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프 전쟁
전쟁, 국제 분쟁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8- 22:46:39
걸프 전쟁은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시작된 국제 분쟁입니다. 미국 주도의 34개국 다국적 연합군이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라 '사막의 방패' 및 '사막의 폭풍'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5주간의 공습과 100시간의 지상전 끝에 연합군이 승리하며 이라크의 쿠웨이트 철수와 왕정 복고를 이끌어냈습니다. 이 전쟁은 실시간 미디어 보도로 '비디오 게임 전쟁'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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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이라크, 미국 테러 지원국 지정]
이라크의 팔레스타인 및 아랍 국가 지원, 이집트-이스라엘 평화 유지 노력 불승인 등으로 미국이 이라크를 테러 지원국 명단에 포함시켰습니다.
이라크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관계 및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평화 유지 노력을 승인하지 않아 미국과의 관계가 재고되었습니다. 미국은 또한 이라크가 아랍 국가 및 팔레스타인에 지원하는 것을 좋지 않게 여겨 1979년 12월 29일 이라크를 미국의 테러 지원국 명단에 포함시켰습니다.
1980
[이란-이라크 전쟁 발발]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공식적으로 중립을 표방했으나 이라크에 자원, 정치적 지지, 비군사적 항공기를 지원하며 이란에 대한 항복을 막았습니다.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국은 공식적으로 중립을 지켰으나 이라크에 자원, 정치적 지지, 그리고 몇몇 비군사적 항공기를 지원했습니다. 1982년 이란이 반격을 시작하자 미국은 이라크에 대한 지원을 증가시켜 이라크가 이란에 항복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했습니다.
1982
[이라크, 美 테러 지원국 명단 제외]
이란의 성공적인 반격 이후, 미국은 이라크가 이란에 항복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라크를 테러 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며 양국 관계 개선을 시도했습니다.
1982년 이란이 성공적인 반격을 시작하자, 미국은 이라크에 대한 지원을 증가시키고 이라크와의 정치적 관계를 완전히 개선하기 위해 이라크를 미국의 테러 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했습니다. 이는 표면적으로 정권의 기록을 향상시키기 위함이었으나 실제로는 이라크군이 이란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었습니다.
1983
[미국 특사, 이라크 사담 후세인 면담]
사담 후세인이 미국의 요청에 따라 아부 니달을 시리아로 축출하자, 레이건 행정부는 도널드 럼즈펠드를 특사로 파견하여 양국 간 유대감 강화를 시도했습니다.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이 1983년 11월 미국의 요청에 따라 아부 니달을 시리아로 축출하자 로널드 레이건 정부는 도널드 럼즈펠드를 특사로 보내 양국간의 유대감을 증강시키려고 했습니다.
1987
[USS 스타크 피격으로 美-이라크 관계 경색]
이라크 전투기의 공격으로 미국 함선 USS 스타크가 큰 피해를 입으면서 미국과 이라크 간 관계가 다시 경색되었습니다.
1987년 5월 17일 미국 함선 USS 스타크가 이라크 전투기 1대에 의해 큰 피해를 입게 되자 양국 관계는 다시 얼어붙었습니다.
1988
[이란-이라크 정전 및 이라크 채무 위기 심화]
이란-이라크 정전 협약 체결 후 이라크의 채무가 급증하고 사회적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에 진 빚이 많았으나, 두 국가는 채무 완화를 거절했습니다.
1988년 이란과 이라크 사이에 정전 협약이 체결되자, 이라크는 채무가 늘게 되었고, 자국 내에서 사회적 긴장이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빚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에서 꾼 것이었습니다. 이라크는 양국에 빚을 완화해달라고 부탁했지만 두 국가는 거절했습니다.
1990
[이라크, 쿠웨이트에 군사적 행동 위협]
이라크는 쿠웨이트가 OPEC 생산 할당량을 초과하여 유가를 하락시킨 것에 불만을 표출하며 군사적 행동을 위협했습니다. 이는 이라크의 경제적 손실을 심화시켰습니다.
1990년 7월 초, 이라크 정부는 쿠웨이트 정부의 정책 및 행동들에 대해 불평을 토로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OPEC에서 쿠웨이트의 할당량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한 이라크 정부의 불만이었습니다. 배럴당 18달러의 목표 가격을 유지해야 했지만, 쿠웨이트와 아랍에미리트가 석유를 초과 생산하여 유가가 배럴당 10달러로 떨어졌고, 이라크는 1년간 70억 달러의 손실을 입었습니다. 이후 이라크 정부는 공공연하게 군사적 행동을 취할 것이라고 쿠웨이트 정부에 협박했습니다.
[사담 후세인, 아랍 연맹에 쿠웨이트 비난 성명]
사담 후세인은 아랍 연맹에 쿠웨이트가 루마일라 정유소를 계속 사용하고 있으며, UAE와 쿠웨이트에 빌린 채무는 아랍 형제들에게 빌린 것이므로 채무가 아니라고 선언했습니다.
1990년 7월 15일에는 사담 후세인 정부가 아랍 연맹에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여기에는 쿠웨이트 정부가 계속해서 루마일라 정유소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 UAE와 쿠웨이트에서 빌린 채무는 아랍 형제들에게 빌린 것이므로 채무가 아니라는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사담 후세인은 "몇몇 아랍 지도자들의 정책들은 미국의 것이다... 그들은 아랍의 이익과 안보를 무시하는 미국에 의해 고무되어 있다"고 말하며 쿠웨이트와 아랍에미리트에 협박을 가했습니다."
[CIA, 이라크의 쿠웨이트 국경 병력 이동 보고]
CIA는 이라크가 3만 명의 군대를 이라크-쿠웨이트 국경으로 옮겼다고 보고했으며, 페르시아만에 있는 미국 해군 함대는 경고 상황에 놓였습니다.
7월 23일, CIA에서 이라크가 3만 명의 군대를 이라크-쿠웨이트 국경으로 옮겼다고 보고했으며, 페르시아 만에 있는 미국 해군 함대는 경고 상황에 놓였다고 말했습니다.
[사담 후세인, 美 대사 만나 쿠웨이트 정책 비판]
사담 후세인은 바그다드에서 미국 대사 에이프럴 글래스피를 만나 쿠웨이트와 아랍에미리트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비판하며, 이라크에 대한 압박 시 군사적 대응을 시사했습니다.
7월 25일, 사담 후세인은 이라크 주재 미국 대사관인 에이프럴 글래스피를 바그다드에서 만났습니다. 이라크의 지도자는 쿠웨이트 및 아랍에미리트와 관련된 미국 정부의 정책을 비판했습니다. 그는 "미국 정부가 그들의 친구들을 지켜준다는 것은 오직 이라크에 대한 편견을 의미하며, 이런 자세는 또한 아랍에미리트와 쿠웨이트 정부가 이라크의 권리를 무시하도록 조장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라크는 미국을 적으로 삼고 싶지 않지만, 미국이 이라크를 압박하면 군사적 압력도 사용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이라크-쿠웨이트 분쟁 중재 위한 제다 회담 개최]
이집트 대통령의 주재로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에서 이라크와 쿠웨이트 간의 분쟁을 중재하기 위한 아랍 연맹 회담이 열렸으나, 이라크가 100억 달러의 배상을 요구하고 쿠웨이트가 5억 달러 이상을 지불할 수 없다고 고수하며 결렬되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제다에서 이집트 대통령 호스니 무바라크의 주최로 아랍 연맹의 중재적 회담이 개최되었습니다. 이라크는 루말리아 유전지대에서 자신들에게 발생한 손실분에 대한 100억 달러의 배상을 쿠웨이트에 요구했지만, 쿠웨이트는 5억 달러 이상은 지불할 수 없다는 안을 고수했습니다. 이에 대해 이라크는 크게 반발하며 침공 위협과 무력시위를 벌였고, 회담은 결렬되었습니다.
[이라크, 쿠웨이트 전격 침공]
이라크는 공화국수비대 30만 명을 동원하여 쿠웨이트를 기습 침공, 주요 거점을 점령하고 쿠웨이트 군을 흩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국제적 비난과 유엔 안보리 제재를 불러일으켰습니다.
1990년 8월 2일 새벽, 이라크는 공화국수비대를 주축으로 하는 30만 명의 병사를 동원하여 전격적으로 쿠웨이트 침공을 개시했습니다. 쿠웨이트는 갑작스러운 기습 공격으로 방어할 수 없는 상태였고, 이라크의 침공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라크의 기습은 매우 전격적으로 이루어져 쿠웨이트 공항과 항만 등 주요 거점을 점령했으며 쿠웨이트 군은 흩어졌습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은 국제적 비난을 불러일으켰으며 유엔 안보리에 의해 즉각적인 이라크 제재를 유발했습니다.
[사막의 방패 작전 개시]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 대응하여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를 방어하고 다국적 연합군을 편성하기 위해 '사막의 방패 작전'을 개시, 미군을 사우디아라비아에 배치했습니다.
이라크 군이 1990년 8월 2일 시작한 쿠웨이트 점령은 국제적 비난을 불러 일으켰으며 유엔 안보리에 의해 즉각적인 이라크 제재를 유발했습니다. 미국 대통령인 조지 H. W. 부시는 미군을 사우디아라비아에 배치하고 다른 국가들에게 자국 병력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 작전은 1991년 1월 16일까지 사우디아라비아의 방어와 미군 군사 기지 설치를 목표로 진행되었습니다.
1991
[유엔 안보리, 이라크에 쿠웨이트 철수 최후통첩]
유엔 안보리는 이라크가 1월 15일까지 쿠웨이트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무력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발표하며 최후통첩을 보냈습니다.
유엔 안보리는 이라크가 1991년 1월 15일까지 쿠웨이트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무력 조치를 취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사막의 폭풍 작전 개시, 이라크·쿠웨이트에 대규모 공습]
유엔 최후통첩 시한 만료 이틀 뒤, 다국적 연합군은 '사막의 폭풍 작전'을 개시하여 이라크와 쿠웨이트에 대규모 공습을 시작했습니다. 이라크군은 대부분 출격하지 못하고 파괴되었으며, 폭격은 5주간 지속되었습니다.
1991년 1월 17일 ‘사막의 폭풍’ 작전 명령이 개시되었습니다. 미국 공군의 EC-130H 전자자원기가 이라크군 통신을 방해하였고, 본격적으로 이라크와 쿠웨이트에 공습이 개시되었습니다. 당시 이라크 전투기는 거의 폭격으로 출격하지 못했으며 설사 출격하더라도 대부분 다국적군의 F-16과 F-18, F-15E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5,000대가 넘는 전차는 불능이 되었으며 이라크는 간간이 이스라엘을 항해 스커드 미사일을 발사하였으나, 대부분 미국이 제공한 최신형 패트리어트 요격 미사일에 의해 격추되었습니다. 40일에 가까운 포격으로 쑥대밭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기간은 다국적 연합군의 전투 기간으로, 5주 간 지속되었습니다.
[다국적 연합군, 쿠웨이트 해방 위한 대규모 지상 공격 감행]
5주간의 공중 폭격 이후, 다국적 연합군은 대규모 지상군을 항공기 호위하에 쿠웨이트로 진격시켰습니다. 이라크 전차는 연합군 전차에 상대가 되지 못하며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공중 및 해상 폭격과 함께 1991년 1월 17일에 시작되어 5주 간 지속된 공중전 이후, 2월 24일 대규모 지상 공격이 이어졌습니다. 다국적군은 대규모 지상군을 항공기 호위하에 진격시켰습니다. 이라크군 전차는 다국적군의 미국제 M1A1 전차나 영국제 챌린저 1 전차에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쿠웨이트에서 이라크 군대를 몰아내고 이라크 영토로 진격한 다국적 연합군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승리였습니다.
[걸프 전쟁 종전, 다국적 연합군 정전 선언]
지상전 시작 100시간 만에 다국적 연합군은 진격을 멈추고 정전을 선언하며 전쟁이 종료되었습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철수, 쿠웨이트 왕정 복고, 이라크 제재 등의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후 연합군은 진격을 멈추고 지상전이 시작된 지 100시간 만에 정전을 선언했습니다. 전쟁은 1991년 2월 28일 끝이 났습니다. 전쟁의 결과로 이라크 군이 쿠웨이트에서 철수하고, 쿠웨이트의 왕정이 복고되었으며, 이라크에 대한 제재가 가해졌습니다. 또한 이라크 및 쿠웨이트 산업시설 파괴, 페르시아만 오염, 이라크 비행금지구역 설치 등의 결과가 발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