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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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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장수, 무신, 재물신 + 카테고리

삼국지의 '무신(武神)'. 유비, 장비와 함께 천하를 도모한 충의의 아이콘.

홀로 적장 안량의 목을 벤 무력, 조조의 회유를 뿌리치고 유비에게 돌아간 의리, 형주를 진동시키고 '위진화하'의 공포를 선사한 정점, 그리고 동맹과 부하의 배신으로 맞이한 비극적 최후까지.

그의 삶은 위명 넘치는 장수를 넘어 사후 1800년간 황제의 반열(관성대제)에 올라 중화권 전역의 신이 되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연표

160

[난세에 태어난 영웅, 도망자가 되다]

하동군 해현(현재의 산시성)에서 태어났다.

의협심이 강했던 그는 고향에서 세력가를 죽이고 수배자가 되어, 고향을 떠나 북쪽의 탁군으로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다.

출생년도는 160년 혹은 162년경으로 추정되며 명확한 기록이 없습니다.

본명은 관장생(關長生) 또는 관숙(關淑)이었으나, 도망자 신세가 되며 '운장(雲長)'이라는 자를 쓰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184

[운명적 만남 '도원결의']

도망자 신세로 떠돌던 탁군에서, 훗날 황제가 될 유비(劉備)와 평생의 동지 장비(張飛)를 만난다.

세 사람은 한 이불을 덮고 자며 친형제처럼 끈끈하게 지냈으며, 이는 관우 평생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소설 <삼국지연의>는 이 만남을 복숭아밭에서 형제의 의를 맺는 '도원결의(桃園結義)'로 극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정사에는 없지만, 세 사람의 관계를 상징하는 전설로 남아있습니다.

[황건적의 난, 역사의 무대에 서다]

유비가 황건적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키자, 관우와 장비는 그의 곁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다.

이들은 유비를 호위하며 수많은 전투에서 용맹을 떨쳤고, 관우는 유비의 '1호 장수'이자 핵심 무장으로 자리매김했다.

196

[서주 공방전과 유비와의 이별]

유비가 서주(徐州)를 다스릴 때, 조조(曹操)의 공격을 받게 된다.

유비가 패배하고 뿔뿔이 흩어지자, 관우는 하비성에서 유비의 두 부인을 보호하며 끝까지 저항했다.

200

[조조의 포로가 되다]

조조군에 완전히 포위되자, 관우는 유비의 부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조조가 아닌 한나라 황제에게 항복한다'는 등의 조건을 내걸고 임시로 항복한다.

조조는 이 당당한 태도에 반해 그를 극진히 대우하며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려 했다.

[조조의 회유와 적토마]

조조는 관우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그에게 높은 벼슬(편장군)과 막대한 재물, 심지어 천하의 명마 '적토마'까지 선물했다.

관우는 다른 선물은 사양했으나, "이 말만 있으면 유비 형님의 소식을 들었을 때 하루 만에 달려갈 수 있다"며 적토마는 기쁘게 받았다.

적토마를 받고 기뻐하는 이 일화는 관우의 변치 않는 충성심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유명한 에피소드입니다. 조조는 이때 관우가 자신에게 남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고 합니다.

[백마 전투 안량의 목을 베다]

조조의 객장 시절, 원소(袁紹)의 맹장 안량(顔良)이 백마에서 조조군을 위협한다.

다른 장수들이 모두 쩔쩔매는 사이, 관우는 적진을 똑바로 쳐다보고는 홀로 말을 달려 수만 대군 속으로 돌진, 안량의 목을 베어 돌아왔다.

이 공으로 관우는 한수정후(漢壽亭侯)라 불리며 '후작'에 봉해진다.

이는 소설이 아닌 '정사'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정사'는 "관우가 멀리서 안량의 기치를 보고, 말을 채찍질해 수만 명의 병사들 사이로 돌진하여 안량을 찌르고 그 수급을 베어 돌아왔다"고 기록, 관우의 무력이 인간을 초월했음을 증명했습니다.

[연진 전투, 문추를 격파하다]

안량을 벤 직후, 원소의 또 다른 맹장 문추(文醜)가 연진에서 다시 조조군을 위협했다.

관우는 이 전투에서도 선봉에 서서 문추를 격퇴(연의에서는 참살)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조조군의 사기를 하늘을 찌르게 만들었다.

[충의의 화신 조조를 떠나다]

조조가 내린 온갖 황금과 미녀, 높은 벼슬(한수정후)에도 불구하고 관우의 마음은 유비를 향했다.

그는 안량과 문추의 목을 베어 조조에게 은혜를 갚은 뒤, 모든 재물을 봉인하고 "떠난다"는 편지 한 장만 남긴 채 유비가 있는 원소의 진영으로 떠났다.

소설 <삼국지연의>는 이 과정을 '오관참육장(五關斬六將)'과 '천리단기(千里單騎)'라는 이야기로 각색했습니다. 5개의 관문을 돌파하며 6명의 장수를 베는 이 전설은, 관우의 무력과 충의를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가 되었습니다.

201

[유비와 재회, 신야에 머물다]

천신만고 끝에 유비와 감격적으로 재회한 관우는, 유비를 따라 형주의 유표(劉表)에게 의탁하게 된다.

유표는 이들을 환대했지만 한편으로는 경계하여, 최전방인 신야(新野)에 주둔시켰다.

208

[장판파의 후퇴, 수군을 이끌다]

조조의 100만 대군이 남하하자, 유비는 백성들을 이끌고 피난길에 오른다.

이 과정에서 조조군에게 따라잡혀 장판파에서 대패하지만, 관우는 별동의 수군을 이끌고 한진(漢津)에서 합류하여 유비의 퇴로를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적벽대전, 조조를 격파하다]

유비는 손권(孫權)과 동맹을 맺고 적벽에서 조조의 대함대와 맞선다.

관우는 유비군 수군의 핵심 전력으로 참전하여 화공(火攻)으로 불타는 조조의 함대를 격파하는 데 큰 공을 세운다.

이 승리로 유비는 형주에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연의에서는 패주하는 조조를 화용도(華容道)에서 만나 의리 때문에 놓아주는 장면이 나오지만, 이는 조조를 살려줌으로써 천하삼분지계를 완성하려 한 제갈량의 계책으로 창작되었습니다.

209

[형주 4군 평정]

적벽대전 승리 후, 관우는 유비를 도와 형주 남부의 4개 군(무릉, 장사, 계양, 영릉)을 평정하는 데 앞장선다.

이 과정에서 관우는 장사 태수 한현을 격파하고 노장 황충(黃忠)을 얻는 공을 세운다.

연의에서는 이 과정에서 관우와 황충이 서로의 실력을 인정하며 명승부를 펼치는 장면이 인상 깊게 묘사됩니다.

211

[형주 총독이 되다]

유비가 익주(益州, 서천)를 공격하러 떠나면서, 관우에게 제갈량과 함께 형주(荊州) 전체의 방어를 맡긴다.

유비 세력의 '2인자'로서, 북쪽의 조조와 동쪽의 손권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시작되었다.

215

[일촉즉발의 외교전 '단도부회']

손권이 유비가 차지한 형주 땅을 돌려달라며 노숙(魯肅)을 보낸다.

노숙이 군대를 동원해 위협하자, 관우는 작은 배에 홀로 칼 한 자루만 들고 적진으로 건너가 담판을 벌였다.

관우의 기백에 눌린 노숙은 결국 물러났고, 이는 관우의 배짱을 상징하는 사건이 되었다.

정사와 연의의 묘사가 약간 다르지만, 관우가 적은 인원으로 적진에 들어가 외교 담판을 성공시킨 것은 동일합니다. 이 일로 유비와 손권은 형주 땅을 일부 나누는 것으로 합의합니다.

217

[동맹 파탄의 씨앗, 혼담 거절]

손권이 관우의 힘을 인정하고 그와 사돈을 맺고자 자신의 아들과 관우의 딸의 혼인을 제안한다.

하지만 관우는"호랑이의 딸을 어찌 개의 자식에게 보내겠느냐!"며 모욕적인 언사로 거절했다.

이 일로 손권은 관우에게 극심한 원한을 품게 된다.

218

[뼈를 깎는 치료]

전투 중 독화살을 맞은 관우는 팔에 독이 퍼져 뼈까지 썩어 들어갔다.

명의 화타(華佗)가 팔을 째고 뼈를 깎아내는 끔찍한 수술을 하는 동안, 관우는 태연히 마량과 바둑을 두며 술과 고기를 먹었다.

그의 초인적인 인내심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연의에서는 이 수술을 한 의사가 '화타'로 나오지만, 정사에서는 화타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고 '의사에게 명했다'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관우의 대담함을 보여주는 핵심 일화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219

[전장군 임명, 황충과의 갈등]

유비가 한중(漢中)을 차지하고 한중왕에 오르자, 관우를 '전장군(前將軍)'에 임명했다.

처음엔 자신과 동급으로 임명된 황충에 대해 "장군으로서 일개 늙은병사 따위와 같은 급에 설 수 없다"라며 모욕했으나, 비시의 설득을 듣고는 자신의 편협함을 깨닫고 직위를 받아들였다.

소설 연의에서는

황충 등용 당시 관우가 대등한 단기접전을 나누고 서로를 존경하고 인정한 바가 있어

설정충돌을 피하기 위해 관우가 무시하는 대상이 황충이 아닌 '마초'로 바뀐다.


관우를 달래주는 역할도 비시에서 제갈량으로 바뀌는데

소설 속 관우에게 '미염공(수염이 아름다운 군후)'라 칭찬하며

'마초는 관우장군 수준에는 못 미치나 능히 장비와 그 능력을 다툴 법 합니다'라고 추켜세운다.

[북벌 감행, 번성을 공격하다]

유비가 한중왕 등극한 직후

유비로부터 가절월을 받은 관우는 중원을 향한 대규모 북벌을 감행한다.

조조의 세력권인 양양(襄陽)을 포위하고 번성(樊城)을 공격하며 조조의 심장부를 향해 진격했다.

가절월은

군주(유비)가 임명한 관리를 임의로 처형시킬 수 있는 권한(가절)에

판단에 따라 임시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권한(월)이 더해진 막강한 권력이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유비가 관우에게 가절월을 내린 저의를

'유비가 관우로 하여금 기회를 보아 조조를 공격하도록 했다'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반대로 유비가 관우에게 '북벌을 감행하라'는 직접적인 명령은 내린 적이 없으므로

위 해석에 반대하는 학자들 또한 많이 있다.

[위진화하(威震華夏) 인생의 정점]

마침 쏟아진 폭우를 이용한 수공(水攻)으로 조조의 7개 군단을 물에 잠기게 한다.

적장 우금(于禁)의 항복을 받아내고, 끝까지 저항한 방덕(龐德)을 참수했다.

관우의 이름값이 중원 전체를 뒤흔들었고(威震華夏), 조조는 수도 이전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이는 관우의 군사적 커리어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승리에 도취한 관우의 오만함이 주변의 적들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서황의 반격, 상승세가 꺾이다]

관우의 위세에 밀린 조조가 구원군으로 서황(徐晃)을 급파한다.

관우는 서황을 얕보았으나, 서황의 교묘한 전술과 맹렬한 공격에 밀려 번성의 포위를 풀고 후퇴하게 된다.

관우의 상승세가 꺾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동맹의 배신 여몽의 백의도강]

관우가 번성에서 혈전을 벌이는 사이, 원한을 품었던 손권(孫權)이 조조와 밀약을 맺고 여몽(呂蒙)을 보내 형주를 기습한다.

여몽은 병사들을 상인으로 위장시켜(백의도강) 방심한 형주 수비대를 속이고 관우의 본거지인 남군을 점령한다.

[부하의 배신, 미방과 사인]

설상가상으로, 관우가 평소 군수물자 보급 문제로 모욕했던 부하 장수 미방(麋芳)과 사인(士仁)이 손권에게 성문을 열고 항복한다.

이들의 배신으로 관우는 돌아갈 본거지를 완전히 상실하고 만다.

[마지막 희망이 끊기다]

돌아갈 곳을 잃은 관우는 인근의 상용(上庸)에 주둔한 양아들 유봉(劉封)과 맹달(孟達)에게 구원병을 요청한다.

그러나 이들은 '주둔지가 안정되지 않았다'는 핑계로 관우의 요청을 거절했고, 관우는 완전히 고립된다.

[고립된 영웅, 맥성]

번성에서 급히 군사를 돌렸으나 이미 본거지는 빼앗기고 군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관우는 아들 관평(關平)과 함께 패잔병을 이끌고 맥성(麥城)이라는 작은 성에 고립된다.

[최후의 돌파, 사로잡히다]

맥성에서 필사적인 탈출을 감행하지만, 이미 모든 퇴로를 파악하고 있던 손권의 군대에게 매복을 당한다.

관우는 아들 관평과 함께 임저(臨沮)에서 생포되고 만다.

220

[무신의 최후]

손권은 관우를 회유하려 했으나, 그가 조금도 굴복할 뜻을 보이지 않자 결국 참수한다.

그의 나이 59세(추정).

손권은 이 죽음의 책임을 조조에게 떠넘기기 위해 관우의 머리를 잘라 조조에게 보냈다.

[관우의 머리, 조조의 장례]

관우의 머리를 받은 조조는 "함정에 빠졌다"며 탄식하고, 관우를 왕의 예로 장사지내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손권이 자신에게 떠넘기려 한 '관우 살해'의 책임을 피하려는 정치적 계산도 깔린 행동이었다.

221

[유비의 분노, 이릉대전의 서막]

의형제의 비참한 죽음 소식을 들은 유비는 분노에 휩싸여 손권을 향한 복수의 칼을 간다.

제갈량을 비롯한 모든 신하의 만류를 뿌리치고 대군을 일으켜 오나라로 진격했으니, 이것이 바로 이릉대전(夷陵大戰)이다.

장비는 이릉대전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준비 과정에서 부하에게 살해당합니다.

풍습이 대신 자리를 이어받아 진행된 이릉대전은 촉나라의 대패로 끝났고,

유비는 패퇴 후 백제성에서 앓다가 사망합니다.

결과적으로 무신 관우의 죽음은 유비, 관우, 장비 창업자 3인 죽음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1120

[신격화의 시작, 왕이 되다]

관우 사후, 그의 '충의'와 '무력'은 민간 신앙과 결합하여 신격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송나라 휘종은 관우에게 '충혜공(忠惠公)', '무안왕(武安王)' 등 왕의 칭호를 내리며 그를 국가가 공인하는 '무신'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1592

[만력제의 꿈과 장비의 환생 선조 (야사)]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자(임진왜란), 명나라 만력제가 파병을 망설였다.

이때 꿈에 관우가 나타나 "조선의 왕(선조)은 내 아우 장비의 환생이니, 마땅히 도와야 한다"고 호소했다는 야사가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조선 후기 <임진록> 등 야사에 등장하며, 명나라의 파병을 극적으로 설명하고 관우 신앙이 조선에 뿌리내리는 계기를 보여준다. 이 일로 관우는 조선에서도 숭배받기 시작했으며, 서울 동묘(관왕묘)가 세워지는 배경이 되었다.

1614

[사후 황제반열에 오르다 '관성대제']

명나라 만력제 시기, 관우는 마침내 '삼계복마대제신위원진천존관성제군(三界伏魔大帝神威遠震天尊關聖帝君)', 즉 '관성대제(關聖大帝)'라는 칭호를 받아 황제의 반열에 오른다.

도교에서는 그를 악귀를 쫓는 신으로, 유교에서는 공자를 모신 '문묘'와 동등한 '무묘'의 주신으로 모셨습니다.

1879

[청나라, 국가 최고의 신이 되다]

청나라에 이르러 관우 숭배는 최고조에 달했다.

청나라 황제들은 '충의'를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관우를 격상시켰고, 급기야 '충의신무영우인용위현관성대제(忠義神武靈佑仁勇威顯關聖大帝)'라는, 공자보다 더 긴 칭호를 내렸다.

2000

[시대를 초월한 아이콘, 재물의 신]

현대에 이르러 관우는 군인, 경찰의 신을 넘어 '재물신(財物神)'으로 가장 널리 숭배받고 있다.

조조의 재물을 탐하지 않은 그의 '신용'과 재무에 밝았던 일화(원부기)가 상인들의 신앙과 결합하여, 현재 아시아 전역의 수많은 가게와 가정에서 그의 상을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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