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딜
경제 정책, 공공사업, 금융 개혁, 규제 정책, 미국 정책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58:17
뉴딜은 대공황으로부터 미국을 구하기 위해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1933년부터 1938년까지 주도한 일련의 경제 및 사회 개혁 프로그램입니다. 실업자 및 빈곤층 구제(Relief), 경제 회복(Recovery), 반복적인 불황 방지를 위한 금융 개혁(Reform)의 '3R'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은행 시스템 안정화, 금본위제 폐지, 사회보장제도 도입, 대규모 공공사업을 통해 금융 개혁과 사회 복지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뉴딜은 미국 정치 지형을 민주당 중심으로 재편하고 정부의 경제 개입 필요성을 확산시켰으며, 그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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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
[월 스트리트 충격 및 대공황 시작]
미국 주식 시장에서 '월 스트리트 충격'이 발생하며 주가가 크게 하락했고, 이는 전 세계적인 경제 침체의 촉매가 되었다. 이후 1929년부터 1933년까지 미국 실업률이 4%에서 25%로 급증하고 공업 생산량이 크게 감소하는 등 대공황이 본격화되었다.
1929년 10월 24일 미국 주식 시장에 "월 스트리트 충격"이 발생하여 주식이 대폭락했다. 이는 전 세계적인 경제 침체, 즉 대공황의 촉매가 되었다. 1929년부터 1933년 동안 미국 실업률은 4%에서 25%로 증가했고, 공업 생산량은 약 3분의 1이 줄었다. 통화 가치의 증가로 빚을 갚기가 더욱 힘들어졌으며, 목재업, 광업, 농업은 물가 하락으로 특히 어려움을 겪었다.
1932
[루스벨트, '뉴딜' 공약 선언]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수락하며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대공황을 타개할 '아메리칸 사람을 위한 뉴딜'을 약속했다. 이 용어는 당시 스튜어트 체이스의 책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스퀘어딜과 우드로 윌슨의 뉴프리덤의 합성어이다.
1932년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수락하면서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아메리칸 사람을 위한 뉴딜"을 약속했다. '뉴딜'이라는 용어는 1932년 초반에 출판된 스튜어트 체이스의 책 《뉴딜》에서 따온 것이며,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스퀘어딜(공평한 분배 정책)과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뉴프리덤(새로운 자유 정책)의 합성어이다.
[루스벨트, 대통령 당선 및 민주당 의회 장악]
193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의회 선거에서도 민주당이 확고한 우위를 점하며 뉴딜 정책 추진을 위한 강력한 정치적 기반을 마련했다.
193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의회 선거에서도 민주당이 확고한 우위를 점했다. 이로써 루스벨트는 전례 없는 정치적 자본을 얻은 대통령이 되어 뉴딜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1933
[미국 달러 금본위제 전격 중단]
의회 법률과 루스벨트의 연방집행명령으로 미국 달러의 금본위제가 중단되었다. 이는 연방준비제도가 화폐 가치 방어를 위해 이자율을 높이는 대신 낮출 수 있도록 하여, 경제 회복에 유연성을 더했다.
1933년 3월과 4월에 의회의 법률과 루스벨트의 연방집행명령으로 미국 달러의 금본위제가 중단되었다. 금본위제 하에서는 연방준비제도가 화폐 가치 방어를 위해 이자율을 높일 수만 있었을 뿐, 이자율을 낮출 수가 없었다. 금본위제를 금지하는 것과 관련된 법령에는 연방집행명령 6073호, 6102호, 6111호, 긴급은행법, 1933년 은행법, 양원공동결의 192호가 있었다. 금본위제 폐지에 따라 금화 소유자는 금화를 미국 달러로 교환하도록 강제당했고, 정부는 더 이상 달러를 금으로 지급하지 않게 되었다. 외환 시장에서 달러는 금의 지급을 보장하지 않았고, 금에 대한 화폐 가치를 자유롭게 시장 가격에 따르게 했다.
[대규모 은행 규제 및 휴무 명령]
루스벨트 대통령 취임 직전, 22개 주와 컬럼비아 특별구에서 은행 규제 및 모라토리엄이 선언되었다. 이에 루스벨트는 3월 6일부터 9일까지 모든 은행에 휴무를 명령하며 금융 시스템 안정화를 위한 첫 조치를 취했다.
1933년 3월 2일,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취임식을 하기도 전에 22개 주와 컬럼비아 특별구에서 모라토리엄과 은행 규제가 선언되었다. 루스벨트는 이에 대응하여 모든 은행에 1933년 3월 6일부터 9일까지 휴가를 명령했다.
[긴급은행법 통과 및 은행 시스템 안정화 시작]
루스벨트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은행 폐쇄 조치를 유지하던 중, 의회에서 긴급은행법이 통과되어 건전한 은행의 영업 재개가 가능해졌다. 이 법으로 연방의 자금 지원과 재무부 감독 아래 은행 시스템이 빠르게 안정화되었고, 수십억 달러가 은행으로 유입되었다.
1933년 3월 9일, 루스벨트 대통령이 새로운 법을 통과시킬 때까지 은행 폐쇄 조치를 유지시키는 가운데, 허버트 후버 정부 때 대강의 내용이 만들어졌던 긴급은행법 입법안이 의회에 제출되어 같은 날 승인을 받아 법이 되었다. 긴급은행법에 따라 연방의 자금 지원과 재무부의 감독 아래에 건전한 은행 영업이 재개되었고, 이후 3일 동안 연방준비제도 가맹은행의 4분의 3이 영업을 재개하였다. 축적되어 있던 수십억 달러의 통화와 금이 한달 동안 이들 은행으로 흘러 들어와 은행 시스템이 안정되었다.
[경제법 통과 (균형 예산 정책)]
예산 관리자가 기초한 경제법이 통과되며 공무원 월급 및 퇴역 군인 연금 삭감을 통해 연방 예산의 수입과 지출 균형을 맞추고자 했다. 이로 인해 연간 5억 달러를 절약할 수 있었다.
예산 관리자 루이스 더글라스가 기초한 경제법(Economy Act Agreement for Purchasing Goods or Services)은 1933년 3월 14일에 통과됐다. 이 법은 공무원 월급을 줄이고, 퇴역 군인에 지급되는 연금의 40%를 삭감하여 연방 "정기" 예산에서 수입과 지출의 균형을 맞추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 법으로 1년에 5억 달러를 아낄 수 있었다.
[볼스티드법 개정으로 술 제조 및 판매 임시 합법화]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선 공약 이행의 일환으로 볼스티드법 개정안에 서명하여 술의 제조와 판매를 임시로 합법화했다. 이는 금주법 폐지의 첫 단계였다.
루스벨트는 1932년 미국 대선에서 금주법 폐지를 공약으로 제시했고, 약속대로 1933년 3월 23일 볼스티드법(Volstead Act, 금주법) 개정안에 서명해 술의 제조와 판매를 임시로 합법화했다.
[농업조정국(AAA) 설립]
농산물 생산량을 조절하여 농산물 가격을 상승시키고 농가 소득을 증가시키기 위해 농업조정법에 근거하여 농업조정국(AAA)이 설립되었다. 이 기관은 옥수수, 솜, 돼지고기 등 주요 농산물의 국내 총생산량을 통제했다.
농업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루스벨트는 농업이 번영해야 진정한 부흥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었다. 농산물 생산량을 조절해 농산물 가격을 상승시켜 농가 소득을 증가시키기 위해 농업조정법(Agricultural Adjustment Act)에 근거하여 1933년 5월 농업조정국(AAA)이 설립되었다. 이 법은 주요 농민 단체의 요구 사항들과 농무부 장관 헨리 월리스 등 농업 관련 인사들의 토론 내용을 반영했다. 농업조정국은 옥수수, 솜, 유제품, 돼지고기, 쌀, 담배, 밀의 국내 총생산량을 통제했다. 생산량 통제를 위해 땅을 놀리는 지주에게 농업조정국은 보조금을 지급했으며, 목표는 1910년~1912년의 "패리티" 수준까지 농산물 가격을 올리는 것이었다.
[테네시강 유역 개발 공사(TVA) 설립]
남부 지역의 빈곤 해결을 위해 1933년 5월 테네시강 유역 개발 공사(TVA)가 설립되었다. 이 공사는 농장 현대화, 전력 공급, 홍수 억제를 목표로 엄청난 규모의 댐 공사를 추진했다.
남부에는 많은 사람들이 빈곤했다. 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1933년 5월 설립된 테네시강 유역 개발 공사(TVA)는 농장을 현대화하고 전력을 공급하고 홍수를 억제하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댐 공사를 추진했다.
[연방예금보험공사(FDIC) 설립]
은행 시스템의 안정화를 위해 의회는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를 설립했다. 이 기관은 5000달러까지 예금을 보증하여, 파산을 염려한 예금 인출 사태를 방지하고 은행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치료'로 질병이 더 악화될 뻔했다"는 밀턴 프리드먼과 애나 슈워츠의 평과 같은 '치료'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의회는 1933년 6월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를 세웠다. 연방예금보험공사는 5000달러까지 보증해 주는 예금 보험을 제공했다. 연방예금보험공사의 설립으로 파산이 염려되는 은행에 예금을 찾으려고 몰려드는 현상은 사라졌다.
[산업생산량 지수 급등으로 경제 회복세 가시화]
1933년 3월 최하 수준이던 연방준비제도의 산업생산량 지표가 7월에는 약 57% 증가하는 극적인 회복세를 보였다. 이는 대공황 이후 바닥을 치고 경제가 점진적으로 개선되기 시작했음을 시사한다.
경제는 1933년 3월 바닥을 치고 나서 회복하기 시작했다. 브로더스 미첼은 "1932년 여름까지 모든 지표가 악화되었다. 이때는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침울한 불황의 정점이었다"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경제 지표들은 3월 1일 최하 수준이었다가 점점 회복세가 강해졌다. 연방준비제도의 산업생산량 지표(Federal Reserve Index of Industrial Production)는 1935년~1939년을 100으로 보았을 때, 1932년 7월 최저 수치인 52.8을 기록했고, 1933년 3월 54.3으로 거의 변동이 없었지만, 1933년 7월에는 85.5에 이르렀다. 네 달 만에 약 57%라는 극적인 증가율이었다.
[금주법 공식 폐지]
수정헌법 제21조가 대다수 주의 비준을 거쳐 공식 발효되며, 미국에서 술의 제조, 판매, 운송을 금지했던 수정헌법 제18조와 금주법이 폐지되었다. 이는 주 정부와 도시의 새로운 수입원 확보에 기여했다.
수정헌법 제18조(금주법의 헌법적 근거)를 정식으로 폐지한다는 내용의 수정헌법 제21조는 1933년 2월 20일 연방 의회에서 제안돼 이미 입법 과정에 있었고, 대다수의 주가 이를 비준하여 같은 해 12월 5일 수정헌법 제18조와 금주법은 폐지됐다. 금주법 폐지로 주 정부와 도시들은 새로운 수입원을 얻었고, 루스벨트는 금주법에 반대하던 도시민의 지지를 이끌어내 뉴딜 정책에 힘을 실을 수 있었다.
1934
[예산 관리자 루이스 더글라스 사임 및 뉴딜 비판]
루스벨트 대통령의 예산 구분 논리(정기/비상 예산)를 거부했던 예산 관리자 루이스 더글라스가 1934년에 사임하고, 이후 뉴딜 정책의 강력한 비판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예산 관리자 루이스 더글라스는 루스벨트의 예산 구분 논리(정기 예산은 균형을 맞추어야 하지만, 비상 예산은 불경기를 해결하기 위해 지출을 늘려 균형을 깰 수 있다는 주장)를 거부했고, 1934년 사임한 후, 뉴딜 정책 비판가로 거리낌 없이 활동했다.
1935
[제2차 뉴딜 정책 시작 및 주요 개혁 법안 통과]
1935년, 루스벨트 행정부는 '두 번째 뉴딜 정책'을 시작하며 몇몇 중요한 구제 및 개혁 법안들을 의회에서 승인받았다. 이 정책들은 노동 조합 지원, 공공사업진흥국(WPA) 설립, 사회보장법 제정 등을 포함하며 뉴딜의 장기적 성과 중심이 되었다.
1935년, 미국 의회는 몇몇의 중요한 구제와 측량 개혁을 승인하며 "두 번째 뉴딜 정책"을 시작했다. 경제 안정을 강조하는 데 향하던 이 법률들은 뉴딜 정책의 오랜 성과들의 중심이 되었다. 수많은 새 법률들이 여름 동안에 통과하였다.
[공공사업진흥국(WPA) 설립]
공공 기획 촉진국(후에 공공사업진흥국으로 개명)이 설립되어 고속도로, 다리, 공원 건설 등 대규모 공공사업을 통해 850만 명에 달하는 미숙련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이는 대공황기 실업 문제 해결에 크게 기여했다.
공공 기획 촉진국(Works Project Administration)이 설립되어 고속도로, 거리, 다리, 공원과 같은 프로젝트를 건설하는 일들을 마련하였다. 이 법률은 화가, 작가와 연기자들을 위한 일들을 창조하기도 했다. 공공 기획 촉진국은 약 850만 명의 사람들을 위한 일들을 마련하였고, 1939년 공공사업진흥국(Work Projects Administration)으로 개명하였다.
[전국 노동 관계법(피터 와그너 법) 제정]
전국 노동 관계법, 일명 피터 와그너 법이 제정되어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단체교섭할 수 있는 권리(단결권, 단체교섭권)를 보장하고, 부당노동행위를 규정하여 노동삼권을 보호했다. 이는 미국 노동 운동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전국 노동 관계법(The National Labour Relations Act)은 발의자의 이름을 따서 피터 와그너 법이라고도 하는데,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조직하여 활동하며, 자본가와의 단체교섭을 할 수 있는 권리(단결권, 단체교섭권)를 보증하였고, 노동삼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부당노동행위를 규정하였다. 1930년 전국 노동관계법이 제정된 후 몇 년 동안에 미국 노동총연맹(AFL)과 산별노조협의회(Congress of Industrial Organisation)는 수백만의 노동자들을 노동조합원으로 조직하였다.
[사회 보장법 제정]
사회 보장법이 제정되어 실업보험과 노령연금 제도가 도입되었다. 이 법은 장애인과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한 보수도 마련했으며, 유럽에서 확립된 사회보장제도를 미국 내에 정착시키려는 루스벨트의 의지를 반영했다.
사회보장법은 본래 19세기 말 유럽에서 확립된 사회보장제도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루스벨트는 미국 안에서도 복지제도가 정착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고 프랜시스 퍼킨스를 책임자로 한 '경제안전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회의 임무는 노령연금제도, 실업보험, 전국건강보험 등을 의회 회기에 상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위원회는 보고서를 대통령에게 전달하고 대통령은 이 안건을 의회에 권고하고 다시 법제화되는 과정에서 몇번의 수정과 타협을 거쳤다. 이 법은 실업보험과 노령연금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이며, 수혜자가 일부를 부담한다는 점에서 완전한 무상복지가 아닌, 연금을 납입한 사람만 복지를 받을 수 있는 선택적이며 배타적 복지였다. 이 법률은 장애인들과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한 보수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면제된 농장과 국내 노동자들에 의하여 법률은 이득으로부터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노동력 3분의 2를 차단하였다.
1936
[연방 대법원, 농업조정법 위헌 판결 및 상여금법 통과]
연방 대법원은 농산물 생산량 통제가 연방 정부 권한을 넘어선다며 농업조정법에 위헌 판결을 내렸다. 같은 해, 의회는 대통령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에게 15억 달러의 상여금을 지급하는 상여금법을 통과시켰다.
1936년 연방 대법원은 농업조정법이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법원은 "농산물 생산량 통제는 연방정부가 위임해 준 권한을 넘어선다"고 판단했다. 농업조정국의 정책은 유사한 프로그램으로 대체됐다. 기존의 농업조정국은 땅을 놀리는 농부에게 보조금을 주었지만, 새로운 프로그램은 시장에서 팔리지도 않는 자주개자리를 경작하는 농부에게 보조금을 주는 것이었다. 이것은 연방 대법원도 승인한 것이다. 루스벨트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에게 상여금을 주기로 하는 상여금법(Bonus Bill)도 강력히 반대했지만, 대통령의 법안 거부에도 불구하고 의회는 1936년 상여금법을 통과시켰다. 1936년도 선거 직전에 참전 군인 4백만 명에게 재무부는 15억 달러를 현금으로 지급했다.
1937
[경기 침체 및 뉴딜 연합의 정치적 재편성]
1937년 경기 침체가 발생하여 실업률이 다시 상승했지만, 이 시기에 민주당을 다수당으로 만든 뉴딜 정책의 정치적 재편성이 '뉴딜 연합'의 창설을 통해 가시화되었다. 이는 1960년대 대통령 선거를 장악하는 기반이 되었다.
1937년 경기 침체는 실업률을 1934년 수준으로 떨어뜨렸다. 뉴딜 정책은 진보적 사상의 확산, 남부와 대도시에서의 정치기계 형성, 새로 권한을 부여받은 노동조합, 다양한 인종 집단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당을 다수당으로 만드는 정치적 재편성을 가져왔다. 이러한 재편성은 이후 1960년대 대통령 선거를 장악하는 뉴딜 연합의 창설을 통해 가시화되었다.
1938
[뉴딜 정책 사실상 마감]
1933년부터 추진된 뉴딜 정책은 1938년까지 이어졌으나, 사실상 제2차 세계 대전의 시작과 함께 마감되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뉴딜 선생은 승전 선생에게 길을 양보하고 물러났다"고 언급하며 시대적 전환을 시사했다.
뉴딜 정책은 미국을 대공황에서 구하기 위해 1933년부터 1938년까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주도한 일련의 경제 프로그램이었다. 사실상 제2차 세계 대전의 시작과 함께 뉴딜 정책은 마감됐다. 1943년 10월 루스벨트가 말한 대로 "뉴딜 선생"(Dr. New Deal)은 "승전 선생"(Dr. Win the War)에게 길을 양보하고 물러났다.
1939
[공공 기획 촉진국, 공공사업진흥국으로 개명]
뉴딜 정책의 핵심 기관 중 하나였던 공공 기획 촉진국(Works Project Administration)이 1939년 공공사업진흥국(Work Projects Administration)으로 정식 개명되었다. 이 기관은 대규모 공공사업을 통해 일자리를 창출했다.
공공 기획 촉진국(Works Project Administration)은 약 8.5백만명의 사람들을 위한 일들을 마련하였고, 1939년 공공사업진흥국(Work Projects Administration)으로 개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