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3세
국왕, 왕족, 영연방 수장, 환경 운동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12-16- 14:58:36
찰스 3세는 영국과 14개 영연방 왕국의 국왕이자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왕세자 자리에 있었던 인물이다. 엘리자베스 2세의 장남으로, 역대 최고령으로 즉위하며 '침묵 전통'과 달리 정치적 견해를 표명하는 등 새로운 군주의 길을 걷고 있다.
1948
[에든버러의 찰스 공자 탄생]
엘리자베스 공주와 필립공의 첫째 아들로 버킹엄 궁전에서 태어나, 왕위 계승 서열 2위가 되었다. 그의 탄생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안정과 군주제의 연속성을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졌다. 초기 칭호는 '에든버러의 찰스 공자 전하'였다.
찰스 필립 아서 조지(Charles Philip Arthur George)는 1948년 11월 14일, 당시 엘리자베스 공주(에든버러 공작부인)와 필립공(에든버러 공작)의 장남으로 버킹엄 궁전에서 태어났다. 그의 탄생은 할아버지인 조지 6세 국왕에 이어 어머니 다음으로 왕위 계승 서열 2위임을 의미했으며, 이는 1936년 에드워드 8세의 퇴위 위기 이후 흔들렸던 영국 왕실의 직계 계승을 공고히 하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그의 초기 공식 칭호는 '에든버러의 찰스 공자 전하(His Royal Highness Prince Charles of Edinburgh)'였다.
1952
[왕위 계승 서열 1위 등극]
할아버지 조지 6세가 서거함에 따라 어머니 엘리자베스 공주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 즉위했다. 이로 인해 찰스는 만 3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왕세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콘월 공작(Duke of Cornwall)과 로스시 공작(Duke of Rothesay) 등의 칭호를 자동으로 부여받았다.
1952년 2월 6일, 조지 6세 국왕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이 순간, 만 3세였던 찰스는 영국 군주제의 법과 관례에 따라 자동으로 왕위 계승 서열 1위가 되었다. 그는 왕세자에게 주어지는 전통적인 작위인 콘월 공작, 로스시 공작, 캐릭 백작 등을 즉시 물려받았으며, 이로써 그의 삶은 미래의 국왕이라는 정해진 운명의 궤도에 본격적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이는 그의 유년기가 어머니의 비교적 평범했던 어린 시절과 달리, 왕위 계승자로서의 공적 의무와 대중의 기대 속에서 형성될 것임을 예고하는 근본적인 변화였다.
1953
[모친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 참석]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린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이는 찰스가 전 세계적인 무대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중요한 순간이었다. 당시 언론은 왕세자의 귀여운 모습을 비중 있게 보도하며 군주제의 연속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찰스는 만 4세의 나이로 어머니의 대관식에 참석하여 할머니인 퀸 마더와 고모인 마거릿 공주와 함께 자리했다. 당시 한국 신문은 '네 살 난 영 황태자, 모황(母皇) 대관에 싱글벙글'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모습을 전하며, 어린 왕세자가 어머니의 대관식을 더욱 빛나게 했다고 보도했다. 이 대관식은 텔레비전으로 전 세계에 생중계된 최초의 대규모 왕실 행사로, 이를 통해 수백만 명의 시청자들이 어린 왕세자의 존재를 각인하게 되었다. 이는 군주제가 미디어 시대에 어떻게 적응해 나갈지를 보여주는 서막이었으며, 찰스는 평생에 걸쳐 이 미디어의 관심과 씨름해야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1955
[왕실 전통을 깬 정규 학교 교육]
왕실 가정교사에게 교육받던 전통을 깨고 처음으로 정규 학교에 입학했다. 이는 아버지 필립공의 의지에 따른 것으로, 미래의 국왕이 일반 국민을 이해해야 한다는 현대적 사고가 반영된 결정이었다. 그는 힐 하우스 스쿨을 시작으로 여러 학교를 거쳐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졸업하며, 학사 학위를 취득한 최초의 왕세자가 되었다.
1955년, 영국 왕실은 찰스가 학교 교육을 받을 것이라고 발표했는데, 이는 "왕실이 현대에 뒤처지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일반 국민을 이해해야 한다"는 필립공의 신념에 따른 혁신적인 결정이었다. 이전까지의 왕위 계승자들은 모두 궁전 내에서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찰스는 런던의 힐 하우스 스쿨(Hill House School)과 침 스쿨(Cheam School)을 거쳐, 아버지가 다녔던 스코틀랜드의 고든스타운 스쿨(Gordonstoun)에 진학했다. 이후 왕실의 관례를 다시 한번 깨고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여 인류학, 고고학, 역사학을 전공하고 1970년에 졸업했다. 이러한 교육 과정은 군주제가 더 이상 대중과 격리된 채 존재할 수 없다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려는 전략적 선택이었다. 이는 찰스에게 폭넓은 경험과 지적 기반을 제공했지만, 동시에 전통적인 왕실의 틀과 외부 세계의 현실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1969
[웨일스 공 책봉식과 웨일스 민족주의]
웨일스의 캐너번 성에서 공식적으로 웨일스 공(Prince of Wales)으로 책봉되었다. 이 행사는 고조되는 웨일스 민족주의를 완화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을 띠고 있었다. 찰스는 책봉식에 앞서 웨일스어를 학습하고 연설의 일부를 웨일스어로 진행하며 통합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노력했다.
1958년 웨일스 공으로 임명되었으나, 공식 책봉식은 11년이 지난 1969년 7월 1일에 열렸다. 이 시기는 웨일스 민족주의 운동이 격화되던 때로, 일부 과격 단체는 폭탄 테러를 감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정치적 긴장 속에서 책봉식은 영국 왕실이 웨일스와의 연대를 과시하고 분리주의 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중요한 행사였다. 찰스는 책봉식을 준비하기 위해 애버리스트위스 대학교에서 10주간 웨일스 민족주의자인 테디 밀워드 박사에게 웨일스어를 배웠다. 책봉식에서 그는 "나 찰스, 웨일스 공은 당신의 충실한 신하가 되어 목숨과 사지를 바쳐 당신을 섬기고, 살아서나 죽어서나 모든 사람들에 맞서 당신께 신의와 진실을 바칠 것을 맹세합니다"라는 서약을 했으며, 연설의 일부를 웨일스어로 구사하며 웨일스 국민과의 유대를 강조했다. 이 사건은 찰스가 평생 수행해야 할 역할의 축소판과 같았다. 즉, 그는 전통 의식의 중심에 서서 상징적 의무를 다하는 동시에, 복잡하고 때로는 적대적인 현대 정치의 현실을 헤쳐나가야 하는 과제를 처음으로 마주한 것이다.
1970
[선구적인 환경 문제 연설]
웨일스 농촌 운영위원회 연설에서 플라스틱과 석유 유출로 인한 해양 오염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이는 환경보호가 세계적인 의제로 부상하기 훨씬 전의 일로, 그의 선구안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연설은 이후 50년 넘게 이어질 그의 환경 운동가로서의 삶의 출발점이 되었다.
찰스는 만 21세의 나이에 행한 이 연설에서 대기 오염, 플라스틱 폐기물, 자원 고갈 등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역설했다. 그는 산업 폐기물이 강과 바다를 오염시키는 현실을 지적하며, 자연과의 조화로운 균형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연설은 그가 단순히 왕실의 상징적 인물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의제에 대해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는 '행동하는 왕세자'가 될 것임을 예고한 사건이었다. 그의 이러한 관심은 이후 유기농 농장 경영, 지속 가능한 도시 계획(파운드버리), 기후 변화 대응을 위한 국제적 활동 등으로 구체화되며 그의 정체성의 핵심을 이루게 되었다.
1971
[공군 및 해군 복무 시작]
왕실의 전통에 따라 군 복무를 시작하여 영국 공군(RAF) 크랜웰 기지에서 제트기 조종사 훈련을 받았다. 이후 해군으로 옮겨 복무했으며, 헬리콥터 조종사 자격을 취득하고 기뢰제거함 HMS 브로닝턴의 함장으로 복무했다. 이 시기는 그가 왕세자라는 신분을 떠나 능력으로 평가받는 소중한 경험을 쌓은 기간이었다.
케임브리지 대학 재학 중 이미 비행 훈련을 받았던 찰스는 1971년 3월 8일, 직접 비행기를 몰고 공군 기지에 입소하여 본격적인 조종사 훈련을 시작했다. 같은 해 9월 공군 훈련을 마친 뒤,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해군에 입대했다. 그는 구축함 HMS 노퍽과 두 척의 호위함에서 복무했으며, 1974년에는 헬리콥터 조종사 자격을 취득했다. 1976년 2월 9일, 그는 해안 기뢰제거함 HMS 브로닝턴의 지휘를 맡아 9개월간 복무한 뒤 전역했다. 군 복무는 그에게 왕실의 보호막을 벗어나 규율과 책임감을 배우고 리더십을 함양하는 중요한 기회를 제공했다.
1976
[자선 단체 '프린스 트러스트' 설립]
해군 전역 수당을 기반으로 자신의 대표적인 자선 단체인 '프린스 트러스트(The Prince's Trust)'를 설립했다. 이 단체는 불우한 환경의 청년들이 교육, 훈련, 창업을 통해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프린스 트러스트는 그의 자선 활동의 초석이 되었으며, 왕세자로서 사회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려는 그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찰스는 해군에서 받은 퇴직금 약 7,400파운드를 종잣돈으로 하여 프린스 트러스트를 설립했다. 이 자선 단체는 실업 상태이거나 학업에 어려움을 겪는 11세에서 30세 사이의 청년들을 돕는 데 중점을 둔다. 설립 이후 현재까지 영국을 포함한 20여 개국에서 100만 명이 넘는 청년들을 지원했으며, 프로그램 참가자의 약 70%가 취업, 교육 또는 훈련으로 나아가는 성과를 거두었다. 프린스 트러스트의 설립은 단순한 자선 활동을 넘어, 찰스가 왕세자라는 모호한 역할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정의하려는 시도였다. 그는 이를 통해 사회 문제에 직접 개입하고, 정부 정책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을 지원하며 독자적인 영향력과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1977
[왕세자비 간택에 대한 압박]
30대에 가까워지면서 후계자를 낳아야 한다는 왕실과 대중의 압박에 직면했다. 당시 왕세자비의 조건은 귀족 가문 출신의 개신교도이자 처녀여야 한다는 매우 엄격하고 시대착오적인 기준을 따라야 했다. 이로 인해 그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카밀라 섄드는 부적격자로 간주되었고, 이는 훗날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
1970년대 후반, 찰스는 왕위 계승자로서 결혼하여 후사를 이어야 한다는 엄청난 압박에 시달렸다. 특히 그의 정신적 지주였던 루이 마운트배튼 경은 "정착하기 전까지는 가능한 한 많은 연애를 하되, 아내는 경험이 없고 순결한 여성을 선택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1970년대 초반부터 깊은 관계였던 카밀라 섄드(결혼 후 카밀라 파커 보울스)는 귀족 가문 출신에었지만, 여러 연애 경험이 대중에게 알려져 있어 '순결한 신부'라는 조건에 부합하지 않았다. 이러한 왕실의 엄격한 기준과 사회적 편견은 찰스의 개인적인 감정보다 왕조의 의무를 앞세우도록 강요했다. 결국 그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왕실이 요구하는 '완벽한 신붓감'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 놓였으며, 이는 훗날 다이애나 스펜서와의 비극적인 결혼으로 이어지는 결정적 배경이 되었다.
1981
[다이애나 스펜서와의 약혼 발표]
스펜서 가문의 막내딸인 19세의 다이애나 스펜서와의 약혼을 공식 발표했다. 다이애나는 왕세자비의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인물로 여겨져 영국 사회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약혼 인터뷰에서 "사랑에 빠졌느냐"는 질문에 찰스가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든"이라고 답한 것은 불길한 징조로 남았다.
찰스는 1977년 다이애나의 언니인 사라 스펜서를 통해 다이애나를 처음 만났고, 1980년 여름부터 본격적인 교제를 시작했다. 짧은 교제 끝에 1981년 2월 24일 약혼이 공식 발표되었다. 다이애나는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출신에 순수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 왕실이 원하던 완벽한 신붓감이었다. 하지만 약혼 발표 직후 진행된 TV 인터뷰에서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되었다. 기자가 "두 분은 사랑에 빠지셨나요?"라고 묻자, 다이애나는 즉시 "물론이죠"라고 답했지만, 찰스는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든 간에(Whatever 'in love' means)"라고 모호하게 덧붙였다. 훗날 다이애나는 이 대답이 자신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고 고백했다. 이 발언은 의무감으로 결혼을 선택한 찰스의 내면과 동화 같은 사랑을 꿈꿨던 다이애나의 기대 사이의 깊은 간극을 대중 앞에 처음으로 드러낸 순간이었다.
['세기의 결혼식' 거행]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다이애나 스펜서와 결혼식을 올렸다. 전 세계 약 7억 5천만 명이 TV로 시청한 이 결혼식은 '동화 같은 결혼'으로 묘사되며 엄청난 화제를 모았다. 이 결혼식은 20세기 후반 영국 왕실의 위상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찰스와 다이애나의 결혼식은 전통적인 왕실 결혼식 장소인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더 많은 하객을 수용할 수 있는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결혼식은 전 세계적인 미디어 이벤트였으며, 약 7억 5천만 명의 시청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다. 이 결혼식은 대중에게 현대판 신데렐라 이야기로 소비되었고, 다이애나는 순식간에 세계적인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화려한 겉모습과 달리, 결혼식 전날 밤 찰스는 카밀라에 대한 감정으로 괴로워했고, 다이애나는 찰스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고통스러워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세기의 결혼식'은 결국 훗날의 비극을 감추기 위한 화려한 막에 불과했음이 드러나게 된다.
1982
[장남 윌리엄 왕자 탄생]
첫째 아들이자 왕위 계승 서열 2위인 윌리엄 왕자가 태어났다. 윌리엄의 탄생으로 찰스는 왕위 계승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왕세자로서의 가장 중요한 의무를 완수했다. 이로써 윈저 왕가의 미래는 한 세대 더 보장받게 되었다.
장남 윌리엄 아서 필립 루이(William Arthur Philip Louis)는 런던 세인트 메리 병원에서 태어났다. 그의 탄생은 영국 왕실의 직계 계승 라인을 공고히 하는 중요한 사건이었으며, 찰스는 아버지로서의 기쁨을 편지에 표현하기도 했다. 윌리엄의 탄생은 찰스와 다이애나 부부에게 잠시나마 행복한 시간을 가져다주었지만, 이미 부부 사이의 균열은 시작되고 있었다. 다이애나는 산후 우울증을 겪었으며, 왕실의 엄격한 환경과 언론의 끊임없는 관심 속에서 힘겨워했다.
1984
['괴물 카벙클' 건축 비평]
영국 왕립 건축가 협회(RIBA) 150주년 기념 연설에서 내셔널 갤러리 증축안을 "사랑스럽고 우아한 친구의 얼굴에 붙은 괴물 카벙클(종기)"이라고 비판했다. 이 발언은 엄청난 논란을 일으키며 해당 건축 계획을 무산시켰다. 이를 계기로 그는 현대 건축에 대한 신랄한 비평가이자 전통 건축의 옹호자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1984년 5월, 찰스는 RIBA 연설에서 현대 건축의 획일성과 비인간성을 강하게 비판하며, 특히 내셔널 갤러리 증축안을 '괴물 카벙클(monstrous carbuncle)'에 비유했다. 이 한마디는 영국 건축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결국 해당 설계안은 폐기되었다. 이후 그는 리처드 로저스와 같은 세계적인 건축가의 프로젝트에도 개입하여 계획을 무산시키는 등, 자신의 영향력을 적극적으로 행사했다. 건축가들은 그의 행위가 왕세자의 헌법적 지위를 남용하는 '월권'이라고 비판했지만, 대중의 일부는 그의 의견에 공감하며 지지를 보냈다. 이 사건은 그가 단순히 상징적인 인물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사회적, 문화적 논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행동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명확히 보여주었다.
[차남 해리 왕자 탄생]
둘째 아들 해리 왕자가 태어났다. 이로써 찰스는 두 아들의 아버지가 되었으며, 왕위 계승 라인은 더욱 안정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찰스와 다이애나의 관계는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악화된 상태였다.
차남 헨리 찰스 앨버트 데이비드(Henry Charles Albert David), 통칭 해리(Harry) 왕자가 태어났다. 해리의 탄생으로 왕위 계승 서열은 윌리엄에 이어 3위가 되었다. 그러나 해리가 태어날 무렵, 찰스와 다이애나의 결혼 생활은 이미 파탄에 가까웠다. 찰스는 카밀라와의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고, 다이애나는 극심한 외로움과 고립감에 시달렸다.
1992
[다이애나비와의 공식 별거 발표]
존 메이저 당시 영국 총리가 하원에서 찰스 왕세자 부부의 공식적인 별거를 발표했다. '세기의 결혼'으로 불렸던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이 11년 만에 사실상 파경을 맞았음을 공식화한 것이다. 이 발표는 영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왕실의 위기, 이른바 '웨일스 전쟁(War of the Waleses)'의 서막을 열었다.
1981년 결혼 이후 계속된 불화와 불륜설 끝에, 1992년 12월 9일 찰스와 다이애나는 공식적으로 별거에 들어갔다. 존 메이저 총리는 하원 연설을 통해 "두 사람의 결정은 우호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자녀 양육에는 함께 참여할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이는 이미 대중에게 알려진 부부의 갈등을 공식 인정한 것에 불과했다. 별거 발표의 배경에는 앤드루 모튼이 다이애나의 비밀 협조를 받아 출간한 책 『다이애나: 그녀의 진실된 이야기(Diana: Her True Story)』가 있었다. 이 책은 다이애나의 불행한 결혼 생활, 폭식증, 자살 시도 등을 폭로하며 찰스를 냉담한 남편으로 묘사했고, 이는 '동화'의 이미지를 완전히 파괴했다.
1994
[TV 인터뷰에서 불륜 사실 인정]
조나단 딤블비와의 TV 다큐멘터리 인터뷰에서 다이애나비와의 결혼 생활이 "회복 불가능하게 파탄 난" 이후 카밀라 파커 보울스와의 관계를 재개했음을 시인했다. 이는 영국 왕위 계승자가 자신의 불륜을 대중 앞에서 인정한 전례 없는 사건이었다. 이 고백은 그의 이미지를 더욱 실추시켰고, 다이애나와의 여론전에서 그를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했다.
찰스는 다큐멘터리 '찰스: 사적인 인간, 공적인 역할(Charles: The Private Man, The Public Role)'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대중의 동정을 얻고자 했다. 인터뷰어인 조나단 딤블비가 결혼 생활 중 "충실하고 명예로웠는가"라고 묻자, 찰스는 "그렇다"고 답한 뒤 "우리 둘 다 노력했지만,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이 무너질 때까지는"이라고 덧붙이며 불륜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카밀라를 "오랜 친구"라고 칭하며 관계의 정당성을 부여하려 했지만, 대중은 이를 혼외정사에 대한 변명으로 받아들였다. 이 인터뷰는 다이애나의 폭로에 대한 반격의 성격이 강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불륜을 공식화함으로써 여론을 더욱 악화시키는 자충수가 되었다.
1995
[다이애나비의 파노라마 인터뷰]
다이애나비가 BBC의 시사 프로그램 '파노라마'에 출연하여 자신의 결혼 생활에 대해 충격적인 폭로를 했다. 그녀는 "이 결혼에는 우리 셋이 있었기에, 조금 복잡했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찰스와 카밀라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언급했다. 이 인터뷰는 왕실을 발칵 뒤집어 놓았고, 결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이혼을 권고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마틴 바셔 기자가 진행한 이 인터뷰에서 다이애나는 찰스의 불륜뿐만 아니라, 왕실로부터 느꼈던 압박감, 자신의 산후 우울증과 폭식증, 그리고 승마 교관 제임스 휴잇과의 불륜 사실까지 모두 털어놓았다. 특히 찰스와 카밀라의 관계를 "결혼 생활에 세 명이 있어 비좁았다(There were three of us in this marriage, so it was a bit crowded)"고 표현한 대목은 전 세계적인 파장을 일으켰다. 이 인터뷰는 왕실의 사전 허가 없이 비밀리에 진행되었으며, 그 내용의 파급력은 엄청났다. 어떻게든 이혼만은 막으려 했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조차 이 인터뷰를 본 후, 군주제의 안정을 위해 두 사람의 이혼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1996
[다이애나비와의 이혼 확정]
찰스와 다이애나의 이혼이 법적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이는 파노라마 인터뷰 이후 이혼을 권고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편지에 따른 결과였다. 이혼으로 다이애나는 '전하(Her Royal Highness)' 칭호를 박탈당했으나, '웨일스 공비(Princess of Wales)' 칭호는 유지했다.
1995년 12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찰스와 다이애나에게 "조속한 이혼이 바람직하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이는 군주제의 수장으로서 내린 사실상의 명령이었다. 이후 양측 변호사들의 협상 끝에 1996년 7월 이혼 조건에 최종 합의했고, 8월 28일 이혼이 공식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다이애나는 위자료로 약 1,700만 파운드의 일시금과 매년 40만 파운드의 생활비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전하' 칭호를 잃은 것은 그녀에게 큰 상실이었지만, 대중의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국민의 왕세자비'로 남았다.
1997
[다이애나비의 비극적 사망]
전 부인 다이애나가 프랑스 파리에서 파파라치의 추격을 피하던 중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고, 영국 왕실은 대중의 엄청난 비난에 직면했다. 찰스는 두 아들을 보호하는 아버지의 역할에 집중하며 위기를 수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다이애나는 연인 도디 알파예드와 함께 파리 알마 터널에서 파파라치를 피하다가 발생한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녀의 죽음 직후, 영국 왕실, 특히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침묵을 지키며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했다. 그러나 대중의 슬픔은 분노로 바뀌었고, "우리가 슬퍼한다는 것을 보여달라(Show us you care)"는 신문 헤드라인이 등장하는 등 왕실에 대한 비판 여론이 들끓었다. 이 위기 상황에서 찰스는 다이애나의 시신을 영국으로 직접 운구해왔으며, 이는 대중의 분노를 일부나마 가라앉히는 역할을 했다. 또한 그는 슬픔에 빠진 두 아들 윌리엄과 해리를 보호하는 데 전념하며 아버지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사건은 영국 군주제가 대중의 감정과 소통하는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함을 깨닫게 한 분수령이었다.
2005
[카밀라 파커 보울스와의 재혼]
30년 넘게 사랑을 이어온 카밀라 파커 보울스와 윈저 길드홀에서 조촐한 시민 예식으로 결혼했다. 다이애나의 죽음 이후 오랜 기간에 걸친 이미지 개선 노력 끝에 이루어진 결실이었다. 이 결혼으로 카밀라는 '콘월 공작부인(Duchess of Cornwall)' 칭호를 얻었으며, 찰스는 개인적인 안정을 찾게 되었다.
다이애나 사후, 찰스는 대중의 엄청난 반감 속에서 카밀라와의 관계를 공식화하기 위해 신중하고 점진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미세스 PB 작전(Operation Mrs PB)'으로 알려진 이 홍보 전략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언론에 서서히 노출시키며 대중의 거부감을 줄여나가는 것이었다. 수년간의 노력 끝에 여왕의 허락을 받아 2005년 4월 9일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은 영국 국교회 수장이 될 왕세자가 이혼녀와 재혼하는 것에 대한 논란을 의식해 종교 예식이 아닌 시민 예식으로 치러졌으며, 여왕은 예식에 참석하지 않고 이후 축복 예배와 피로연에만 참석했다. 카밀라는 대중의 정서를 고려하여 '웨일스 공비' 대신 '콘월 공작부인'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이 결혼은 찰스에게 개인적인 행복을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수십 년간 그를 괴롭혔던 사생활 문제를 일단락짓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2015
['블랙 스파이더 메모' 공개]
찰스가 2004년에서 2005년 사이 정부 각료들에게 보낸 친필 편지, 이른바 '블랙 스파이더 메모'가 공개되었다. 이 편지들은 그가 군사, 농업, 건축 등 다양한 정책 현안에 대해 적극적으로 로비했음을 보여주었다. 이 사건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왕위 계승자의 역할에 대한 헌법적 논쟁을 촉발시켰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이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10년간의 법적 다툼 끝에 공개한 이 메모들은 찰스의 흘려 쓴 글씨체 때문에 '검은 거미 메모(Black spider memos)'라는 별명이 붙었다. 공개된 27통의 편지에서 그는 토니 블레어 당시 총리를 비롯한 장관들에게 이라크 파병 장비 문제, 소 결핵 확산 방지를 위한 오소리 도살, 특정 인물의 공직 임명 추천 등 구체적인 정책 사안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영국 정부는 "편지가 공개되면 찰스 왕세자의 향후 왕위 계승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40만 파운드가 넘는 소송 비용을 써가며 공개를 막으려 했다. 이 사건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입헌군주제의 원칙을 왕세자가 위반했다는 비판을 낳았으며, 그가 단순히 상징적인 존재가 아니라 적극적인 정치적 행위자였음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2022
[국왕 찰스 3세로 즉위]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서거함에 따라 즉시 국왕으로 즉위했다. 이로써 70년이라는 영국 역사상 가장 긴 왕세자 기간이 막을 내렸다. 그는 7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영국 역사상 최고령으로 즉위한 군주가 되었다.
2022년 9월 8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스코틀랜드 밸모럴 성에서 서거하자, 찰스는 그 순간부터 영국의 새로운 국왕 찰스 3세가 되었다. 그는 즉위 성명을 통해 "소중한 군주이자 사랑받았던 어머니의 서거를 깊이 애도한다"고 밝혔다. 이틀 뒤인 9월 10일, 세인트 제임스 궁에서 열린 즉위위원회에서 그는 공식적으로 국왕으로 선포되었으며, 이 의식은 역사상 처음으로 TV를 통해 생중계되었다. 7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미래의 왕으로 준비해온 그의 '견습 기간'이 끝나고, 마침내 그의 통치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2023
[찰스 3세 대관식 거행]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찰스 3세와 카밀라 왕비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이 대관식은 70년 전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에 비해 규모를 축소하고, 다문화·다종교 사회인 현대 영국의 모습을 반영하는 요소를 포함했다. 이는 그의 통치가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는 현대적인 군주제를 지향할 것임을 보여주었다.
찰스 3세의 대관식은 여러 면에서 과거와 차별화되었다. 대관식 시간은 약 2시간으로 3시간에 달했던 어머니의 대관식보다 짧았고, 초청 인원도 8,000여 명에서 2,000여 명으로 대폭 축소되었다. 또한, 기독교 의식이라는 본질은 유지하되, 불교, 힌두교, 유대교 등 다른 종교 지도자들이 의식에 참여하여 현대 영국의 종교적 다양성을 반영했다. 귀족들만이 충성을 맹세하던 '동료의 경의(Homage of Peers)'를 폐지하고, 전 국민이 원하면 참여할 수 있는 '국민의 경의(Homage of the People)'를 도입한 것 역시 중요한 변화였다. 이러한 변화들은 찰스 3세가 '슬림하고' 포용적인 군주제를 만들겠다는 자신의 오랜 구상을 대관식을 통해 명확히 제시한 것으로, 그의 통치 철학을 담은 첫 번째 공식 선언과도 같았다.
2024
[암 진단 사실 공개]
버킹엄 궁은 찰스 3세가 암 진단을 받았으며, 치료를 위해 대외 공무를 잠정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왕실 구성원의 건강 문제를 이례적으로 투명하게 공개한 것으로, 과거의 비밀주의적 관행에서 벗어난 결정이었다. 국왕의 이러한 결정은 질병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높이고 검진을 장려하는 공익적 효과를 낳았다.
국왕의 암은 지난 1월 전립선 비대증 치료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버킹엄 궁은 암의 종류나 단계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으나, 국왕이 치료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며 가능한 한 빨리 공무에 전면 복귀하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전했다. 과거 영국 왕실은 군주의 건강 상태를 국가 기밀처럼 다루었지만, 찰스 3세는 자신의 상황을 공개함으로써 불필요한 추측을 막고, 비슷한 처지의 환자들에게 용기를 주고자 했다. 이 결정은 1997년 다이애나 사망 당시 왕실이 보여준 불통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대중과 소통하고 공감하려는 현대적 군주제의 모습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