내렸습니다.

고약광의 자손들은 대대로 고마 신사의 궁사를 맡아 '출세명신'이라는 속설과 함께 일본의 명소가 되었으며, 이는 고구려 유민의 높은 위상을 보여줍니다.

한편 1,799명의 또 다른 고구려인들은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다이호 3년(703년)에 일본 조정은 고구려의 왕족이자 보장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고약광(고마노 잣코)에게 고마노고키시(高麗王)라는 성(씨성제)을 주었습니다. 덴표쇼호(天平勝寶) 2년(750년)에는 고구려 광개토왕 5대 손 배내복덕의 후예 다카쿠라노 후쿠노부 등의 일족에게 고마노아손(高麗朝臣)의 가바네를 내렸는데, 아손이라는 가바네를 도래인에게 내리는 것은 당시 일본에서는 이례적인 것이었습니다. 그 뒤 후쿠노부는 다시 성을 다카쿠라(高倉)로 고쳤습니다. 또한 약광의 자손은 대대로 고마 신사의 궁사(宮司)를 맡아 오늘날까지 이어져 현대의 고마씨(高麗氏)가 되었습니다. 한편 고약광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고마 신사(高麗神社)는 "출세하고 싶으면 고마 신사에 가서 빌라"는 속설이 있을 정도로 일본에서는 명소입니다. 하마구치 오사치, 와카쓰키 레이지로, 사이토 마코토, 고이소 구니아키, 시데하라 기주로, 하토야마 이치로가 참배한 뒤에 일본의 내각총리대신 총리 에 임명되었기에, 출세명신(出世明神)이라 하며 숭상하고 있습니다. 1990년대에는 "큰 사건이 있을 땐 고마 신사에 가서 빌어야 수사가 잘 풀린다"는 얘기가 퍼져, 도쿄지검·도쿄고검 검사들이 줄줄이 참배하기도 했습니다. 연간 40만명의 참배객이 거쳐갈 정도이며, 그중에서도 많은 유명인사와 연예인들이 자주 참배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918

[왕씨고려 건국, 두 개의 고려]

918년, 왕건은 궁예의 태봉(泰封)을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열면서 국호를 '고려(高麗)'로 정했습니다. 

이는 "동명성왕(추모왕)이 세운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명백한 정치적 선언이었으며, 동시에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평양을 '서경(西京)'으로 승격시키는 등 강력한 고씨 고려 계승 의지를 표명했습니다.

당시, 북방에는 대조영의 후예들이 이끄는 대씨 고려(발해(渤海))가 역시 스스로를 '고려국'이라 칭하며  존속하고 있었기에 '두 개의 고려'가 약 8년 간 일시적으로 공존했습니다.

왕건의 '고려' 건국은 후삼국(신라, 후백제)의 경쟁자들을 압도하는 독보적인 정통성을 선점하는 행위였습니다. 신라나 후백제와 달리 '고구려 계승'을 내세움으로써 , 한반도 중부와 북부 고토(故土)에 대한 역사적 연고권을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왕건은 즉위 직후부터 "평양 옛 서울이 황폐해졌다"며  서경(西京) 개척을 강력히 추진하는 등 , 고구려 계승을 단순한 국호가 아닌 국가 핵심 정책으로 삼았습니다.


이처럼 왕건의 '고려' 건국은 북방의 '대씨 고려(발해)'와 정통성을 다투는 경쟁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는 '누가 진정한 고구려의 후계자인가'라는 역사적 질문을 던졌으며, 이 질문은 8년 뒤 발해의 멸망과 그 유민들의 행보에 따라 극적으로 귀결됩니다.

918

934

[대씨고려 마지막 왕자 대광현, 왕건에게 귀순]

926년, 북방의 '대씨 고려'(발해)가 거란(契丹)의 침공으로 허무하게 멸망했습니다.

왕건은 대씨 고려 유민들을 '형제의 나라' 백성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으로 포용하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 흐름의 정점이 바로 934년(태조 17년), 발해의 마지막 세자(太子) 대광현(大光顯)이 수만 명의 무리를 이끌고 왕건의 '고려'로 귀순한 사건입니다.


왕건이 이들을 극진히 대우하며 대광현에게 '왕계(王繼)'라는 이름과 왕실 족보(宗籍)를 하사함으로써 비로소 고려 계승의 두 흐름(대씨 고려, 왕씨 고려)이 하나로 합쳐졌습니다.

대광현의 귀순은 단순한 망명이 아닌, '대씨 고려'의 정통성이 '왕씨 고려'로 공식적으로 이양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왕건은 대광현에게 왕족의 지위와 토지를 부여하고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했습니다.

이로써 왕건은 신라나 후백제가 감히 넘볼 수 없는 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유일무이한 정통 계승자가 되었습니다.


왕건이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짐승(禽獸)의 나라'라 칭하며 극단적으로 적대하고, 거란 사신이 보낸 낙타를 만부교(萬夫橋)에서 굶겨 죽인 사건 은 이러한 정통성에서 비롯된 외교적 선언이었습니다. '두 개의 고려'는 '하나의 고려'로 통합되었습니다.


이는 935년 신라의 평화적 병합과 936년 후백제 멸망 으로 이어지는 후삼국 통일의 결정적인 이데올로기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934

1400

['Corea' 서방 기록의 등장]

'고려'라는 이름이 유럽에 전파된 경로는 크게 두 갈래입니다.


첫째는 13세기 몽골 제국을 통한 육상 경로로, 원(元)나라에 체류했던 마르코 폴로(Marco Polo)가 1295년 귀국 후 쓴 Dongfang Jianwenlu(동방견문록)에 원나라에 복속된 지역 중 하나로 'Cauli'를 언급합니다. 이는 중국인들이 '고려(高麗)'를 '가우리' 또는 '가오리'에 가깝게 발음하는 것을 듣고 표음한 것으로 분석됩니다.


둘째는 16세기 초 대항해시대를 통한 해상 경로입니다. 1510년경 포르투갈인들은 동남아시아 말라카(Malacca)에서 무역 활동을 하는 'Gores'(고려 사람들)를 기록했으며, 이후 'Gori'(1514년), 'Coree'(1549년) 등의 표기가 등장합니다.

11~12세기 고려의 벽란도(碧瀾渡)는 송나라, 아라비아 상인들이 드나들던 국제 무역항으로 '고려'라는 이름을 아시아권에 널리 알린 1차 확산지였습니다. 이후 유럽인들이 이 이름을 '발견'한 것은 13세기(육로)와 16세기(해로)였습니다. 'Gores', 'Gori', 'Coree' 등은 모두 '고려' 또는 '고리'의 발음을 각자의 언어로 표기하려 한 시도였습니다. 1571년, 포르투갈인 두라도(F. Dourado)의 해도에 처음으로 'Core'라는 표기가 등장하며, 같은 해 예수회 빌렐라(G. Vilela) 신부가 "China와 Japan 사이에 있는 'Corea'라고 불리는 왕국"이라고 기록합니다. 


이는 'Core'라는 어근에 나라를 뜻하는 라틴계 여성형 접미사 '-a'가 결합하여 'Corea'로 정착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다양한 표기는 16세기 후반 'Corea'로 수렴 및 통일되었고, 이 이름이 이후 약 300년간 서양 세계에서 한반도를 지칭하는 표준 명칭이 되었습니다.

1400

1890

['Corea'에서 'Korea'로의 철자 변천]

'Corea'는 16세기 말부터 19세기 말까지 표준적인 표기였습니다.

조선이 서양과 맺은 최초의 공식 조약인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의 공식 영어 명칭은 'Corea'였습니다. 1883년 영국과의 조약(조영수호통상조약) 역시 'Corea'를 사용했습니다. 'Korea'라는 표기는 1671년 하멜 표류기의 독일어 번역판 이나 18세기 러시아 지도  등에서 간헐적으로 등장했지만 주류는 아니었습니다.


'K' 표기가 확산된 것은 19세기 말부터입니다. 일각에서는 일제강점기 일본이 'Corea'를 'Japan'보다 알파벳 순서에서 뒤로 보내기 위해 'Korea'로 고의로 바꾸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 이는 여러 복합적인 요인 중 하나일 뿐입니다.

'C'에서 'K'로의 변화는 일본의 의도라기보다는, 영어권의 언어적 편의성이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분석됩니다. 영어에서 'C'는 's'(시옷) 발음(예: City)과 'k'(키읔) 발음(예: Cat)으로 혼용되어 혼동을 줄 수 있었습니다. 반면 'K'는 'ㅋ' 발음을 명확하게 표기할 수 있었기에, 미국무부와 영국 왕립지리학회 등 영어권에서 'Korea' 표기를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이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나 1910년 한일병합 선언문에서 'Korea'를 사용한 것 은 이러한 영어권의 추세를 따른 것이거나 확산에 기여한 것일 수 있으나, 그들이 '발명'한 것은 아닙니다.


조선 정부의 공식 표기 'Corea'는 점차 영어권의 'Korea' 표기에 밀려났습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영향력이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면서 , 미국식 영어 표기인 'Korea'가 국제 표준으로 완전히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1890

1937

['고려인(카레이스키)'의 정체성과 강제이주]

러시아와 구소련 중앙아시아(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에 거주하는 한민족 디아스포라를 '고려인(高麗人, Koryo-saram)' 또는 러시아어로 '카레이스키(Корейцы)'라고 부릅니다. 

이 명칭은 그들의 고유한 민족적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이 '고려인'이라는 정체성은 19세기 중후반 농업 이민으로 연해주(沿海州)에 정착했던 한인들에게서 기원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운명은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Deportation) 정책 으로 인해 비극적으로 바뀌었습니다.

1937년, 스탈린은 연해주의 고려인들이 일본의 첩자가 될 수 있다는 의심 하에, 약 17만 명에 달하는 고려인 전체를 하루아침에 화물 열차에 태워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중앙아시아의 황무지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이주 과정과 초기 정착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들은 척박한 환경에서 집단농장(콜호스)을 이루며 생존해야 했습니다. 이처럼 '고려인'이라는 이름은 고대의 영광스러운 '고려'에서 유래했지만, 20세기 제국주의와 전체주의의 가장 큰 희생양이 되었던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비극적이고 강인한 정체성을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1937

1948

[남북한의 공통 영문 국호 'Korea']

1948년 한반도 분단 이후, 남과 북은 각기 다른 정통성을 내세우며 별개의 국호를 채택했습니다.

남한은 '대한민국(大韓民國, Republic of Korea)'을 국호로 하여 삼한(三韓)과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정통성을 계승했습니다.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 DPRK)'을 국호로 하여 고조선(古朝鮮)과 이씨조선(李氏朝鮮)의 계승을 표방했습니다. 


그러나 두 국가는 대외적인 공식 영문 국호로는 '고려(高麗)'에서 유래한 'Korea'를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남한의 공식 영문 명칭은 'Republic of Korea' (ROK) 이며, 북한의 공식 영문 명칭은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DPRK) 입니다. 이는 남북한이 내부적으로는 '한(韓)'과 '조선(朝鮮)'이라는 서로 다른 역사적 정통성을 주장하면서도, 국제 사회에서는 '고려'가 서양에 알려져 굳어진 'Korea'라는 단일한 이름의 정통성을 두고 경쟁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고려'라는 이름은 고대(발해 vs 당), 중세(왕건 vs 후백제/신라)에 이어 현대(남한 vs 북한)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전체의 역사적 정통성을 상징하는 가장 강력하고 상징적인 이름으로 남아있습니다. 'Korea'는 분단된 두 국가가 공유하는 유일한 이름이자, 동시에 그 이름의 유일한 합법적 상속자임을 두고 다투는 '경합하는 유산(Contested Inheritance)'입니다.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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