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색

고려시대 인물, 문신, 학자, 사상가, 교육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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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5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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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인물, 문신, 학자, 사상가, 교육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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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문신, 정치인, 대학자, 사상가, 교육자, 시인이다. 성리학을 고려에 소개하고 확산시키며 새로운 개혁 비전을 제시했다. 이제현의 제자로 정몽주, 정도전 등 수많은 성리학자를 배출했다. 역성혁명에 반대하며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키다 유배되기도 했다. 조선 개국 후 태조의 출사 권유를 거절하며 충절을 보여주었다. 《목은시고》, 《목은문고》 등 방대한 저술을 남긴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성리학의 유종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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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8

[이색 탄생]

고려 말의 대학자 이색이 태어났다.

고려 말기의 문신이자 정치인, 대학자, 사상가, 교육자, 철학가, 시인인 이색(李穡)이 1328년 6월 17일에 태어났다.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이다.

1335

[독서 시작]

이색이 7세의 나이에 독서를 시작하며 학문의 길에 들어섰다.

이색은 7세 때(1335년)부터 독서를 시작했으며, 아버지 이곡의 친구이자 안향, 백이정의 학문을 계승한 이제현을 찾아가 정주학을 배웠다.

1341

[성균시 합격 및 원나라 유학]

14세에 성균시에 합격하고 원나라 국자감에서 유학하며 학문을 깊이 갈고닦았다.

이색은 14세(1341년)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했으며, 중서사전부(中瑞司典簿)로 원나라에서 일을 보던 아버지 이곡으로 인해 원나라 국자감 생원이 되어 3년간 유학했다.

1352

[공민왕에게 개혁 의견서 제출]

공민왕에게 자신의 학문적 경향과 정치적 견해를 담은 의견서를 제출하며 개혁 활동의 시작을 알렸다.

1352년(공민왕 1년) 이색은 그의 학문의 경향과 정견(政見)의 윤곽을 피력한 의견서를 왕에게 제출하였다.

1353

[고려 및 원나라 문과 급제]

문과에 급제하고 원나라에서도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 지제고를 역임하며 관료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1353년(공민왕 2년) 문과에 갑과(3등 이내)로 급제했으며, 다시 정동행성 향시(鄕試)에 장원(1등)으로 합격하여 서장관에 임명된 뒤 원나라에 들어가 다시 문과에 급제, 한림 지제고(翰林知制誥)가 되었다.

1367

[성균관 대사성 취임 및 성리학 확산 기여]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 정몽주 등과 함께 성리학을 강론하며 고려에 성리학이 뿌리내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367년(공민왕 16년) 개성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고, 정몽주, 김구용 등과 명륜당에서 학문을 강론하니 이에 정주(程朱)의 성리학이 처음으로 일어났다. 그는 권문세족의 전횡을 비판하며 공민왕의 개혁 정책에 적극 협력했으며, 불교의 대안으로 성리학을 새로운 개혁의 비전으로 제시했다.

1377

[우왕의 사부 임명]

우왕의 사부가 되어 고려의 핵심 정치 인물로서 왕실 교육에 참여했다.

1377년(우왕 3년)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찬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388

[위화도 회군 이후 정치적 갈등]

위화도 회군 이후 전제 개혁에 반대하고 우왕 폐위에 맞서다 관직에서 물러나며 역성혁명 세력과 갈등을 겪었다.

위화도 회군 이후 전제 개혁 논의에서 사전 혁파에 반대했으며, 우왕 폐위 이후 창왕 옹립에 앞장섰다. 이성계, 정도전, 정몽주 등이 우왕을 폐위하자 그는 관직에서 물러나며 역성혁명 세력과 대립각을 세웠다.

1392

[정몽주 피살 연좌 및 유배]

정몽주 피살에 연좌되어 금천, 여흥, 장흥 등지로 유배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392년 4월 정몽주가 피살되자 이색 또한 이에 연좌되어 금천, 여흥, 장흥 등지로 유배되었으나 이후 석방되었다.

1395

[조선 출사 거절]

조선 개국 후 태조의 여러 차례 출사 권유를 끝내 거절하며 고려에 대한 굳건한 절의를 지켰다.

조선 개국 후 태조는 그의 재능을 아껴 1395년(조선 태조 4년) 한산백으로 봉하며 예를 다하여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이색은 끝내 이를 고사하고 망국의 사대부는 오로지 해골을 고산(故山)에 파묻을 뿐이라 하였다.

1396

[이색 서거]

피서차 여주로 가던 중 여강(驪江)의 배 안에서 급병으로 사망했으며, 독살설 등 의혹을 남겼다.

1396년 6월 17일, 피서차 여주로 가던 중 여강(驪江 연자탄)의 배 안에서 급병으로 갑자기 사망했다. 그의 사인(死因)에 대하여는 후세에 독살설 등 의혹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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