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 정치인, 연방 하원의원, 연방 상원의원, 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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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6- 21:0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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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 정치인, 연방 하원의원, 연방 상원의원, 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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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제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캘리포니아 출신으로 하원의원, 상원의원, 부통령을 거쳐 최고 지도자에 올랐다. 베트남 전쟁 종결과 중국과의 관계 개선 등 외교적 성과를 이뤘으나,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임기 중 사임한 대통령으로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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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

[캘리포니아에서 출생]

리처드 밀하우스 닉슨이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농장 경영주 집안에서 다섯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이후 위티어 대학과 듀크 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리처드 밀하우스 닉슨은 캘리포니아주 요바린다에서 프랜시스 앤서니 닉슨과 해나 밀하우스 닉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34년 위티어 대학을 졸업하고 노스캐롤라이나주 듀크 대학교 로스쿨에 입학하여 1937년 6월 최고 수준의 성적으로 졸업했다. 고향으로 돌아와 캘리포니아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1940

[팻 라이언과 결혼 및 해군 복무]

리처드 닉슨이 취미로 연극 활동을 하던 중 만난 고등학교 교사 텔마 '팻' 라이언과 결혼했다. 이후 1942년 물가관리청으로 이직하며 워싱턴 D.C.로 이주했고, 같은 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해군으로 복무했다.

리처드 닉슨은 윈저트 앤 뷸리 로펌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중 고등학교 교사 텔마 '팻' 라이언과 결혼했다. 1942년 1월 물가관리청으로 이직하여 워싱턴 D.C.로 이주했으나, 이 일을 즐기지 못하고 4개월 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해군으로 복무했다.

1946

[정계 진출 및 연방 하원·상원의원 당선]

제2차 세계대전 후, 리처드 닉슨은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도전하여 당선되었고, 1950년에는 연방 상원의원으로 당선되며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해군으로 복무를 마친 리처드 닉슨은 1946년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당선되었고, 1947년 1월 3일 하원의원으로 취임했다. 이후 1950년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50년 12월 1일 상원의원으로 취임하며 워싱턴 정가에서 입지를 다졌다.

1953

[미국 제36대 부통령 취임]

리처드 닉슨은 불과 39세의 나이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러닝메이트로 공화당 부통령 후보에 선출되어 당선됐다. 개인적인 용도로 정치자금을 사용했다는 스캔들에 휘말렸으나, 애완견만 선물로 받았다는 TV 연설로 위기를 넘기고 미국의 제36대 부통령으로 취임했다.

1952년 대통령 선거에서 리처드 닉슨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 후보에 선출되었다. 유권자들로부터 받은 정치자금을 개인적으로 유용했다는 스캔들에 휘말렸으나, TV 연설에서 개인적인 용도로 돈을 쓴 적이 없고 애완견 칩만 선물로 받았다고 해명하며 위기를 극복했다. 선거에서 공화당이 승리하며 닉슨은 미국의 제36대 부통령에 취임했고, 1956년 재선에 성공하여 총 8년간 부통령직을 수행하며 니키타 흐루쇼프와의 '부엌 논쟁' 등으로 높은 인기를 누렸다.

1960

[존 F. 케네디에 패배 및 정치적 위기]

리처드 닉슨은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민주당의 존 F. 케네디와 치열한 접전 끝에 근소한 차이로 패배하며 대선에서 고배를 마셨다. 이후 1962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도 도전했으나 패배하며 정치적 위기에 봉착했다.

1960년 리처드 닉슨은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민주당의 존 F. 케네디와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다. 1961년 1월 20일 부통령직에서 퇴임한 후, 1962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도전했으나 현직 민주당 주지사 팻 브라운에게 패배하며 한동안 정계에서 물러나 뉴욕으로 이주하는 등 정치적 위기를 겪었다.

1969

[미국 제37대 대통령 취임]

리처드 닉슨은 베트남 전쟁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1968년 대선에 재출마하여 민주당의 휴버트 험프리를 누르고 제37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취임 후 베트남 전쟁을 종결시키고 미국 환경보호국을 설립하는 등 국내외적으로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정치적 위기 후 재기를 노린 리처드 닉슨은 1968년 대선에 재출마하여 민주당의 휴버트 험프리를 상대로 근소한 차이로 승리하며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9년 1월 20일 제37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그는 베트남 전쟁을 종결시키고 미국인 포로들을 석방했으며, 미국 환경보호국을 설립하고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성공에 기여하는 등 다양한 국내외 정책을 추진했다. 또한, 1969년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며 아시아 각국의 자립을 강조했다.

1972

[압도적 지지로 대통령 재선 및 워터게이트 사건 연루]

리처드 닉슨은 민주당 조지 맥거번을 상대로 50개 주 중 49개 주에서 승리하는 압도적인 지지로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하지만 이 대선 기간에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가 있는 워터게이트 빌딩에 불법 침입과 도청 사건이 발생하여 스캔들에 연루되기 시작했다.

리처드 닉슨은 1972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조지 맥거번을 상대로 매사추세츠주를 제외한 49개 주에서 승리하며 역사적인 압승을 거두고 재선되었다. 하지만 이 대선 기간 중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가 있는 워터게이트 호텔 빌딩에 불법 침입과 도청 사건이 발생했고, 닉슨 행정부가 이 사건에 연루되어 은폐를 시도했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워터게이트 사건이 점차 확대되기 시작했다.

[미국 대통령 최초 중국 방문]

리처드 닉슨은 미국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마오쩌둥, 저우언라이와 회담하며 양국 국교 정상화의 길을 열었다. 이는 1970년대 데탕트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대담한 외교적 행보로 평가받는다.

1971년 헨리 키신저의 비밀 베이징 방문에 이어, 1972년 리처드 닉슨은 미국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했다. 마오쩌둥 주석 및 저우언라이 총리와 회담하며 미국과 중국 사이의 국교 정상화 길을 열었고, 이는 냉전 시대의 국제 정세에 큰 변화를 가져오며 데탕트 시대를 촉진하는 역사적인 외교적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같은 해 소련을 방문하며 미소 관계 개선에도 기여했다.

1973

['스모킹 건' 녹음 공개로 은폐 시도 드러남]

워터게이트 사건 수사 과정에서 닉슨 대통령 집무실의 녹음테이프 존재가 드러났고, 이 중 '연방수사국은 워터게이트 침입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라'는 닉슨의 말이 담긴 녹음이 공개되었다. 이는 닉슨이 사건 은폐에 직접 개입했음을 보여주는 '스모킹 건'으로 작용하며 국민적 공분을 샀다.

워터게이트 사건이 점차 커지면서 닉슨 행정부의 조직적인 증거 조작과 은폐 시도가 언론과 특검에 의해 밝혀졌다. 특히 1973년 6월 23일, 닉슨 대통령의 집무실에서 '워터게이트 침입은 국가 안보 문제이니 연방수사국은 이 문제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라!'라고 지시하는 그의 녹음된 말이 공개되면서, 닉슨이 사건 은폐에 직접적으로 개입했음이 명백히 드러났다. 이는 이른바 '스모킹 건'으로 비유되며 미국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분노를 안겼다.

1974

[미국 대통령 중 유일하게 임기 중 사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의회에서 탄핵 표결이 임박하자, 리처드 닉슨은 결국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이는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임기 중 사임한 대통령으로 기록되는 불명예스러운 퇴진이었다.

워터게이트 사건 은폐 의혹이 '스모킹 건' 녹음 공개로 사실로 드러나자, 닉슨은 증거 제출을 거부했으나 미국 연방 대법원 판결에서 위법으로 판결되었다. 1974년 의회가 탄핵 표결에 들어가 성사될 가능성이 높아지자, 리처드 닉슨은 결국 사임을 발표하고 제럴드 포드 부통령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이는 미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하게 임기 중 사임한 대통령으로 기록되는 치욕적인 결말이었다. 사임 한 달 뒤, 후임 제럴드 포드 대통령은 그를 특별 사면했다.

1994

[뇌졸중으로 81세에 사망]

대통령직 사임 후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한 리처드 닉슨은 뉴욕 근교에서 조용히 생활하며 후임 대통령에게 정치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외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1994년 4월 18일 뇌졸중 발작 후 나흘 뒤 81세로 사망했으며, 고향 캘리포니아주에 안장되었다.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고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한 리처드 닉슨은 뉴욕과 뉴저지주에서 조용히 생활했으나, 때때로 후임 대통령에게 정치적 조언을 제공하고 외국을 방문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1994년 4월 18일 뇌졸중이 발작하여 나흘 뒤인 4월 22일 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고향 캘리포니아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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