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신
충신, 절의파, 조선 시대 인물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8- 09:50:46
사육신은 조선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여섯 명의 충신이다.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로 구성되며, 이들은 단종 폐위 후 세조 암살을 통한 복위 운동을 계획했다. 1456년 거사가 김질의 밀고로 실패하면서 혹독한 고문과 함께 일가족이 처형당했다. 이들의 시신은 노량진에 매장되었으며, 사후 오랜 시간이 지나 숙종, 영조, 정조 대에 걸쳐 관작이 복구되고 충신으로 복권되었다. 현재 노량진에 사육신을 기리는 묘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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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5
[세조의 왕위 찬탈과 단종 폐위]
세종대왕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어린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강탈당하며 폐위되었다. 이는 훗날 사육신이 단종 복위 운동을 시작하게 되는 직접적인 배경이 된다.
세종대왕은 죽기 전 집현전 학사들을 불러 어린 손자 홍위를 부탁했으나, 문종마저 일찍 죽고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세조)이 계략으로 왕위를 빼앗아 단종을 강제로 폐위시켰다. 이로 인해 단종은 상왕으로 물러나 수강궁에 거처하게 된다.
1456
[사육신 시신 비밀리에 매장]
처형된 사육신의 시신은 한강변 새남터에 버려졌으나, 생육신 김시습 또는 성삼문의 사위 박임경이 비밀리에 수습하여 노량진에 매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사육신과 그 일가족의 시신은 처형장인 새남터에 그대로 버려졌다. 통설에 의하면 생육신 중 한 명인 매월당 김시습이 이들을 몰래 수습하여 한강변 노량진에 매장했다고 전해지며, 다른 기록에는 성삼문의 사위 박임경이 수습했다고도 한다. 이곳에 유응부, 박팽년, 이개, 성삼문, 하위지, 유성원 외 박팽년의 부친 박중림, 성삼문의 부친 성승의 시신도 함께 매장되었다고 한다.
[단종 복위 운동 거사 계획 및 실패]
단종 복위를 위해 성삼문 등 사육신은 세조를 암살하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거사를 계획했으나, 명나라 사신 향응 자리에서 실행하기로 한 계획이 어긋났다.
집현전 학사 성삼문, 예조참판 하위지, 형조참판 박팽년, 직제학 이개, 사예 유성원, 도총부부총관 유응부 등은 상왕 단종의 복위와 반역파 숙청을 꾀했다. 1456년 6월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향응하는 기회를 타 세조 3부자를 척살할 계획이었으나, 거사 동조자 김질이 장인 정창손의 설득으로 계획을 밀고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사육신 및 관련자들의 처형]
단종 복위 운동이 발각되자, 세조는 성삼문 등 사육신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이들은 굴하지 않고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유응부는 거열형에 처해졌고 유성원은 자살 후 거열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으로 500~800여 명이 처형 또는 학살되었다.
단종 복위 운동 거사가 발각되자, 세조는 즉시 성삼문 등에게 참혹한 고문을 가했으나 이들은 모두 굴하지 않았다. 결국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유응부는 거열형에 처해져 몸이 찢겨 죽었고, 유성원은 잡히기 전 자기 집에서 자살한 후 역시 거열형을 당했다. 유응부, 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이들 여섯 명을 사육신이라 부른다. 사육신 외에도 관련자 권자신 등 70여 명이 처벌받았으며, 총 500여 명에서 800여 명이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육신 가문의 남자는 모두 죽음을 당했고, 여성은 노비로 끌려가는 등 큰 화를 입었다.
1469
[박팽년 가문의 후손 생존 및 사면]
사육신 일족 중 박팽년가와 하위지 가문만이 후손이 생존했다. 박팽년의 며느리는 아들과 여종의 딸을 바꿔치기해 아들을 살렸고, 이 아들 박비는 성종 때 자수하여 사면되고 박일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사육신 사건으로 일족이 몰살당했지만, 박팽년가와 하위지 가문은 후손이 생존했다. 특히 박팽년의 며느리 이씨는 자신이 낳은 아들과 박팽년가의 노비 여종의 딸을 바꾸어 자신의 딸이라 주장함으로써 아들을 살렸다. 이 아들 박비는 성종 때에 자수하여 특별히 사면받고 박일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하위지의 조카 하포, 하박, 하원 등은 미성년자라 처형되지 않고 생존했다.
1506
[사육신 복권 움직임 시작]
사육신에 대한 복권의 움직임은 조선 중종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성종 때부터는 도학을 좇는 분위기 속에 동정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사육신은 조선 성종 때부터 도학을 좇는 분위기 속에서 동정의 대상이 되었으며, 사후 조선 중종 때부터 본격적인 복권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는 공식적인 복권 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1659
[사육신 공식 복권 및 관작 복구]
현종 때 송시열, 김수항 등의 지속적인 상소로 사육신 복권 논의가 활발해졌고, 숙종을 거쳐 영조와 정조 대에 이르러 관작이 복구되고 증직과 시호가 내려지며 충신으로 공식 복권되었다.
조선 중종 대부터 시작된 사육신 복권 움직임은 현종 때 송시열, 김수항 등이 복권을 청하는 상소를 계속 올리면서 본격화되었다. 숙종 때부터 영조 때 노론 강경파들에 의해 복권되었으며, 최종적으로 영조와 정조 대에 이르러 관작이 복구되고 증직과 시호가 내려지면서 충신으로서 완전히 복권되었다.
1782
[노량진 사육신 신도비 건립]
정조는 노량진에 조선육신 신도비를 건립하여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김문기 여섯 충신을 추모했다.
1782년 (정조 6년), 조선의 정조는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김문기 여섯 충신을 추모하기 위해 노량진에 조선육신이라는 신도비를 세워주었다. 이로써 사육신의 충절은 국가적으로 공식 인정받게 되었다. 현재 사육신묘 일대는 서울특별시가 성역화하여 묘소가 조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