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수 (고려)

고려, 무신, 군인,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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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8:2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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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수는 고려 말 격동의 시기를 살았던 무신이자 정치인입니다. 이성계와 요동 정벌에 참여했으나 위화도 회군에 동참하며 고려의 운명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우왕을 폐위하고 창왕을 옹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이후 이성계 일파와 대립하다 유배지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습니다. 그의 삶은 고려의 몰락과 조선 건국이라는 거대한 전환기의 한 단면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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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4

[격동의 시대에 태어나다]

고려 말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무신이자 정치인 조민수가 태어났다.

고려 말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무신 조민수가 태어났다.

1361

[홍건적 격퇴, 무인으로서의 첫 공적]

순주부사로 재직하며 여러 장군들과 함께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쳐 2등공신에 책봉되었다.

1361년, 순주부사로 홍건적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2등공신에 올랐다.

1362

[고려의 주요 요직을 거치다]

양광도도순문사, 전리판서, 동지밀직사사 등 여러 요직을 거치며 경력을 쌓았다.

1362년, 양광도도순문사를 거쳐 전리판서, 동지밀직사사 등 주요 관직을 역임하며 고려의 주요 인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1368

[명나라 견제, 권력의 중심에 서다]

명나라가 원나라 수도를 포위하자 좌상시로서 명나라의 위협에 대비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충근보리공신의 호를 받았다.

명나라가 원나라의 수도인 연경을 포위하며 고려에 위협을 가하자, 좌상시로서 의정주등처안무사가 되어 이에 대비하였다. 이때 충근보리공신이라는 호를 받았다.

1375

[왜구로부터 백성을 지키고 승진하다]

경상도도순문사로 왜구를 물리쳤으며, 이후 지문하부사, 서북면도체찰사에 오르며 고위직에 올랐다.

우왕 즉위 초, 경상도도순문사로서 왜구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격퇴하였다. 이 공로로 지문하부사와 서북면도체찰사 등 요직을 거치며 권력을 강화했다.

1379

[국정 운영의 핵심에 서다]

문하평리직을 수행하며 고려의 주요 정책 결정에 참여했다.

1379년, 문하평리에 임명되어 국정에 참여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1383

[고려 최고 권력의 정점에 오르다]

고려의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에 올랐고, 창성부원군에 봉해져 권세의 정점에 다다랐다.

1383년, 고려의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에 올랐으며, 왕실의 종친이나 재상에게 주어지는 작위인 창성부원군에 봉해지며 최고의 명예와 권력을 얻었다.

1384

[전라도 군사권을 총괄하다]

밀직부사로서 전라도조전원수를 겸임하며 전라도 지역의 군사권을 총괄했다.

1384년, 밀직부사로서 전라도조전원수를 겸임하여 전라도 지역의 군사 통솔권을 맡았으며, 이는 그의 군사적 역량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385

[외교 사절로 명나라를 방문하다]

판문하부사의 신분으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385년, 판문하부사의 직책으로 명나라에 사은사로 파견되어 외교적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왔다.

1388

[요동정벌 중 위화도 회군, 창왕을 옹립하다]

요동 정벌군의 좌군도통사로 출정했으나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에서 회군했다. 이후 이성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인임의 외종손인 왕창을 창왕으로 옹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일로 충근양절선위동덕안사공신에 책봉되었다.

1388년, 요동 정벌군의 좌군도통사로 이성계와 함께 출정했으나, 이성계의 제안에 따라 위화도에서 회군하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회군 이후, 그는 이성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색의 지지를 얻어 우왕을 폐위하고 창왕을 세우는 데 중요 역할을 했다. 이 공로로 충근양절선위동덕안사공신 및 양광전라경상서해교주도도통사 칭호를 받았다.

1389

[개혁 반대로 유배, 서인으로 강등되다]

이성계 일파의 전제개혁을 반대하다 조준 등의 탄핵으로 창녕에 유배되었다. 창왕 생일 특사로 풀려났으나, 우왕의 혈통 논쟁으로 이성계 일파와 대립하다 다시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1389년, 그는 이성계 일파가 추진하던 전제개혁에 반대하다가 조준 등의 탄핵을 받아 창녕으로 유배되었다. 창왕의 생일에 특사로 풀려났지만, 우왕의 혈통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서 이성계 일파에 대항하다가 결국 서인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었다.

1391

[창녕 유배지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다]

창녕 유배지에서 사망하며 파란만장했던 생애를 마감했다.

1391년 1월 27일(음력 1390년 12월 22일), 창녕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고려 말 격변의 시기에 권력을 쥐었으나 결국 몰락한 그의 삶은 고려의 운명과 궤를 같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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