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엽 (위)

정치인, 관료, 삼국시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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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8: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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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관료, 삼국시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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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광무제의 후손으로 위나라의 핵심 책사이자 관료였다. 젊은 시절부터 비범한 지략과 뛰어난 통찰력을 발휘했다. 조조, 조비, 조예 3대에 걸쳐 중요하게 등용되며 위나라의 기틀 마련에 크게 기여했다. 냉철한 판단과 예리한 조언으로 여러 전역과 정치적 위기를 해결했으며,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타인과의 교류를 자제하는 면모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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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어머니의 유언]

7살이던 유엽의 어머니는 병중에 아버지의 시비를 제거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7살이던 유엽의 어머니 수(脩)는 심한 병중에서 아버지의 시비를 제거하기를 유언했다.

183

[어머니 유언 이행]

13살이 된 유엽은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아버지의 시비를 죽이고 어머니 묘에 참배했다.

13살 때, 유엽은 어머니의 유언을 따라 시비를 죽이고 어머니 묘에 참배했다.

198

[정보 토벌 및 무리 흡수]

회남에서 세력을 떨치던 정보가 주민을 위협하자, 유엽은 그를 직접 죽이고 그의 무리들을 설득하여 손에 넣었다. 이후 사병을 거느리지 않고 여강 태수 유훈에게 무리를 넘겨주며 비범한 능력을 보였다.

친구 노숙에게 함께 정보(鄭寶)를 섬길 것을 권했으나 노숙은 중도에 손권을 섬겼다. 정보가 주민을 쫓아 장강 남쪽으로 건너가려고 유엽을 협박하자, 유엽은 조조의 사자를 이용해 정보를 죽일 틈을 노렸으나 여의치 않자 직접 그의 머리를 베었다. 이후 정보의 무리들을 설득하여 손에 넣었지만, 스스로 왕실 지파로서 사병을 거느리지 않고 여강군 태수 유훈에게 넘겨주었다.

199

[손책의 계략 간파]

손책이 유훈에게 뇌물을 주고 상료 공격을 요청하자, 유엽은 이것이 여강을 차지하려는 손책의 계략임을 간파하고 유훈에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유훈은 이를 듣지 않고 본거지를 잃었다.

손책이 유훈에게 뇌물을 주어 상료(上繚)를 공격할 것을 요청했다. 유엽은 이것이 유훈으로 상료를 공격하러 나간 틈에 여강을 차지하려는 손책의 계략임을 간파하고 유훈에게 이를 받아들이지 말도록 조언했으나, 유훈은 마침 원술의 잔당 등 귀의한 무리가 갑자기 늘어나 식량이 부족했으므로 이를 듣지 않고 상료를 공격하다가 과연 손책의 공격을 받아 본거지인 환성(皖城)을 잃고 조조에게로 달아났다.

209

[진란 토벌 조언]

조조가 여강의 산적 진란 토벌에 실패하자 방치하려 했을 때, 유엽은 진란을 무찔러 위세를 보일 것을 조언했다. 조조는 이를 받아들여 진란을 토벌했고, 유엽을 사공창조연에 임명했다.

여강에는 산적 진란이 수만 명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조조가 여러 번 토벌군을 보냈으나 이기지 못했다. 조조가 수춘에 이르자 여러 신하들은 진란을 내버려 둘 것을 조언했는데, 유엽은 조조에게 진란을 무찔러 위세를 보일 것을 조언했다. 조조는 이를 받아들여 맹장을 써 진란을 토벌하고, 돌아오면서 유엽을 사공창조연(司空倉曹掾)에 임명했다.

215

[한중 평정 조언]

조조가 장로를 토벌할 때 주부로 전임되었다. 조조가 군량 문제로 철수하려 할 때, 유엽은 장로를 이길 수 있다고 보고 군량을 끊어 퇴각하지 못하게 하여 장로를 무찌르고 한중을 평정했다. 그는 한중 점령 후 촉을 칠 것을 권했으나 조조는 듣지 않았다.

조조가 장로를 토벌할 때 주부(主簿)로 전임되었다. 한중 땅은 길이 험하고, 또 군량이 다했으므로 조조는 철수하면서 유엽에게 후군을 감독하게 했다. 유엽은 장로를 이길 수 있다고 보았으므로, 군량을 끊어 퇴각하지 못하게 했다. 과연 조조는 장로를 무찌르고 한중을 평정했다. 유엽은 조조에게 한중 점령으로 인해 두려워하고 있을 촉을 치도록 권하고, 또 촉이 안정되면 그때에는 이미 늦어 근심거리가 된다고 조언했으나, 조조는 듣지 않고 돌아갔다. 유엽은 행군장사가 되었고, 영군을 겸했다. 《부자》에 따르면, 7일 후 촉에서 온 투항자가 유비가 두려워하는 자들을 참했음에도 촉 사람들은 불안해 한다고 전했고, 조조는 유엽에게 촉을 쳐도 좋은지 물었는데, 유엽은 이제는 안정되었으니 칠 수 없다고 답했다.

220

[맹달 중용 반대]

맹달이 위나라에 투항하여 문제(조비)의 총애를 받아 신성태수가 되자, 유엽은 맹달에게 충성심이 없고 신성군이 국경 요지이므로 그의 중용을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맹달이 위나라에 투항하여 문제(조비)의 총애를 받아 신성태수가 되었다. 유엽은 맹달에겐 충성심이 없고, 또 신성군은 국경의 요지이므로 이를 반대했으나 기각되었다.

[유비의 오나라 보복 정확히 예측]

관우가 손권에게 주살되자, 문제(조비)가 유비의 보복 여부를 묻자 유엽만이 보복할 것이라 정확히 예측했으며, 과연 유비는 손권을 쳤다.

관우가 손권에게 주살되자 문제는 조칙을 내려 여러 신하들에게 유비가 관우를 위해 오나라에 보복할지를 생각해 보게 했는데, 유엽만이 보복하리라고 여겼다. 과연 유비는 손권을 쳤고, 손권은 문제에게 복종하기를 구했다.

[시중·관내후 임명]

황초 원년에 시중과 관내후에 임명되며 본격적으로 위나라의 중책을 맡았다.

황초 원년(220년), 시중·관내후가 되었다.

221

[오나라 공격 주장이 거절됨]

유비가 손권을 치자 손권은 문제에게 복종을 구했으나, 유엽은 이를 거부하고 오나라를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거절되었고 손권은 오왕에 봉해졌다.

유비는 손권을 쳤고, 손권은 문제에게 복종하기를 구했다. 유엽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나라를 공격하기를 주장했으나, 거절되고 손권은 오왕에 봉해졌다. 나중에 손권이 문제를 배반하자, 손권을 치려는 문제를 말렸으나 이도 거절되었다.

222

[강릉 전선에서 손권의 행동 정확히 예측]

문제(조비)가 손권을 치러 강릉에 이르렀을 때, 유엽은 다른 신하들과 달리 손권이 직접 오지 않고 수하 장수를 보낼 것이라 예측했고, 이는 그대로 실현되어 문제의 인정을 받았다.

문제가 군대를 이끌고 손권을 치러 강릉에 이르자 여러 신하들은 손권이 항복하러 오든지 저항하러 오든지 친히 올 것이라고 했으나, 유엽은 그렇지 않고 손권은 수하 장수를 출진시킬 것이라고 했으며, 과연 그대로 되었다. 그제서야 문제는 유엽이 옳았음을 인정했다.

226

[동정후에 봉해짐]

명제(조예)가 즉위하자 동정후에 봉해졌다.

명제(조예)가 즉위하자 동정후에 봉해졌다.

227

[선조 시호 추증 문제에 대한 현명한 조언]

명제가 선조들의 시호 추증 문제를 논의하게 하자, 유엽은 전한의 예를 따라 초대 황제의 부친까지만 추증하도록 상소하여 수용되었다.

명제가 조칙을 내려 선조들에게 시호를 내리는 문제를 논의케 하자, 초대 황제의 부친까지만 추증한 전한의 예를 받들도록 상소했는데, 위진과 같은 논의를 펼쳐 수용되었다.

232

[태중대부 및 대홍려 역임]

질병으로 인해 태중대부가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홍려 직책을 맡게 되었다.

태화 6년(232년) 질병이 있어 태중대부가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홍려가 되었다.

234

[유엽 사망]

태중대부가 된 지 2년 후 세상을 떠났으며, 시호는 경후(景侯)이다.

2년 뒤 다시 태중대부가 되었고, 이때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경후(景侯)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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