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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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 여왕, 황제, 인물 + 카테고리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의 여왕이자 인도 제국의 황제로, 1837년부터 1901년까지 64년간 재위했습니다. 그녀의 재위 기간은 '빅토리아 시대'로 불리며 대영 제국의 최전성기와 일치합니다. 9명의 자녀들이 유럽 왕실과 혼인하여 '유럽의 할머니'라는 별명을 얻었고, 엘리자베스 2세 다음으로 가장 오래 재위한 영국 군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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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819

[빅토리아 여왕 탄생]

켄징턴 궁전에서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와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녀 빅토리아 사이에서 외동딸로 태어났습니다.

알렉산드리나 빅토리아라는 본명으로 런던의 켄징턴 궁전에서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와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녀 빅토리아 사이에서 외동딸로 태어났습니다.

1820

[아버지 켄트 공작 에드워드 사망]

태어난 이듬해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와 연인 관계였던 존 코로이 밑에서 자랐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이 태어난 이듬해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그는 자신의 어머니와 연인 관계였던 아일랜드 출신의 존 코로이 밑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당시 아버지의 빈 자리를 외숙부이자 종형부인 레오폴드가 채워주고 있었습니다.

1831

[외숙부 레오폴드 1세 벨기에 국왕 즉위]

외숙부 레오폴드가 벨기에의 왕으로 선출되어 영국을 떠났습니다.

빅토리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외숙부 레오폴드가 1831년에 벨기에의 왕으로 선출되어 영국을 떠났습니다.

1837

[영국 여왕으로 즉위]

셋째 백부 윌리엄 4세의 서거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하노버 왕가가 여성의 상속권을 인정하지 않아 영국과 하노버의 동군 연합 관계는 끝났고, 영국 왕위만 계승했습니다.

18살 생일을 맞은 지 26일 만에 셋째 백부인 윌리엄 4세가 서거하자, 그의 뒤를 이어 영국 여왕으로 즉위했습니다. 하노버 왕가가 여성의 상속권을 인정하지 않아 조지 1세 때부터 이어지던 영국과 하노버의 동군 연합 관계는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와 함께 끝났습니다.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하울리가 빅토리아를 찾아가 차기 왕으로 내정됨을 알리자, 빅토리아는 무릎을 꿇고 성서를 펼친 뒤 ‘주님, 제가 영국의 왕이 되면 당신의 말씀대로 통치하게 해주소서’라고 기도했다고 전해집니다.

1838

[빅토리아 여왕 대관식]

여왕으로서의 권위를 공고히 하는 대관식을 거행했습니다.

1838년 6월 28일, 여왕으로서의 권위를 공고히 하는 대관식을 거행했습니다. 즉위 후 빅토리아는 버킹엄 궁전으로 들어가, 어머니를 자신의 거처에서 멀리 떨어진 방으로 쫓아내고, 어머니와 연인 관계였던 존 코로이도 연금을 주어 퇴직시켰습니다. 외숙부인 레오폴트도 정치에 간섭하지 말라는 내각의 정중한 경고를 받았습니다. 마침내 혼자가 된 빅토리아는 난생 처음 얻은 자유를 마음껏 즐겼습니다.

1839

['침실 위기' 발생]

'침실 위기'로 불리는 정치적 위기가 발생했습니다. 멜버른 수상이 노예 해방령을 거부한 자메이카에 자치권을 주려던 안건이 부결되자, 로버트 필이 수상직을 수락하는 과정에서 여왕의 시녀 교체를 요구하며 발생한 사건입니다.

빅토리아 치세의 첫 번째 위기는 1839년에 두 차례 있었는데, 그중 '침실 위기'는 윌리엄 윌버포스 등의 국회의원들이 펼친 노예 제도 반대 운동의 결실인 노예 해방령을 거부한 자메이카가 영국의 자치령이 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플랜테이션 경작지로 각광받는 자메이카에 멜버른이 자치권을 주려 했으나, 1839년 5월 그 안건이 5표 차이로 부결되면서 멜버른이 수상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새로이 당선된 보수당의 로버트 필은 반대 정파인 휘그당원 일색인 왕의 시녀들이 왕의 침실 근처에 있는 한 공평한 정치가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보고 이들을 모두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빅토리아는 멜버른의 격려를 받아 단호히 이 요구를 거부했고, 필은 수상직을 포기했으며 멜버른이 다시 그 자리에 임명되었습니다.

[앨버트 공작과 운명적인 만남]

윈저 궁전을 방문한 외사촌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앨버트 공작의 외모와 인품에 매혹되어 사랑에 빠졌습니다.

대관식 후 혼사 문제가 거론되었고, 배우자로 1순위에 오른 인물은 빅토리아의 외사촌인 독일계 왕족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앨버트 공작이었습니다. 그가 영국을 방문하기 위해 윈저 궁전에 도착한 지 불과 5일 뒤인 1839년 10월 15일, 빅토리아는 앨버트의 외모와 인품에 매혹되어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1840

[앨버트 공작과 결혼]

사랑에 빠진 앨버트 공작과 결혼했습니다. 앨버트는 빅토리아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자 훌륭한 정치적 조언자가 되었습니다.

빅토리아와 앨버트는 1840년 2월 10일에 결혼했습니다. 앨버트 공작은 빅토리아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 되었고, 빅토리아는 자신의 훌륭한 정치적 조언자인 남편을 깊이 사랑하고 신뢰했습니다. 남편 앨버트 공도 아내를 사랑하여, 아내가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심을 받는 국가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제1차 아편전쟁 발발]

영국 동인도 회사를 통해 중국에 아편을 밀수입하던 중, 청나라가 아편을 몰수하고 불태우자 영국이 침략하여 1차 아편전쟁이 발발했습니다.

18~19세기 유럽에서 청나라의 도자기, 차, 비단 등이 큰 인기를 끌었고, 청나라는 교역으로 막대한 은을 확보했습니다. 영국은 무역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동인도 회사를 통해 다량의 아편을 중국에 유입시켰습니다. 청나라 도광제가 임칙서를 광저우에 파견하여 아편을 몰수하고 불태우자, 영국에서는 개전론이 들끓었습니다. 1840년 6월, 여당 휘그당의 파머스턴 내각은 앨리어트를 특사로 하여 군함과 병력을 이끌고 청나라를 침략하여 아편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1842

[난징조약 체결]

제1차 아편전쟁이 난징조약 체결로 마무리되며, 중국의 문호가 개방되고 홍콩이 영국에 할양되었습니다.

1842년 난징조약이 체결되어 중국의 문호가 개방되었습니다. 이 전쟁의 결과 중국의 반식민지화가 가속되고 홍콩이 영국에 할양되었습니다.

1856

[제2차 아편전쟁 발발]

크림전쟁으로 동맹 관계에 있던 프랑스와 연합하여 제2차 아편전쟁을 개시했습니다.

크림전쟁으로 동맹 관계에 있던 프랑스와 연합하여 1856년 제2차 아편전쟁을 개시했습니다. 이 전쟁은 톈진 조약 불이행을 이유로 1860년 영프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며 베이징 조약이 체결되었고, 중국은 막대한 전쟁배상금과 이권 확보에 시달렸습니다.

1857

[세포이 항쟁 발생]

동인도 회사의 착취로 인도인들의 반영감정이 고조되어 세포이 항쟁이 발생했습니다. 영국은 이를 진압하고 무굴 제국을 멸망시켰습니다.

18세기 이후 쇠퇴하던 인도의 무굴 제국에서 심각한 재정난과 종교·민족 분열이 지속되었습니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자국 면직물 관세를 낮추고 인도산 면직물 관세를 높이는 등 인도인들을 착취하여 반영감정이 고조되었습니다. 이 결과 1857년 세포이의 항쟁이 발생했고, 영국은 이를 진압함과 동시에 무굴 제국의 바하두르 샤 2세를 퇴위시키고 제국을 멸망시켰습니다.

1858

[인도 제국 성립]

인도 제국을 세워 인도를 영국의 직접 통치를 받는 식민제국에 편입시켰습니다.

세포이 항쟁 진압 이후, 1858년 인도 제국(Indian Empire)을 세워 인도를 영국의 직접 통치를 받는 식민제국에 편입시켰습니다. 이는 영국의 영토 확장 정책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습니다.

1860

[베이징 조약 체결]

제2차 아편전쟁의 조약 불이행을 이유로 영프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고 베이징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제2차 아편전쟁에서 청나라와 영국, 프랑스 간의 톈진 조약이 체결되었으나, 조약 불이행을 이유로 영프 연합군은 1860년 8월 베이징을 점령했습니다. 이로 인해 베이징 조약이 체결되어 중국은 막대한 전쟁배상금과 태평천국의 난을 비롯한 내우외환에 시달렸습니다. 영국은 청나라 정부를 지지하여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고 은 200만냥을 획득했으며, 청나라 남부 연안 전역을 방위하는 목적으로 군대를 파견하여 통치했습니다.

1861

[앨버트 공작 사망]

남편 앨버트 공작이 사망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큰 충격을 받아 국무에 손을 떼고 한동안 두문불출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었던 남편 앨버트 공작이 1861년 12월 24일에 사망했습니다. 여왕은 그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아 국무에 손을 떼고 한동안 두문불출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여왕은 시종 존 브라운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세간의 소문을 낳기도 했습니다.

1876

[인도 제국의 여제 즉위]

영국 국왕 최초로 인도 제국의 황제 칭호를 겸했습니다. 이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던 대영 제국의 위상을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1876년 5월 1일부터 빅토리아 여왕은 영국 국왕뿐만 아니라 인도 제국의 황제를 겸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영국의 영토가 세계 전체 대륙의 4분의 1을 확보하고 4억 명의 인구를 보유한 대제국이 되었음을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1877년 1월 1일에는 인도 여제 즉위식을 거행했습니다.

1887

[재위 50주년 골든 주빌리]

재위 50주년을 기념하는 '골든 주빌리'가 성대하게 치러졌습니다.

1887년 1월 20일,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 50주년을 기념하는 '골든 주빌리'가 성대하게 치러졌습니다. 이는 여왕의 긴 재위 기간과 대영 제국의 번영을 상징하는 행사였습니다.

1897

[재위 60주년 다이아몬드 주빌리]

재위 60주년을 기념하는 '다이아몬드 주빌리'가 거행되었습니다.

1897년 6월 20일,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 60주년을 기념하는 '다이아몬드 주빌리'가 거행되었습니다. 이는 여왕이 엘리자베스 2세 다음으로 가장 오랜 기간 재위한 영국 군주임을 보여주는 기록적인 행사였습니다.

1898

[파쇼다 사건 발생]

영국의 아프리카 종단 정책과 프랑스의 아프리카 횡단 정책이 충돌하여 '파쇼다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은 19세기 후반부터 '3C 정책'(카이로, 케이프타운, 캘커타)을 추진하며 아프리카 대륙을 종단하여 지역 지배를 강화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서아프리카를 영토화하던 프랑스의 횡단 정책과 충돌하여 1898년 파쇼다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또한 아프가니스탄과 중앙아시아로 남진하려는 러시아의 남진 정책, 독일의 '3B 정책'과도 충돌하여 지속적인 영토확장 갈등을 겪었고, 이는 훗날 제1차 세계 대전의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1901

[빅토리아 여왕 서거]

2차 보어 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중 82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녀는 하노버 왕조의 마지막 군주였으며, 아들 에드워드 7세가 왕위를 물려받았습니다.

2차 보어 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1901년 1월 22일, 빅토리아 여왕은 82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녀는 하노버 왕조의 마지막 군주였으며, 그녀가 죽고 나서 현재 윈저 왕조의 전신인 삭스-코버그-고타 왕조가 시작되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작의 장남인 에드워드(에드워드 7세)가 왕위를 물려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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