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클린 D. 루스벨트
연표
1882
1903
1905
[엘리너 루스벨트와 결혼]
5촌이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조카 엘리너 루스벨트와 결혼했습니다.
이 결혼은 1945년 루스벨트가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1907
[컬럼비아 로스쿨 중퇴]
뉴욕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자마자 컬럼비아 법학대학원을 자퇴했습니다.
(이후 2008년 컬럼비아 대학교는 그에게 사후 법학 박사 학위를 수여했습니다.).
1911
[뉴욕주 상원의원 당선]
뉴욕주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어 정치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민주당을 지배하던 '태머니 홀'에 반대하는 '반군'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1913
[해군 차관보 임명]
우드로 윌슨 휘하에서 해군 차관보로 임명되어 미국 해군에서 두 번째로 높은 직위를 맡았습니다.
이 직위에서 7년간 귀중한 경험을 쌓았습니다.
1920
[부통령 후보 출마]
제임스 M.
콕스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 후보에 출마했으나, 공화당의 워런 G.
하딩에게 패배했습니다.
이 선거운동에서 구축한 관계는 1932년 대통령 선거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1921
[소아마비 발병]
캄포벨로섬에서 휴가 중 하반신이 마비되는 질병(소아마비)에 걸렸습니다.
공직에서 은퇴하려 했으나, 아내와 정치 고문의 설득으로 정치 활동을 계속하기로 결심했습니다.
1929
[뉴욕 주지사 취임]
앨 스미스의 요청으로 뉴욕 주지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습니다.
취임 후 대공황 극복을 위한 계획을 추진했으며, 라디오를 통해 유권자들에게 직접 연설하는 '노변한담'을 시작했습니다.
1930
[뉴욕 주지사 재선]
두 번째 임기를 위해 뉴욕 주지사에 출마하여 압도적인 차이로 당선되었습니다.
그의 강령은 농민 지원, 완전 고용, 고용보험과 노령 연금을 요구했습니다.
1932
[제32대 대통령 당선]
공화당 소속 허버트 후버 현직 대통령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제32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취임 수락 연설에서 '뉴딜' 정책을 약속했습니다.
1933
[암살 시도 모면]
'모든 통치자에 대한 증오'를 선언한 주세피 장가라의 암살 시도를 피했습니다.
이 시도로 옆에 앉아 있던 시카고 시장 안톤 세르마크가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대통령 취임 및 뉴딜 시작]
역사상 최악의 불황 속에서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취임 첫 100일 동안 전례 없는 연방 입법을 주도하며 '뉴딜' 정책을 시행하는 수많은 행정 명령을 쏟아냈습니다.
1935
[사회보장법 서명]
사회보장법에 서명하여 노인, 빈곤층, 장애인들에게 경제적 보장을 약속하는 사회 보험 프로그램을 법적으로 확립했습니다.
이는 서유럽 국가에 비해 보수적이었으나 연방 정부가 경제 안정을 보장하는 첫 사례였습니다.
1936
[제32대 대통령 재선 (2선)]
앨프 랜던을 상대로 60.8%의 득표율을 얻으며 압도적으로 승리했습니다.
메인주와 버몬트주를 제외한 모든 주에서 승리하며 '뉴딜 연합'이 통합되었습니다.
1937
[대법원 확장 계획 실패]
70세 이상 판사 직에 추가 판사를 임명하는 '사법 절차 개혁 법안'을 제안했으나, 권력 분배를 흔든다는 비판과 부통령 가너의 반대로 실패했습니다.
1938
[공정노동기준법 통과]
아동 노동을 불법화하고 전국 최저 임금을 설정하며 주당 40시간 이상 근무 시 초과근무 수당을 받을 수 있게 한 공정노동기준법(FLSA)을 통과시켰습니다.
1939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영국, 프랑스의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과 프랑스를 군사적으로 지원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1940
[제32대 대통령 재선 (3선)]
전례 없는 3선에 도전하여 웬델 윌키를 물리치고 승리했습니다.
워싱턴 이후 3선 출마를 거부했던 전통을 깬 세계 최초의 대통령입니다.
[구축함-기지 협정 체결]
중립법을 공개적으로 무시하고 영국령 카리브 제도의 군사 기지 권리를 대가로 미국 구축함 50척을 영국에 제공하는 '구축함-기지 협정'에 동의했습니다.
1941
[무기대여법 승인]
'네 가지 자유' 연설을 통해 연합군이 전 세계적으로 자유와 기본권을 위해 싸울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습니다.
영국과 중국에 막대한 군사·경제 지원을 지시하는 무기대여법에 대한 의회 승인을 얻었습니다.
[아카디아 회의 개최]
처칠과 아카디아 회의에서 만나 일본보다 독일 공략을 우선시하는 '유럽 우선 전략'에 합의했습니다.
군사 정책 조정을 위한 연합 합동참모본부도 설립했습니다.
[진주만 공격 발생]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 공습으로 미국의 주요 전함 함대가 격파되고 2,403명의 미군과 민간인이 사망했습니다.
이는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대일본 선전포고]
의회 연설에서 '치욕의 날'을 선언하며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촉구했고, 의회가 이를 거의 만장일치로 승인했습니다.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 내 반전 여론은 사라졌습니다.
[독일, 이탈리아의 대미 선전포고]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미국에 전쟁을 선포했고, 미국도 이에 대응하여 독일과 이탈리아에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이로써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에 본격적으로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1942
[연합국 공동 선언]
미국과 연합군 회원국들이 추축국을 패배시키겠다고 선언하는 '연합국 공동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연합국의 단합된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미국 합동참모본부 창설]
미국의 군사 전략에 대한 최종 결정을 내리는 합동참모본부를 창설하고, 전쟁에 세세하게 개입하는 대신 군 장교들에게 대부분의 결정을 위임했습니다.
[맨해튼 계획 승인]
진주만 공격 이후 핵무기 연구를 위한 자금을 확보하고 세계 최초의 핵무기 개발을 위한 '맨해튼 계획'을 승인했습니다.
영국 과학자들과의 협력도 장려했습니다.
[일본계 미국인 억류 명령]
행정명령 9066호에 서명하여 대부분이 태평양 연안에 거주하던 11만 명에 달하는 일본계 미국인들을 강제로 이주시켰습니다.
이는 인권 침해 논란을 낳았습니다.
[북아프리카 상륙 작전]
연합국이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 상륙하여 침공하고 며칠 만에 비시 프랑스의 항복을 얻어냈습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의 주요 전환점 중 하나였습니다.
1943
[카사블랑카 회담]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연합국이 북아프리카에서 추축국을 몰아낸 후 시칠리아 침공, 1944년 프랑스 상륙 작전을 합의했습니다.
또한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만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테헤란 회담 개최]
처칠, 스탈린과 테헤란 회담에서 만나 전략과 전후 계획을 논의했습니다.
이곳에서 스탈린과 처음으로 직접 만났습니다.
1944
[제32대 대통령 재선 (4선)]
건강 악화에도 불구하고 토머스 E. 듀이를 물리치고 승리하며 전례 없는 4선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이는 그가 사망하기 몇 달 전의 일입니다.
[전쟁난민위원회 설립]
유대인과 추축국 잔학 행위의 희생자들을 돕기 위해 전쟁난민위원회를 설립했습니다.
그는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믿었습니다.
[두 번째 권리 장전 발표]
국정연설에서 '두 번째 권리 장전'을 통해 모든 미국인이 '적절한 의료', '좋은 교육', '괜찮은 집', '유용하고 충분한 보수를 가진 직업'에 대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G.I. 빌 법안 서명]
퇴역군인들을 위한 대규모 혜택 프로그램(고등교육, 의료, 직업 상담, 주택 및 기업 대출 등)을 담은 G.I.
빌 법안에 서명했습니다.
이 법안은 상하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습니다.
1945
[얄타 회담 개최]
처칠, 스탈린과 크림반도에서 열린 얄타 회담에서 두 번째로 만났습니다.
일본 전쟁 참전과 국제 연합 창설, 독일 점령 등 전후 계획을 논의했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 서거]
조지아주 웜 스프링스에서 뇌출혈로 63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전 세계에 충격과 슬픔을 안겼으며, 부통령 해리 S.
트루먼이 대통령직을 승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