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비 (삼국지)
촉한 무장, 삼국시대 인물, 군인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7- 21:27:44
장비는 유비, 관우와 의형제를 맺고 생사고락을 함께한 촉한의 용맹한 무장입니다. '만인적'이라 불릴 만큼 무예와 용맹이 뛰어났으며, 장판 전투, 익주 평정, 한중 공방전 등 주요 전투에서 큰 활약을 펼쳤습니다. 군자를 존경했으나 소인에게는 가혹한 성격 탓에 결국 부하에게 암살당했습니다. 후대에는 용맹한 장수의 상징으로 추앙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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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장비 탄생 (추정)]
중국 후한 말, 삼국시대 촉한의 무장인 장비가 태어났다고 추정됩니다. 자는 익덕(益德)이며, 의형제인 유비, 관우와 함께 생사고락을 하며 이름을 떨쳤습니다.
중국 후한 말, 삼국시대 촉한의 무장으로 자는 익덕이다. 의형제인 유비, 관우와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이름을 떨쳤다.
183
[유비와 관우를 만나 생사고락을 함께 하다]
탁군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유비를 섬기며 유비가 지어준 '익덕'이라는 자를 사용했다. 관우는 이 이후에 만난 사이로, 간옹과 더불어 유비를 가장 먼저 섬긴 사람이다. 유비, 관우와 함께 황건적의 난부터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의형제처럼 지냈다.
탁군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유비를 섬겼다. 유비는 장비의 자(字)인 익덕(益德)을 지어준 장본인이다. 당시의 관례에 의하면 자신의 자를 지어준 사람에게는 친아버지의 대우를 해야 한다는 암묵의 룰이 있었다. 이에 따라 장비는 평생 유비 단 한 사람만 섬겼다. 관우는 이 이후에 만난 사이이다. 따라서 장비는 간옹과 더불어 유비를 가장 먼저 섬긴 사람들이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 유비가 탁군에서 의병을 일으켰을 때부터 형처럼 여긴 관우와 함께 유비를 위해 싸웠다. 이들은 한방에서 같이 잤고 그 정은 형제 같았다.
196
[조표와의 불화로 여포에게 서주를 빼앗기다]
유비가 원술 토벌에 나서 서주를 맡겼으나, 하비상 조표와 다투어 여포를 불러들이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유비의 처자식을 남겨둔 채 서주를 빼앗기고 패주했다.
196년(건안 원년) 서주목 유비가 원술을 치러가면서 도겸의 옛 부하이자 하비상인 조표와 같이 하비를 지켰다. 그러나 서로 다투어서 조표가 여포를 불러들이는 바람에 유비의 처자식을 남겨둔 채 패주했다.
198
198년 여포가 하비 전투에서 토벌된 후 조조가 중랑장을 주었다.
199
[조조 토벌 중 진의록을 살해하다]
유비가 조조 주살을 모의하고 거병하자, 진의록에게 동참을 권했으나 그가 후회하고 돌아가려 하자 장비가 그를 죽였다.
199년 유비는 동승과 조조 주살을 모의하다가 서주로 출정하여 거병하였다. 이때 장비가 진의록에게 ‘귀공의 전처를 조조가 취하지 않았냐’며 동참을 권하였다. 이에 따라오던 진의록이 이내 후회하여 돌아가려고 하자 죽였다.
200
[하후연의 조카딸 하후씨와 결혼하다]
유비가 조조에게 패배하여 원소에게 귀의하던 중, 하후연의 열세네 살 된 조카딸을 만나 처로 삼았다. 이 기록은 위략 출처로 신빙성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있다.
200년 유비군은 조조에게 패배하여 하북의 원소에게 귀의하고 장비도 여기에 동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와중에 하후연의 열서너 살 된 조카딸이 땔감을 모을 때 만나서 양갓집 규수임을 알고는 처로 삼았다. 그러나 위략 자체가 신빙성이 부족한 기록이 많고 기록상으로도 사건이 벌어진 200년에 장비는 유비를 따라 서주와 화북으로 도주하던 시기라 하후씨가 납치되었다는 고향(예주 초현)에 들렀을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며, 조조의 친인척이 땔감을 모으는 잡일을 하는 등 기록 자체가 신빙성이 매우 부족하다. 이것 때문에 날조되었거나 혹은 정략 결혼을 뒤에 왜곡한 것으로 추정된다.
208
[장판 전투에서 홀로 조조군을 저지하다]
조조군이 유비를 맹렬히 추격해오자, 장비는 당양 장판에서 20기의 기병만을 이끌고 다리를 끊어 막았다. 홀로 다리 위에 서서 크게 호령하며 조조군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게 하여 유비의 도주를 도왔다.
208년 조조가 형주로 군을 움직이면서 유비는 강남으로 달아났다. 빠르게 추격해온 조조군을 당양(當陽)의 장판(長阪)에서 20기만을 거느린 채 다리를 끊어 장판 전투 막았다. 눈을 부릅뜨고 모를 가로로 들어 자신의 이름을 크게 외치니 아무도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적벽 대전 후 마침내 유비가 강남을 평정하자 의도 태수 겸 정로장군(征虜將軍)에 임명되고 신정후(新亭侯)에 봉해졌다. 이후 남군 태수로 전임되었다.
214
[익주 평정에 공을 세우고 엄안을 감복시키다]
유비의 익주 평정 전쟁(212년 시작)에 제갈량, 조운과 함께 참여하여 강주에서 파군태수 엄안을 격파하고 생포했다. 장비의 위엄에도 엄안이 굴하지 않자 그 기개에 감복하여 풀어주고 빈객으로 삼았다. 가는 곳마다 승리하며 유비와 성도에서 합류했고, 파서태수 등의 관직과 많은 상을 받았다.
익주로 가 있던 유비가 212년 유장과 유비의 입촉 전쟁을 벌이자 제갈량, 조운과 함께 형주로부터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각 군현을 점령했다. 강주(江州)에서 파군태수 엄안을 격파하고 산 채로 붙잡았다. 장비가 항복하지 않은 엄안을 꾸짖었다. 엄안이 ‘유비군이 무도하게 익주를 침탈했으니 머리가 잘릴지언정 항복하는 장군은 없다.’고 답하므로 노하여 참수를 명했다. 그래도 엄안이 안색 하나 변하지 않으며 “머리를 자르면 자르는 것이지 어찌 화를 내는가!”고 하니 장하게 여겨 풀어주고는 빈객으로 삼았다. 장비가 덕양(德陽)에서 장예도 물리치는 등 가는 곳마다 이기고 성도에서 유비와 합쳤다. 제갈량, 법정, 관우와 더불어 금 500근, 은 1,000근, 5,000만 전(錢), 비단 1,000필을 상으로 받고 파서태수(巴西―)를 겸하였다.
215
[한중 공방전 중 장합을 격파하다]
한중을 점령한 조조가 장합을 남겨두자, 장비는 파서군에서 장합과 50여 일간 대치했다. 이후 1만여 정예병으로 와구를 공격하여, 산길에서 진퇴양난에 빠진 장합군을 격파하고 장합을 퇴각시켰다.
215년 조조가 장로의 한중을 손에 넣고 하후연과 장합을 남겨둔 채 돌아갔다. 장합이 파서군으로 내려와 그 주민을 한중으로 옮기려 하기에 탕거현(宕渠縣)에서 서로 겨루었다. 50여 일을 대치한 끝에 정예병 1만여 명을 이끌고 다른 길을 따라 와구(瓦口)를 공격하였다. 장합군은 산길이 좁아서 앞뒤가 서로를 구할 수가 없었다. 장합은 부하 10여 명과 같이 말을 버리고 산을 타 퇴각한 후 패잔병을 수습하여 남정(南鄭)으로 돌아갔다.
219
219년(건안 24년) 비로소 유비가 한중을 정복하고 한중왕에 올라 우장군 가절(假節)을 주었다.
221
[유비의 황제 즉위 후 거기장군과 서향후에 봉해지다]
221년 유비가 황제에 오르자, 장비는 거기장군 겸 사례교위가 되고 서향후에 봉해졌다.
221년(장무 원년) 유비는 제위에 오르고 장비는 거기장군 겸 사례교위가 되고 서향후(西鄕侯)에 봉해졌다.
[오나라 정벌 준비 중 부하에게 암살당하다]
관우 사후 오나라 정벌을 위해 낭중에서 1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강주에서 유비와 합류하기로 했으나, 평소 장비의 폭력에 원한을 품은 부하 범강과 장달에게 암살당했다.
이전에 관우가 죽은 것 때문에 유비가 오나라 이릉 대전 정벌에 나서자 낭중(閬中)으로부터 만 명을 인솔하여 강주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그러나 장비의 폭력을 당했던 부하 범강, 장달에게 암살당했다.
260
260년(경요 3년) 관우, 마초, 방통, 황충과 함께 시호를 받아 환후(桓侯)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