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 (조선)
조선 국왕, 왕세손, 왕세자, 폐위된 군주
최근 수정 시각 : 2025-11-11- 02:26:21
조선 제6대 국왕 단종은 비극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즉위했으나 숙부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으로 폐위되었습니다.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지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오랜 시간 노산군으로 불리다가 숙종 대에 복권되어 '단종'이라는 묘호를 받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많은 충신들의 희생을 낳았으며, 조선 역사상 가장 애처로운 왕으로 기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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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1
[비운의 시작, 단종의 탄생]
왕세자 문종과 왕세자빈 현덕왕후의 외아들로 태어났으나, 어머니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은 지 하루 만에 산욕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린 단종은 할아버지 세종대왕의 후궁 혜빈 양씨의 보살핌 아래 성장했습니다.
1441년 8월 18일(음력 7월 23일) 단종은 당시 왕세자였던 문종과 왕세자빈이었던 현덕왕후의 외아들로 태어났으나,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은 지 하루 만에 산욕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모후가 죽자 어린 단종을 가련히 여긴 세종은 소헌왕후와 의논하여 자신의 후궁인 혜빈 양씨에게 어린 단종을 부탁했고, 혜빈 양씨의 보살핌 아래에서 성장하였습니다.
1448
[조선 최초의 왕세손 책봉]
8살이 되던 해, 단종은 할아버지 세종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조선 최초의 왕세손으로 책봉되었습니다. 세종은 병약한 아들 문종과 어린 손자 단종의 미래를 걱정하며 여러 신하에게 단종을 지켜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1448년 4월 24일(음력 4월 3일) 8살이 되던 해에 왕세손으로 책봉된 단종은 할아버지 세종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습니다. 병중이었던 세종은 자신이 그리 길게 살지 못할 것을 예감하고 있었으며, 병약한 아들 문종 역시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늘 어린 손자 단종을 몹시 걱정했습니다. 세종은 생전에 황보인, 김종서,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에게 왕세손을 지켜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1450
[왕세자 책봉]
할아버지 세종대왕이 승하하고 아버지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단종은 곧바로 왕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세종대왕은 문종의 병약함과 여러 대군들의 존재를 염려하며 집현전 학사들에게 어린 왕세자를 부탁했습니다.
1450년 8월 26일(음력 7월 20일) 조부 세종대왕이 승하하고 아버지 문종이 왕으로 즉위하자 바로 왕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부왕 문종이 즉위하기 전 할아버지 세종은 세자 문종의 병약함과 수양대군, 안평대군 등의 아들들의 존재를 염려하여 집현전의 학사들에게 어린 손자를 부탁하는 말을 여러번 반복하였습니다. 성삼문 등은 세종의 뜻을 받들었지만, 신숙주 등은 수양대군의 측근이 되었습니다.
1452
[어린 나이에 조선의 국왕으로 즉위]
아버지 문종이 즉위 2년 3개월 만에 병으로 승하하자, 단종은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어린 왕은 혼자 국정을 결정하기 어려웠고, 의정부 신하들이 실질적인 국정을 운영했으며, 특히 인사 문제는 황표정사 방식으로 결정되었습니다.
1452년 6월 1일(음력 5월 14일) 아버지 문종은 즉위한 지 겨우 2년 3개월 만에 병으로 승하하고 말았습니다. 단종은 문종의 뒤를 이어 같은 날 12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어릴 때부터 세종의 칭찬이 자자했을 만큼 영리하였으나, 어린 나이에 즉위했으므로 혼자서 나랏일을 결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결정은 의정부의 신하들이 도맡아 했고, 단종은 형식적인 결재를 하는 데 그쳤습니다. 특히 인사 문제는 고명대신들에 의한‘황표정사(黃票政事)'라는 방식으로 결정되었습니다.
1453
[숙부 수양대군의 계유정난 발발]
숙부 수양대군이 안평대군 세력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계유정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단종의 고명대신인 황보인, 김종서, 정분 등을 살해하고, 안평대군을 유배 보냈으며, 수양대군 스스로 영의정부사가 되어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이로써 단종은 이름뿐인 왕이 되고 말았습니다.
수양대군은 단종의 최측근 보호자를 자처하며 비밀리에 측근 세력을 양성하여 왕위를 찬탈할 기회를 노렸습니다. 1453년 10월 10일, 안평대군 계열이 먼저 손을 쓰려는 움직임이 감지되자 수양대군은 한명회, 권람 등과 공모하여 홍윤성, 홍달손 등의 병력을 동원함으로써, 문종의 고명(誥命)을 받아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인, 김종서, 정분 등을 죽이고 아우 안평대군을 강화도에 유배시켰으며 스스로 영의정부사가 되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습니다. 이후 1454년 3월 정난공신을 책정하고 자신은 1등 공신에 서훈하였습니다.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이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자 단종은 단지 이름뿐인 왕이 되고 말았습니다.
1455
[수양대군에게 강제로 왕위 양위 및 유배]
수양대군의 측근 세력의 강요로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습니다. 이듬해인 1456년,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처형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에 연루된 단종은 1457년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되었습니다.
1455년 7월 25일(음력 윤 6월 11일), 단종은 수양대군의 측근 세력인 한명회, 권람 등에게 왕위를 강요받아 수양대군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 수강궁으로 옮겨갔습니다. 동시에 그의 유모 혜빈 양씨는 금성대군 등과 결탁하여 전횡을 휘둘렀다는 이유로 탄핵당하고 1455년 12월 17일(음력 11월 9일) 교수형으로 사망합니다. 1456년 음력 6월,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김문기 등 이른바 사육신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1457년 단종은 노산군, 즉 폐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되었습니다.
1457
[비극적인 최후, 영월에서 사사되다]
유배지 영월에서 금성대군이 또다시 단종 복위 사건을 일으키자, 세조는 금성대군을 사사하고 단종에게도 죽음을 내렸습니다. 단종은 16세의 어린 나이로 사사(교살 또는 사약)당했고, 그의 시신은 영월 호장 엄흥도에 의해 수습되어 가매장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오랜 기간 공적으로 추모가 금기시되었습니다.
1457년 9월, 금성대군은 배소인 순흥에서 단종 복위 계획을 세웁니다. 금성대군, 순흥부사 이보흠 등이 또다시 단종 복위 사건을 일으키자 세조는 금성대군을 사사하고 단종도 같이 죽음을 내렸습니다. 1457년 11월 16일(음력 10월 21일), 단종은 16세의 어린 나이로 사사(교살 또는 사약)되었습니다. 아무도 그의 시신을 매장하지 못하였으나, 영월군의 호장 엄흥도가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눈보라 속에서 사슴이 앉았다가 사라진 곳에 가매장했습니다. 공적으로는 단종의 추모가 금기시되었으나, 정보, 이수형 등 일부 신하는 복상하고 3년상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사후 단종은 무속에서 군왕신으로 숭배되기 시작했습니다.
1516
[59년 만에 봉분이 갖춰진 묘소]
단종이 사사된 지 59년 후인 중종 11년에 이르러서야 그의 묘소에 정식으로 봉분이 갖춰졌습니다. 비록 여전히 '노산군묘'로 불렸지만, 이는 복권의 첫걸음이었습니다.
단종은 1457년 사사된 이후 가매장되었다가, 59년 후인 조선 중종 11년 1516년 12월 15일에야 정식으로 봉분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의 능은 강원도 영월에 위치한 장릉입니다.
1681
[노산대군으로 추봉되며 복권 논의 시작]
사망한 지 224년 만에, 숙종의 특명으로 단종은 노산대군으로 추봉되었습니다. 이는 그를 왕족의 일원으로 다시 인정하는 중요한 조치였습니다.
사망한 지 224년 만인 1681년(숙종 7년) 7월, 숙종의 특명으로 단종은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추봉되었습니다. 앞서 중종 때 사림에 의해 복권 논의가 있었으나 거절되었고, 사림의 한 갈래인 서인과 노론이 단종과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의 복권을 주장하며 여론을 조성했습니다.
1698
[300여 년 만에 비로소 '단종'으로 복위]
숙종 대에 이르러 단종은 정식으로 복위되어 '예를 지키고 의를 잡는다'는 뜻의 '단종'이라는 묘호를 받았습니다. 그의 묘소도 노산군묘에서 '장릉'으로 격상되었습니다.
1698년(숙종 24년) 11월 6일, 단종은 정종과 함께 복위되어 '예를 지키고 의를 잡는다'라는 뜻의 '단종'(端宗)으로 묘호가 정해졌습니다. 정식 시호는 단종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이었습니다. 단종의 묘소 역시 단종이 노산군에서 노산대군으로, 노산대군에서 다시 단종으로 복권되면서 묘호 또한 정식으로 '장릉'(莊陵)으로 격상되었습니다.
2007
[550년 만에 치러진 단종의 국장]
단종이 승하한 지 550년 만인 2007년 5월, 그의 능이 있는 강원도 영월에서 마침내 국장이 치러졌습니다. 이는 조선왕조 27명의 임금들 중 유일하게 제때 국장을 치르지 못한 왕인 단종의 한을 달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단종은 조선왕조 27명의 임금들 중 유일하게 국장을 제때 치르지 못한 왕이기도 합니다. 승하한 지 550년 만인 2007년 5월에 단종의 능이 있는 강원도 영월에서 국장이 치러졌습니다. 이는 단종의 비극적인 삶과 그를 향한 오랜 염원이 마침내 결실을 맺은 역사적인 순간으로 기록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