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현
고려 문신, 성리학자, 시인, 역사가, 정치인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57:06
고려 후기 대표 문신이자 대학자로, 뛰어난 정치 감각과 학문적 깊이로 혼란한 시대를 이끌었습니다. 충선왕 만권당에서 원나라 학자들과 교류하며 성리학을 심화했고, 원의 내정 간섭 시도를 저지하며 고려의 자주성을 수호했습니다. 세 번의 문하시중을 역임하며 공민왕의 개혁을 지지했으며, 이색 등 당대 최고의 후학을 양성하여 고려말 성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익재난고》, 《역옹패설》 등 다수의 저술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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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8
[이제현 탄생]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인 이제현이 검교정승 이진과 진한국대부인 박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명은 이지공이었으며, 자는 중사, 호는 익재, 역옹, 실재이다. 경주 이씨 익재공파의 파조이기도 하다.
익재 이제현은 검교정승인 이진과 부인 진한국대부인 박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 건국초 삼한공신 이금서의 후손이며, 그의 처음 이름은 지공이고, 자는 중사인데 뒤에 제현으로 이름을 개명하였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일찍 조숙하여, 서를 즐겼고, 글을 잘 지었다. 일찍이 백이정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하였고, 뒤에는 후일 장인이 된 권부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1309
[사헌부 규정 임명 및 충선왕의 신임 획득]
사헌부 규정이 되었고, 충선왕이 복위 후 원나라 여인에 대한 그리움을 이제현에게 고백한 일화를 통해 충선왕의 각별한 신임을 얻게 되었다.
사헌부규정(司憲府糾正)이 되었다. 충선왕이 복위되어 귀국하자 왕을 따르던 원나라 여인이 따라왔다. 왕은 연꽃 한 송이를 이별의 징표로 주어 되돌려보냈다. 고려에 돌아온 후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한 충선왕은 이제현에게 원나라에 가서 그녀를 만나보게 하였다. 이제현이 갔을 때, 그 여인은 다락 속에 있었는데 며칠 동안 먹지를 않아 말도 잘 못하는 지경이었다. 겨우 붓을 들어 시 한 구절을 썼다. 이제현은 고려로 돌아와 충선왕에게 거짓으로 말했다. 다음해 임금의 생일에 이제현이 뜰 아래로 물러나와 엎드리며 대죄하였다. 충선왕이 그 연유를 물었다. 이제현이 여인의 시를 올리며 그때 일을 말했다. 충선왕은 그 뒤로 이제현의 각별한 신임을 얻게 되었다.
1314
[백이정에게 정주학 수학 및 만권당 활동 시작]
충숙왕 재위 시 백이정의 문하에 들어가 정주학을 배웠다. 같은 해 원나라에 있던 충선왕이 만권당을 세우고 그를 부르자, 연경으로 건너가 염복, 조맹부 등 원나라 대학자들과 학문을 논하며 견문을 넓혔다.
충숙왕 때 백이정의 문하에 들어가, 그로부터 정주학을 공부하였다. 그 해 원나라에 가 있던 상왕 충선왕이 만권당을 세우고 성균악정(成均樂正)에 이른 이제현을 부르자, 연경에 건나갔다. 연경을 방문한 그는 충선왕이 세운 만권당에서 염복, 조맹부, 요수, 원명선 등의 한인 출신 대학자들과 학문을 논할 기회를 갖게 된다.
1323
[원나라 입성책동 저지 및 충선왕 석방 노력]
유청신, 오잠 등이 원나라에 고려의 성(省) 설치(입성책동)를 청하자, 고려 편입 반대 상소를 올려 이 문제를 철회시켰다. 동시에 유배된 충선왕의 석방 및 환국 운동을 벌여 풀려나오게 했으며, 감숙성 타마사에 방문하여 충선왕을 위로했다.
1320년말 다시 출국했으나 아버지 이진의 상으로 다시 귀국하여, 3년상을 마치고 1323년 출국, 다시 원나라에 되돌아갔다. 1323년(충숙왕 10) 유청신(柳淸臣)·오잠 등이 원나라에 글을 올려 고려에 성(省)을 설립하여 원나라의 제성(諸省)과 동등하게 하려고 청하자(입성론) 고려 편입 반대론을 주장하며 입성반대상서를 올렸는데, 이제현은 도평의사사에도 글을 올려 고려 400년의 토대가 이로 말미암아 무너진다고 간곡히 호소하여 이 문제를 철회케 하였다. 동시에 그는 토번(吐蕃)으로 유배되어 있는 충선왕의 석방, 환국 운동도 벌였다. 그의 노력으로 직할통치론, 입성론은 폐지되었다. 마지막으로 1323년에는 유배된 충선왕을 만나 위로하기 위하여 감숙성의 타사마(朶思麻)에 다녀왔다.
1344
[충목왕 즉위 후 복직 및 개혁안 제시]
충목왕 즉위 후 복직되어 계림부원군에 피봉되었고 판삼사사가 되었다. 충목왕에게 예의와 염치를 중요시하는 성리학적 개혁안을 제시하며 정치 기강 확립과 민생 구휼을 주장했다. 또한 후학을 양성하여 이색 등을 배출했다.
충목왕이 즉위하자 복직되고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피봉되었다. 그 해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충목왕이 즉위하자 그는 개혁안을 제시하여, 새로운 개혁의 비전으로 예의와 염치를 중요시하는 성리학을 들었다. 그는 특히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의 도를 강조하기도 했다. 이후 무신정변 이후 정치기강이 문란해졌음을 지적하고, 문란하여진 정치기강을 바로잡고 사회를 바로잡으며 흉흉해진 민심을 잡기 위해 민생구휼책과 세금 감면, 그리고 새로운 시책을 주장하며 여러 항목에 걸친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관료생활 외에 여가시간에는 서당을 열고 후학을 양성하였는데, 이색 등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1357
[관직 은퇴 및 학문 연구 몰두]
친원파 암살 사건 중재 실패 후 사임을 청하고 관직에서 완전히 물러나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 저술에 몰두했다.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의 실록 편찬에도 참여했으며, 미완성의 《국사》 편찬을 시도했다.
반원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자 그는 사태 수습에 나섰다가 뜻대로 되지 않아 1357년 사임을 청하고 관직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고려 수상직은 수차례 명칭 변동이 있었는데 이제현은 도첨의정승, 우정승, 문하시중 등 4차례 수상직을 역임하였고, 5차례 공신에 책록되었다. 이후 관작을 사양하고 학문 연구와 성리학자 양성으로 여생을 보냈다. 하지만 정치 일선에는 나서지 않고 주로 학문에 열중하며 많은 책들을 저술하였다. 또한 역사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며 민지의 본조편년강목을 중수하는 일을 맡기도 하였고 만년에는 백문보, 이달충 등과 함께 홍건적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진 사료들을 보충하는 차원에서 국사를 집필하였다. 만년에는 집에서 지내면서 공민왕의 명을 받고 충렬왕·충선왕·충숙왕의 실록을 편찬하고, 종묘(宗廟) 위패(位牌)의 서차(序次)를 정하였다. 또한 역사책인 《국사 國史》 편찬하면서 그는 기년전지(紀年傳志)의 기전체를 계획하여 이달충, 백문보 등과 함께 편찬작업을 진행시켰으나 완성시키지 못하였다.
1367
[이제현 사망]
고려 말의 대학자이자 정치가인 이제현이 향년 80세로 사망했다. 그의 학문은 제자인 이색으로 이어져 정몽주, 정도전 등 고려 말 성리학자들의 학맥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1367년에 사망하니 당시 향년 80세였다. 죽은 뒤에 경상북도 경주의 구강서원과 금천의 도산서원에 제향되었고, 공민왕 묘정에 배향되었다.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의 학문은 이색으로 이어졌다. 정몽주, 정도전, 권근, 이숭인 등 고려 말의 대표적 성리학자들은 대부분 이색의 문하에서 배출된 인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