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시경
언어학자, 국문학자, 독립운동가, 교육인, 학자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57:22
주시경은 조선말 개화기에 한국어와 한글을 과학적으로 연구한 선각자입니다. 그는 훈민정음에 '한글'이라는 이름을 부여하여 우리 글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보급했으며, 한국어 문법을 정립하고 현대 한글 체계를 구축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민족자주 사상으로 한글 대중화와 근대화에 헌신한 실천적 국어학자이자, 많은 후진을 양성하여 한국어 연구의 맥을 이은 교육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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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
1876년 12월 22일(음력 11월 7일) 황해도 봉산군 무릉골에서 서당 훈장 주학원과 연안 이씨의 4남 2녀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상주 주씨 시조 주이의 17세손이며, 어린 시절 이름은 상호이고 관명은 시경이다. 할아버지 방렬 대에 황해도 평산군 차돌개에 살았고, 아버지 대에 봉산군 무릉골로 옮겼다. 정승 주세붕의 후예이다.
1887
1887년, 12세에 서울 남대문 안 시장에서 해륙물산객주업을 하는 둘째 백부 주학만(周鶴萬)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1887년, 수박다리에 사는 진사 이희종의 글방에서 한학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1892
[한국어 연구 시작]
진사 이희종에게 시전(詩傳)을 배우던 중 한문을 한국어로 풀이하는 과정에 의문을 품고 한국어 해석의 가능성을 모색하며 한국어 연구에 뜻을 세웠다.
1892년, 진사 이희종에게 시전을 배우던 중 한문을 한국어로 풀이하는 과정에 의문을 품고 한국어로 해석하기의 가능성을 모색하며 한국어 연구에 뜻을 세웠다.
1893
1893년, 배재학당의 강사 박세양과 정인덕을 찾아 산술과 만국지지(역사, 지리)를 배웠다.
1894
1894년, 배재학당의 특별과인 만국지지과에 입학하였다.
1895
1895년, 탁지부 관비생으로 선발되어 제물포에 있는 이운 학교 속성과에 입학하여 항해술을 배웠다.
1896
[국문 동식회 조직 및 독립신문 활동]
배재학당에 다시 입학하여 활판소에서 잡역을 하며 공부했다. 독립신문사의 회계 겸 교정원, 총무로 일하며 학비를 벌었으며, 학당 내 활판소, 독립신문사, 협성회의 동지들을 모아 '국문 동식회'를 조직했다.
1896년, 배재학당에 다시 입학하여 학당 안에 있는 활판소에서 잡역을 하며 공부를 했다. 독립신문사의 회계 겸 교정원으로, 또는 총무로 일하면서 학비를 벌었다. 또한 배재 학당 내 활판소와 독립신문사 및 협성회의 동지들을 모아 '국문 동식회'를 조직하였다. 이 모임의 목적은 국문 동식법(맞춤법)을 연구하고 국문 전용을 권장하며 국어사전을 편찬하고 국어 문법을 연구하는 일이었다.
1896년, 배재학당의 학생회인 협성회의 찬술원 및 사적으로 피선되어 '협성회보'를 편집하게 된다.
1896년, 김명훈과 결혼하여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1897
1897년, 독립협회 임원으로 피선되었다.
1898
1898년, 국어 문법의 연구에 필요한 추가 공부를 위해 영어 문법을 연구하기로 하고 배재학당 보통과에 입학하였다.
1898년 6월, 배재학당 만국지지 특별과를 졸업하였다. 이와 함께 독립신문사의 총무직을 사임하였다.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투옥 및 석방]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이승만, 서상대, 이동녕, 양기탁 등과 함께 감옥에 투옥되었으나, 황제의 특사령으로 11월에 석방되었다.
1898년,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이승만, 서상대, 이동녕, 양기탁 등과 함께 감옥에 투옥되었다. 황제의 특사령으로 11월에 석방되었다.
1898년 12월 31일, '대한국어문법'의 원고본 집필을 완료했다.
1899
1899년, 남대문 안에 있는 제국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로 활동했다.
1900
[한국 최초 근대 국어 문법 교육]
상동교회 부설 상동 청년 학원(야학)에 국어문법과를 부설하여, 한국에서 최초로 국어 문법이 근대 교육의 한 과목이 되었다. 이 당시 교재는 '대한 국어 문법' 원고본이었다.
1900년 2월 15일, 상동교회 부설 상동 청년 학원(야학)에 국어문법과를 부설했다. 이 날은 한국에서 최초로 국어 문법이 근대 교육의 한 과목이 된 날이다. 이 당시 교재는 '대한 국어 문법' 원고본이었다.
[배재학당 졸업 및 감리교 입교]
배재학당 보통과를 졸업하고 졸업 예배 식전에서 아펜젤러 목사의 집례로 세례를 받고 감리교에 입교했다.
1900년 6월, 배재학당 보통과를 졸업했다. 졸업 예배 식전에서 아펜젤러 목사의 집례로 세례를 받고 감리교에 입교했다.
1901
1901년부터 1905년까지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활동을 했다.
1906
1906년, 수진동 흥화학교 측량과(야간 속성과)를 졸업하였다.
1906년, 서우 학회 협찬원으로 근무했다.
1906년, 창동에 있는 학교 '정리사'에 입학하여 수학과 물리학을 배웠다.
1906년, 이화 학당 사무원으로 근무했다.
1906년, '대한 국어 문법' 목각 인쇄본을 출간하였다.
1907
1907년, 지석영이 만든 국어연구회의 회원으로 4개월간 활동하였다.
[국문 연구소 주임위원 임명]
학부(지금의 교육부) 내의 국문 연구소 주임위원으로 임명되어 3년 동안 국문연구안을 작성, 제출, 토의했다.
1907년 7월, 학부(지금의 교육부) 내의 국문 연구소 주임위원으로 임명되어 3년 동안 국문연구안을 작성·제출·토의했다.
1908
1908년, '국어 문전 음학'을 출간하였다.
1908년부터 1910년까지 상동청년학원 안에 개설된 하기국어강습소의 졸업생과 유지들을 규합하여 국어연구학회를 조직했다.
1909
1909년, 캐나다 개신교 선교사 J.S.게일, 다카하시 도루 등과 더불어 한어연구회를 조직했다.
1911
[국어연구학회, 조선언문회로 개명]
국어연구학회 이름이 조선언문회(배달말글몯음)로 개명되었으며, 국어강습소는 조선어강습원으로 개칭되었다.
1911년, 학회 이름이 국어연구학회에서 조선언문회(배달말글몯음)로 개명되었다. 그리고 국어강습소는 조선어강습원으로 개칭되었다.
1913
['한글' 명칭 최초 사용 제안]
홀대 받던 우리글 훈민정음을 '으뜸가는 글, 하나 밖에 없는 글'이란 뜻을 지닌 '한글'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부를 것을 제안하여 사용하게 하였고, 1913년 어린이 잡지 <아이들 보이>에 글을 쓰면서 이 이름을 최초로 사용했다.
주시경 선생은 홀대 받던 우리글 훈민정음을 '으뜸가는 글, 하나 밖에 없는 글'이란 뜻을 지닌 '한글'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부를 것을 제안하여 사용하게 하였다. 1910년대 초 주시경 선생을 비롯한 한글학자들이 쓰기 시작했으며, 특히 1913년 간행된 어린이 잡지 《아이들 보이》의 끝에 제목으로 '한글'이라 한 것이 최초의 명확한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이 명칭은 1928년 조선어학회가 '한글날'로 고쳐 부르면서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졌다.
1913년, 학회의 이름이 한글모로 다시 개명되었다.
1914
1914년, 조선어강습원의 이름이 한글배곧으로 다시 개칭되었다.
[주시경 선생 별세]
39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그는 "나무가 자라는 것은 하늘이 하는 일이요, 그 나무를 가꾸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우리말을 다듬어서 바르게 말하고 적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1914년 7월 27일, 39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그는 생전에 "나무가 자라는 것은 하늘이 하는 일이요, 그 나무를 가꾸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우리말을 다듬어서 바르게 말하고 적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1980
정부에서는 주시경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