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정부
정부, 대한민국, 대통령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49:50
- 제6공화국의 세 번째 정부로, 36년 만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며 출범했습니다. - IMF 외환 위기를 조기 극복하고,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본격화했습니다. - 남북 화해 협력 정책을 추진,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 개최 및 6.15 공동선언을 발표했습니다. - IT 벤처기업 육성에 힘써 정보화 강국 도약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 여성부, 국가인권위원회 신설 등 사회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 최규선 게이트, 아들 비리, 카드대란 등 각종 비판과 논란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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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제15대 대통령 선거 김대중 당선]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 단일 후보로 나선 김대중이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며 대한민국 제2공화국 이후 36년 만에 여야 정권 교체의 역사적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이 단일 후보로 내세운 김대중이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승리함으로써 대한민국 제2공화국 이후 36년만에 여야 정권 교체를 이루어냈다.
1998
[IT 벤처기업 육성 정책 본격화]
IMF 사태로 침체된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벤처특별법' 4차 개정 등 IT 벤처기업 육성 정책이 본격화되었습니다. 이는 창업 문턱을 낮추고 대규모 지원 자금을 마련하여 정보화 강국 도약의 토대를 놓았습니다.
IMF 사태로 침체에 빠진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하여 국민의 정부는 정보 기술(IT) 관련 벤처기업을 육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이 당시 벤처 기업 활성화 대책으로 9천억 원 정도의 지원 자금이 마련되고 새로 창업하는 벤처기업에 3억 원을 지원하는 등의 정책을 발표하였으며 1998년 ‘벤처특별법’ 4차 개정을 통해 실험실 및 교수창업을 가능하게 하였다. 또한 창업 자본을 2000만 원으로 낮춰 창업의 문턱을 낮추었다. 2000년에는‘벤처촉진지구’를 도입해 지방 벤처기업 육성정책을 펼치며 조세감면을 통한 창업 활성화 마련과 벤처기업의 경영환경 개선을 위한 정책도 마련하였고 9차 개정에서는 스톡옵션제를 확산시켰다. 2002년 '벤처 건전화 방안'에선 M&A활성화 정책을 구축했다. 이 밖에도 코스닥시장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정책과 시장환경 개선을 위한 다양한 정책도 마련했다. 이러한 지원의 결과 1998년 말에는 2000개 회사에 불과했던 IT 관련 기업의 숫자가 2001년 6월에는 1만개 사를 기록하였고, 벤처 기업의 생산 비중은 대한민국 GDP의 3%에 달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벤처기업에 대한 지원이 계속되면서, “벤처 대박”신화에 휩쓸린 투자자들이 일확천금을 꿈꾸고 과도한 투자를 하게 되어, 후반기에는 거품이 생기게 된다. 이후 윤태식 사건 등의 벤처 산업과 관련된 비리가 발생하였고, 2000년 봄 이후 새롬기술 사태 등으로 인해 거품이 붕괴하고 권노갑 등의 거물 정치가와 벤처기업의 유착이 밝혀지면서 벤처 산업은 사양길을 걸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벤처기업 우대 정책의 부작용을 보여주었다.
[김대중 정부 출범 (국민의 정부 시작)]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공식 명칭 '국민의 정부'가 출범했습니다. 이는 새 정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강조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998년 2월 25일에 김대중의 취임과 함께 출범했다. 국민의 정부는 김대중 정부의 공식 명칭으로, 새 정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뜻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채택되었다. 김대중 정부는 외환 위기 극복과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 병행 발전을 천명하였다. 이를 위하여 국정 전반의 개혁, 경제난의 극복, 국민 화합 실현, 법과 질서 수호 등을 국가적 과제로 제시했다.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본격화하였으며 외환위기를 극복하였고, 남북 화해 협력 정책을 추진하여 남북 교류를 크게 활성화시켰다. 임기 중에 발생한 최규선 게이트 사건, 윤태식 게이트 사건, 옷로비 사건, 새롬기술 사태, 이용호 게이트 등 각종 비리 사건과 특히 신용카드 정책, 부동산 정책, 대북정책, IT 벤처기업 육성 정책 등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김대중의 장남인 김홍일이 이권과 관련된 로비에서 1억 5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것을 비롯해 차남 김홍업과 3남 김홍걸까지 세 아들이 구속되어 결국 대국민사과를 하였다. 또한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던 최규선이 각종 이권에 개입한 혐의로 구속된 최규선 게이트가 발생했다.
[김대중 정부의 정부조직법 공포]
김대중 정부의 정부조직법이 대폭 개정되어 공포되었습니다. 이는 새 정부의 국정 운영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법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대폭 개정된 김대중 정부의 정부조직법이 2월 28일 전격 공포되었다.
[김종필 총리 인준안 표결 중지]
여야 간 갈등으로 김종필 국무총리 인준안 표결이 국회에서 중지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김대중 정부의 초기 내각 출범에 진통이 있었습니다.
여야는 3월 2일 국무총리인준표결에 합의하였으나, 3월 2일 국회에서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과 야당인 한나라당간에 갈등이 발생하여 김종필 국무총리 인준안이 표결 도중 중지되었다.
[김종필 총리서리 임명 및 조각 완료]
국무총리 인준 문제로 난항을 겪던 김대중 정부는 김종필을 총리서리로 임명하고, 17부 장관에 대한 조각을 완료하며 내각을 출범시켰습니다.
김대중은 3월 3일 김종필을 총리서리로 임명하고, 김영삼 정부의 국무총리인 고건 국무총리의 제청을 받아 17부 장관에 대한 조각을 완료한다.
[주양자 보건복지부 장관 사퇴]
주양자 보건복지부 장관이 각종 부정 의혹으로 인해 사퇴했습니다. 이는 김대중 정부 초기 인사의 문제점을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1998년 4월 주양자 보건복지부 장관이 각종 부정 의혹으로 인하여 사퇴하였다.
[외교부 장관 경질 (한러관계 문제)]
러시아 외교관 추방 등으로 인한 한러 관계 문제로 외교부 장관이 경질되고, 후임에 홍순영 전 외교부 차관이 임명되었습니다. 이는 외교 정책의 변화를 보여주었습니다.
1998년 8월 러시아 외교관 추방 등으로 인한 한러관계 문제로 인하여 외교부 장관이 경질되고, 후임에 홍순영 전 외교부 차관이 임명되었다.
[한일어업협정 재체결 및 독도 영유권 논란]
1998년 11월 한일어업협정이 다시 체결되었으나, 독도가 한일 배타적 경제수역 안에 놓이게 되면서 독도의 영유권이 침해당했다는 논란이 일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어업 수역과 영유권은 무관하다며 헌법소원을 기각했지만, 중간수역 설정은 일본의 독도 강탈 시도에 빌미를 준다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1998년 11월 한일어업협정이 다시 체결되었다. 그 결과 독도가 한일 배타적 경제 수역 안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대해 독도의 영유권이 침해당했다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심판이 청구되었는데, 헌법재판소는 어업을 위해 양국이 정한 수역과 섬의 영유권 내지는 영해 문제는 서로 관련이 없다 하여 이를 기각했다. 독도를 대한민국의 영토인데도 이를 중간수역으로 설정하면서 일본의 독도강탈 시도를 그대로 받아 들였다는 주장이 있다. 제성호 교수는 이런 중간수역은 일종의 '분쟁수역'이라고 평했다. 독도를 한일중간수역에 놓이게 한 신 한일어업협정을 수정해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 최낙정 전 해양수산부 장관은 "실효성이 없다"고 일축했다. 협상을 다시 한다고 해도 일본이 독도를 우리 땅으로 인정해주지도 않을 것이고, 또 다른 마찰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실효성이 없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신 한일어업협정은 김영삼 정부 때부터 5년 간 진행되다 김대중 정부 들어 마무리 된 것"으로 "독도 영유권을 훼손했다고 보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최낙정 전 장관은 또, 독도가 배타적 경제수역이 아닌 한일중간수역에 놓인 것이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빌미를 준 것 아니냐는 질의에 "어업협정은 영토 영유권 문제와는 무관하다"고 설명했다. 최 전 장관은 "신 한일어업협정 조문에서 이 협정은 영유권에는 전혀 영향이 없다고 밝히고 있고, 헌법재판소나 국제사법재판소 역시 어업협정은 어업 문제에만 국한됨을 판시했다"고 덧붙였다.
[금강산 관광 개시]
남북 화해 협력 정책의 일환으로 역사적인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남북 교류 활성화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1998년 11월 18일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었다.
[배순훈 정보통신부 장관 경질]
배순훈 정보통신부 장관이 경질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급변하는 정보통신 산업 환경 속에서 정책 방향에 대한 고민을 보여주었습니다.
1998년 12월 배순훈 정보통신부 장관이 경질되었다.
1999
[국민연금 전 국민 적용 확대]
1999년, 국민연금 적용 대상이 전 국민으로 확대되며 사회보장 시스템이 강화되었습니다. 이는 모든 국민의 노후 소득 보장을 위한 중요한 복지 개혁이었습니다.
1999년 국민연금 적용대상이 전국민으로 확대되었다.
[대전 법조 비리 사건 발생]
대전 지역에서 법조계 인사들의 비리가 드러나는 '대전 법조 비리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사법 시스템에 대한 국민적 불신을 야기했습니다.
1999년 1월 대전 법조 비리 사건이 있었다.
[복제소 '영롱이' 탄생]
스타 과학자 황우석 교수가 복제소 '영롱이'를 탄생시켰습니다. 이 성과는 한국 생명과학 기술의 발전을 대내외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99년 2월 복제소 ‘영롱이’를 만들어낸 스타과학자 황우석 교수.
[김정길 행정자치부 장관 이동 및 후임 임명]
김정길 행정자치부 장관이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으로 이동하고, 김기재 전 의원이 행정자치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는 김대중 정부의 첫 주요 인사이동 중 하나였습니다.
1999년 2월 김정길 행정자치부 장관이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으로 이동하고, 행정자치부 장관에 김기재 전 의원이 임명되었다.
[서정욱 과학기술부 장관 임명]
서정욱이 과학기술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는 과학기술 분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정부의 기조를 보여주었습니다.
1999년 3월 과학기술부 장관에 서정욱이 임명되었다.
[정상천 해양수산부 장관 임명]
정상천이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해양 자원 및 수산업 발전에 대한 정부의 의지를 나타내는 인사였습니다.
1999년 3월 해양수산부 장관에 정상천이 임명되었다.
[옷로비 사건 발생 및 특검 도입]
신동아그룹 회장 부인이 남편 구명을 위해 고위급 인사에게 고가의 옷 로비를 했다는 '옷로비 사건'이 터졌습니다. 이 사건 수사를 위해 대한민국 사상 처음으로 특별검사제도가 도입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5월 신동아그룹 회장의 부인이 남편 구명을 위해 고위급 인사에게 고가의 옷 로비를 한 옷로비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의 수사를 위해 대한민국 사상 처음으로 특별검사제도가 도입되었다.
[국민의 정부 제1차 개각 단행]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이후 첫 번째로 11부 장관을 경질하는 대폭 개각을 단행했습니다. 강봉균 재경부 장관, 조성태 국방부 장관 등이 임명되며 국정 동력을 재정비했습니다.
1999년 5월 24일 김대중은 11부 장관을 경질하는 대폭 개각을 단행한다. 취임 이후 첫번째로 이뤄진 개각이었다. 재경부장관에 강봉균 경제수석비서관이, 국방부 장관에 조성태, 문화관광부 장관에 박지원, 보건복지부 장관에 차흥봉이 임명되었다.
[김태정 법무부 장관 경질 (옷로비 사건)]
김태정 법무부 장관이 '옷로비 사건'으로 인해 경질되고, 김정길 청와대 수석이 후임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는 고위 공직자의 윤리 문제에 대한 정부의 엄정한 입장을 보여주었습니다.
1999년 6월 김태정 법무부 장관이 옷로비 사건으로 인하여 경질되었다. 후임에 김정길 청와대 수석이 임명되었다.
[제1연평해전 발발]
서해상에서 북한 경비정과의 충돌로 제1연평해전이 발발했습니다. 이는 햇볕정책 추진 중 발생한 군사적 긴장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6월 제1연평해전이 있었다.
[손숙 환경부 장관 경질 (공연 논란)]
손숙 환경부 장관이 공연 논란으로 인해 경질되었습니다. 이는 공직자에게 요구되는 높은 도덕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99년 6월 손숙 환경부 장관이 공연 논란으로 인하여 경질되었다.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 참사]
경기도 화성의 씨랜드 청소년수련원에서 발생한 대형 화재로 많은 어린이가 희생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청소년 시설의 안전 관리 부실과 부패 문제를 드러내며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6월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 사건이 있었다.
[재외동포법 제정 및 시행]
IMF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재외동포의 동참을 유도하고 거주국 정착을 돕기 위해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재외동포법)이 최초로 제정되어 시행되었습니다. 이 법은 이후 복수국적 허용 등 논란 속에서 변화를 겪었습니다.
1999년 9월 최초로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 (약칭 재외동포법)을 제정하여 시행하게 된다. 재외동포의 경제회생 동참 및 거주국 정착 유도, 애로사항 선별 수용을 위한 법률 입안이었다. 재외동포법은 제정·시행 이후에도 논란의 대상이었고, 1999년 12월에 법률이 시행된 이후로 2013년 1월 1일부터 복수국적을 제한적이나마 허용하게 된다. 법률이 시행되는 동안에 대한민국 국적을 이탈·상실하여 외국국적동포가 된 경우가 다수 발생하면서 또다시 사회적 논란에 휩싸이기도 한다.
[인현동 호프집 화재 참사]
인천에서 발생한 '인현동 호프집 화재 참사'로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이는 청소년 출입 유해 시설의 안전 관리 부실을 여실히 보여주며 사회에 큰 경종을 울렸습니다.
10월 인현동 호프집 화재 참사가 있었다.
[대한항공 1533편 활주로 이탈 사고]
대한항공 1533편이 포항 공항 활주로를 이탈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으나, 항공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 사건이었습니다.
10월 대한항공 1533편 활주로 이탈 사고가 발생했다.
[임동원 통일부 장관 이동 및 후임 임명]
임동원 통일부 장관이 국가정보원장으로 이동하고, 박재규 경남대학교 총장이 후임 통일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는 대북 정책 추진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인사이동이었습니다.
1999년 12월 임동원 통일부 장관이 국가정보원장으로 이동 배치되었다. 후임에 박재규 경남대학교 총장이 임명되었다.
2000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도입]
최저생활을 보장하고 자립을 돕기 위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도입되었습니다. 이는 사회 안전망을 강화하고 복지 국가로 나아가는 중요한 발걸음이 되었습니다.
2000년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도입되었다.
2000년에 산마리노와 수교하였다.
[체세포 복제 한우 '진이' 탄생]
황우석 교수가 체세포 복제 한우 '진이'를 탄생시켰습니다. '진이'는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작명한 이름으로, 생명공학 분야에 대한 정부의 관심을 보여주었습니다.
2000년에는 황우석 교수가 체세포 핵 치환 체세포 복제 한우 '진이'를 탄생시켰는데, '진이'는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작명한 이름이었다.
[국민의 정부 제2차 개각 단행]
김대중 대통령은 박태준 의원을 국무총리로 임명하는 등 국무총리를 포함한 7부 장관에 대한 개각을 단행했습니다. 이는 새천년으로 넘어가는 시점에 국정 동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김대중은 2000년 1월 14일 국무총리를 포함에 7부 장관에 대한 개각을 단행한다. 국무총리에 박태준 의원이, 교육부장관에 문용린이, 행정자치부 장관에 최인기 전 내무부 차관이, 외교통상부 장관에 이정빈이 임명되었다.
[주한미군 한강 독극물 무단 방류 사건]
용산 미군 기지에서 미군무원이 독성을 가진 발암물질인 포름알데히드를 한강에 무단 방류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책임자 처벌 미비와 사법부 무시 논란으로 한국민의 반미 감정을 고조시켰습니다.
2000년 2월 용산 미군 기지 영안실에서 미군무원이 독성을 가진 발암물질인 포름알데히드를 한강에 무단방류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맥팔랜드에 대한 처벌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한민국 사법부에 대한 무시 행위로 대한민국 국민들의 반미감정을 고조시켰다.
[이상룡 노동부 장관 경질 및 후임 임명]
이상룡 노동부 장관이 경질되고, 최선정이 후임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는 노동 정책 방향의 변화를 모색하는 정부의 움직임을 보여주었습니다.
2000년 2월 이상룡 노동부 장관이 경질되고 후임에 최선정이 임명되었다.
[남궁석 정보통신부 장관 사퇴]
남궁석 정보통신부 장관이 총선 출마를 위해 사퇴했습니다. 이는 정치적 변화와 개인의 선택이 교차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2000년 2월 14일 남궁석 정보통신부 장관이 총선 출마를 위해 사퇴하였다.
[박태준 국무총리 사퇴 및 후임 지명]
박태준 국무총리가 부동산 문제로 사퇴하고, 이한동이 후임으로 지명되었습니다. 이는 고위 공직자의 도덕성 문제와 관련된 논란이 지속되었음을 보여줍니다.
2000년 5월 박태준 국무총리가 부동산 문제로 인하여 사퇴하였다. 후임에 이한동이 지명되었다.
[이한동 국무총리 취임]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 이한동이 국무총리에 취임했습니다. 이는 투명한 인사 검증 절차가 자리 잡는 과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이한동은 서리로 임명되었고,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 6월 국무총리에 취임한다.
[최초의 남북 정상 회담 개최 및 6.15 공동 선언]
국민의 정부의 햇볕정책 추진 결과, 분단 역사상 최초로 남북 정상 회담이 개최되었습니다. 이 회담에서 6.15 남북 공동 선언이 발표되어 남북 화해 협력의 새 시대를 열었습니다.
처음으로 남북 정상 회담이 이루어져 6·15 남북 공동선언이 발표되고 남북 이산 가족이 만나는 등 남북 간의 긴장 완화와 화해 협력이 진전되었다. 남북 정상 회담과 개성공단 설립 등의 가시적 성과는 있었지만 제1연평해전과 제2연평해전을 막지 못해 북한의 무력 도발을 막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현대가 북한에 7대 대북 사업권 구입을 위해 북한에 4억 5천만 달러를 송금한 대북 불법 송금사건 도중 정상회담 대가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져 후일 햇볕정책의 진정성과 투명성의 문제가 생기는 계기가 되었다.
[의약분업 시행 및 사회적 갈등]
의약분업이 시행되면서 약사, 의사, 시민단체 등 사회 각계에서 큰 갈등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보건의료 시스템 개혁의 중요한 전환점이었으나, 동시에 진통을 겪은 정책으로 평가됩니다.
2000년 8월 의약분업으로 인해 사회적 갈등이 발생했다.
[송자 교육부 장관 경질 및 후임 임명]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된 송자에 대해 비리 의혹이 제기되면서 경질되고, 이돈희 새교육공동체위원장이 후임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는 고위직 인사 검증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습니다.
2000년 8월 개각으로 교육부장관에 임명된 송자에 대하여 비리 의혹이 제기되었다. 김대중은 송자 교육부 장관을 경질하고 후임에 이돈희 새교육공동체위원장을 임명하였다.
[국민의 정부 제3차 개각 단행]
김대중 대통령은 교육부 장관을 포함한 8개 부처에 대한 개각을 단행했습니다. 진념 전 동력자원부 장관이 재정경제부 장관으로, 노무현 전 의원이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임명되는 등 주요 인사이동이 있었습니다.
2000년 8월 7일 김대중은 교육부 장관 등 8개 부처에 대한 개각을 단행한다. 재정경제부 장관에는 진념 전 동력자원부 장관이, 해양수산부 장관에는 노무현이 임명되었다.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 경질]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이 한빛은행 특혜대출 의혹사건으로 경질되고, 김한길이 후임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는 금융권 비리와 고위 공직자의 연루 의혹이 끊이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2000년 9월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이 한빛은행 특혜대출 의혹사건으로 인하여 경질되었다. 후임에 김한길이 임명되었다.
[2000년 서울 아셈(ASEM) 정상회의 개최]
아시아와 유럽 정상들이 서울에 모여 아시아-유럽 정상회의(ASEM)를 개최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이 국제 사회에서 외교적 위상을 높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2000년 10월 20일 2000년 서울 아시아·유럽 정상회의 개막.
2001
[황우석 교수 세종문화상 대통령상 수상]
황우석 교수가 복제소 '영롱이'와 '진이' 탄생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1년에 문화관광부로부터 세종문화상 대통령상을 수여받았습니다.
1999년 2월 복제소 ‘영롱이’를 만들어낸 스타과학자 황우석 교수에게 문화관광부는 2001년에 세종문화상 대통령상을 수여한다.
[국가인권위원회법 공포]
2001년에 국가인권위원회법이 공포되어 국가인권위원회의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습니다. 이로써 인권 보호 및 증진 활동에 대한 독립성과 전문성이 강화되었습니다.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법을 공포하였다.
[한미 정상회담 개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의 한미 정상회담이 열렸습니다. 대북정책에 대한 이견이 있었으나, 한국 정부의 대북정책 추진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확인하고 전통적 동맹 관계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기로 합의했습니다.
2001년 한.미 정상회담 이후 대북정책은 한국 정부가 추진하는 것과 전적으로 일치한다고 밝힌 바 있고, 전통적 동맹관계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며 남북문제에 대해서는 한국의 입장을 존중할 것임을 밝히기도 했다.
[여성부, 국가인권위원회 신설]
정부조직법 개편에 따라 여성의 인권 증진을 위한 여성부와 사회적 약자의 권리 보호를 위한 국가인권위원회가 신설되었습니다. 이는 사회 복지와 인권 분야의 중요한 진전으로 평가됩니다.
여성부와 국가인권위원회는 2001년 1월 29일 정부조직법 개편에 따라 신설되었다. 여성부는 여성의 인권을 크게 증진하였으며 또한 국가인권위원회는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를 지켜주었다. 2001년 1월 정부조직법 개정으로 인하여 부총리로 승격된 교육부장관에 한완상이, 신설된 여성부 장관에 한명숙이 임명되었다.
[최선정 보건복지부 장관 경질]
건강보험 재정 문제로 인해 최선정 보건복지부 장관이 경질되었습니다. 이는 보건 정책의 난맥상과 정부의 부담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2001년 3월 23일 건강보험 재정문제로 인하여 최선정 보건복지부 장관이 경질되었다.
[국민의 정부 제4차 개각 단행]
김대중 대통령은 통일부 장관, 외교부 장관 등 9부 장관을 경질하는 중폭 개각을 단행했습니다. 이근식 행정자치부 장관, 한승수 외교통상부 장관 등이 새로 임명되었습니다.
2001년 3월 26일 김대중은 통일부 장관, 외교부 장관 등 9부 장관을 경질하는 중폭 개각을 단행하였다. 행정자치부 장관에는 이근식 전 내무부 차관이, 외교통상부 장관에는 한승수 의원이, 국방부 장관에는 김동신 전 육군참모총장, 해양수산부 장관에는 정우택 자민련 의원, 과학기술부 장관에는 김영환 민주당 의원이 임명되었다.
[김정길 법무부 장관 경질 및 후임 임명]
김정길 법무부 장관이 경질되고, 안동수가 후임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는 정부의 법무 행정 운영에 대한 지속적인 논란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2001년 5월 21일 김정길 법무부 장관이 경질되고 후임에 안동수가 임명되었다.
[안동수 법무부 장관 3일 만에 경질]
안동수 법무부 장관이 '김대중 정권에 충성해야 한다'는 취임사 논란으로 임명된 지 단 3일 만에 경질되었습니다. 이는 고위 공직자의 정치적 중립성 요구가 높아졌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2001년 5월 24일 안동수 법무부 장관이 '김대중 정권에 충성해야 한다'는 취임사로 인하여 비판을 받으며 임명된 지 3일 만에 경질되었다.
[오장섭 건설교통부 장관 경질 및 후임 임명]
오장섭 건설교통부 장관이 경질되고, 김용채 자유민주연합 의원이 후임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는 여당 연합 내부의 인사이동과 정치적 상황을 반영했습니다.
2001년 8월 오장섭 건설교통부 장관이 경질되고 후임에 김용채 자유민주연합 의원이 임명되었다.
[이용호 게이트 사건 및 특검 실시]
이용호 회장의 주가조작 및 횡령 의혹이 불거지면서 '이용호 게이트 사건'이 발생했고, 특별검사가 실시되었습니다. 이는 권력형 비리 수사에 대한 정부의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용호 게이트 사건으로 특검 실시되었다.
[IMF 구제금융 조기 상환 및 외환위기 극복 선언]
국민의 정부는 당초 예상보다 3년을 앞당겨 IMF로부터 빌린 195억 달러의 지원자금을 전액 상환하며 대한민국이 IMF 관리체제에서 공식적으로 벗어났음을 선언했습니다. 이는 국민적 단합과 강도 높은 구조조정의 결과로 평가됩니다.
IMF로부터 구제 금융을 받는 대가로 근로기준법 개정에 따른 정리해고제 도입을 비롯한 강도 높은 기업 구조조정 실시를 요구받았고, 국제 수준의 기업 투명성 강화와 부채비율 축소정책을 추진하여 금융, 기업, 노동, 공공 4대분야에 일대 개혁을 단행했다. 그리하여 2001년 8월, 예상보다 3년을 앞당겨 IMF차입금을 전액 상환했다. 2001년 IMF에게 빌린 195억불을 전액 상환함으로써 4년여에 걸친 외환위기 사태는 막을 내렸다. 하지만 한국 전쟁 이래 최대 국난이라는 촌평답게 외환위기 사태 이후 한국 사회는 평생 직장 개념이 사라지고 명예퇴직으로 인해 수많은 중산층 가정이 몰락하는 일대 변혁을 가져오게 되었다.
[DJP 연합 붕괴 및 제5차 개각]
한나라당의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건의안에 자유민주연합이 찬성하며 'DJP 연합' 공동정권이 붕괴되었습니다. 이에 김대중 대통령은 자민련 소속 장관들을 경질하는 중폭 개각을 단행했습니다.
한나라당이 제출한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건의안에 자유민주연합이 찬성하면서 김대중-김종필 공동정권은 출범한 지 3년 6개월 만에 붕괴되었다. 이로 인하여 내각에 입각한 자민련 출신 의원들이 모두 경질되었다. 그러나, 자민련 의원을 겸하고 있는 국무총리 이한동은 김대중-김종필 공동정권 붕괴에도 불구하고 당의 입장과 관계없이 국무총리의 직을 계속 수행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이한동의 소속 정당인 자유민주연합은 이에 따라 이한동을 자민련에서 제명하였다. DJP 연합 붕괴에 따라 김대중은 9월 6일 자민련 소속으로 내각에 입각한 장관과 국회가 해임 건의한 임동원 통일부 장관을 경질하는 중폭 개각을 단행한다. 통일부 장관에 홍순영 주중국 대사가, 문화체육부 장관에 남궁진이, 노동부 장관에 유용태 민주당 의원이 임명되었다.
[안정남 건설교통부 장관 23일 만에 경질]
개각으로 임명된 안정남 건설교통부 장관이 각종 의혹으로 인해 23일 만에 경질되었습니다. 이는 고위직 인사에 대한 국민적 시선이 얼마나 엄격한지를 보여주었습니다.
2001년 9월 6일 개각으로 임명된 안정남 건설교통부 장관이 각종 의혹으로 인해 임명된 지 23일 만인 9월 27일 경질되었다.
2002
[동티모르, 아프가니스탄과 수교]
2002년, 대한민국은 신생 독립국인 동티모르 및 아프가니스탄과 수교를 맺으며 국제적 협력 관계를 확대했습니다.
동티모르, 아프가니스탄과 각 2002년에 수교하였다.
[국민의 정부 제6차 개각 단행]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이후 6번째 개각을 단행했습니다. 교육부총리에 이상주가 임명되는 등 8개 부처 장관을 교체하며 임기 말 국정 쇄신을 시도했습니다.
2002년 1월 29일 김대중은 취임 이후 6번째 개각을 단행하였다. 교육부총리에 이상주가 임명되는 등 8개 부처 장관을 경질하는 중폭 개각이 단행되었다.
[한승수 외교통상부 장관 경질 및 후임 임명]
한승수 외교통상부 장관이 경질되고, 최성홍 고려대학교 교수가 후임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는 외교 정책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려는 시도였습니다.
2002년 2월 한승수 외교통상부 장관이 경질되고 후임에 최성홍 고려대학교 교수가 임명되었다.
[진념 경제부총리 경질 및 후임 임명]
진념 경제부총리가 경질되고, 전윤철 전 기획예산처 장관이 후임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는 경제 정책의 주요 책임자가 교체되었음을 의미합니다.
2002년 4월 진념 경제부총리가 경질되고 후임에 전윤철 전 기획예산처 장관이 임명되었다.
[중국국제항공 129편 추락 사고]
부산 김해국제공항 인근에서 중국국제항공 129편 여객기가 추락하여 한국인 승객 110명이 사망하는 대형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이는 항공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고조시켰습니다.
2002년 4월 15일 중국국제항공 129편 추락 사고가 발생해서 한국인 승객 110명이 사망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성공적 개최]
대한민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2002년 FIFA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 역대 최대 규모의 국제 행사였으며, 온 국민의 열정과 단합을 이끌어냈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이 개최되었다. 2002년 월드컵 한일 공동 개최를 통해 한일관계 증진에 기여했다.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 발생]
주한 미군 훈련 중 부교 운반용 장갑차에 의해 여중생 두 명이 압사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불평등한 한미관계와 주한미군 주둔에 대한 국민적 공분을 일으켰습니다.
2002년 6월 13일 여중생인 신효순, 심미선이 주한 미군 미 보병 2사단 대대 전투훈련을 위해 이동 중인 부교 운반용 장갑차에 깔려 숨진 사건(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이 발생하였다.
[제2연평해전 발발]
2002년 한일 월드컵 기간 중 서해 연평도 해상에서 북한 경비정의 기습 공격으로 제2연평해전이 발발, 우리 해군 장병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이는 햇볕정책에 대한 비판을 증폭시킨 사건이었습니다.
2002년 6월 29일 서해에서 제2연평해전이 발생하였다.
[김대중 정부 제7차 개각 및 장상 총리서리 인준 부결]
김대중 대통령은 최규선 게이트와 세 아들의 비리 의혹 등으로 위기에 봉착하자 사상 최초로 여성 총리 후보로 장상 이화여대 총장을 지명하는 등 7번째 개각을 단행했습니다. 그러나 장상 후보는 국회 인준이 부결되며 사퇴했습니다.
김대중은 김홍업, 김홍걸 등 세 아들의 비리 및 최규선 게이트 등 각종 비리 의혹으로 인하여 정권 지지도가 크게 떨어지는 등 위기에 봉착하자 2002년 7월 취임 이후 7번째 개각을 단행하였다. 사상 최초로 여성 총리를 지명하고, 7개 부처 장관을 경질하는 중폭 개각이 단행되었다. 국무총리에 장상 이화여대 총장을, 국방부 장관에 이준 전 육군참모총장을 지명하였다. 그러나 장상 총리서리는 2002년 7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부동산 투기 의혹, 아들의 국적 포기 의혹, 위장 전입 등 각종 의혹이 제기되면서 국회 인준에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결국 야당인 한나라당과 자유민주연합이 반대하면서 국회는 장상 국무총리 인준안을 부결하였고, 장상 서리는 사퇴하였다.
[장대환 매일경제 사장 총리서리 인준 부결]
장상 국무총리 인준 부결 후, 김대중 대통령은 장대환 매일경제 사장을 신임 총리 후보로 지명했습니다. 그러나 장대환 후보 역시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위장 전입, 부동산 투기 등 의혹이 제기되며 인준이 부결되었습니다.
장상 국무총리 인준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자, 2002년 8월 김대중은 신임 총리에 장대환 매일경제 사장을 지명하고, 장대환을 총리서리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장대환의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위장 전입, 부동산 투기 등 각종 의혹이 제기되었고, 야당인 한나라당과 자유민주연합은 장대환 국무총리 인준안에 대하여 반대하였다. 결국 장대환 국무총리 인준안은 국회에서 부결되었고, 장대환 총리서리는 사퇴하였다.
[김석수 대법관 국무총리 임명]
연이은 총리 후보자 사퇴 후, 김대중 대통령은 김석수 대법관을 국무총리로 지명하고 국회 인준을 거쳐 임명했습니다. 이는 김대중 정부의 마지막 국무총리였습니다.
결국 김대중은 김석수 대법관을 국무총리로 지명하고, 총리서리에 임명하였다. 김석수는 2002년 10월 국회 인준을 거쳐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
[제1차 세계 한상대회 서울 개최]
재외동포재단 주관으로 제1차 세계 한상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고, 이때 '한상(韓商)'이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전 세계 한민족 경제인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초석이 되었습니다.
2002년 10월 8일 한상(韓商)이라는 단어를 처음 쓰기 시작하며 재외동포재단의 주관으로 제1차 세계 한상대회(World Korean Business Convention)를 서울에서 개최한다.
[김정길 법무부 장관 사퇴 및 후임 내정]
김정길 법무부 장관이 사퇴하고, 심상명이 후임으로 내정되었습니다. 이는 정부 말기에도 지속되는 인사이동을 보여주었습니다.
2002년 11월 김정길 법무부 장관이 사퇴하였다. 후임에 심상명이 내정되었다.
[제16대 대통령 선거 노무현 당선, 정권 재창출]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며, 김대중 정부에 이어 민주당이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습니다. 이는 국민의 정부의 주요 성과를 계승하는 동시에 새로운 시대를 예고했습니다.
2002년 12월 19일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제16대 대통령 후보 노무현이 당선 되었다. 이로써 정권 재창출에 성공으로 민주당은 위대한 승리의 분위기를 느꼈다.
2003
[1·25 인터넷 대란 발생]
대한민국 인터넷망 거의 대부분이 마비되는 전례 없는 '1·25 인터넷 대란'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정보통신 강국으로서의 한국 사회에 심각한 충격과 함께 보안 및 인프라의 중요성을 일깨웠습니다.
2003년 1월 25일 대한민국 거의 대부분의 인터넷 망이 마비된 1·25 인터넷 대란이 있었다.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발생]
21세기 대한민국 최악의 지하철 참사로 기록되는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가 발생하여 수많은 인명 피해를 냈습니다. 이 사건은 사회 전반의 안전 불감증과 재난 대응 시스템의 문제점을 드러냈습니다.
2003년 2월 18일 21세기 대한민국 최악의 지하철 참사인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가 발생했다.
[김대중 정부 (국민의 정부) 임기 종료]
1998년 2월 25일 출범했던 김대중 정부(국민의 정부)가 5년간의 임기를 마감했습니다. 이로써 IMF 외환 위기 극복, 남북 화해 협력 등 많은 성과와 함께 다양한 논란을 남긴 한 시대가 막을 내렸습니다.
2003년 2월 24일 국민의 정부의 임기가 만료되었다.
[노무현 정부 (참여 정부) 출범]
김대중 정부의 후임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 정부'가 공식 출범하며 새로운 시대의 막을 열었습니다. 이는 민주당의 연속 집권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2003년 2월 25일 후임 정부인 참여 정부(노무현 정부)가 출범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