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군란
군란, 정치 변동, 조선 개화기 사건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49:18
1882년 구식 군인들의 봉급 체불과 불량미 지급으로 시작된 무장 폭동입니다. 민씨 정권의 개화 정책에 대한 불만과 흥선대원군의 재집권 시도가 얽히며 조선의 내정은 혼란에 빠졌고, 일본 공사관 습격 등 국제 문제로 비화했습니다. 결국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을 초래하며 조선의 운명을 크게 바꾼 중요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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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
[흥선대원군 실각]
흥선대원군이 탄핵 등으로 권력을 잃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서구 세력의 위협에 대한 백성들의 쇄국 요구와 척화파들과의 소통을 통해 영향력을 유지했습니다.
1873년, 흥선대원군은 탄핵 등으로 세력을 잃고 지위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점점 증가하는 서구 세력의 위협으로 백성들의 민심은 아직 쇄국에 머물러 있었고 흥선대원군 역시 최익현 등 척화파들과 계속 소통하면서 아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운요호 사건 이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며 조선은 쇄국을 버리고 개국, 개화로 향하게 됐다.
1881
[별기군 창설 및 구식 군인 차별]
민씨 정권이 자기 정권 기반을 다지기 위해 일본의 후원으로 신식군대 '별기군'을 창설했습니다. 반면 기존의 구식 군대였던 훈련도감 등 5영은 2영으로 축소되고 대량 해고와 봉급 지급 지연 등 차별 대우를 받았습니다.
민씨 정권은 아직 확고하지 않은 자기 정권 기반을 다지기 위해 내외로 자기 척족들과 개화파 관료들을 대거 기용하는 한편, 일본의 후원으로 신식군대 ‘별기군’을 창설했다. 총책임자는 민영환의 부친, 민겸호 대감이었다. 종래의 훈련도감·용호·금위·어영·총융 5영을 무위영, 장어영 2영으로 축소하면서 대량 해고 시키고 봉급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등, 민씨 척족들의 사병과 다름없는 별기군과 달리 차별했다. 훈련도감 출신 구식 군인들은 당시 일본군을 모델로 신설된 별기군을 ‘왜별기’라 낮춰 부르며 증오했다.
1882
[불량미 지급으로 임오군란 발발]
13개월 동안 체불된 임금 중 1개월분을 썩은 쌀과 모래, 겨를 섞어 지급받은 구식 군인들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정당한 항의에도 담당관이 강압적으로 나오자 격분한 병졸들이 선혜청 당상 민겸호를 비롯한 민씨 척족의 비리에 분노하며 소요를 확대시켰습니다. 이는 '도봉소 사건'으로 불리며 임오군란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전라도에서 세곡선이 쌀을 싣고 도착했다. 대동법 실시 이후 정부 예산을 집행해온 선혜청은 도봉소에서 무위영 소속 옛 훈련도감 군병들에게 밀린 봉급 중 1개월분의 급료만 우선 지불했다. 그나마도 썩은 쌀에다 모래하고 겨를 잔뜩 섞어 지급하자 병졸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이다. 정당한 그들의 항의에 지급 담당관이 선혜청 당상 민겸호만 믿고 적반하장 식의 강압적으로 나오자, 격분한 병졸들이 마침내 소요를 일으킨 것이다. 옛 훈련도감 포수 김춘영·유복만·정의길·강명준·홍만복 등을 필두로 한 군병들은 선혜청 창고지기와 무위영 영관에게 돌을 던지고 몰매를 때렸으며 도봉소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선혜청 당상 민겸호는 곧 체포령을 내려 주동자 네다섯을 포도청에 넘겼다. 그들은 혹독한 문초를 당했고 그 중 둘은 곧 사형되리라는 소문이 퍼졌다.
[흥선대원군, 청에 의해 톈진으로 압송]
청나라의 북양함대가 조선에 도착하고 회군 대장 오장경이 남양만에 상륙했습니다. 오장경은 흥선대원군을 초청해 억류한 뒤 톈진으로 압송했고, 대원군은 10년 만에 재집권에 성공한 지 33일 만에 다시 권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후 청국군은 난 가담자들을 진압했습니다.
북양수사 대리 정여창이 북양함대의 함선 3척에 병력 4~500명과 이홍장의 사신 자격으로 마건충을 싣고 1차로 제물포에 도착했다. 같은 날 이홍장의 참모 설목상이 제안하고 장수성, 그리고 영선사 김윤식의 찬성으로 흥선대원군 납치안이 채택됐다. 회군 대장 오장경이 정여창의 배를 타고 영선사 김윤식을 대동해 회군 3천 명으로 남양만(현 경기도 화성시)에 상륙했다. 한양에 입성한 오장경은 흥선대원군을 초청해 불러놓고는 억류시켰다. 그리고는 그대로 톈진으로 배에 태워 보냈다. 왕십리동과 이태원 일대에 주둔하던 난 가담자들은 청국군의 공격을 받아 170여 명이 체포되고 11명이 사형됐다.
[민씨 외척, 청에 군사 원조 요청]
군란 발발 이후 명성황후가 피난하고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는 등 사태가 격화되자, 당시 영선사로 청나라에 체류 중이던 김윤식, 어윤중 등은 급보를 보내 청나라에 군사 원조를 요청했습니다. 이는 청나라의 조선 내정 간섭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민씨 외척들은 당시 영선사로 청나라에 체류 중이던 김윤식, 어윤중 등에게 급보를 보내 청에 원조를 요청했다. 요청은 8월 2일 수신되었다. 주일 청국 공사 여서창이 '일본 병선이 조선으로 가니 중국 병선을 앞서 파견해야 한다'는 내용을 본국에 타전함에 따라 이튿날 북양대신 이홍장의 직무대리 장수성이 북양함대 제독 정여창에게 출동을 명령했다. 장수성은 오장경에게 덩저우의 회군 3천 명을 조선에 파병토록 지시했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
청나라와 조선 사이에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 체결되었습니다. 이는 청국 상인의 통상 특권을 규정하고, 청의 북양 대신과 조선 국왕을 동격으로 놓는 등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명문화하여 청의 내정 간섭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임오군란의 결과, 청과 결탁한 민씨 정권이 정권 유지를 위해 더욱 청에 의존하면서 청의 내정 간섭이 심화됐다. 청나라는 원세개의 군대를 조선에 상주시키고 군사 고문을 보내 조선 군대를 감시하고, 마젠창과 묄렌도르프를 내정 및 재정 고문으로 파견해 내정과 외교에 깊이 간섭했다. 특히 8월 23일〈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체결로 청국 상인의 통상 특권을 규정하고, 청의 북양 대신과 조선 국왕을 동격으로 놓는 등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명문화했다(속방조관).
[조선과 일본, 제물포 조약 체결]
조선 정부와 일본 제국은 '제물포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 조약은 임오군란 당시 일본인 사상자 및 공사관 등 일본 재산에 대한 손해배상을 주 내용으로 하여, 조선 반도가 청일 양국 세력의 각축장으로 전락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임오군란의 결과, 8월 30일 임오군란 때 일본인 사상자 및 공사관 등 일본 재산에 대한 손해배상을 주 내용으로 하는 제물포 조약 및 조·일수호조규속약이 체결돼 조선 반도는 청일 양국 세력의 각축장으로 전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