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필
문신, 혁명가, 언론인, 교육인, 정치가, 의사, 독립운동가, 병리학자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8- 10:03:47
서재필은 조선 말기부터 대한민국의 기반을 다진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는 급진 개화파의 일원으로 갑신정변에 참여했으나 실패 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의학을 공부하고 의사 겸 병리학자로 활동했습니다. 귀국 후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이끌며 민중 계몽과 민주주의 사상 전파에 힘썼습니다. 이후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해방 후 미군정청 고문으로 활동하며 국가 건설에 기여했습니다. 그의 일생은 조국의 근대화와 독립을 위한 헌신으로 가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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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화파와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키다
- 3일천하 갑신정변 실패 후 가족 몰살의 비극을 겪다
-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다
-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 독립신문을 창간하다
- 독립협회를 결성하여 민중 계몽과 민권 운동을 이끌다
- 독립협회 활동의 상징, 독립문을 건립하다
- 조선 정부에 의해 추방되어 미국으로 떠나다
- 3.1 운동 소식에 감동하여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치다
-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 의장으로 선출되다
- 워싱턴 군축회의에 한국 대표단 부단장으로 파견되다
- 한국인 최초로 미국 병리학 전문의가 되다
- 49년 만에 해방된 고국으로 귀환하다
-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추대 운동을 사양하다
1864
[서재필, 조선 보성에서 태어나다]
조선 전라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에서 진사 서광효와 성주 이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외가에서 큰 용이 승천하는 태몽을 꾸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송재 서재필은 1864년 1월 7일(음력 1863년 11월 28일) 외가가 있는 전라도 동복군(현재의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528번지 가내마을에서 대구 서씨 진사 서광효와 성주 이씨의 5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외가인 성주 이씨는 외고조부 대에 동복군 문덕에 정착한 대지주 가문이었다. 출생 후 아버지의 고향인 충청남도 은진군 구자곡면 화석리에서 유아기를 보내고 금곡리로 이주하여 유년 시절을 보냈다.
1870
[7살에 양자로 가 한성으로 이주하다]
7살 무렵, 생부 서광효의 6촌 형제인 서광하에게 양자로 보내져 충청남도 은진군 진잠으로 갔다가, 양부 서광하가 관직에 오르면서 한성부로 올라갔다. 양어머니는 안동김씨 세도가의 딸이었다.
서재필은 7살 무렵 생부모와 오래 지내지 못하고, 아버지 서광효의 6촌 형제 중 서광하에게 아들이 없자 서광하의 양자로 보내졌다. 서재필은 어린 나이에 7촌 아저씨인 서광하의 양자가 되어 근처 충청남도 은진군 진잠으로 갔다가, 관직에 오른 양부 서광하를 따라 한성부로 올라갔다. 양어머니는 안동김씨 세도가의 하나였던 김온순의 딸이자, 대한제국 시기 대신을 지낸 김성근의 누나였다.
1872
[김성근의 집에서 학문에 전념하다]
양부모의 권유로 양어머니의 동생인 이조참판 김성근의 집에서 기거하며 글과 학문을 배웠다. 김성근의 학숙에서 동몽선습, 사기, 사서 육경 등을 배웠고, 김옥균과 박영효 등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를 시작했다.
양부 서광하 내외는 서재필을 입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1872년(고종 10년) 서울시 한성에서 이조참판 벼슬을 하고 있던 동생 김성근의 집에 서재필을 보낸다. 서재필은 김성근을 찾아가 수학하고, 과거 시험을 준비하였다. 그는 김성근의 학숙에서 동몽선습, 사기, 사서 육경을 배웠는데 대부분 암송하였다 한다. 또한 김성근의 집에 머물던 중 그의 집안에 출입하던 서광범과 김성근의 일족인 김옥균을 만나게 되었다. 서재필은 김옥균을 통해 박영효와도 만나 사귀게 되었고, 김옥균과 서광범을 통해 박규수, 오경석, 유대치 등의 문하에 출입하며 새로운 문명을 접했다.
1882
[18세 나이로 증광 문과에 급제하다]
18세 되던 해 증광 문과에 병과(3등)로 급제하여 교서관 부정자에 임명되었다. 이 무렵 서광범, 김옥균 등 개화파 인사들과 다시 만나 충의계(개화당의 전신)에 가입하며 개화 사상에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다.
18세 되던 1882년 3월 증광 문과에 병과(3등)으로 급제하였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급제함으로써 주위의 촉망을 한 몸에 받게 된다. 과거 급제 직후 정식 보직을 받지 못하다가, 4월 6일 승문원 가주서로 임시 보직되었다. 4월 18일 다시 승문원 가주서로 임명되었다. 그해 6월 서재필은 경서 인쇄 및 관인을 관리하는 '교서관 부정자'에 임명되었다. 이무렵 서광범, 김옥균 등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는 김옥균 등이 만든 충의계(忠義契)에 가입했고 이는 그대로 개화당으로 발전하였다.
1883
[일본으로 건너가 서양 문물을 배우다]
국방력 강화를 주장하던 김옥균의 권유로 14명의 평민 출신 청년들과 함께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게이오 의숙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토야마 육군하사관학교에서 신식 군사 훈련을 받으며 서양의 제도와 문물을 익혔다.
1883년(고종 20년) 3월 6품으로 특별 승진하고, 훈련원 부봉사가 되었다. 이때 국방력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김옥균의 권유로 1883년 봄 서재필은 14명의 평민 출신 청년들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1883년(고종 20년) 5월 일본에 당도한 서재필과 일행은 6개월간 게이오 의숙(慶應義塾)에 입학한다. 유학생 대표는 서재필이었다. 서재필은 게이오 의숙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어학의 재능도 뛰어나 유학 몇 달 만에 일본어 통역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일본어를 익히면서 일본에 체류중인 미국인들을 만나 기초 수준의 영어를 배웠다.
1884
[게이오 의숙 1년 과정 수료 및 일본 군사 훈련 시작]
게이오 의숙 1년 과정을 수료하고, 7개월간 토야마 육군 하사관학교에서 총검술, 제식훈련, 폭탄 투척 등의 신식 군사 훈련을 받았다. 훈련 중에도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 일본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1884년(고종 21년) 1월에 게이오 의숙 1년 과정을 수료하였다. 서재필은 게이오 의숙에서 일본어를 배우며 한편으로 선진국 일본의 제도와 문물을 눈여겨 보기도 했다. 또한 다른 길에 빠지지 않고 일본의 군사 시설과 경찰 제도를 유심히 살펴봤다. 1884년 1월부터 7개월간은 토야마 육군 하사관학교에서 총검술, 제식훈련, 폭탄 투척 등의 신식 군사 훈련을 받았다. 훈련 중에도 그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솔선수범하였고, 지지신보 1884년 2월 28일자 기사에는 이를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신식 사관학교 '조련국' 사관장으로 임명되다]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후 고종의 특명으로 장교를 양성하는 조련국 사관장(操鍊局 士官長)이 되었다. 그러나 청나라와 명성황후 측의 반대로 조련국은 폐지되고, 서재필을 비롯한 사관생도들은 궁궐수비대로 편입되었다.
1884년 6월 수료하였다. 그해 6월 일본에 체류 중 다시 교서관 부정자에 임명되었다. 6월 20일 서재필과 조선으로 돌아온 사관생도들은 고종에게 신식 사관학교를 설립할 것을 간청하였고, 서재필을 사관장으로 삼아 병조 예하에 조련국(操鍊局)을 만들 것을 건의하였다. 고종의 승락을 얻어내 조련국을 창설하였으나 서재필의 양어머니 안동 김씨의 사망으로 서재필은 관직을 사퇴하게 되었다. 6월 30일 고종의 특명으로 기복의 명을 받고 서재필은 장교를 양성하는 조련국 사관장(操鍊局 士官長)이 되었다. 그러나 신설된 조련국은 청나라와 명성황후 측의 반대로 결국 폐지되었다. 민비의 조카인 민영익이 민씨 일족과 1884년말 군대의 통솔권을 장악하고 군대의 훈련을 위해 청나라 장교를 부르자 군에서 쫓겨났다. 서재필을 비롯한 사관생도들은 궁궐수비대로 편입되었다.
[개화파와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키다]
김옥균, 박영효 등과 함께 우정국 낙성식을 기회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조련국 병사들과 신식 군대를 총 지휘하며 궁궐로 진입했고, 정변 과정에서 수구파 대신들을 처단하는 행동대장의 역할을 수행했다.
1884년 11월 승지로 특별 승진하였다. 11월 4일 박영효의 집에서 김옥균, 서광범, 홍영식 등 개화당 동지들과 모여 거사를 모의하였다. 11월 9일 서재필은 조선주둔 일본군 중대장 무라카미 등을 찾아가 거사 협조를 부탁하였다 11월 16일 묘동에 있는 이인종(李仁鍾)의 집에서 김옥균과 만나 거사 계획을 숙론하였다. 11월 26일 탐골 승방에서 김옥균 등 동지들과 회합하고 빠른 시일 내로 거사할 것을 결의하고, 환경 변화에 대비한 다양한 거사 세부 계획을 짰다. 11월 27일 3시에 무라카미와, 밤에 다시 동지들과 계획을 세밀히 세워 나갔다. 11월 30일에 다시 동지들과 모여 거사 준비를 하였다. 12월 2일 새벽 2시, 박영효의 집에 가서 서광범, 홍영식, 김옥균 등과 만나 12월 4일로 거사 날자를 정하였다. 12월 4일에 거사를 개시할 각 부문의 담당자의 임무도 이때 결정하였다. 1884년 12월 4일 서재필의 자택에서 여러 동지들과 거사 내용을 다시 점검하고 어두워지자 우정국으로 갔다. 장사패를 이끌고 교동 일대의 경비 책임을 맡았다. 그는 이인종 등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창덕궁으로 가다. 밤에 김옥균 일행이 고종을 만나 정변이 일어났음을 알리었다. 고종을 경호하여 경우궁까지 무사히 인도하였다. 고종 내외를 경우궁으로 파천시킨 뒤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12월 5일 개화파는 개화 신내각을 발표하였으며, 서재필은 병조참판 겸 후영 정령관에 임명되었다. 김옥균은 갑신일록에서 그를 병조참판 겸 정령관으로 기록하였으나 실록을 비롯한 공식문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특히 그는 정변 과정에서 대신들을 참살하는 행동대장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12월 6일 청나라 병의 내습으로 전투가 벌어졌다.
[3일천하 갑신정변 실패 후 가족 몰살의 비극을 겪다]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갑신정변이 3일 만에 실패로 끝나자,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정변의 주동자로 몰려 생부모와 형제들, 아내와 두 살 아들이 사약을 받거나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1884년 12월 4일 오후 6시 한성부 정동에 신축한 우정국 낙성식에는 우정국 총판 홍영식의 초청으로 많은 내외 귀빈이 참석하여 낙성 축하연을 했다. 이때를 틈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은 급히 우정국을 빠져나와, 매복하고 있던 서재필 휘하 사관 생도들을 다시 경우궁으로 이동시키고 김옥균은 교동에 있는 일본 공사관으로 가서 일본군의 출동을 확인한 후에 대궐로 향했다. 갑신정변 당시 그는 토야마군관학교에서 같이 훈련받은 생도들과 함께 한때 개화당에 참여하였다가 배신한 환관 유재현을 처단하였고, 문신 조영하와 민태호, 민영목 등을 대한제국 고종이 지켜보는 데에서 살해하였다. 그러나 민씨 척족 정권은 청나라와 연락하여 청나라 군대의 조선 개입을 요청하였다. 그는 외세의 개입을 규탄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자 민가로 은신하였다. 12월 9일 일본공사 다케조에가 이들의 피신을 주선해주었다. 김옥균, 박영효, 이규완, 정란교, 서광범, 변수 등 일행 9명은 창덕궁 북문으로 빠져나가 옷을 변복하고 일본 공사관에 숨었다가 12월 12일 인천주재 주조선 일본 영사관 직원 고바야시의 주선으로 제일은행 지점장 기노시타의 집에 은신하였다. 그러나 묄렌도르프가 추격대대를 이끌고 오자, 기노시타의 배려로 일본인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제물포항에 정박중이던 츠지 가츠사부로의 일본 선박 치토세마루 호에 승선했다. 갑신정변 주역은 역적으로 몰렸고 서재필의 가족들은 모두 살해당하였다. 생부 서광효는 은진 감옥에 투옥당했다. 서재필의 부모를 비롯하여 3명의 친형제 등 가족들이 사약을 받거나 사람들로부터 죽임을 당하였다. 관가에 기생으로 보내지기로 된 서재필의 부인은 죽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여 독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당시 서재필에게는 두 살난 아들이 있었는데, 나라에서 굶겨서 죽였다고도 하고, 아이가 굶주림에 지쳐 죽은 어머니 광산김씨의 젖을 물었는데 어머니 몸 속에 있던 독이 아이 몸 속에도 퍼져 죽었다는 설도 있다. 어린 딸 한 명은 딸이라 하여 연좌되지 않고 노비가 되었다가 풀려났다. 풀려난 딸은 후에 안동김씨 김태균의 아들 김두진과 결혼하였는데, 그는 선원 김상용의 10대손으로 청음 김상헌의 자손 고죽 김옥균과는 먼 친척이었다. 그러나 김두진과 결혼한 딸과는 이후 연락이 단절되었다. 서재필의 배우자 광산 김씨는 자신의 본가를 찾아갔는데, 부모들은 대역의 죄인이라 하여 집안에 들이지도 않았다. 승지였던 장인 김영석은 딸에게 서씨 집 귀신이 되라며 되돌려보냈는데 가서 자결하도록 하며 가마에 태울 때 독약 그릇을 하나 넣어 시가로 쫓아보냈다. 이에 서재필은 후일 귀국한 뒤 장인 김영석이 찾아오자 거지 취급하고 냉대하였다. 생부 서광효는 옥중에서 절곡 끝에 '만일 관노사령배가 문전에 오거든 잡혀가서 욕을 당하느니보다는 차라리 자결하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맏형 서재춘은 은진군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고, 이복 형 서재형은 관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관노사령들이 화석이 앞길에 나타난 것을 보고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마주보고 앉아 독약을 마셨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사망했지만 며느리 김씨는 못다 죽어, 어느날 대청 대들보에 목을 매어 죽었다. 그러나 생모 성주이씨나 배우자 광산김씨는 바로 죽지 않고 노비로 끌려갔다가 1885년 1월에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또한 그의 서모 역시 관비로 끌려갔고 이복 동생들 역시 죽임을 당했다. 아내의 묘소는 연무읍 죽평리 어머니 묘소 근처에 안장되었다가 후에 구자곡면으로 이장된 뒤, 서재필의 유골이 봉환되어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자 1995년 서재필 묘소에 합장되었다. 한성부 종로방 화동 1번지에 있던 그의 집은 김옥균의 집과 인접해 있었는데, 김옥균의 집과 서재필의 집터는 조정에 의해 몰수당한 뒤 후일 한성 관립한성고등학교의 부지(현. 서울 정독도서관 터)가 된다. 담양군 담양 가사문학면 지실 정해은과 결혼한 큰누나 서씨는 이미 출가외인이라 하여 화를 모면하였다.
1885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여 고난의 시간을 보내다]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에서 조선 조정의 자객 위협에 시달리다 기독교 선교사들의 후원으로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막노동과 잡역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언어와 인종차별의 어려움을 겪었다.
1885년(고종 22년) 5월 26일 서재필, 박영효, 서광범은 일본 요코하마에서 미국 화물선 차이나 호를 타고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비용이 없었고 능통하지 못한 영어 실력과, 조선 조정에서 보낸 자객을 피해 숨어있어야 했던 이들은 조선에 기독교 선교사를 보내려는 미국인 선교사들의 후원과 후쿠자와 유키치와 이노우에 가오루 씨가 보내준 생활비와 차비 덕분에 미국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조병옥에 의하면, 이들은 배를 타고 미국에 도착하였으나 상륙하자마자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닥쳐올 생활위협을 헤쳐나갈 자신이 없었던 박영효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고 말았다고 한다. 서광범도 얼마 동안은 언더우드 박사의 후원으로 뉴욕 시에 체류하며 지냈으나, 결국 앞서 돌아간 박영효의 뒤를 따라 그도 양반이라는 자존심을 버리지 못해 힘든 일을 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그가 처음으로 미국에 도착하였을 때 한국 사람이라고는 자기 혼자 뿐, 말도 모르고 풍속이 다른 남의 나라에서 스스로의 진로를 개척하려던, 고독에 겨운 참담한 생활은 그의 자립정신을 더욱 굳게 해주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문방구점의 경영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의 근면과 창의력은 상점의 번영을 가져왔던 것이다. 그러나 유색인종에 대한 무시와, 차별에 시달림을 당했고 열차에 탑승할 때도 짐칸으로 밀려나는 등의 모욕을 당한다. 미국 망명 초기 장로교 선교사이자 안면이 있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가 편지로 보낸 소개장 덕에 거처를 구할 수 있었다. 미국생활 중 감리교회에 나가 감리교 신자로 개종하였다. 조선에서는 1887년 3월부터 1894년 3월 10일까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서 번갈아가며 홍국영을 부관참시하고 노륙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동시에 서재필과 서광범, 박영효도 기한을 정해 잡아들이거나 사살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매일 올렸다. 이는 승정원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동일한 내용의 상소가 수시로 계속되자 고종은 나중에 이를 모두 물리쳤다.
1886
[미국의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학업을 이어가다]
기독교 신자를 통해 존 홀렌벡이라는 사업가를 소개받아 그의 도움으로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 배리의 명문 고등학교인 해리 힐만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학업 중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으며, 라틴어, 헬라어, 수학 등에서 우등생으로 활동했다.
낮에는 아르바이트와 노동을 하고 밤에는 기독교청년회(YMCA) 야간학교에서 영어를 공부했다. 주말에는 교회를 다니며 영어를 배웠다. 교회에 나가던 그는 곧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됐고, 이것을 계기로 기독교적 인권사상과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키울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운 좋게 교회 신자를 통해 존 홀렌벡(John Wells Hollenbeck)이라는 사업가를 소개받는다. 펜실베이니아주에서 탄광업을 통해 많은 돈을 번 대부호이자 자선사업가였던 홀렌벡은 서재필에게 미국에서 정식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1886년 9월 서재필은 홀렌백과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대륙횡단 열차를 타고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 배리(Wilkes-Barre)에 당도하여 "해리 힐만 아카데미(Harry Hillman Academy)"라는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머무를 거처가 없었던 서재필은 해리힐맨 고등학교 교장 집에서 집안 일과 정원 조경을 도우며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는데, 마침 법관으로 퇴임한 교장의 장인이 함께 살고 있어서 그에게서 미국의 역사 및 민주주의 제도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서재필은 1888년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되는데, 홀렌벡이 손수 지어주었다는 설도 있다. 필립 제이슨은 "서재필"을 거꾸로 하여 "필재서"로 만든 다음, "필"을 "필립(Philip)"으로 "재서"를 "제이슨(Jaisohn)"으로 음역한 것으로, Jaisohn이라는 성의 철자는 미국인들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고유한 철자 표기였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사립고를 다녔다. 또한 한편으로 제이슨(Philip Jason)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다. 언론에 칼럼을 기고할 때의 필명은 오시아(N. H. Osia)라 하였다. 서재필은 해리 힐맨 고등학교에서 라틴어, 헬라어(그리스어), 수학 등 여러 과목에서 우등생이 되었고, 특히 웅변을 잘 하여 웅변대회에서 입상도 하였다. 고등학교 졸업식에서는 졸업생 대표로 고별 연설도 하였다.
1889
[워싱턴 컬럼비안 대학 의과대학 야간반에 입학하다]
홀렌벡과의 결별 후 일자리를 찾아 워싱턴 D.C.로 옮겨 미국 육군 의학박물관에서 의서를 번역하는 일을 하다가 의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89년 컬럼비안 대학 의과대학 야간반에 입학하여 문구점과 병행하며 학업을 이어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워싱턴 D.C.의 컬럼비안 대학 (Columbian University, 현 조지워싱턴 대학교의 전신)의 예과(대학 예비 과정)의 야간부인 코크란 단과대학(Corcoran Scientific School) 물리학과 야간반에 입학, 1년간 자유전공으로 전공 없이 주로 자연과학과 역사를 배웠다. 1889년 6월 서재필이 코크란 단과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자, 홀렌벡은 서재필을 불러 놓고, 이미 입학허가를 받은 라파예트(Lafayette) 대학에서 일단 공부를 마치고 그 다음 프린스턴 대학교 신학대를 졸업하여 조선에 기독교 선교사로 돌아가겠다는 것을 서면으로 약속하라고 말했다. 그래야 앞으로 더 지원해 주겠다는 것이다. 당시 역적의 신세에 묶여 조선으로 돌아 갈 수 없었던 서재필은 홀렌벡의 제안을 거절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은인과 결별하게 된다. 1890년 서재필은 그해의 라파예트 대학 입학 시험에 합격했고, 곧 라파예트 대학 하트 교수의 도움으로 라파예트 대학교에 입학한다. 대학에 다닐 무렵, 서재필은 하루 3불의 품삯을 받고 유리창닦이 등 잡역부로 노동을 하였고, 여가를 틈타 독학으로 영어를 공부했다 한다. 그 뒤 교회당을 찾아 신앙을 발견하려고 꾸준히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재필은 라파예트 대학교를 중퇴하고 일자리를 찾아 워싱턴 D.C.로 떠났는데, 그가 찾은 일자리는 미국 육군 의학박물관에서 중국과 일본에서 온 의서들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의학 서적을 번역하면서 서재필은 의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마침내 1889년 워싱턴 D.C.의 컬럼비안 대학 의과대학에서 워싱턴의 고등학교 졸업자 공무원들을 위해 설립한 야간학부에 입학하였다. 그는 문구점을 설립했는데 낮에는 문구점 주인으로 밤에는 학생의 신분으로 공부하였다.
1890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다]
컬럼비안 대학 재학 중 1890년 6월 미국인으로 귀화하여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 이는 황인종에게 시민자격을 부여하지 않던 당시 제도에 비추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컬럼비안 대학 재학 중이던 1890년 6월 미국인으로 귀화하여 6월 10일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 황인종에게 시민자격을 부여하지 않던 당시의 제도에 비추어보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귀국 후 한국에서는 그를 '서재필 박사'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가 정식 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아니었고, 의사라는 뜻의 닥터(Doctor)가 박사로 번역됐기 때문이었다.
1893
[컬럼비안 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및 의사 면허 취득]
컬럼비안 대학교를 졸업하여 한국인 최초로 세균학 전공으로 의무박사가 되었고, 정식 의사 면허를 취득했다. 모교의 강사가 되었으나 유색인종에 대한 학생들의 반발로 그만두었다.
컬럼비안 대학 예과를 마친 서재필은 컬럼비안 대학교의 본과로 진학, 1893년 컬럼비안 대학교를 졸업하여 미국에서는 한인 최초로 세균학 전공으로 의무박사가 되었다. 컬럼비안 대학 재학 중이던 1890년 6월 미국인으로 귀화하여 6월 10일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 1892년 컬럼비안 대학교를 재학 중 바로 가필드 병원(Garfield Hospital에서 1년간의 수련의 인턴 과정을 거쳤다. 1893년 정식 의사면허를 받았다. 1893년 6월 컬럼비안 대학교 의과대학 야간반을 2등으로 졸업하였다. 1893년 6월 바로 모교인 컬럼비안 대학교의 강사가 될 목적으로 모교의 조교가 되었다. 그러나 유색인종에게서 강의를 들을 수 없다는 일부 학생들의 반발로 1년만에 그만두고 만다.
1894
[미국 초대 철도 우체국장의 딸 뮤리엘과 결혼하다]
미국 초대 철도 우체국장 조지 뷰캐넌 암스트롱의 딸 뮤리엘 메리 암스트롱과 결혼했다.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했으며, 워싱턴 D.C.에서 의사 개업을 했으나 인종차별로 어려움을 겪었다.
서재필은 1894년 미국 초대 철도 우체국장의 딸인 뮤리엘 메리 암스트롱(Muriel Mary Armstrong)을 만나 그의 과외 가정교사가 되었다. 뮤리엘 암스트롱의 가정교사로 있다가 연애를 시작,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무시와 차별, 냉대 등으로 이국 생활에 어려움을 겪던 그에게 뮤리엘 암스트롱은 친절하게 대했고, 때로는 그의 고충을 들어주기도 한다. 뮤리엘의 인간미에 감격한 서재필은 곧 뮤리엘에게 청혼하였고, 뮤리엘은 가난할 것이다, 힘들 것이다, 유색인종이다 등등의 이유로, 주변의 반대와 조언,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재필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결혼 비용에 부담을 느낀 서재필을 배려하여 같은 해 6월 20일 워싱턴 D.C 교외에 있는 카버넌트 교회에서 친지들을 불러 간소하게 결혼식을 올리고 미국 주류사회에 편입됐다. 이를 두고 상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주진오는 "이는 외국여성과의 국제결혼으로 그 당시 서재필은 귀국할 의사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고 평했다. 미국 시민권을 받자 바로 병원에 처음 취직한 그는 세균학 연구를 주로 하였다. 서재필은 뮤리엘 암스트롱과 결혼한 후 1894년 6월 워싱턴 D.C.에서 의사 개업을 하였으나, 백인들의 유색인에 대한 편견과 인종차별로 생계유지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신혼 살림도 워싱턴에 있던 주미조선공사관 직원 관사에 방을 빌려 차렸다.
1895
[조선 정부로부터 작위를 회복하다]
법무대신 서광범의 건의로 갑신정변 당시 내려졌던 역적의 죄명이 벗겨지고 작위가 회복되었다. 이후 외부협판, 학부대신 서리 등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미국에 체류 중이었다.
1895년(고종 32년) 3월 1일 법무대신(法務大臣) 서광범(徐光範)의 건의로 작위가 회복되었다. 조선의 관료제는 직책은 없거나 퇴직해도, 가선대부, 통정대부 등의 품계는 유지되었었다. 5월 10일에는 미국 체류 중 외부 협판(外部協辦)에 임명된다. 8월에는 학부대신 서리에 임명되었다.
[1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다]
김홍집 내각의 초빙으로 10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왔다. 귀국 직후 외무 협판과 학부대신 서리 직을 사직하고, 연좌제와 고문 등 악법 폐지, 문벌 폐지, 인재 등용을 고종에게 건의했다.
서재필은 귀국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주미조선 공사관에서는 그에게 공사관의 방 하나를 무료로 빌려주었고, 식비까지 제공하였다. 갑오개혁으로 갑신정변 당시 서재필 등의 급진개화파에게 내려진 역적의 죄명이 벗겨지자 1895년 가을, 미국을 방문 중 워싱턴 시에 들른 박영효를 워싱턴 시 내에서 10년만에 만나게 되고, 그에게서 조선의 정세를 접하게 된다. 박영효를 만난 뒤 다시 조선을 개혁해 보겠다는 생각을 품게 된 그는 김홍집 내각이 다시 서재필에게 귀국을 요청함에 따라 귀국을 결심한다. 생활이 어려웠던 그는 조선으로 돌아올 때 주미조선공사관에서 추가로 마련해준 여비까지 더 받고, 1895년 11월 10일 워싱턴을 떠나 필라델피아를 출발, 하와이와 일본을 경유하여 조선으로 귀환하게 된다. 그는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일본을 경유할 때 일본 동경의 모교 토야마 사관학교를 방문하였고,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났으며, 다시 일본 나가사키를 출발하여 배편으로 12월 26일 인천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인천항에 도착한 서재필과 그의 부인 뮤리엘은 출국 전 고용한 미국인 경호원을 대동하고, 인력거로 비밀리에 한성부에 당도하였다. 그는 귀국 직후 외무 협판과 학부대신 서리 직을 사직한다. 후일 1900년 6월 윤용선은 그가 이름뿐이지만, 당시 학부대신 서리에 임명된 것을 근거로 을미사변 관련자로 몰아 사형에 처할 것을 상주하기도 한다.
1896
[조선 정부의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다]
김홍집 내각으로부터 10년 계약으로 총리대신과 같은 월봉 300원을 받는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그는 조선인으로서 관직을 거부하고 미국인 신분으로 활동하며 개화 계몽 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조선인으로서 관직을 임명받는 것을 거부하는 대신 1896년(고종 33년) 1월 김홍집 내각으로부터 10년 계약으로 총리대신과 같은 액수였던 월봉 300원(연봉 3,600원)을 받는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이런 우대가 가능했던 것은 그가 미국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환율은 원과 달러가 같았으며 미국에서 받는 월급은 100달러였다. 이어 장기체류를 결심하고 우편으로 컬럼비아 대학 의과대학의 세균학 강사직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한편 그는 철저하게 미국인으로 행세하였다. 고종 앞에서 자신을 부를 때에도 외국인 고문관과 같이 '외신'이라고 하였고, 담배를 피우기도 하였다.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 독립신문을 창간하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한국 최초의 순한글 및 영문판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했다. 일반 민초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언문'을 채택하고 띄어쓰기를 도입했으며, 민중 계몽과 독립 사상 고취에 크게 기여했다.
1896년 4월 7일 한국 최초의 신문인 《독립신문 (獨立新問)》을 순한글과 영어로 인쇄, 발간하였다. 독립신문의 영문판은 The Independent 라는 이름으로 발행되었다. 서재필은 정부로부터 창립 자금 4400원을 지원 받아 시작하였다. 독립신문은 주 3회 발행되었다. 그는 독립신문의 필진으로 박영효, 윤치호, 유길준, 이상재, 박정양, 이완용, 주시경, 김규식, 박중양 등을 영입했다. 그 중 주시경은 독립신문사 회계 사무원 겸 교보원(校補員)으로 임명하여 신문사의 재정과 교열을 담당하게 했다. 또한 언더우드 학당에서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목사와 관계가 다소 소원해졌으며 직업이 없어 고민인 김규식을 영입하여 취재기자로 고용하기도 했다. 독립신문을 편집할 때 그는 띄어쓰기를 반영하였다. 후일 1896년 4월 7일의 그의 독립신문 창건을 기념해 후일 한국신문편집인협회는 1957년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지정하였다.
[독립협회를 결성하여 민중 계몽과 민권 운동을 이끌다]
이완용, 남궁억 등과 함께 정부 관료 중심의 독립협회를 결성하고 고문에 선출되었다. 독립협회를 통해 토론회, 강연회, 상소 활동 등을 주도하며 민주주의와 참정권을 소개하고 신문물 견학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1896년 내내 계몽강연 활동과 독립신문을 발행하는 일 이외에도, 서재필은 목요일마다 매주 비용 한푼 받지 않고 무료로 배재학당에 출강해 이승만, 주시경, 신흥우, 김규식 등의 젊은이들에게 세계사를 강의하면서 자유 민주주의와 참정권, 인권 개념, 사회 계약론 등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이 때 이승만도 그의 강의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1896년 11월 학생들은 13명의 회원으로 협성회(協成會)라는 학생토론회를 조직했는데, 1년 만에 회원이 약 200명으로 증가했다. 협성회에도 이승만, 김규식 등의 학생지사들이 모여들었고, 서재필은 학생 토론 모임인 협성회를 지도하였다. 그 밖에 그는 만민공동회의 연사로 조선 팔도를 순회강연하기도 했다. 조선을 순행할 때 그는 항상 미국인 경호원을 대동하고 돌아다녔다. 그는 배재학당과 언더우드 학당의 학생들에게 수업 이외에도 별도로 논리적 설득의 필요성과 토론하는 방법을 틈틈이 가르치기도 했다. 서재필은 1896년 초부터 서울 영천에 있는 영은문이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치욕스러운 존재라고 하여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울 것을 건의하였다. 이 일을 위해 1896년 7월 2일 이완용을 비롯 남궁억·박영효·김가진·안경수 등과 함께 정부 관료 중심의 독립협회를 결성하였다. 독립협회의 지도자는 윤치호, 이상재, 박정양, 양기탁, 이동녕 등이었다. 그 중에서도 서재필은 독립협회 고문에 선출되어 윤치호와 함께 협회의 제반사무를 총괄하였다.
1897
[독립협회 토론회에서 노비 해방을 주장하다]
윤치호와 함께 노비 해방 문제를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상정했다. '동포 형제간에 남녀를 팔고 사는 것이 의리상 불가하다'는 주제로 토론회를 열어 노비 제도의 폐해와 비인간성을 역설했고, 만장일치로 노비 해방 결의를 이끌어냈다.
서재필의 귀국 직후부터 노비 해방 문제를 상의하던 윤치호와 서재필은 노비들을 해방시킬 것을 결의하고, 1897년 10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노비 해방 문제를 상정시키기로 계획하고 1897년 11월 1일 독립협회의 토론에 노비제도가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여론을 공론화시켰다. 1897년 11월 1일의 제8회 토론회의 광경을 보면, 약 500명의 회중이 참석한 가운데 먼저 회원의 호명이 있었고, 다음 지난 회의 토론회 기록의 확인이 있었으며, 내빈 소개와 신입 회원 소개가 있었다. 서재필은 독립협회의 회장에게 노비 해방에 대한 것을 건의하였고, 11월 1일 독립협회 회의의 주제로 채택된다. 회장이 토론회의 주제, 이날의 주제는 '동포 형제간에 남녀를 팔고 사고 하는 것이 의리 상에 대단히 불가하다'고 선언하였다. 이 중 한 발언자가 용역은 '하나의 필요한 제도이며 노비 제도(奴婢制度)는 그러한 용역의 하나라고 발언하자, 회중의 하나가 일어서서 토론자가 명제를 정확히 말하고 있지않다고 의사 규칙 위반을 들어 항의했으며, 많은 회원들이 주제의 찬성편에 서서 발언하였다. 1897년 11월 1일 윤치호는 노비제도의 폐해와 비인간성을 구체적 사례를 들면서 설명하는 연설을 하고, 서재필은 미국에서의 아프리카 흑인 노예 들의 참상을 들어 설명하였다. 다음으로 주제에 대한 회중의 의견을 투표에 붙인 결과 만장일치로 주제에 대한 찬성이 의결되었으며, 주제에 찬성한 사람은 자기가 실제로 소유한 노비를 모두 해방시키도록 하자는 동의가 가결됨으로써 토론회를 끝내었다. 독립협회의 결의에 따라 한성부의 양반 가에서는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노비들을 석방시키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윤치호와 서재필은 각각 인간은 물건이 아니며 재산이 되어서는 안된다, 인간의 생명은 하늘이 부여한 것이라고 역설하고 다녔다. 시중에서는 이들의 사상을 위험한 사상이며 반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해괴한 요설, 궤변으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1897년 11월 1일의 노비해방에 대한 기습 토론 이후 노비 해방 풍조가 한국사회에 점차적으로 확산되었다.
[독립협회 활동의 상징, 독립문을 건립하다]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치욕스러운 영은문을 헐고 그 맞은편에 독립문을 건립했다.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모델로 하여 서재필이 스케치하고, 서양 건축가가 설계한 독립문은 자주독립 의지를 상징하는 건축물로 큰 의미를 가졌다.
1897년 11월 20일 청나라 외교 사신을 맞아들이던 영은문(迎恩門) 맞은 편에 '독립문'이 들어섰다. 그는 미국에 있을 때 입수한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그린 그림을 소지하고 있었다. 독립협회가 기금을 모아 완공한 독립문은 서재필이 가지고 있던 화첩 중에서 파리의 개선문을 모델로, 그 규모를 축소하되 모양만은 똑같이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독립문은 서재필이 특별히 초빙한 건축사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이 설계하였다. 후일 사적 32호로 지정된 독립문은 서재필이 독립문의 윤곽을 스케치한 것을 바탕으로 독일 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설계를 담당했다. 토목·건축공사는 한국인 건축 기사 심의석이 담당하고 중국인 노무자들이 노역을 맡았다. 공사비는 기부금으로 해결했다. 그는 사대사상의 증거인 한성부 서대문방 현저동(峴底洞) 모화관과 영은문을 헐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모화관은 조선 말기인 1897년 서재필 같은 독립협회 인사들에 의해 '독립관'(獨立館)으로 개축돼 독립협회 회관으로 쓰였다.
1898
[미국-스페인 전쟁에 군의관으로 참전하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 미국-스페인 전쟁에 미군 군의관으로 잠시 참전하여 병원선 하지 호에서 부상병 진료와 수술을 담당했다. 이후 필라델피아 대학 해부학 강사 및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병리학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1898년 4월 미국으로 환국, 4월부터 1899년 8월까지 미국-스페인 전쟁에 미국군 군의관으로 잠시 참전하였다. 이때 그는 미군 병원선 하지 호(號)에서 미국 육군 군의관으로 부상병의 진료와 수술을 담당했다. 미국-스페인 전쟁이 끝난 뒤 노동과 상점의 아르바이트로 활동했으나 곧 그만두었다. 바로 필라델피아 대학교 의학부로 돌아가 해부학 강사가 되어 해부학 강좌를 담당했다. 필라델피아 대학의 해부학 강사 직은 1914년까지 출강하였다. 1899년말부터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위스터 연구소에서 병리학 연구원으로도 근무하였다.
[조선 정부에 의해 추방되어 미국으로 떠나다]
러시아 공사의 압력과 조선 정부의 권유로 중추원 고문직에서 해고되고 독립신문을 윤치호에게 인계한 뒤 미국으로 돌아갔다. 계약 위반에 따른 거액의 보상금을 받고 조선을 떠났다.
당시 주조선러시아공사 스페이어는 독립협회가 러시아의 절영도 할양 요구를 반대하는 구국선언 상소를 올리고 언론에 공표한 것을 두고 주조선미국공사 알렌을 방문해 항의하고 서재필의 소환을 강력히 요청했다. 러시아 공사관의 계속된 항의에 결국 알렌은 서재필이 봉급을 받는 즉시 출국시키겠다고 구두로 약속했다. 주미러시아 대사 캐시니 백작은 윌리엄 매킨리 미국 대통령에게 이를 전하고 서재필의 소환을 요청했다. 일본 역시 일본의 정부고문으로 와 있는 미국인 윌리엄스를 설득, 미국 정부에 서재필의 소환을 강력히 요청하게 했다. 친러정권과의 대립 외에도 보수파가 다시 정권을 잡자 서재필을 사형에 처하거나 살해할 모의가 진행되었으나 미국 시민권자라는 외교문제 비화에 엮일 수 있다는 외교에 밝은 일부 보수파 인사들의 설득으로 살해위기는 모면되었다. 고종 황제에게 그는 자신을 "외신"이라 칭했고, 고종 앞에서도 담배를 피우는 등, 완전히 미국인 행세를 한 점 역시 눈밖에 나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1898년 러시아 및 청나라, 일본 등의 서재필 추방 압력과 고종을 비롯한 대한제국 정부의 권유로 중추원 고문 직에서 해고되고, 1898년 5월 독립신문을 윤치호에게 인계하고 미국으로 돌아간다. 미국정부는 서재필이 지도하는 독립협회가 열강의 이권침탈을 비판하는 것을 보고 그가 미국 시민권자임에도 그와 같은 행위를 함을 그를 불온시하기 시작했다. 한편 귀국 직후부터 그의 신문 발행과 토론, 참정권 주장을 이상한 사상으로 여긴 일부 백성들 사이에서는 그가 서양에 가서 이상한 약물을 먹었다, 귀신이 씌워 돌아와서 사람들을 오염시킨다는 등의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서재필은 거절했고, 주조선미국공사 알렌은 서재필을 귀국시키기 위해 그의 부인 뮤리엘 암스트롱의 친정어머니를 설득하여 위독하다는 거짓 전보를 보내게 했다. 뮤리엘이 조속한 귀국을 재촉하는 한편 대한제국 정부는 그를 중추원 고문에서 해촉하면서 그의 출국을 요청했다. 그는 이 사실을 알렸고, 독립협회는 조정에 항의공문을 발송했으며, 남대문 앞에서 대규모 만민공동회를 열고 정부의 행위를 강력 규탄했다. 서재필은 자신을 고문 직으로 초빙할 마음이 확고하다면 체류하겠다는 뜻을 내비쳤으나 대한제국 정부의 입장은 단호했다. 자객을 보내 자신을 암살 또는 제거하려한 대한제국 정부와 친러파, 친일파 정객들, 자신을 정신이상자, 역적 취급하는 민중들에 대한 강렬한 반감과 적개심을 품은 서재필은 한때 독립신문을 일본이나 러시아에 매각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윤치호, 이상재의 만류로 독립신문 매각은 단념한다. 1898년 5월 14일 그는 독자와 동포들에게 올리는 인사말을 남기고 독립협회 간부들의 환송 속에 서울서 낳은 큰 딸 스테파니와 부인을 대동한 채 용산에서 인천행 배에 올랐다. 5월 27일 인천 제물포항을 출발해 일본을 경유해 미국으로 향했다.
1905
[사업을 시작하고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호소하다]
해리힐먼 고등학교 후배 해롤드 디머와 함께 문구 및 인쇄 사업 '디머 앤 제이손' 상회를 설립하여 사업가로 변모했다. 같은 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한국 정부에 조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
서재필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해, 나중에 큰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재정적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해리힐먼 고등학교를 하숙하며 다녔던 윌크스베리에서, 힐맨 아카데미 고등학교 시절의 일 년 후배 해롤드 디머와 함께 문구 및 인쇄 사업을 하는 '디머 앤 제이손' 상회를 설립하였고, 1905년에는 해롤드 디머는 '디머 앤 제이손 상회' 윌크스 베리 본점을, 서재필은 '디머 앤 제이손 상회' 필라델피아 분점을 맡아 경영하였다. 1905년 을사 보호 조약이 체결되자 서재필은 한국 정부에 조약은 부당하고 조선이 국가로서의 능력을 상실함을 의미하니 지금이라도 조약을 파기하라며, 을사 조약에 반대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편지는 황제에게 전달되지 못하였다. 그는 윤치호에게 편지를 보내 을사 조약의 부당성을 호소했다. 윤치호로부터 이미 정부의 고관들이 나라를 팔아치우기로 작심한 것 같다는 내용의 답장을 받았다.
1919
[3.1 운동 소식에 감동하여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치다]
미국에서 3.1 운동 소식을 접하고 깊이 감동하여 메스를 버리고 시험관을 내던진 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자신의 전 재산 7만 6천 달러를 정리하여 독립운동 자금으로 바치고, 미국 잡지에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인터뷰를 진행했다.
재미한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그는 미국내 한인 지도자의 한사람으로 활동하였으며, 1919년 3·1 운동 소식을 듣고 미국내 한인 교포들에게 만세 운동 소식을 전하였다. 2월 말 필라델피아에 방문했다가 라디오와 신문, 뉴스 등으로 3·1 만세 운동 소식을 접하게 된다. 3·1 만세 운동 당시 자신이 체포되거나 죽을 것을 알고 만세 시위에 뛰어든 학생들, 기밀을 누설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손목에 칼을 그은 학생들의 의거 소식을 접한 그는 깊이 감동한다. 3.1 운동 이후 미국내 한인들은 단체 조직을 결정하고 서재필한테 대표가 되어 줄 것을 부탁했지만 사양했다. 3월 중순 서재필은 자신의 전 재산을 정리, 독립 운동 자금으로 바치고, 동시에 미국 잡지 《이브닝 레저 (The Evening Ledger)》지를 찾아가 인터뷰, 조선의 문제를 다룰 것을 설득하여 승락받았다. 또 한국의 독립을 세계 여론에 호소하고, 일본 군국주의를 규탄하는 자료와 논설, 칼럼을 기고하였다. 3.1 운동 직후, 서재필은 독립운동을 위하여 사재를 모두 팔아서 7만 6,000 달러를 모두 독립운동에 투입하였다. 이때 그는 병원 외에도 60~70명의 종업원을 둔 문방구점과 분점들을 가지고 있었으나 부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들을 모두 독립운동에 바치고 파산하였다.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 의장으로 선출되다]
이승만의 설득으로 제1차 한인연합회의(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 의장으로 참가하여 한국의 독립을 세계 여론에 호소하는 활동을 주도했다. 대회가 끝난 후에는 전미 '한국 친구회'를 조직하여 교포들을 결속시켰다.
3.1 만세 운동 이후 서재필은 조선인들에게 독립의 의지가 미약하게나마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독립 운동에 대한 방략을 구상한다. 교육을 통해 문화, 기술 수준을 높이는 것과 미국과 국제사회에 조선의 독립을 지지해줄 것을 호소하는 것, 조선인 인력의 해외 진출을 통해 조선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을 확산시키는 것 등이었다. 필요하다면 자치제라도 실시한 뒤에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독립하는 단계적인 방법도 대안의 하나로 검토하였다. 1919년 3·1 운동에 호응하고 한인 교민들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이승만은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를 기획한다. 본래 서재필은 출판사를 차릴 계획이었으나 이승만의 설득에 의해 이 대회의 의장으로서 참가하게 된다. 4월 초에 공지하여 4월 13일,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연합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가 소집되었고 연합대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19년 4월 13일에서 15일까지 3일간 열린 이 행사에는 이승만, 정한경, 유일한, 조병옥, 장택상, 허정, 국민회 간부 등 150여명의 한인들이 참여하였으나 그는 열강들이 한국 문제에는 무관심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대회가 끝나고 그는 곧바로 전미 "한국 친구회 (Friends of Korea)"를 조직, 조선인 교포들을 결속시켰다. 그러나 그는 미국이 아무런 이득 없이 조선을 독립시킬 목적으로 일본과 싸울 이유는 없다고 내다봤다.
1921
[워싱턴 군축회의에 한국 대표단 부단장으로 파견되다]
이승만과 함께 워싱턴 군축회의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단 부단장으로 파견되어,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홍보물을 배포하고 《한국독립청원서》를 제출했으나 일본의 방해와 미국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서재필이 가장 기대했던 것은 1921년 11월부터 1922년 2월까지 개최된 워싱턴 군축회의였다. 1921년 8월 일본의 해군력 팽창을 억제하고 중국 침략을 견제하려는 취지에서 미국이 주최한 태평양회의가 열리자 이승만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단 대표로 워싱턴에서 1921년~1922년동안 열리는 평화군축회에 파견되었다. 이때의 태평양회의 주제는 태평양을 사이에 둔 미국과 일본의 해군력 강화 경쟁을 완화하기 위해 소집된 것이라는 것을 지인을 통해 알아냈고, 그는 이 기회에 일본군의 철수와 조선의 독립을 설득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곧 군축회의의 '조선인특파단'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으며, 단장은 이승만이 맡고 서재필은 부단장으로 임명되었다. 평화군축회의 직전 회의장에서 조선 독립의 정당성, 당위성을 설명한 홍보물들을 태평양 연안 국가 대표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회의 개최 후 그는 조선 독립문제를 국제회의 석상에서 공식적으로 다루어줄 것을 요구하는 《한국독립청원서 (Korea's Appeal)》을 각국 대표들에게 제출하였지만, 일본의 방해와 미국의 반대로 끝내 무산되었다. 파리평화회의에서 서재필은 370여 단체의 서명을 받은 연판장을 일본측 대표 도쿠가와 이에사토에게 전달하고, 한국의 독립을 승인해줄 것을 각국 대표와 세계 여론에 호소했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 한국의 독립문제가 논의는커녕 전혀 언급조차 되지 않자 실망하여 경제난으로 한인통신부와 한국친우동맹에 관한 사업을 정지한다는 보고를 구미위원회로 보냈다.
1924
[유한양행의 초대 사장으로 추대되다]
유일한이 류한주식회사(유한양행 전신)를 설립하며 서재필을 초대 사장으로 추대했다. 서재필의 제안으로 회사명은 '유일한'의 한글 표기인 '유한'으로 정해졌으며, '새로운 한국'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1924년 5월 유일한이 정한경 등과 함께 류한주식회사(유한양행의 전신)를 설립하고 서재필을 초대 사장으로 추대했다. 그는 1926년 12월 10일까지 류한주식회사의 사장이었다. 유일한은 초대 사장으로 서재필 박사를 모시고 싶다고 제안했고, 서재필도 흔쾌히 수락했다. 당시 자금은 유일한이 제공했고 서재필은 경영을 담당했다. 서재필은 회사명을 '유일한 주식회사(New-il Han Company)'로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유일한에게 권했다. 서재필의 제안을 받아들인 유일한은 회사 이름을 한글로는 류한주식회사로 하고, 영어로는 New il-han & Company라 하였다. 한국어로는 '유일한'에서 일을 빼고 유한이라는 이름만 사용하게 되었는데, '한(Han)'을 나라 한이라는 뜻으로 해석했을 때 그 뜻은 새로운 한국이 되었던 것이다. 류한주식회사는 1926년 12월 10일 유일한이 정동에 유한양행을 건립하면서 소멸되었다. 서재필은 1926년 6월 유일한의 귀국때까지 류한주식회사의 사장이었고, 12월 10일 유일한이 기존의 류한주식회사를 유한양행으로 변경, 국내법인으로 등록할 때까지 서재필은 류한주식회사의 명목상 사장이었다.
1929
[한국인 최초로 미국 병리학 전문의가 되다]
병리학 전문의 시험에 합격하여 한국인 최초로 미국 병리학자가 되었으며, 동시에 한국인 최초의 미국 의사가 되었다. 이후 자신의 병원을 개업하기도 했으나 경제 대공황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926년 미국에서 병리학 전문의 면허제도가 시행되자 그는 병리학 의사 면허에 응시하였고, 여러 번 낙방하였다. 1929년 병리학 전문의 시험에 합격한다. 이로써 서재필은 한국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미국의 병리학자이자 한국인 최초의 미국 의사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병원을 개업하기도 했다. 1929년 3월 필라델피아 대학, 펜실베이니아 대학, 콜롬비아 대학 등의 의학부 시간제 강사로 취직했으나 백인 학생들이 유색인종에게서는 수업을 받을 수 없다며 거절하여 오래 못가고 그만두었다. 그는 필라델피아의 간호학원에도 강사로 나갔으나 역시 백인 학생들이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꺼리게 되면서 얼마 못가 그만두게 되었다. 가족에게 실직 사실을 통보할 수 없었던 서재필은 이승만이나 동지회, 국민회를 방문하거나, 거리를 전전해야 했다.
1941
[77세 고령으로 미군 군의관에 자원봉사하다]
77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미군 예하 무계급 명예역 군의관으로 자원하여 1945년 4월까지 징병검사 의무관으로 봉사했다. 1945년 1월에는 미국 국회로부터 공로훈장을 수여받았다.
1941년 1월 6일 미군 예하 무계급 명예역 군의관으로 자원하였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폭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승리가 조선의 해방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77세에 미군 징병검사관으로 자원봉사하기도 했다. 그는 1941년 1월 6일부터 1945년 4월까지 미군 징병검사 의무관으로 자원봉사활동을 하여 1945년 1월에는 미국 국회로부터 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
1947
[49년 만에 해방된 고국으로 귀환하다]
미군정청 사령장관 존 하지의 요청을 받아들여 49년 만에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왔다. 이승만, 김규식, 여운형 등 주요 인사들의 환영을 받으며 미군정청 최고정무관 겸 남조선과도입법의원 특별의정관으로 취임했다.
몇 차례 미군정의 요청을 고사했던 서재필은 미군정청 사령장관 존 하지의 요청을 받아들여 미군정청 최고정무관 겸 남조선과도입법의원 특별의정관으로 초빙받아 1947년 7월 1일, 미국을 출발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1947년 7월 1일 오후 4시, 서재필은 49년만에 85세의 고령으로 뮤리엘 영애를 동반하고 해방된 고국에 귀환하였다. 부두에는 이승만, 김규식, 여운형, 안재홍 민정장관, 김형민 서울시장, 김용무 대법원장 등이 마중을 나왔다. 1947년 7월 12일 오후 2시, 서울운동장에서 '서재필귀국환영대회'가 개최되었다. 시민과 각 단체대표자 등 5만여명이 참석, 김규식의 개회사가 있었고, 이승만의 환영사가 있었다. 서재필은 서투른 한국어로 답사를 하였다. 귀국 인사로 서재필은 '자신이 한국말을 잊어버렸으며 한국 사정을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을 솔직하게 시인하였다. 그러나 '힘을 다하여 한국 인민들을 도와주려고 한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권한이 없는 사람이며, 다만 존 하지 사령관에게 진언할 따름이다'고 덧붙였다. 한편 그는 윤치호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귀국 직후 충청남도 아산의 윤치호 묘소를 참배하였다. 기자회견장에서 의친왕 등이 존재하니 그들을 찾아가 볼 것을 권유하는 기자들의 요청을 그는 거절하였다. 귀국 직후 김규식, 여운형, 김성수, 김구 등을 찾아 면담하기도 하고, 김성수, 이광수, 조병옥 등을 만나 그들로부터 국내 정세를 접했으나, 파벌 다툼이 여전한 것을 보고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파벌 다툼은 여전하다며 한탄하였다. 1947년 7월 3일, 하지중장의 최고정치고문으로 조미특별의정관이라는 신설된 직책에 취임하였다. 서울 소공동의 조선호텔에서 잠시 숙박하다가 미 군정청에서 내준 군정청 직원 숙소로 이주하였다. 이후 존 하지 미국 육군 중장에게 자문을 하고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하였다. 서재필의 집무실은 중앙청의 207호실이었다. 그는 매일 출근해 성실하게 근무하였다. 그리고 라디오 연설을 통해 민주주의, 교육,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방송에도 출연하여 매주 금요일 서울중앙방송국을 통해 주로 자유 민주주의의 이념과 제도를 설명하고 우리국민이 걸어야 할 길을 강의했다. 서재필의 방송과 라디오 그의 연설은 영어로 이뤄졌기 때문에 손금성 박사가 꼭 한국어로 통역을 하거나 다른 번역가들에 의해 번역되어 보도되었다.
1948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추대 운동을 사양하다]
제헌 국회 개원 후 정일형, 백인제 등을 비롯한 지도층 인사들과 흥사단계 독립협회로부터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운동이 있었으나, '나는 미국 시민이며 또한 미국 시민으로 머무를 생각이다'며 불출마를 선언했다.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 5·10 총선이 끝나고 제헌국회가 개원한 그 다음날, 정일형, 백인제, 이용설 등을 비롯한 지도층 인사들이 서재필을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운동을 시작하였다. 1948년 5월 29일 '反단독선거론 측에서 단독정부론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서재필의 정계출마 공작을 일으키고 여기에 김구·김규식도 가담한 것 같다'는 풍설에 대해 서재필은 '원칙적으로 남북통일운동은 옳으나 금번 그러한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은 모른다'라고 말하였고, 김구·김규식은 '우리가 단선을 반대한 사람들인 만큼 단정에 관여할 이유가 만무하며 그런 운동은 전연 사실무근이다'라고 말하였다. 남한 단독 정부 수립 결정되고 대통령 선거 일정이 잡히자, 1948년 6월 11일 흥사단계 독립협회는 서재필을 최고 정치지도자로 추대하여 새로운 정치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서재필에게 간원문을 보냈다. '지금 조국이 요구하는 사람은 명령하는 사람이 아니라 인민의 뜻을 알아서 이에 충실히 순종하는 정직한 민주주의적 지도자입니다. 이 나라에는 그러한 인격자가 한분 계시니 그는 서박사입니다'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이 편지는 서재필이 '정계 최고지도자로 출마하시기를'간청했다. 정인과, 백인제 외에도 흥사단 계열 중 최능진과 최능진 계열 인사들이 서재필의 대통령 후보자 출마 운동을 주도했다. 1948년 6월 20일, 서재필은 흥사단계 독립협회가 보낸 간원문(懇願文)에 대해 '조국의 독립이 되느냐 안되느냐의 위기에 서 있는 이때 이러한 정당조직을 하는 것은 우리나라를 더욱 혼란케 할 뿐이오 아무 효과가 없는 것'이라는 말로 이를 거절하였다. 그럼에도 1948년 6월 24일 서박사추대연합준비위원회가 만들어졌다. 7월초, 백인제, 최능진, 김대중을 비롯한 1,929명이 서재필에게 '한국 초대 정부 대통령으로 추대하고자 하니 대통령 출마를 승낙해 달라'는 내용의 요청서를 보냈으나, 서재필은 '미국 시민으로 남겠노라'며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한편 서재필 추대 운동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에 의해 공개적으로 견제됐다. 6월 24일 조선언론인협회에서 서재필, 안재홍을 명예회장으로 추대했다. 1948년 7월 4일 서재필은 대통령 선거 불출마를 피력하였다. '나는 조선 각지로부터 나에게 조선 대통령 입후보를 요청하는 동시에 내가 출마하는 경우 나를 지지하겠다는 허다한 서신을 받았다. 나는 그들의 후의에 깊이 감사하는 한편, 나는 과거에 있어 그 관직에 입후보한 일 없으며 지금도 그리고 장래에도 그리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을 그들에게 전달해야 할 것이다. 설혹 나에게 그 지위가 제공된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수락하지 않을 터이다. 나는 미국 시민이며 또한 미국 시민으로 머무를 생각이다.'
[혼란스러운 고국을 떠나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다]
미군정청 최고의정관 직을 사직하고, '고국 떠나며 동포 여러분께'라는 서한을 남긴 채 둘째 딸 뮤리엘과 비서 임창영을 대동하고 인천항을 통해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동포들에게 권리와 책임을 강조하며 단결을 호소했다.
1948년 8월 29일, 서재필은 고국을 떠나기 전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8·15선거는 옳다고 볼 수 없다', '신정부는 무엇보다도 민생문제의 해결을 위해 청년에게 직장을 주라', '조선 체류 중 가장 기쁜 것은 민족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선거권을 얻은 것이고, 슬픈 것은 청년들이 일이 없어 1일의 식사 문제 해결을 위하여 할 일 없이 정당만 왕래하며 쓸 데 없는 건의의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다', '인민의 권리를 남에게 약탈당하지 마라. 정부에게 맹종만 하지 말고 정부는 인민의 종복이고 인민이 곧 주인이라는 것을 망각하여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이 권리를 외국인이나 타인이 빼앗으려 하거든 생명을 바쳐 싸워라. 이것만이 나의 평생 소원이다.' 등의 답변을 하였다. 서재필은 미국으로 떠나기 수일 전 기자 김을한에게 '우리 한국 사람은 단결할 줄을 모르고 당파 싸움만 하다가 일을 그르치는 수가 많은데, 갑신정변 때나 지금이나 50년이 지났지만 그 점만은 똑같으니 한심한 일이오'라고 하였다. 1948년 9월 10일, 미군정청 최고의정관 직을 사직하였고 이튿날 9월 11일, 서재필은 '고국 떠나며 동포 여러분께'라는 제목으로 대국민 서한을 기고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여러분의 수중에 있는 권한이란 특권을 가치있게 효용할 것을 배웁시다. 둘째로 현실적인 동시에 실질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셋째로 마지막으로 할 말은 나의 친애하는 남자 친구들이 자기네 부녀자와 자녀들의 안락과 복지와 편의를 위해서 일층 유의하는 동시 노력하여 주기 바라는 바이다.' 1948년 9월 11일 오전 7시 반, 서재필은 김구·이용설·손원일·김형민·강진국 등 백여 명의 환송리에 둘째 딸 뮤리엘 제이슨과 비서 임창영을 대동하고 숙소인 조선호텔을 떠나 인천으로 향하였다. 그는 오전 8시 40분경 인천에 도착하여 기자와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하였다. (문) 통일독립국가를 조속히 수립하는 방법은? (답) 4천년 역사를 가진 대한민족이므로 분리될 리 없다. 당파싸움과 정치이권을 떠나 국민의 권리를 잘 이용하면 자주독립국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951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88세의 나이로 영면하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 의료활동에 전념하다 후두암과 방광암, 과로의 합병증으로 필라델피아 노리스타운 몽고메리 병원에서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1994년에 대한민국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봉환되어 안장되었다.
1948년 9월, 미국으로 돌아온 서재필은 다시 의료활동에 전념했다. 그러나 후두암에 걸린 서재필은 곧 노환과 과로로 쓰러졌고 결국 병원에 실려가게 된다. 후두암과 방광암 진단을 받았다. 1949년 8월, 주미한국대사 장면으로부터 초청장을 받고 대한민국 정부수립 1주년 기념행사에 초대되었다. 이후 그는 주미한국대사로 부임해온 장면의 방문을 받았다. 1950년 6월, 미국에서 방송을 통해 한국 전쟁 소식을 접하였고, 6월 병세가 악화되면서 필라델피아 노리스타운 몽고메리 병원에 입원하였다. 주미 한국대사 장면은 수시로 문병하였으며, 서신을 보내 입원 중인 서재필의 빠른 완쾌를 비는 한편, 당시 전쟁 상황을 전하며 '지금 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반드시 승리 할 것이다.'는 것과 '자유로운 분위기 내에서 제2대 총선거가 진행되었음'을 전하였다. 그러나 서재필은 휴전을 못보고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 5일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노리스타운 몽고메리 병원 병실에서 후두암과 방광암, 과로의 합병증으로 일생을 마쳤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향년 88세였다. 장례식은 필라델피아 메디아 교회에서 두 딸 스테파니, 뮤리엘과 흥사단, 대한인 국민회 회원, 주한미국대사 장면 등이 참석하여 두 딸의 회고담과 지인들의 추모사 낭독 후 간소하게 진행되었다. 시신은 화장되어 미국 필라델피아 교외 메디아의 비브 교회 공동묘지의 납골당에 안장되었다. 1994년 대한민국의 국립서울현충원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1977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다]
한국 독립 운동에 기여한 공적을 인정받아 1977년 11월 30일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다. 1962년에 외국 국적자라는 이유로 취소되었던 수훈 대상자 지정이 1977년에 다시 이루어졌다.
1962년 3월, 한국 독립 운동에 기여한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공로훈장 수훈 대상자로 지정되었으나, 외국 국적자라는 이유로 취소되었다. 1977년, 해방 이전까지의 인물을 수소문하여 11월 30일 수상자로 지정되었고 그 해 12월 13일,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2008
[미국 워싱턴 D.C.에 서재필 동상이 세워지다]
미국 워싱턴 D.C.에 동상이 세워지고, 5월 6일이 '서재필의 날'로 지정되었다. '최초 한국계 미국인 - 한국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개척자'라는 문구가 초석에 새겨졌다.
1975년, 미국 필라델피아에 서재필 기념재단이 만들어져 의료, 봉사, 장학 및 교육, 지역사회 활동을 하고 있으며, 필라델피아 근교인 미디아에 서재필 박사가 살던 집을 서재필 기념관으로 만들어 개방하고 있다. 2008년 5월 미국 워싱턴 D.C 워싱턴에 동상이 세워졌고 워싱턴 시는 5월 6일을 ‘서재필의 날’로 지정했다. 2008년 5월 6일, 워싱턴 D.C. 소재 주미 한국대사관 총영사관 앞에 서재필의 동상이 제막되었다. 서재필 동상 초석 정면에는 '최초 한국계 미국인―한국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개척자'라고 씌어 있다. 전신 청동상은 이재길 전남대 미대 교수가 조각했다. 좌측 면에는 이은상 시인이 서 박사 생애를 압축한 한글 헌사를 담았고, 우측 면에는 서 박사 전기를 저술한 이정식 펜실베이니아 대학 교수의 영문 헌사가 있다. 2011년에는 서재필 언론문화상이 제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