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

친일 관료, 정치인, 사상가, 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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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친일 관료, 정치인, 사상가, 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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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은 대한제국 시기 고위 관료이자 정치인으로 시작했으나, 점차 친일파로 변모한 인물입니다. 을사늑약부터 한일 병합 조약까지 국권 상실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등 고위직을 역임하며 일본의 식민 통치에 적극 협력했습니다. 대한민국 역사상 '매국노'의 대명사로 기억되며, 그의 재산은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으로 분류되어 국가로 환수되었습니다. 개인의 영달을 위해 시대적 대의를 저버린 기회주의자로 평가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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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8

[이완용 출생]

경기도 광주부 낙생면 백현리(현재의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에서 이호석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완용은 경기도 광주부 낙생면 백현리(현재의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에서 부친 이호석과 생모 신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15살 터울의 형 이면용과 누이 3명이 있었습니다. 그의 집안은 과거에 고관을 배출했으나, 당시에는 몰락한 양반 상태였습니다.

1867

[이호준에게 입양]

10세 때 일가 아저씨뻘인 중추부 판사 이호준에게 입양되었습니다. 양부 이호준은 흥선대원군의 친구이자 당대 정계의 거물이었으며, 이완용의 친아버지 이호석에게 미관말직을 알선해 주기도 했습니다.

이완용은 10세 때 일가 아저씨뻘인 중추부 판사 이호준에게 입양되었습니다. 이호준은 이조참의, 승정원 동부승지, 한성부 판윤 등 최고위 관료이자 흥선대원군의 친구였습니다. 이호준은 서자와 딸만 있었기에 아들을 얻기 위해 이완용을 양자로 들였습니다. 이완용의 친아버지 이호석에게는 선공감 감역관 자리를 알선해주었습니다.

1870

[양주 조씨와 혼인]

13세가 되던 시기, 한 살 연상의 홍문관 부수찬 조병익의 딸인 양주 조씨와 혼인했습니다.

13세에 홍문관 부수찬 조병익의 딸인 양주 조씨와 혼인했습니다. 청소년기에는 양아버지 이호준의 후계자로서 다른 대감집 자제들과 비교당하며 조심스러운 언행을 보였다고 합니다. 친아버지 이호석에게 소학을 떼고, 입양 후 서울의 노론계 서당에서 글을 배웠으며, 충청북도 전의군의 선비 정익호에게 대학과 논어 등 사서를 사사받았습니다.

1882

[증광문과 별시 급제]

25세에 증광문과 별시에 병과 18위로 급제하여 정7품 주서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는 임오군란 진압 후 명성황후의 무사 환궁과 대원군의 실각을 축하하는 의미의 과거시험이었습니다.

1882년, 25세 나이로 증광문과 별시에 병과 18위(전체 28위)로 급제한 후, 정7품 주서가 되었습니다. 증광시는 왕실에 축하할 일이 있을 때 치르는 과거시험으로, 이완용이 시험 보았던 당시 축하할 일은 임오군란 진압 후 명성황후를 청군의 경호 속에 무사 환궁시키고 대원군이 천진에 끌려가면서 고종 부부가 다시 조정 실권을 차지한 일이었습니다. 병과였음에도 이례적으로 정7품에 임명된 것은 후견인 이호준이 대원군과 손을 끊고 민씨 정권과 결탁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1884

[갑신정변 관찰]

음력 10월 갑신정변이 발발하자, 해방영 주둔지에서 개화파의 3일 천하를 불안하게 지켜봤습니다. 당시 민씨 정권과 손잡은 수구파였던 그는 급진개화파와의 접점이 전혀 없었습니다.

1884년 음력 10월 갑신정변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이완용은 해방영 주둔지에서 개화파의 집권, 그리고 그들의 3일 천하, 민씨 정권의 재집권이라는 정치적 격변을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민씨 정권과 이미 손을 잡고 수구파가 되었던 이완용은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의 급진개화파와의 접점이 전혀 없었고, 세계 정세나 시대적 당위성에 대한 인식이 결여된 상태였습니다.

1886

[육영공원 입학 및 신문물 습득]

중앙정계로 복귀하여 조선 최초의 근대적 관료 재교육 기관인 육영공원에 입학, 초보적인 영어, 과학, 경제학 등으로 재교육을 받으며 신문물을 접했습니다.

1886년에 중앙정계로 복귀하여 조선 최초의 근대적 관료 재교육 기관이었던 육영공원에 입학했습니다. 이곳에서 초보적인 영어, 과학, 경제학 등으로 재교육을 받으면서 비로소 신문물을 접했고, 뛰어난 성적으로 사헌부 장령, 홍문관 응교 등으로 승차했습니다. 이듬해에는 세자시강원 보덕에 보임되어 왕세자 척(순종)을 가르치는 등 고종의 눈에 들었으며, 과거 급제부터 정3품 당상관에 오르기까지 5년도 채 걸리지 않는 유례없이 빠른 승진을 기록했습니다.

1887

[순종의 스승 및 주미참찬관 발령]

세자시강원 보덕(정3품)에 보임되어 왕세자 척(순종)을 가르쳤고, 이후 주차미국참찬관으로 발령받아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 등을 따라 미국 워싱턴 D.C.에 가 대한제국주미공사관 설치에 참여했습니다.

1887년 세자시강원 보덕(정3품)에 보임되어 왕세자 척(훗날 순종)을 가르쳤습니다. 이완용은 갑신정변 실패 후 조정에서 멀어진 급진개화파들과 달리, 민씨 정권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신문물을 이해하고 근대화를 추진할 수 있는 신세대 인재로서 고종의 눈에 들었습니다. 같은 해 주차미국참찬관으로 발령받아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 등을 따라 요코하마, 하와이를 거쳐 미국 워싱턴 D.C.에 가 대한제국주미공사관 설치에 참여했습니다.

1888

[주미공사 소환]

미국에서 병으로 소환된 후, 미국이 한반도 지배에 관심이 없으므로 독립을 위해 적극 이용해야 한다는 조정 여론을 재확인시켰습니다.

1888년 초 병으로 박정양과 함께 주미공사에서 소환되었습니다. 박정양은 청나라에 약속한 영약삼단을 지키지 않아 문책성 인사를 당했습니다. 이들은 귀국 후, 미국이 일본, 러시아, 중국과 달리 한반도 지배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독립을 위해 미국을 적극 이용해야 한다는 조정 여론을 재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동부승지 임명]

음력 5월에 동부승지로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이조참의와 외무참의 등을 지냈습니다.

1888년 음력 5월 동부승지로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이조참의, 외무참의 등을 지냈습니다. 그는 집권 세력이 자주 바뀌는 불안한 정국에서 양부 이호준과 함께 보신에 급급한 정치적 입장을 취하며 근대 국가 건설에 대한 절실한 인식은 결여된 상태였습니다.

1889

[주미참찬관 재임명 및 미국행]

음력 12월에 주차미국참찬관으로 재임명되어 이하영 부부, 부인 양주 조씨와 함께 다시 워싱턴 D.C.로 향했습니다.

1888년 음력 12월에 주차미국참찬관에 재임명되어 이하영 부부와 부인 양주 조씨와 함께 부부동반으로 다시 워싱턴 D.C.에 갔습니다. 이듬해 12월 주미대리공사로 승진하여 총 2년간 근무했습니다. 주미공사관의 이전을 지휘했고, 재임 시 미국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와 회담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워싱턴에 체류 중이던 윤치호의 일기에도 이완용과 대한제국 공관 소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미대리공사 승진]

주미대리공사로 승진하여 총 2년간 근무하며 주미공사관 이전을 지휘하고 미국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와 회담했습니다.

1889년 12월에 주미대리공사로 승진하여 총 2년간 근무했습니다. 주미공사관의 이전을 지휘했고 재임 시 미국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와 회담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미국 워싱턴에 체제 중이던 윤치호가 <워싱턴 이브닝 스타지> 등 현지 신문에 실리는 이완용 및 대한제국 공관 소식을 자신의 일기에 기록한 것이 남아있습니다.

1890

[귀국 및 요직 역임]

음력 10월에 귀국하여 성균관 대사성, 교환서총판, 형조참판, 공조참판, 동지의금부사 등 각종 요직을 역임하며 대한제국 내각의 대미협상을 도맡았습니다.

1890년 음력 10월에 귀국하여 성균관 대사성, 교환서총판, 형조참판, 공조참판, 동지의금부사, 동지성균관사, 동지춘추관사, 전환국총판, 우부승지, 내무참의 등 각종 요직을 역임했고 대한제국 내각의 대미협상을 도맡았습니다. 특히 성균관 대사성 재임 당시 미국에서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초등교육 의무화, 근대적 교사 양성 계획 지휘, 성균관 커리큘럼 개편 등 근대 교육 개혁을 주도했습니다.

1893

[친모상으로 사직]

친모 신씨의 상을 이유로 사직한 뒤 1년여간 상을 지켰습니다.

1893년 친모 신씨의 상을 이유로 사직 후 모친상을 지키길 1년여간 정계를 떠나 있었습니다. 이듬해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하자, 고종과 조정 대신들은 동학 시위를 역성 혁명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는 대규모 농민 봉기로 인식했습니다.

1894

[동학농민운동 및 청일전쟁 발발]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하고 청일전쟁이 이어져 일본이 승리하면서, 청나라와 결탁했던 수구파 정권은 붕괴했습니다.

1894년에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고종과 조정 대신들의 긴장감은 극에 달했고, 동학 시위를 흥선대원군과 결탁된 반역 작당 쯤으로 몰아붙였습니다. 용인에서 친어머니 산소를 지키고 있는 이완용으로서도 위기가 감지되었으나 양부 이호준의 처분과 결단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청국에 파병을 요청하면서 톈진 조약이 파기되고 일본이 참전했으며,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며 양무 운동식 근대화의 한계가 드러나고 청나라와 결탁했던 수구파 정권은 붕괴했습니다.

1895

[갑오경장 개화파 내각 참여]

청일전쟁 후 일본의 비호 아래 갑오개혁이 추진되자,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이후 학부대신 겸 중추원 의관으로 내각에 참여했습니다.

1894년 8월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기를 잡고 갑오경장을 추진하자, 박영효 등 도쿄서 망명 중이던 개화파들이 조선에 돌아와 2차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처음에는 개화파 내각이 불안정하다고 판단하여 친모 산소를 지키는 것을 이유로 내각 참여를 거절했습니다. 이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승리를 확정한 일본의 보호 속에 개화파의 개혁이 자리를 잡는 듯하자, 1895년 음력 5월 학부대신 겸 대한제국 중추원 의관으로 내각에 참여했습니다.

[갑오개혁 실패 및 러시아 세력 접근]

갑오개혁이 실패로 끝나고 일본의 위신이 떨어진 후, 러시아와 미국으로 관심이 쏠리며 새로운 근대화 모델을 찾아야 했습니다.

1895년 음력 7월, 갑오개혁이 실패로 끝났습니다. 고종과 민씨 외척 등 친위 세력들은 박영효와 개화파에게 역적 누명을 씌워 조정에서 쫓아냈습니다. 일본이 삼국 간섭으로 요동반도를 러시아에 뺏기자, 조선 조정에서 일본의 위신이 크게 떨어졌고 자연히 개화파의 위세도 약해졌습니다. 졸지에 다시 역적들이 된 개화파들은 일본 망명길에 올랐고, 조정의 관심은 이제 외교적 위압만으로 일제를 누른 러시아와 미국으로 쏠리게 되었습니다.

[을미사변 발생 및 피신]

고종의 어심을 읽은 이호준의 지시로 러시아에 접근하기 시작했으나, 갑작스러운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살해당하자 주한미국서기관 호러스 뉴턴 알렌의 도움으로 미국공사관으로 급히 피신했습니다.

1895년 8월, 고종의 어심을 읽은 이호준은 국제 경험이 있는 이완용을 보내 러시아에 접근시켰습니다. 이에 이완용은 정동파에 가담해 러시아 세력과 접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별안간 을미사변이 일어났고, 개화파가 조직했던 훈련대 소속 사병들이 일본과 공모해 명성황후가 경복궁 건청궁 마당에서 살해당했습니다. 수구파 이완용 부자도 목숨이 위험했으며, 사변 당시 주한미국서기관 호러스 뉴턴 알렌의 도움으로 미국공사관으로 급히 피신했습니다.

1896

[아관파천과 외부대신 임명]

이완용 등 친위대가 지방 소요를 진압하러 떠난 사이, 고종은 주한러시아공사 카를 베베르와 함께 아관파천을 단행했습니다. 이완용은 외부대신에 임명되어 대한제국의 러시아 협상을 전담하게 되었습니다.

1896년 음력 2월 11일(양력 3월 23일) 이완용 등 친위대가 지방 소요를 진압하러 떠난 사이, 고종은 의도대로 아관파천을 단행시켜 러시아 공관에서 왕세자와 1년여를 보냈습니다. 자연히 친일 개화파들은 조정에서 모습을 감췄고, 이완용은 외부대신에 임명되어 대한제국의 러시아 협상까지 전담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농상공부대신 등을 겸직하며 제국 근대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는데, 이는 러시아를 이용해 일본을 견제하고 근대화를 이루어 국제사회에서 독립을 인정받으려던 고종과 신내각의 위기감 때문이었습니다.

1897

[학부대신으로 좌천]

러시아의 압력으로 학부대신으로 좌천되었고, 재차 평양 관찰사로 좌천되며 중앙 정계에서 축출되었습니다.

러시아는 조선의 대미 접촉에 분노와 위기감을 느꼈고, 주한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는 고종에게 압력을 가했습니다. 이에 1897년 7월 20일 이완용은 학부대신으로 좌천되었고, 재차 9월 1일자로 외직인 평양 관찰사로 좌천되어 중앙 정계에서 축출되었습니다. 스페에르 신임 러시아 공사는 이완용을 '가장 질나쁜 인간'으로 비난하며 그의 내각 복귀를 반대했습니다.

[평양 관찰사로 재차 좌천]

주한 러시아 공사 스페에르의 압력으로 외직인 평양 관찰사로 좌천되어 중앙 정계에서 축출되었습니다.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후임으로 부임한 스페에르(Speyer, A. de.)는 고종에게 압력을 가했고, 1897년 9월 1일자로 이완용은 외직인 평양 관찰사로 좌천되어 중앙 정계에서 축출되었습니다. 스페에르는 이완용을 조선 정치에서 배제시키려 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했습니다.

1898

[전북 관찰사로 좌천]

러시아의 압력과 대미 협상 실패의 책임을 지고 전북 관찰사로 좌천되었습니다.

1898년 3월 11일, 러시아의 압력에다 대미 협상 실패의 책임을 지고 내각에서도 차츰 밀려난 그는 급기야 전북 관찰사로 좌천되었습니다. 부임 5일만에 직무태만 혐의로 감봉 처분을 받았고, 공금횡령죄까지 뒤집어써 파직될 뻔했습니다. 그의 입지는 계속해서 좁아지고 있었습니다.

[독립협회에서 제명]

급진성을 띠기 시작한 독립협회에서 제명당했습니다. 원래 왕정 지지자였던 그는 역모의 죄를 우려하여 간부직을 사퇴했었습니다.

1898년 7월 11일, 이완용은 독립협회로부터 제명당하기까지 이릅니다. 그는 독립협회 내 정부측 인사로서 제2대 위원장으로까지 활동했으나, 점차 친미 개화파 계열의 윤치호, 서재필 등이 국민 투표를 통한 미국식 참정권을 주장하며 황실과 유생들의 경계와 이목을 끌자, 왕정 지지자였던 그는 역모의 죄까지 뒤집어쓸까 염려하여 협회 명단에 이름만 남긴 채 모든 간부직을 자진 사퇴했었습니다.

1901

[아비 병환으로 정계 복귀]

의정부 참정 아비 이호준이 노환으로 쓰러지자, 고종 황제의 명으로 사면복권되어 궁내부 특진관으로 복귀했습니다.

1901년 2월, 의정부 참정이던 아비 이호준이 노환으로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고종 황제는 총신 이호준의 후계를 잇게 하려고 급히 이완용을 사면복권시켜 궁내부 특진관으로 불러 올렸습니다. 이호준은 얼마 안 가 81세를 일기로 사망했고, 이완용은 3년 부친상을 위해 의원면본관 해 정계를 다시금 떠났습니다.

1904

[3년상 마친 후 수구파 좌장으로 복귀]

3년상을 치르고 상복을 벗은 후, 자신의 정치적 스승이자 보호자였던 아버지를 대신해 수구파의 좌장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는 그의 인생 최대의 기로였습니다.

1904년 2월 이완용은 3년상을 치르고 상복을 벗었습니다. 그는 곧 자신의 정치적 스승이자 보호자였던 아버지를 대신해 수구파의 좌장자리에 올랐습니다. 이때까지 이완용의 정치적 행보가 전적으로 이호준의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면 이제부터의 정치적 결단은 이완용이 독자적으로 내려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당시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굳어져가는 시점으로, 국권을 침탈당할 위험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커졌습니다.

1905

[친일파로 전향]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국권 침탈 위협이 고조되자, 일본과의 타협을 주장하며 철저한 친일파로 전향했습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굳어져가는 시점, 대한제국은 마지막 보루로 다시 미국을 택했으나, 미국은 이미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한 상태였습니다. 대한제국은 더 이상 빌릴 외세의 힘조차도 없게 되자 이완용은 '일본은 한국 문제 때문에 두 번이나 큰 전쟁을 치러 이제는 러시아까지 격파했으니 한국에 대해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그런데도 일본 천황과 정부가 타협적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하니 우리 정부도 일본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라는 말을 남기며 친일파로 전향했습니다.

[을사늑약 체결 서명]

학부대신으로서 일본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의 지시를 받고, 일본군의 무력시위 속에 을사늑약에 서명하여 외교권을 박탈당하게 했습니다.

1905년 11월 17일 이완용은 학부대신으로서 일본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로부터 지시를 받고, 일본군의 무력시위를 배경으로 을사늑약에 서명했습니다. 이로 인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었고, 주미공사관을 비롯한 모든 재외 공관이 일본에 강제 매각 폐쇄되는 국가적 치욕을 겪었습니다. 이 조약은 이후 대한제국의 완전한 국권 상실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의정대신 겸직]

이토 히로부미의 후원으로 의정대신을 겸직했고, 이후 대한제국 내각 최고직인 의정부 참정대신에 올랐습니다.

1905년 12월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후원으로 의정대신을 겸직하고, 1907년 초 대한제국 내각 최고직이었던 의정부 참정대신(정1품)에 올랐습니다. 또한 조선 근대화 작업을 위해 겸하고 있었던 농상공부 대신서리·광산사무국총재에 유임되었습니다. 1907년 6월에는 일본과 본격적인 강제병합 준비를 위해 내각 체제가 개편되었고, 이완용은 개각 후에도 총리대신 직에 추천되어 처음엔 거부했지만 이토의 거듭된 권유에 결국 수락하게 됩니다.

1907

[의정부 참정대신 취임]

대한제국 내각 최고직이었던 의정부 참정대신에 올랐습니다.

1907년 초 대한제국 내각 최고직이었던 의정부 참정대신(정1품)에 올랐으며, 조선 근대화 작업을 위해 겸하고 있었던 농상공부 대신서리·광산사무국총재에 유임되었습니다. 이 시기 이완용은 일본의 강력한 지지를 받으며 고위직에 오르게 됩니다.

[내각총리대신 취임]

일본과 강제병합 준비를 위한 내각 개편 후 총리대신 직에 추천되어 수락, 총리대신으로 취임했습니다.

1907년 6월 일본과 본격적인 강제병합 준비를 위해 내각 체제가 개편되었습니다. 이완용은 개각 후에도 총리대신 직에 추천되었습니다. 처음엔 거부했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거듭된 권유에 결국 수락하여 총리대신으로 취임했습니다. 이로써 이완용은 일제에 대한 국권 상실의 주도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허위 처형 주청과 민중 방화]

어전회의에서 항일 의병장 허위의 처형을 순종 황제에게 주청했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성난 민중들이 그의 집에 불을 질렀으나 조기에 진압하여 위패와 재산 대부분을 지켰습니다.

1907년 6월 내각총리대신으로 궁내부대신서리를 겸하면서 이완용은 매국노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하루는 이완용이 어전회의에서 항일 의병장 허위의 처형을 순종 황제에게 주청했습니다. 허위는 황실 어용단체인 황국협회의 간부 출신이었으나 이완용은 그의 처형을 주장했습니다. 이완용의 사형 주청 사실이 알려지자 옛 황국협회 지지자들과 화가 난 민중들이 몰려와 그의 집에 불을 놨습니다. 이때는 조기에 진압하여 조상들의 위패와 재산의 대부분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고종 양위 강행 시도]

고종의 양위 조칙이 내려진 당일, 궁내부 대신 박영효가 병을 핑계로 불참하자 궁내부대신 서리로서 황제 대리 의식을 강행하려 했습니다.

1907년 7월 19일, 고종은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일본에 의해 양위를 강요받았습니다. 이완용은 양위에 관한 고종의 조칙이 내려진 당일 곧바로 황제 대리 의식을 거행하려 했으나, 의식을 주관할 궁내부 대신 박영효가 병을 핑계로 입궐하지 않아 차질이 생겼습니다. 박영효는 한일병합 과정에서 역할을 기대받았으나, 양위만은 막고자 애썼고, 결국 양위가 확정되자 궁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튿날 이완용은 박영효의 공석을 맡아 궁내부대신 서리로서 양위식을 강행했습니다.

[순종 즉위식 당일 자택 방화 사건]

순종 즉위식 당일, 반일 단체 동우회 회원들이 그의 자택으로 몰려가 불을 질러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그는 가족과 함께 왜성대 통감관저로 피신했습니다.

1907년 7월 20일, 순종 즉위식으로 공표된 그 시각, 반일 단체인 동우회 회원들이 덕수궁에서 2km 거리도 안 되는 이완용의 자택으로 몰려가 불을 질렀습니다. 1차 화재 때와 달리 서울 시내의 경비력과 치안력이 양위식 때문에 모두 덕수궁 쪽으로 집중됐던 탓으로 시위 및 화재에 미처 대처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가재도구는 말할 것도 없고 고서적 등과 집안 패물까지 모두 타버려, 이완용은 거의 전재산이 불타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특히 집안의 적장자로서 제사를 모셔야 될 조상들의 신주까지 불 속에 사라져 정신적인 충격도 상당했다고 합니다. 이완용의 가족들은 '매국노의 일족들을 잡아 죽여라'는 군중들에게 쫓겨 남산 왜성대(倭城臺)에 있던 왜성구락부로 몸만 피했습니다. 난리가 난 줄도 모르고 이완용과 친일 관료들은 덕수궁에서 순종 즉위식을 주관 중이었습니다.

[영친왕 황태자 책봉 주도]

태황제 고종의 추천을 받아, 후사가 없었던 순종의 황태자로 막내 동생 영친왕을 결정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907년 8월 17일, 태황제 고종은 이완용의 추천대로, 후사가 없었던 순종의 황태자로 순종 황제의 막내 동생 영친왕을 결정했습니다. 이는 차기 대권의 유력 주자였던 흥선대원군의 적장손 영선군과 장성한 아들 의친왕을 견제해, 막후에서 실질적 권력을 쥐려 했던 고종의 노욕과 이완용의 정략이 맞아떨어진 결과였습니다. 이로써 끊임없이 잠재적 왕위계승자로서의 대우와 주목을 받아왔던 영선군과 의친왕은 졸지에 황태자의 신하로 격하되었습니다.

[자택 방화 후 의붓형 집으로 피신]

자택 방화 사건 후 왜성대에서 두 달가량 머물다가 의붓형 이윤용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1907년 9월, 이완용과 그 가족들은 왜성대에서 두 달가량 머물다가 이제 의붓형 이윤용의 집이 된 옛 대저택으로 돌아갔습니다. 이호준의 모든 재산은 친아들인 서자 이윤용에게 상속되었지만, 이완용은 이호준 사망 당시 상속권을 주장하지 않고 집안 제사를 직접 모시는 적자로서 의무만을 다해왔기 때문에, 비록 이윤용이 의붓형이나마 동생 가족의 편의를 성심성의껏 봐주어 더부살이에 별 어려움은 없었다고 합니다.

1908

[고종에게 남녕위궁 하사받음]

태황제로 물러난 고종이 저동에 있는 남녕위궁을 자신에게 하사한다는 식의 정치적 연출로 사태 무마를 시도했습니다.

1908년 1월, 의붓형 집에서 서너 달을 지내던 이완용은 겨우 궁리 끝에 태황제로 물러난 고종이 직접 저동(현재 명동성당 인근)에 있는 남녕위궁을 자신에게 하사한다는 식의 정치적 연출로 사태 무마를 시도하기까지 이릅니다. 이는 민중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한 시도였으나 큰 효과는 없었습니다.

[당쟁 희생자 복권 시도]

총리대신 취임 초 양반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역대 당쟁 희생자들인 남인, 북인 등의 복권을 시도하여 77명의 명예를 회복시켰습니다.

1907년(융희 1년) 총리대신 취임 초, 자신들에게 향하던 양반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역대 당쟁 희생자들로 역적의 오명을 쓰고 축출됐던 남인, 북인 등의 복권을 시도했습니다. 비록 노론이 벽파 시파로 갈린 지도 백여 년 전이었지만, 아직 문벌들의 뿌리가 되는 노론계의 집단 반발이 잠시 있었습니다. 그러나 숙종의 환국 정치를 모방한 사면 이벤트는 국권 침탈을 놓고 고조되던 양반들의 분노를 흩어놓는 데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으며, 1908년 4월에는 예정대로 77명의 명예를 회복시켰습니다. 단, 정여립의 대동계와 천주교 관련자 등은 배제되었습니다.

1909

[기유각서 체결로 사법권 일본에 이양]

독단으로 기유각서를 일본과 교환하여 대한제국의 사법권마저 일본에 넘겨주었습니다. 이는 국권 상실을 더욱 가속화하는 행위였습니다.

1909년 7월 이완용은 독단으로 기유각서를 일본과 교환하여 대한제국의 사법권마저 일본에 넘겨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대한제국은 사법권마저 상실하게 되면서 국권이 더욱 약화되었고, 일본의 식민 통치 기반이 한층 공고해졌습니다. 이는 한일 병합으로 가는 결정적인 단계 중 하나였습니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암살당했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암살당했습니다. 이는 일본의 한국 침략 정책에 대한 강력한 저항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일본은 이에 크게 놀라 한국 병합을 더욱 서두르게 됩니다. 이완용은 이토 추도회에 참석하여 안중근을 맹렬히 비난했습니다.

[이토 추도회 참석 및 안중근 비난]

서울 남산 장충단에서 열린 이토 통감 추도회에 참석하여 추도문을 읽고 안중근을 맹렬히 비난했습니다.

1909년 11월 4일, 서울 남산 장충단에서 열렸던 이토 통감 추도회에 침통한 표정으로 참석했습니다. 추도회는 일본 현지의 이토 히로부미의 장례식과 동시에 거행되었는데, 시종원경 윤덕영, 한성부민회 대표 윤효정 등이 대표로 함께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그는 추도문을 읽는 자리에서 이토 공은 자신의 스승과 같은 존재였으며 그가 제창한 극동평화론의 뜻을 지지하고 존경한다고 말하는 동시에 그를 암살한 안중근을 조선인의 이름으로 맹렬히 비난했습니다.

[이재명 의사의 암살 시도 피습]

벨기에 왕 추도미사에 참석하던 중 군밤장수로 변장한 이재명 의사에게 칼에 찔려 폐가 관통되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당시 최신 의료기술로 기적적으로 생존했으나, 이 상처로 평생 폐 관련 질병에 시달리게 됩니다.

1909년 12월 22일, 이완용은 벨기에의 왕 레오폴 2세의 명동성당 추도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인력거에 올랐습니다. 성당 정문 근처에서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기다리던 이재명 의사가 이완용을 덮쳐 그의 옆구리와 어깨 등을 순식간에 세 차례 찔렀습니다. 그는 인력거꾼마저 찔러 밀쳐내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일본 순사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인력거꾼 박원문은 그 자리에서 사망했고, 이완용은 곧바로 대한의원으로 후송되었습니다. 이때 칼에 왼쪽 폐가 관통되는 중상을 입었으나, 일본인 외과의사들과 당시 최신 의료기술이 총동원되어 두 달간의 입원 치료 끝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다만 이때부터 얻은 폐 쪽 지병이 천식과 폐렴으로 발전하여 평생 동절기마다 크게 고생했고, 훗날 사망 원인이 됩니다.

1910

[한일병합조약 어전회의 상정]

내각총리대신으로서 일본의 각본대로 한일병합에 관한 건을 내각회의에 상정하고 어전회의에 올려 황제의 면전에서 합병안을 통과시켰습니다.

1910년 8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은 일본의 각본대로 내각회의를 소집해 한일병합에 관한 건을 상정하고 어전회의에 올려 뻔뻔하게도 황제의 면전에서 합병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이는 대한제국의 국권을 최종적으로 일본에 넘겨주는 절차였습니다. 이완용은 이미 이전부터 을사늑약, 정미 7조약, 기유각서 등을 통해 국권 상실에 깊이 관여해왔습니다.

[한일 병합 조약 서명]

한일양국병합전권위원회의 전권위원으로서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관사에서 한일 병합 조약에 직접 서명했습니다. 이로써 대한제국의 국권은 완전히 상실되었습니다.

1910년 8월 22일, 이완용은 한일양국병합전권위원회의 전권위원에 올라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관사에서 한일 병합 조약에 직접 서명했습니다. 이 조약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일본에 완전히 넘겨주는 불평등 조약으로, 이완용은 이로써 '매국노'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조약 체결 후 그는 곧 관직을 사퇴했으며,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백작의 작위와 함께 막대한 은사공채금 15만 원을 지급받았습니다.

[총리대신 사퇴 및 백작 작위 수여]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총리대신직을 사퇴하고, 일본 정부로부터 백작 작위와 함께 잔무처리수당, 퇴직금, 은사공채금 15만 원 등 막대한 보상을 받았습니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곧 관직을 사퇴한 이완용은 조약문 5번 조항의 혜택으로,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백작의 작위와 잔무처리수당 60여 원, 퇴직금 1,458원 33전, 조선총독부의 은사공채금 15만 원을 지급받았습니다. 이는 당시 조선인들 중에서도 가장 큰 액수의 보상이었습니다. 이로써 이완용은 일본 제국의 귀족으로서 식민지 통치에 협력하는 길을 걷게 됩니다.

1912

[중추원 부의장 취임 및 일선융화 주도]

백작 작위를 받은 그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에 올라 '일선융화' 정책을 주도하며 일본의 식민 통치에 적극 협력했습니다.

한일병합 이후, 백작이 된 그는 1912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에 올라 '일선융화'(日鮮融化)를 진행시켰습니다. 그는 정기적으로 일본천황에게 조선귀족 대표로 직접 문안인사를 갔으며, 신사 참배는 물론 조선인 귀족들을 모아 두고 '천황폐하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해 7월 11일에는 농사장려회 회장으로 추대되며 일본의 식민지 정책 수행에 기여했습니다.

1919

[고종 황제 붕어와 독살설 지목]

고종 황제가 붕어하자 시중에 독살설이 떠돌았고, 고종 양위를 강요했던 친일파들, 특히 이완용이 그 배후로 지목되었습니다.

1919년 1월 15일, 고종 황제가 붕어했습니다. 시중에 독살설이 떠돌았는데, 고종 양위를 강요했던 친일파들, 특히 이완용이 그 배후로 지목되었습니다. 이는 일본의 조선 식민 통치에 대한 민중의 분노와 불신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3·1 운동 탄압 주장]

3·1 운동이 일어나자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탄압 필요성에 관한 편지를 보내고, 3·1 운동을 불순한 난동으로 규정하는 경고문을 연달아 발표하며 일본의 식민 통치에 적극 협력했습니다.

1919년 3월 1일, 조선에서는 고종의 승하와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제창에 호응해 3·1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완용 역시 민족 지도자들로부터 동참을 요청받았으나, 오히려 당시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탄압 필요성과 그 방안에 관한 편지를 수차례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완용은 공식적으로 경고문을 연달아 세 차례 발표하고, 3·1 운동이 불순세력에 의한 난동에 불과하며, 약육강식의 시대에 조선의 독립 기도는 허망할 뿐이라 발언했습니다.

1920

[후작으로 승작]

3·1 운동 진압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제로부터 백작에서 후작으로 승작되었습니다.

1920년 일제는 3·1 운동 진압에 대한 공로로 그를 백작에서 후작으로 올려줬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그의 입지는 일본 황실로부터 훈장과 작위를 받으면서 더욱더 확고해졌습니다. 그는 1921년 조선인 귀족 명부 관리 기관인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겸 부의장을 지냈습니다.

1923

[조선사편찬위원회 고문으로 친일사관 정립 기여]

조선사편찬위원회 고문으로 위촉되어 한국 역사를 일본의 시각에 맞춰 해석, 왜곡하는 이른바 '친일사관' 정립에 힘을 보탰습니다.

1923년 1월 6일, 이완용은 조선사편찬위원회 고문으로 위촉되어 한국 역사를 일본의 시각에 껴맞춰 해석, 왜곡하는 이른바 '친일사관'을 정립하는 데 힘을 보탰습니다. 그는 내선일체와 일본어 보급을 독려했으며, 조선귀족원 회원, 농사장려회 회장 등 다양한 친일 단체 활동을 통해 일본의 식민지 정책과 한반도 수탈을 음으로 양으로 도왔습니다.

1924

[아들 이항구 남작 작위 수여]

그의 아들 이항구도 남작 작위를 받아, 조선인으로는 드물게 부자(父子) 귀족이 되었습니다.

1924년에는 이완용의 아들 이항구도 남작 작위를 받아, 조선인으로는 거의 드물게 부자 귀족이 되었습니다. 이완용과 핵심 친일파들 몇몇은 일제시대 내내 승승장구했던 반면, 다수의 귀족들과 나머지 양반들의 형편은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점점 비참해졌습니다. 이는 일제의 수탈과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토지 가치가 떨어지고 무위도식하는 생활이 이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1926

[총독부 중추원 회의 참석 후 병세 악화]

조선 총독부 신축 청사에서 열린 중추원 신년 첫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무리한 참석이 그의 병세를 결정적으로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26년 1월 12일 오전 10시, 이완용은 총독부에서 열린 중추원 신년 제1회 회의에 다소 무리를 해 참석하게 됩니다. 조선 총독부는 그해 1월 1일 경복궁 안에 신축한 청사로 이전해 있었으며, 조선 귀족 등록관청인 중추원도 새 청사 한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완용은 새 청사에서 열린 새해 첫 회의인데다 사이토 마코토 총독도 참석한다고 해서 무리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이 그의 병을 결정적으로 악화시키고 말았습니다.

[이완용 사망]

1909년 이재명 의사의 암살 미수 사건 때 입은 폐 상처 후유증으로, 폐렴과 해소 합병증으로 옥인동 집에서 향년 69세로 사망했습니다.

1909년 이재명의 암살 미수 사건 때 폐에 상처를 입은 뒤로 이완용은 매년 겨울철만 되면 해소(咳嗽)와 천식, 폐렴과 흉통 등으로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런 증상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심해졌고, 1926년 1월 중추원 회의 참석 후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결국 1926년 2월 11일 오후 1시 20분, 그는 옛 주인이 보낸 적포도주를 입에 대보지도 못한 채 일본인 의학 박사 두 명과 조선인 주치의, 그리고 그의 의붓형 이윤용과 차남 이항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옥인동 집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향년 69세였습니다.

[대훈위 국화대수장 수여]

사망 다음 날, 매국친일의 대가로 일본 황실로부터 '대훈위 국화대수장'을 받았습니다.

1926년 2월 12일, 이완용은 사망 다음 날 매국친일의 대가로 일본 황실로부터 '대훈위 국화대수장'을 받았습니다. 국화대수장은 일본 황실이 현재도 수여하고 있는 최고 훈장 중 하나로, 역대 한국인 수훈자 중 왕족 3명을 제외하면 이완용이 유일합니다. 그의 장례식은 일본인, 조선인 합쳐 50명의 장례위원들이 엄수했고, 일황이 하사한 장례 깃발을 앞세워 호화로운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1979

[후손들에 의해 묘 파묘 및 유골 화장]

이완용의 묘소는 해방 이후 지속적인 훼손과 방치에 시달리다가, 직계 후손들이 결국 파묘하여 유골을 화장했습니다.

이완용은 전라북도 익산군 낭산면 낭산리의 산에 묻혔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매국 행동에 대한 앙갚음으로 묘소 훼손이 두려워 궁벽한 벽지를 택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해방 이전에도 훼묘 사건이 종종 있어 일본 순사가 묘를 지켰고, 해방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훼묘 사건이 끊이지 않아 급기야 1979년, 직계 후손들이 아예 파묘하여 그 유골은 화장했습니다. 그의 관 뚜껑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었으나 역사학자 이병도가 반대하여 불태워졌고, 이완용의 묘터는 이후 채석장으로 바뀌어 옛 흔적조차 사라져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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