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일스 공비 다이애나
영국 왕족, 왕세자비, 자선사업가, 패셔니스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14:18
영국 왕세자 찰스 3세의 전 부인이자 윌리엄 왕자와 해리 왕자의 어머니. 뛰어난 미모와 패션 감각으로 '민중의 왕세자비'로 불리며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았다. 지뢰 제거 운동 등 활발한 자선 활동을 펼쳤으나, 파파라치와 언론의 집요한 관심 속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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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다이애나 스펜서는 1961년 7월 1일 잉글랜드 노퍽주 샌드링엄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집안은 스튜어트 왕가의 후손으로, 아버지 쪽으로는 영국의 왕 찰스 2세로 이어지는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이다.
1975
[레이디 다이애나 스펜서 호칭 획득]
할아버지인 7대 앨버트 스펜서 백작의 사망 후 아버지가 8대 스펜서 백작을 세습하면서 '레이디 다이애나 스펜서'가 되었다.
다이애나는 유년 시절 부모의 이혼 후 아버지와 살았으며, 1975년 할아버지인 7대 앨버트 스펜서 백작의 사망 후 아버지가 8대 스펜서 백작을 세습하면서 '레이디 다이애나 스펜서'가 되었다. 이후 16세기에 지어진 올소프의 가문 저택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1977
[찰스 왕세자와의 첫 만남]
스위스 학교에 다니던 16세 때, 미래의 남편인 찰스 왕세자와 처음 만났다. 당시 찰스 왕세자는 다이애나의 언니인 레이디 사라와 사귀고 있었다.
1977년 16세 때 잠시 스위스의 인스티튜트 알핀 비데마넷트에 다녔다. 여기서 미래의 남편인 찰스 왕세자와 처음 만났는데 당시에는 그녀의 언니인 레이디 사라와 사귀고 있었다.
1981
영국 왕세자의 아내가 되기 위한 로마 가톨릭교도가 아닌 성공회 신자, 결혼한 적이 없는 처녀, 왕족 또는 귀족 가문 출신이라는 조건에 딱 들어맞는 신붓감이었던 다이애나는 1981년 2월 24일 찰스 왕세자와 공식적으로 약혼이 발표되었다.
[세기의 결혼식, 웨일스 공비 탄생]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찰스 왕세자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며 '세기의 결혼식'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젊고 매력적인 웨일스 공비의 탄생은 대중의 폭발적인 관심과 인기를 불러일으켰고, 패션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1981년 7월 29일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전 세계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찰스 3세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젊고 매력적인 새로운 웨일스 공비의 탄생은 마치 신데렐라를 보듯 대중적인 관심과 인기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패션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82
[윌리엄 왕자 탄생]
첫째 아들인 웨일스 공 윌리엄을 출산했다. 다이애나는 직접 아들에게 모유를 먹이고 육아를 담당하며 극진한 사랑을 보였다.
1982년 6월 21일 웨일스 공 윌리엄을 출산했다. 자신이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많은 애정을 받지 못했기에, 다이애나는 직접 아들에게 모유를 먹였고 육아를 직접적으로 담당했다. 두 아들에 대한 사랑은 엄격한 왕실생활에서 그녀가 찾을 수 있는 희망이었다.
1984
[해리 왕자 탄생]
둘째 아들인 서식스 공작 해리를 출산했다. 엘리자베스 2세와 필립공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두 아들을 이튼 칼리지에 입학시켰다.
1984년 서식스 공작 해리를 출산하였다. 엘리자베스 2세와 필립공은 두 아들을 고든스타운 학교에 보내라고 부탁했지만, 찰스 3세와 다이애나는 두 아들 모두 이튼 칼리지에 입학시켰다. 다이애나는 어린 아들들에게 심리적인 상처가 될 것을 우려해 이들이 10대 중반이 되는 1996년까지 결혼 생활을 유지하였다.
1989
[찰스 왕세자와의 불화 심화]
1980년대 후반부터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언론은 이들의 불화를 집중 조명했다. 찰스는 카밀라 파커 볼스와 다시 만났으며, 다이애나 역시 다른 인물과 교제했다.
1980년대 후반에 찰스와 다이애나의 사이는 많이 벌어지게 되었으며, 언론에서는 이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부추기고 많이 다루게 되었다. 찰스는 결혼 전에 사귀던 카밀라 파커 볼스와 다시 만나게 되었고, 다이애나는 승마 교사와 교제를 하게 된다. 한편 각종 공식 행사에서 찰스가 다이애나를 배려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1992
두 사람의 사이는 계속해서 벌어지며 결국 1992년 12월 9일부터 별거에 들어갔다.
1995
[BBC 인터뷰에서 왕실 불륜 폭로]
BBC 프로그램 '파노라마'에 출연하여 찰스 왕세자와 카밀라 파커 볼스의 불륜 관계를 폭로하고, 이로 인한 자신의 폭식증, 거식증, 자해 및 자살 시도 경험을 고백했다. 인터뷰 직후 영국 여론의 93%가 다이애나를 지지했다.
다이애나는 1995년 11월 20일 BBC의 특별 편성 프로그램 《파노라마》에 출연, 언론인 마틴 바시르와 인터뷰를 가졌다. 이 인터뷰에서 그녀는 찰스와 카밀라 파커 볼스의 불륜 관계를 폭로하였으며 이들의 불륜이 1981년 결혼 당시부터 지속되어 왔음을 밝혔다. 또한 인터뷰에서 다이애나는 두 사람의 불륜 관계로 인한 스트레스로 폭식증, 거식증을 앓았으며 수차례 자해 및 자살 시도를 했었다고도 이야기했다. 이 인터뷰 직후 영국의 여론은 약 93%가 다이애나의 인터뷰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996
[찰스 왕세자와의 최종 이혼]
BBC 인터뷰를 계기로 왕실과의 관계가 급속도로 냉각되며 찰스 왕세자와 최종 이혼했다. 이혼 후 '전하' 칭호를 잃고 '웨일즈 공비' 칭호만 유지하게 되었으나, 왕자들의 어머니로서 왕실 가족임은 인정받았다.
해당 인터뷰를 계기로 다이애나와 왕실의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됐으며, 결국 이듬 해인 1996년 8월 28일 최종 이혼하였다. 이혼 직후 1천 7백만 파운드의 위자료(한화 약 260억원)와 캔싱턴 궁 내 아파트에 살 수 있는 권리 등 여러 혜택을 받았다. 이들의 이혼 며칠 전 엘리자베스 2세가 제정한 법령에 의하여 왕가와 결혼한 사람의 이혼 후 호칭을 정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더 이상 웨일스 공 찰스와 결혼 관계가 아닌, 즉 더 이상 결혼에 의한 왕족이 아닌 그녀에 대한 호칭에서 앞에 붙여지던 '전하(Her Royal Highness)'는 더 이상 쓰지 못하게 되고 단지 '웨일즈 공비' 칭호만 쓸 수 있게 되었다. 버킹엄 궁전은 다이애나가 왕자들의 어머니로서 왕실 가족의 일원임을 인정하였다.
1997
[파리 교통사고로 비극적 사망]
이집트 재벌 도디 알파예드와 파리에서 파파라치를 피해 과속으로 달리다 교통사고를 당해 향년 3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충돌 당시 생존했으나 파파라치들의 응급조치 미흡으로 인해 숨을 거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고는 수많은 음모론을 낳았다.
1997년 8월 31일 다이애나는 알파예드와 함께 프랑스 파리의 리츠 호텔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둘은 저녁식사를 마치고 호텔 식당에서 제공한 자동차에 타자 그들의 연애에 관심을 보인 파파라치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파파라치들을 피하기 위해 과속으로 달렸으나 파파라치들의 추격은 집요하게 계속되었으며, 마침내 퐁드랄마 지하차도로 접어들자마자 교통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이후 수술을 받았으나, 수술 끝에 상태가 악화되어 숨을 거두었다. 향년 36세. 다이애나는 즉사하지 않았으며 빨리 치료하면 살 수 있었다. 당시 다이애나에 대한 응급조치를 소홀히 한 파파라치들은 선한 사마리아인 법을 위반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으나, 주범 3명만 1유로의 벌금형을 선고받아 이들의 판결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이 사건을 두고 이후 다이애나가 도디 알파예드와 결혼 예정이라는 설, 다이애나가 알파예드 혹은 다른 남성의 아이를 임신중이었다는 설, 다이애나의 외국인 아이 출산을 바라지 않는 개인 혹은 단체에 의한 암살설 등 음모이론들이 쏟아져 나왔다.
[전 세계가 애도한 장례식]
영국으로 운구되어 수만 명의 조문 인파와 세계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장례식이 치러졌다. 캔싱턴 궁 앞은 애도의 꽃다발로 가득했고, 엘튼 존이 추모곡 'Candle in the wind'를 개사하여 불렀다.
1997년 9월 6일 시신은 영국으로 운구되어 많은 영국 국민들과 세계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장례식이 치러졌으며, 스펜서 가문의 영지에 있는 섬에 무덤이 세워졌고 그 곳에 기념관이 설립되었다. 수만명의 조문 인파가 몰려들었다. 다이애나가 생전 거주하던 캔싱턴 궁의 아파트에는 애도 및 왕실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엄청난 수의 꽃다발들이 대문 앞을 가득 채웠으며, 각국에서 애도 성명을 발표하였다. 왕실은 이미 이혼한 사이였던 다이애나의 죽음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총리 토니 블레어의 설득으로 왕실 전체가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장례식에서는 엘튼 존이 자신의 히트곡 《Candle in the wind》을 개사하여 추모곡으로 불렀으며, 장례식 중 성가 《전능하신 주 하느님》이 합창되었다. 장례식에서 부른 《Candle in the wind》 는 장례식 직후 《Candle in the wind 1997》 으로 정식 발매되어 영국 차트 1위를 기록하는 등 추모 분위기를 이루었다.
2002
['가장 위대한 영국인' 3위 선정]
BBC가 선정한 가장 위대한 영국인 순위에서 윈스턴 처칠,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에 이어 3위를 차지하며 사후에도 영국인들의 변함없는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음을 증명했다.
2002년 BBC가 선정한 가장 위대한 영국인 순위에서 다이애나는 윈스턴 처칠,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에 뒤를 이어 3위를 차지하였다. 다이애나비의 무덤이 있는 섬과 그녀가 교통사고를 당했던 파리의 지하차도에는 기일마다 그녀를 기리는 이들의 헌화와 참배가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