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오파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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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 여왕, 파라오, 정치인, 외교관, 언어학자 + 카테고리

마케도니아 그리스 혈통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마지막 통치자 클레오파트라 7세. 그녀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동맹을 맺고 로마에 대항하며 이집트의 독립을 지키려 했습니다. 다국어에 능통했던 유일한 프톨레마이오스 군주이자 뛰어난 지략과 외교술을 겸비했던 그는 극적인 삶과 죽음으로 헬레니즘 시대의 종말을 고하며 역사에 깊은 족적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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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 7세 탄생]

클레오파트라 7세는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파라오로, 기원전 69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훗날 이집트어를 유창하게 구사한 유일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군주가 됩니다.

왕족으로서 여러 언어와 철학, 웅변술을 배우며 통치자가 될 자질을 키웠습니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마케도니아 그리스 혈통을 이어받았으며, 어머니는 클레오파트라 5세 트뤼파이나로 추정됩니다. 어릴 때부터 그리스 철학과 웅변술을 배웠으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있던 무세이온에서 교육받았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아버지의 추방과 복귀]

클레오파트라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로마의 속국이던 이집트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인해 로마로 추방되었고, 클레오파트라도 이때 아버지를 따라 로마로 간 것으로 추정됩니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로마 군대의 지원을 받아 기원전 55년에 이집트로 돌아와 왕위를 주장하던 딸 베레니케 4세를 처형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로마의 유력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바쳐 이집트 합병 위협을 피하려 했으나 결국 파산하고 추방당했습니다. 로마에 머무는 동안 베레니케 4세가 보낸 사절단의 주요 인물들을 암살하는 등 권력 복귀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이때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지원하는 로마군 장교로 복무했으며, 클레오파트라는 이때 안토니우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남동생과의 공동 통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죽자, 클레오파트라는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공동으로 이집트의 통치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나일강 수위가 낮아 흉년이 들고 로마군 주둔 문제가 발생하는 등 국정은 시작부터 불안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뛰어난 언어 능력으로 이집트어를 배운 유일한 프톨레마이오스 군주로서 백성들의 지지를 얻으려 노력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의 모국어는 코이네 그리스어였으나, 이집트어를 배운 유일한 프톨레마이오스 군주였습니다. 플루타르코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최소 7개 이상의 외국어에 능통했다고 기록했습니다. 당시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로마 공화국에 1,750만 드라크마에 달하는 막대한 빚을 남겼습니다.

[단독 군주 등극]

클레오파트라는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게 밀려나지 않고 이집트의 단독 군주로 등장했습니다.

이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고문들과의 권력 다툼이 심화되었음을 보여주며, 결국 두 남매 사이에 내전이 발생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도망쳐 시리아에서 침략군을 모으며 전력을 강화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에 반대하는 세력으로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가정교사이자 섭정인 내시 포테이노스, 또 다른 가정교사 테오도투스, 장군 아킬라스 등이 있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잠시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동맹을 맺기도 했으나, 결국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 의해 밀려났습니다.

[폼페이우스 암살]

로마 내전 중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패한 폼페이우스가 이집트로 도피했으나,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고문들은 카이사르의 이집트 점령을 막기 위해 폼페이우스를 암살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폼페이우스의 머리를 방부 처리하여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 카이사르에게 보냈습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죽음에 분노했습니다.

폼페이우스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와 정치적 동맹을 맺고 있었기에 이집트로 피난했습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고문들은 이집트가 로마 내전의 전장이 될 것을 두려워하여 폼페이우스를 암살하는 계략을 세웠습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죽음에 슬퍼하며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클레오파트라에게 화해하고 군대를 해산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카이사르와의 첫 만남]

이집트에 도착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게 폼페이우스 암살에 대한 분노를 표하며 클레오파트라와 화해를 요구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남동생에게 알리지 않고 매력적인 옷차림과 재치로 카이사르를 직접 만나 매혹시켰으며, 플루타르코스는 그녀가 침대 자루에 숨어 궁전으로 들어갔다고 기록했습니다.

이 만남은 클레오파트라의 운명을 바꾸는 결정적인 순간이 됩니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시민 회의 앞에 데려와,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유언장 내용대로 둘이 이집트를 공동 통치해야 한다고 공개했습니다. 또한, 이복누이 아르시노에 4세와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에게 키프로스를 공동 통치하도록 하여 로마에게 빼앗긴 키프로스를 이집트에게 돌려주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공성전]

카이사르의 결정에 반발한 포테이노스는 2만 군대를 동원해 알렉산드리아 궁전에 있던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를 포위했습니다.

결국 알렉산드리아 공성전이 발발했고, 기원전 47년 카이사르의 지원군이 도착하자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나일강 전투에서 사망했습니다.

이복누이 아르시노에 4세는 로마 개선식에 끌려간 후 에페소스로 추방당했습니다.

포테이노스는 카이사르의 4천 병력만으로는 자신들을 막지 못할 것이라 판단했으나, 카이사르에 의해 처형되었습니다. 아르시노에 4세는 스스로 여왕에 올랐으나, 환관 가니메데스에 의해 아킬라스 장군이 살해당하고 가니메데스가 총지휘관이 되는 등 내분도 있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이 시기 카이사르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카이사리온 탄생]

클레오파트라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들 카이사리온을 낳고 그에게 '카이사르 파라오'라는 칭호를 부여했습니다.

카이사르는 공식적으로는 카이사리온의 친부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여러 차례 카이사리온의 아버지가 카이사르임을 공식적으로 선언했습니다.

이는 이집트 왕조의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클레오파트라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카이사르는 본처 칼푸르니아와의 사이에 아직 자녀가 없었기에 카이사리온에 대해 침묵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리온을 파라오로 키워 이집트의 독립과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 했습니다.

[로마 방문 및 카이사르 암살]

클레오파트라는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함께 로마를 방문하여 카이사르의 별장에 머물렀습니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 14세에게 '로마인의 친구이자 동맹'이라는 법적 지위를 부여했습니다.

로마 포럼에 클레오파트라의 황금 조각상이 세워지는 등 이집트 여왕으로서 이례적인 대우를 받았습니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당하자,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로 돌아와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독살하고 카이사리온을 공동 통치자로 격상시켰습니다.

클레오파트라의 신하인 알렉산드리아의 소시게네스는 카이사르를 도와 기원전 45년 1월 1일 시행될 새로운 율리우스력 제작에 기여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의 로마 방문은 루페르칼리아 축제에서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에게 다이아뎀을 씌우려다 거절당한 사건에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카이사르는 유언장에서 옥타비아누스를 1차 상속인으로 지명했습니다.

[제2차 삼두정치와 동맹]

카이사르 암살 후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충신이던 돌라벨라에게 이집트에 남은 로마 군단을 파견하며 삼두정치의 편에 섰습니다.

비록 그녀의 함대가 폭풍 피해로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 못했으나, 기원전 42년 필리피 전투에서 삼두정치가 승리하자 안토니우스는 로마 공화정 동쪽 절반을 장악하게 됩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의 내전에 간접적으로 개입했으며, 카이사르 암살자들의 편에 서 있던 카시우스에게 망명한 키프로스 총독 세라피온을 처형해달라고 안토니우스에게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안토니우스와의 첫 만남]

안토니우스는 아나톨리아의 타르수스에서 클레오파트라를 초청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카시우스 지원 의혹을 풀고 레반트 지역 영토 교환을 논의하기 위해 회담에 참석했으나, 안토니우스는 그녀에게 개인적인 교제를 목적으로 접근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호화로운 탈라메고스호에서 성대한 연회를 베풀고 자신을 이시스 여신에 비유하며 안토니우스를 매혹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에게 추방된 이복누이 아르시노에 4세를 처형해달라고 설득했습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요청을 들어주었으며, 이집트에서 호화로운 왕실 생활을 즐겼습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카이사르 사후 가장 강력한 인물로 판단하여 자신의 후계자를 낳을 상대로 여겼습니다.

[안토니우스와의 쌍둥이 출산]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서 쌍둥이 아들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와 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를 낳았습니다.

안토니우스는 이들을 자신의 친자로 인정했으며, 자녀들의 이름인 '태양'과 '달'은 안토니우스가 파르티아 정복을 통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위업을 재현하고 새 시대의 상징이 되겠다는 클레오파트라의 야망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안토니우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집트를 떠났고, 클레오파트라는 그에게 200척의 선박을 지원했습니다. 이 둘은 기원전 37년이 되어서야 재회했지만, 서신으로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습니다. 안토니우스의 본처 풀비아의 죽음과 옥타비아누스와의 평화협정으로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여동생 소 옥타비아와 결혼하여 클레오파트라에게 경쟁자가 생겼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국 영토 확장]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를 통해 킬리키아와 키프로스를 포함한 과거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영토를 거의 다 복구시켜주었습니다.

아코, 코엘레 시리아, 예리코 주변 지역, 홍해 아카바만 일부, 크레타와 리비아 해안의 키레네 등이 클레오파트라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은 번영을 맞이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로마의 직접 지배 영토를 내어주면서까지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을 확장시킨 점을 공격하며 안토니우스를 비난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에게 할양된 팔레스타인의 예리코는 임대의 형식으로 헤로데에게 다시 돌려주었으며, 이로 인해 클레오파트라와 헤로데 사이에 갈등의 씨앗이 심어졌습니다.

[셋째 아들 출산과 파르티아 원정 실패]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제국 정벌에 유프라테스강까지 동행했으며, 임신으로 인해 그곳에서 돌아왔습니다.

같은 해 여름, 안토니우스와의 셋째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가 태어났습니다.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은 동맹군인 아르메니아 왕의 배신으로 실패했으며,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지원을 받아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왔습니다.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 원정 실패 후 로마로 돌아가는 대신 알렉산드리아로 향하여 클레오파트라와 아들들을 만났습니다. 이로 인해 로마 내에서 안토니우스의 입지는 더욱 약화되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봉헌식]

안토니우스는 아르메니아 원정에서 승리한 뒤 알렉산드리아에서 로마의 개선 행진을 모방한 봉헌식을 거행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이시스 여신 복장을 하고 '왕중여왕'으로, 카이사리온은 '왕중왕'으로 선포했습니다.

안토니우스에게서 낳은 자녀들에게도 아르메니아, 메디아, 파르티아, 시리아, 킬리키아, 크레타, 키레네 등의 광대한 영토를 할양했습니다.

이 파격적인 선언은 로마의 전통을 무시한 것으로 옥타비아누스의 강력한 비난을 받았습니다.

이 축제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공식적으로 결혼식을 올렸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 내용을 대중에게 공개하려 했으나, 안토니우스를 지지하던 두 집정관에 의해 검열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사이의 선전전이 시작되는 주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옥타비아누스와의 선전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사이에 향후 수년간 이어질 치열한 선전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로마의 영토를 클레오파트라에게 내어주고, 옥타비아를 등한시하며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했다고 비난했습니다.

옥타비아누스의 선전물 속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세뇌하는 마녀이자 문명을 파괴하는 위험한 존재로 묘사되었습니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가 레피두스를 불법으로 삼두에서 물러나게 하고 권리를 제한했다고 주장하며 맞섰습니다. 대 플리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진주 수천만 알을 식초에 녹여 마셨다고 주장하는 등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형성하는 일화들이 확산되었습니다. 이러한 선전전은 훗날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대중의 인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클레오파트라에게 선전포고]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불법적으로 확보하여 대중에게 공개했습니다.

유언장에는 카이사리온이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지명되고, 알렉산드리아 봉헌식 선언이 확증되며,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알렉산드리아에 묻히기를 원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를 전쟁 명분으로 삼은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아닌 클레오파트라에게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집정관으로서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의 노예로서 로마의 자유를 전복하려 한다고 비난했습니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에게 공식적인 이혼 선언서를 보내며 옥타비아누스의 분노를 더욱 키웠습니다. 안토니우스의 유언은 알렉산드리아를 로마 공화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을 것이라는 내용까지 포함되어 로마인들의 공분을 샀습니다.

[악티움 해전 패배]

그리스 악티움에서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이끄는 옥타비아누스의 해군과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 함대가 대치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함대 후방에서 60척의 배를 지휘했으나, 연합군은 결국 패배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펠로폰네소스반도로 철수했고, 안토니우스는 그녀의 배에 옮겨 타 후퇴했습니다.

이 패배는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습니다.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옥타비아누스보다 거대했으나 훈련도가 낮았습니다. 안토니우스의 오랜 동료 델리우스와 갈라티아 왕 아민타스 등이 옥타비아누스 진영으로 망명하는 등 연합군의 사기는 떨어졌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집트 방어가 주목적인 클레오파트라가 이탈리아 직접 공격을 거부한 것을 비난했습니다.

[안토니우스의 비극적 자살]

악티움 해전 패배 후 옥타비아누스의 이집트 침공이 본격화되자, 안토니우스의 해군과 기병대가 옥타비아누스에게 투항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가 목숨을 끊었다는 거짓 소식을 들은 안토니우스는 절망하여 스스로 칼로 배를 찔러 자살했습니다.

그는 클레오파트라가 있는 무덤으로 옮겨져 숨을 거두었습니다.

안토니우스는 자살 시도 후 숨이 붙어 있는 상태로 클레오파트라가 숨어 있던 무덤으로 옮겨졌습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자신이 명예롭게 죽었으며 옥타비아누스의 동료 프로쿨레이우스는 믿을만한 자라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안토니우스의 죽음은 클레오파트라에게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음을 의미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의 최후]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를 로마 개선식에 포로로 끌고 가려 했으나, 클레오파트라는 이를 거부하며 무덤에 숨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녀가 독사에 물려 죽었다는 야사가 널리 알려져 있으며, 하인 에이라스와 샤미온도 함께 죽음을 택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에 분개했지만, 그녀는 안토니우스 옆에 왕의 위엄을 갖춘 채로 매장되었습니다.

이로써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멸망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생존을 보장했지만, 이집트 왕국에 대한 어떠한 계획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리온을 상이집트로 보내 도피시키려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를 만났을 때 "개선식 앞에 서지 않겠다"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현존하는 그녀의 거의 유일한 육성 기록입니다.

[카이사리온 처형 및 헬레니즘 종말]

클레오파트라의 죽음 이후, 아들 카이사리온은 옥타비아누스가 자신을 왕으로 인정해주리라는 헛소문에 속아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의 명령에 의해 처형당하며 1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로써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모든 혈통이 끊어졌고, 알렉산드로스 3세 이후 약 300년간 이어져 온 헬레니즘 시대가 공식적으로 종말을 고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세상에 시저는 한 명만 존재해야 한다"는 철학자 아리우스 디디모스의 조언에 따라 카이사리온을 제거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이 멸망하고 이집트는 로마 제국의 아이깁투스 속주가 되었으며,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로 개명하며 로마 황제로 제국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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