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

문신, 외교관, 유학자, 정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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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뛰어난 학식과 외교 역량을 겸비한 문신이자 성리학자. 친명파 신진사대부로서 유학 진흥 및 사회 개혁에 앞장섰다. 위화도 회군에 동참하며 새로운 정치 세력과 협력했으나, 역성혁명에는 반대했다.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을 지키려다 이방원에게 암살당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사후 조선 시대에 충절의 상징이자 동방 성리학의 중시조로 추앙받으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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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8

[정몽주 탄생]

고려 말 문신이자 유학자인 정몽주가 경상북도 영천군에서 정운관과 영천 이씨 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명은 몽란, 몽룡이었으나 아버지의 태몽에 따라 후에 몽주로 개명하였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기억력과 학업 성취도를 보였으며, 이색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하며 학문적 기반을 다졌다.

정몽주는 1338년 1월 13일 (음력 1337년 12월 22일) 경상북도 영천군에서 영일 정씨 정운관과 영천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어머니 영천 이씨는 품에 안고 있던 난초 화분을 떨어뜨리는 태몽을 꾸고 이름을 몽란이라 지었다. 후일 아버지의 꿈에 주나라 주공을 만나는 내용이 있어 몽주로 이름을 고쳤다.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고 암기력이 뛰어났으며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유년기에 아버지 정운관에게 한학을 배우다가 이색의 문인이 되어 성리학을 수학했다.

1355

[부친상과 효행]

17세 되던 해 아버지 정운관이 사망하자, 정몽주는 영천 도일동에 부친의 장사를 지내고 묘소에서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며 지극한 효행을 보였다. 이 소식이 조정에 알려져 공민왕은 그의 집에 특별히 포상하고 정표를 세워주었다.

1355년(고려 공민왕 4년) 정몽주가 17세 되던 해에 아버지 정운관이 사망하자, 그는 영천 도일동에 부친의 장사를 지내고 묘소에서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당시 상제(喪制)가 문란해 사대부들도 100일만 지나면 상을 벗었는데 그는 부모상 때 분묘를 지키고, 애도와 예절이 극진했으므로 왕이 그의 마을을 표창했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공민왕은 그의 집에 특별히 포상을 하고 정표(旌表)를 세워주었다.

1360

[문과 장원 급제]

공민왕 9년, 정몽주는 문과에서 세 번의 시험을 거쳐 장원으로 급제하며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의 종사관으로 여진족 토벌에 참가하는 등 초기에 군사 활동에도 참여했다.

정몽주는 1357년(공민왕 6년) 여름에 감시(監試)에 합격하고 1360년(공민왕 9년) 10월 문과에서 세 번의 시험 끝에 장원 급제하였다. 이때 과거의 감독관인 지공거는 난계 김득배였고 동지공거는 한방신이었다. 김득배 등에 의해 선발되어 과거에 장원급제한 이후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의 종사관으로 여진족(女眞族) 토벌에 참가였으며, 예문관 검열·수찬(修撰) 등을 거쳐 1362년 다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

1362

[김득배 시신 수습과 의리]

김득배가 홍건적 격파 후 김용의 모해로 처형되자, 정몽주는 김득배의 문생으로서 홀로 왕에게 간청하여 그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 지냈다. 이는 그의 충의롭고 의로운 성품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1362년 김득배가 홍건적을 격파하여 개경을 수복하고서도 김용(金鏞)의 모해로 옥에 갇혔다가 상주에서 처형, 효수되자, 정몽주는 특별히 간청하여 그의 문생으로서 왕에게 청하여 그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냈다. 김득배 등이 역적으로 몰렸을 때 그의 문생 중에서 나서는 이는 거의 없었으나 정몽주 혼자 분연히 일어나 의리상 그의 시신을 수습해야 되겠다고 건의한 것이다. 이때 정몽주는 왕에게 청하여 김득배의 시체를 친히 수습한 뒤 글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1368

[명나라 국교 체결 주장]

명나라가 건국되자, 정몽주는 명나라가 중국 대륙의 정통 국가임을 주장하며 명과의 외교 관계 체결을 강력히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이로써 고려는 명나라와 국교를 맺게 되었다.

1368년 명나라가 처음 건국하자 그는 명나라가 중국 대륙의 정통 국가임을 들어, 명나라와 외교관계를 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관철시켰으며, 명나라와 국교를 체결하게 된다. 1371년(공민왕 20년) 태상소경(太常少卿)·보문각 응교 겸 성균관직강(寶文閣應敎兼成均館直講) 등을 거쳐 성균관 사성에 올랐다.

1372

[명나라 사신 파견과 귀환]

명나라 서촉 평정을 축하하는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오던 중 태풍을 만나 배가 난파되는 사고를 겪었다. 정몽주는 바위섬에서 13일간 표류하며 명 태조의 서신을 보존하는 의연한 모습을 보여 명나라로부터 깊은 신뢰를 얻었고, 1373년 7월 개경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1372년(공민왕 21년) 3월 명나라가 서촉지방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명나라에 파견되는 정사(正使)인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홍사범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왔다. 남경에서 고려로 귀국하는 길에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배가 난파당했다. 정사인 홍사범 등은 익사하고 정몽주는 바위 섬에서 구사일생으로 표류 13일 만에 살아났다. 그 뒤 표류하였으나 그는 가슴 속에 명 태조 주원장의 서신을 간직하며 물에 한번 젖지 않게끔 보존하고 있었다. 명 태조가 이 소식을 듣고 배를 보내어 굶주림 속에서도 의연한 그의 모습을 보고 귀국을 도와주었으며, 이 사실이 알려져 명나라로부터 깊은 신뢰를 얻게 되었다. 그는 1373년 7월 개경으로 돌아왔다.

1375

[이인임 친원정책 비판과 유배]

성균관 대사성으로서 이인임이 주장하는 배명친원 정책을 반대하고, 원나라 사신을 사로잡을 것을 상소하는 등 강력히 비판했다. 이로 인해 정몽주를 포함한 신진사류 21명이 죽거나 유배당했으며, 정몽주는 울산 언양으로 유배되었다.

1375년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 유학을 크게 진흥시켰다. 1376년(우왕 2년) 우사의대부를 거쳐 다시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이후 명나라와의 외교론을 주장하였다. 성균관 대사성으로서 그는 이인임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 방침을 반대하였으며 이인임이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면서 동시에 북원(北元)에서 보내온 사신을 맞이하려는 이중 외교정책을 추진하자 정몽주는 박상용, 김구용 등 10여 명과 상소하고 대간들도 이인임을 탄핵했다. 1375년(우왕 1년) 5월 원나라에서 온 사신을 사로잡고 관계를 맺지 말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이러한 정몽주 등의 정치적 행동은 심각한 좌절로 끝나고 말았다. 정몽주는 물론이고 정도전을 포함하여 신진사류 21명이 죽거나 유배당한 것이다. 이인임의 친원정책을 비판, 규탄하였다가 울산 언양(彦陽)으로 유배 되었다가 1377년(우왕 3년) 정도전 등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1377

[일본 보빙사 파견 및 외교 성과]

왜구의 약탈이 심해지자 직접 일본 보빙사로 건너가 규슈 탄다이를 만나 왜구 단속을 요청하고 국교의 이해관계를 설명했다. 그의 뛰어난 인품과 학식에 감복한 일본 측의 협조로 잡혀갔던 고려인 수천 명을 귀국시키며 외교적 명망을 얻었다.

1377년 9월 그는 사신을 자원하여 왜에 보빙사(報聘使)로 건너갔다. 그가 직접 사신으로 파견돼 귀국 시, 수백 병의 포로들을 데리고 오는 외교력을 보여줬다. 왜(倭)에 파견되는 사신으로 일본 규슈에 가서 규슈 탄다이(지방장관) 이마가와 료슌(今川了俊)을 만나 왜구의 약탈로 인한 피해가 심하여 일본과 외교가 어려운 점을 지적하여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여 응낙을 얻고, 국교의 이해관계를 잘 설명하여 왜구에게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이때 학문적 소양이 있던 왜의 규슈탄다이 이마가와 료슌과의 대화에서 두 나라 사이에 교류하는 의리와 이해관계를 설명하였는데, 이마가와는 그의 뛰어난 인품과 학식에 탄복하였다 한다. 1378년 7월 포로나 노예로 끌려갔던 수천 명을 배에 싣고 일본에서 돌아왔다. 고려인 포로 수천명을 구해 되돌아온 일로 명망을 얻었다.

1384

[명나라 외교 재개 및 세공 문제 해결]

명나라의 강압적인 공물 요구와 외교 단절 위기 속에서, 모두가 꺼리는 성절사 임무를 자원하여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그는 세공 감축과 미납 세공 면제를 받아내고, 억류된 사신들을 귀국시키며 긴장 상태에 있던 명과의 국교를 성공적으로 회복시켰다.

1383년(우왕 9년) 3월에 판도판서(版圖判書)를 거쳐 동년 가을 동북면 조전원수(助戰元帥)로서 함경도에 쳐들어온 왜구를 토벌하고, 1384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다. 그 시 명은 우왕의 요동 정벌 계획을 사전에 입수하여 고려에 출병하려고 병력을 증원하였으며, 고려에 최후통첩을 보내 매년 보내는 토산물을 증액시켰으며 5년간에 걸쳐 토산물을 약속대로 보내지 않았다고 하여 사신 홍상재(洪尙載) 등을 유배보냈다. 정몽주는 토산물의 부족과 명나라 명 태조의 처사가 지나침을 호소하였고, 스스로 사신의 직책을 자청한다. 그해 주원장의 생일을 축하하는 성절사(聖節使)가 파견될 때, 사신을 보내 명 태조의 생일을 축하해야 하는 형편이었는데 사람마다 가기를 꺼려했는데, 사신 중 일부는 명 태조가 그자리에서 처형했기 때문이었다. 정몽주는 자원하여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세공(歲貢)의 감축과 5년간 미납한 세공을 면제받고 긴장 상태에 있던 대명(對明) 국교를 회복하게 하였다. 또한 이전에 억류된 홍상재 등도 풀려나 돌아오게 했다.

1388

[위화도 회군 동참]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자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도와주었다. 이로 인해 우왕과 창왕이 폐위되고 이성계가 실권을 장악하는 데 협력하며 정몽주 역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1388년 5월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자 이를 적극 도와주었다. 정몽주는 위화도 회군을 찬성했다. 1388년 최영과 우왕이 계획한 요동 정벌이 이성계가 주도한 위화도 회군으로 무산되고, 우왕이 폐위당하였으며, 그의 아들인 창왕(昌王)이 왕위에 올랐다. 국가 운영은 이성계가 주도했고, 정몽주는 더욱 출세 가도를 달렸다.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와 결합한 신진사류 대부분이 정치 일선에서 활발한 활약을 보였지만 정몽주는 보다 유리한 입장이었다. 고려사 정몽주전에는 이성계가 매번 출전할 때 정몽주와 함께 나갔고, 여러 번 천거하여 함께 재상이 되었다고 기록할만큼 이성계와 정몽주는 가까운 사이였다.

1389

[공양왕 옹립]

이성계 일파와 함께 '폐가입진'을 주장하며 창왕을 폐위하고, 신종의 6대손 정창군 왕요를 공양왕으로 옹립하는 데 적극 동참했다. 이 공로로 순충논도좌명공신에 책록되고 중대광 문하찬성사 등의 고위 관직에 올랐다.

1388년(창왕 1년)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임명되었고, 예문관대제학이 되었는데, 1388년 동년 도당(都堂)에서의 개인이 사사로이 보유한 토지들이 문제가 되어 사전혁파(私田革罷)를 논의하였으나 그는 의사표시를 하지 않았다. 그 해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지서연사(知書筵事)를 거쳐 1389년(창왕 2년) 6월에 예문관 대제학,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그해 11월 다시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가 되었으며 이때 이성계 일파가 새로운 왕을 세우려 하자 이성계 등과 함께 폐가입진을 주장하며 고려 신종의 6대손 정원부원군(定原府院君)의 차남 정창군 왕요를 공양왕으로 영립(迎立)했다. 1389년(창왕 1년) 말에는 태조 이성계와 함께 창왕을 폐한 뒤 공양왕을 괴뢰로 옹립하고 조정을 장악하고자 하였으나, 당시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커지어서 조준·남은·정도전 등이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들을 숙청할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그러나 우왕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이 탄로나면서, 창왕도 폐위당하였다. 공양왕을 옹립할 때 정몽주는 적극 찬성했다. 뒤를 이어 공양왕이 왕위에 올랐는데, 정몽주는 이성계·정도전·조준(趙浚) 등 아홉 명과 함께 공양왕 옹립 공신에 책봉되어, 동년 8월 순충논도좌명공신(純忠論道佐命功臣)에 책록되고 중대광(重大匡)에 올라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겸 동판도평의사사사 판호조상서시사 진현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同判都評議使司事 判戶曹尙瑞寺事 進賢館大提學 知經筵春秋事)에 임명된 뒤 익양군충의군(益陽郡忠義君)에 봉군되었다.

1390

[수문하시중으로서 개혁 추진]

벽상삼한삼중대광에 올라 수문하시중 겸 도평의사사 등을 겸하고 익양군충의백에 봉작되었다. 수문하시중이 되어 그는 풍년기 곡식을 저장하는 의창을 재건하여 흉년 때 백성을 구제하는 등 사회 개혁과 민생 안정에 힘썼다.

1390년(공양왕 2년)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에 올라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겸 도평의사사, 병조상서시판사(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判事)·경영전영사(景靈殿領사)·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 등을 겸하고 익양군충의백(益陽郡忠義伯)에 봉작되었다. 수문하시중이 되어 그는 풍년이 들었을 때 여유 분의 곡식을 저장해 두는 창고인 의창을 다시 세워 흉년이 들었을 때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했다. 그는 수문하시중으로 수문하시중인 이성계와 함께 공동 수상이 되었으나 이성계을 중심으로 한 역성혁명파는 '이씨(李氏)가 나라를 얻는다'는 뜻의 목자득국(木子得國)이라는 노래와 말을 시중에 확산시켰다.

1391

[신법령 제정]

인물추변도감제조관으로서 인재 선발을 주관하고, 《대명률》, 《지정조격》 및 본국 법령을 참작하여 새로운 법령인 신률(新律)을 제정, 공표하며 법질서 확립에 힘썼다. 이는 혼란했던 고려 말 사회의 기강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1391년(공양왕 3년) 인물추변도감제조관(人物推辨都監提調官)이 되어 인재 선발을 주관하였고, 바로 안사공신(安社功臣)의 호를 더하였다. 그 뒤 《대명률 大明律》·《지정조격 至正條格》 및 본국의 법령을 참작, 산정하여 새로운 법령인 신률(新律)을 제정, 공표하여 법질서를 확립하려고 힘썼다.

1392

[이성계 일파 제거 시도 실패]

이성계가 사냥 중 낙마하여 황주에 드러눕자, 정몽주는 이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방원이 이를 눈치채고 이성계를 개경으로 돌아오게 하면서 계획은 실패했다. 이 시도는 정몽주와 이성계 세력 간의 결정적인 대립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392년(공양왕 4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낙마하여 황주(黃州)에 드러눕게 되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 챈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이성계를 그날 밤 개성으로 돌아오게 함으로써 실패하였다. 이성계는 이방원에게 정몽주를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일 것을 지시했다. 이에 이방원은 정몽주를 자택으로 부르자 정몽주는 정세를 엿보러 이성계를 병문안하러 왔다. 그때 정몽주와 태종 이방원이 주고 받은 시조가 바로 《단심가》(丹心歌)와 《하여가》(何如歌)이다. 이방원은 하여가를 통해 정몽주를 이성계의 세력으로 다시 끌어들이고자 하였으나, 정몽주는 단심가로 이를 거절하였다. 그의 오랜 벗이었던 정도전 역시 계속 그를 찾아 도와줄 것을 요청하며 설득했으나, 그는 종묘와 사직을 엎을 수 없다며 협력을 거부하였다.

[선죽교 피살]

이성계의 병문안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개성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심복 조영규 일파에게 암살당했다. 그는 죽음을 예감하고 충효를 다하라는 유언을 남겼으며, 임 향한 일편단심을 노래한 '단심가'를 남긴 채 고려의 충신으로 생을 마감했다.

1392년 5월 4일(공양왕 4년 음력 4월 4일) 새벽 그는 악몽을 꾸었는데, 자신이 죽을 수도 있음을 예상하였다. 그날 아침, 조상들의 제단 앞에 절하고 부인과 두 아들을 불러놓고 '충효를 숭상하는 우리 집의 가문이니 조금도 낙심 말라'는 유언과 새 조정에서 주는 벼슬을 거절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5월 4일(음력 4월 4일) 저녁 정몽주는 낙마로 부상당했다는 태조 이성계의 문병 겸 동태를 살피기 위해 태조 이성계의 집을 방문, 정황을 살피고 귀가하던 중, 개성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와 그 일파에게 암살당했다. 일부 전설에 의하면 그가 이성계 집을 방문한 것은 이방원이 계략을 써서 그를 초청한 것이라고도 한다. 이때 이미 이방원은 심복부하 조영규를 시켜 철퇴를 꺼내어 선죽교 다리 밑에 숨었다가 정몽주가 지나갈 때 쳐서 죽이라고 지시하였고, 정몽주는 변중량(변중랑)을 통해 이 정보를 입수했었다. 조영규와 무사들이 나타나자 그는 분위기가 이상함을 감지하여 말을 타고 이성계의 자택을 떠났으나, 돌아오면서 친구 집에 들려 술을 마신 후 말을 거꾸로 타고 마부에게 끌라 했다. 말을 끄는 사람이 정몽주 선생이 술이 취해 그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아한 눈치로 물으니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몸이라 맑은 정신으로 죽을 수 없어 술을 마셨고 흉한이 앞에서 흉기로 때리는 것이 끔직하여 말을 돌려 탄 것이다. 하고 답하였다. 그 말을 이해 못한 마부는 말을 끌고 선죽교(善竹橋)를 향했다. 선죽교를 넘으려 할 때 궁사가 말 혹은 정몽주를 저격하여 넘어트렸고, 마부가 쓰러지자 순간 조영규가 이끄는 고여(高呂), 조평(趙評) 등 5~10여 명의 괴한이 나타났다. 정몽주는 이들이 비열하게 숨어서 사람을 공격함을 질책하고 말을 달렸으나, 부상당한 채 도망치는 정몽주를 쫓아가 철퇴 또는 몽둥이와 철편으로 때려 죽였다. 이때 그가 조영규, 고여, 조평 등의 철퇴에 맞고 흘린 피가 개성 선죽교의 교각에 일부 묻었는데, 후일 백범일지에 의하면 1945년 이후 김구가 선죽교를 방문할 때까지도 그 흔적이 있었다 한다. 이후 선죽교 돌 틈에서는 대나무가 솟아 그의 충절을 나타냈다는 전설이 있으며 이후 이 다리는 원래 선지교라고 하였으나 다시 선죽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송도에 내려오는 한 전설에 의하면 정몽주가 선죽교 근처에서 사망하지 않고, 피습을 당한 뒤 개경부 태묘동까지 부상당한 상태로 피를 흘리며 피신해왔으나, 그의 뒤를 따라온 태종 이방원의 자객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전승도 전한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56세였다.

1401

[사후 복권 및 추증]

암살 직후 역적으로 단죄되었으나, 그가 죽은 지 9년 후인 1401년(태종 1년) 태종 이방원의 주청을 받아들여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에 추증되고 익양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이는 태종이 정도전 등을 격하시키고 정몽주를 충절의 상징으로 격상시키려는 의도였다.

그가 죽은지 9년 후인 1401년 태종은 권근의 주청을 받아들여 정몽주에게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겸 수문전대제학 감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을 추증했다. 자기가 죽인 사람을 영의정에 추증함으로써 자신의 포용력을 대외에 과시하려는 의도였다. 그의 문하생 중 길재와 이숭인은 많은 문하생을 길러냈는데, 이들은 지방의 유력 인사로 성장하여 후일 사림파의 기원이 된다. 조선 건국 초까지만 해도 그는 간신(姦臣)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그의 손녀 중 한 명은 정종의 다섯째 서자와 결혼했고, 그의 제자 길재는 김숙자(김숙자)-김종직을 거쳐 사림파로 이어지고, 다른 제자 권우(권우)는 세종대왕과 정인지의 스승이 된다. 태종(태종)은 왕조가 확립된 후 왕실에 반대하는 인물들을 규탄하면서 사대부와 백성들에게 충성심을 유도할 목적으로 정몽주를 충절의 표상으로 끌어올렸다. 정몽주의 문하생인 권우(권우)에게서 학문을 배운 세종대왕 때에 이르러서 그는 성자로 인식되었다.

1517

[문묘 종사]

중종 12년, 성균관 유생들의 청원으로 정몽주가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었다. 이는 사림파가 훈구파를 견제하고 자신들의 학문적 정통성을 확립하려는 과정에서 정몽주를 유학의 종장으로 추대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성종이 훈구파(공신 세력)의 견제를 위해 그의 후신인 사림파를 발탁하면서 그를 성균관 문묘에 모시려는 운동이 나타나 조선 중종 때 문묘에 종사되었고, 1555년(명종 10년) 그의 고향인 경북 영천에 임고서원이 창건되고, 1573년 개성 숭양서원, 1576년 용인 충렬서원, 1588년 영일 오천서원 및 상주 도남서원, 울산 구강서원, 언양 반구서원 등 13개의 서원에 배향되었다. 중종 때 이여가 정몽주의 문묘 종사를 청했다. 중종은 이여의 건의와 유생의 상소에 따라서 정몽주의 문묘 종사를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했다. 1611년 참찬관 이자가 정몽주의 묘를 수리할 것을 건의했다. 중종은 예조 정랑 이순(李純)을 보내어 정몽주의 무덤에 치제를 했다.

2003

[6월 문화인물 선정]

대한민국 문화관광부에서 2003년 6월의 문화인물로 정몽주를 선정하여 그의 업적과 정신을 기렸다. 이는 현대에 이르러서도 그에 대한 평가와 재조명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2003년 대한민국 문화관광부에서 6월 문화인물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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