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육신
조선 시대 인물, 충신, 절의파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56:45
조선 단종의 왕위 찬탈에 반대하여 세조에게 충성하지 않고 절개를 지킨 여섯 명의 신하를 일컫습니다. 사육신과 달리 죽음 대신 은둔하며 지조를 지켰으며, 훗날 사림파에 의해 그 충절이 재평가되고 국가적 공인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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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3
[계유정난 발발]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계유정난이 발생, 단종의 왕위가 위태로워졌습니다. 이는 훗날 세조의 왕위 찬탈의 발판이 됩니다.
1453년 10월 10일, 수양대군(훗날 세조)이 김종서, 황보인 등 단종을 보필하던 세력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입니다. 이를 계기로 단종의 왕위가 흔들리기 시작하며, 생육신들의 불사이군 결심에 중요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1455
[세조 즉위와 생육신의 결단]
단종이 왕위에서 물러나고 세조가 즉위하자, 김시습 등 여섯 신하가 불사이군의 절개를 지키며 관직을 버리거나 아예 관직에 나아가지 않는 길을 선택합니다.
1455년 6월 11일,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세조가 즉위합니다. 이에 김시습, 성담수, 원호, 이맹전, 조려, 남효온 등의 인물들은 세조의 즉위를 부당한 찬탈 행위로 보고, 관직에 나아가지 않거나 이미 가진 벼슬을 버리고 단종에 대한 충절을 지키는 길을 택했습니다.
1456
[사육신 거사 실패와 생육신 호칭]
성삼문 등 사육신이 단종 복위 운동을 시도했으나 발각되어 실패하고 처형당했습니다. 이들의 죽음에 대비되어, 살아남아 절개를 지킨 이들을 '생육신'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1456년 6월 7일,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 사육신이 단종 복위 거사를 계획했으나 발각되어 실패하고 모두 처형당했습니다. 이들의 충절어린 죽음에 대칭하여, 세조의 찬탈을 인정하지 않고 관직에서 물러나 평생을 절의를 지키며 살았던 김시습, 성담수, 원호, 이맹전, 조려, 남효온 등 여섯 신하를 '생육신'이라 칭하게 되었습니다.
1506
[중종반정 이후 충절 재평가 시작]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중종이 즉위한 중종반정 이후 사림파가 정계에 등장하며, 사육신과 생육신의 충절이 재조명되고 높이 평가받기 시작했습니다.
1506년 9월 2일,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이 즉위하는 중종반정이 일어났습니다. 이를 계기로 훈구파의 시대가 저물고 사림파가 정치의 주류로 부상하면서, 사육신과 생육신이 보여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과 의리가 본격적으로 재평가받기 시작했습니다.
1674
[생육신, 국가적 공인]
조선 후기 숙종대를 거쳐 정조대에 이르러, 생육신은 사육신과 함께 국가적인 차원에서 충절을 공인받고 추모되는 인물들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성리학적 충절 이념이 한층 강화된 조선 후기, 숙종 시대를 시작으로 정조 시대에 이르기까지 생육신은 사육신과 함께 국가로부터 충절을 공인받아 사원(祠院) 건립, 시호 추증 등의 형태로 추모되고 존경받는 인물들로 확고히 자리매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