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티움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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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로마 제국, 고대사, 해전 + 카테고리

악티움 해전은 단순한 해상 충돌을 넘어, 로마 공화정의 종말과 제국의 탄생을 알린 역사의 거대한 분수령이었습니다. 카이사르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벌인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그리고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야망이 지중해의 푸른 바다 위에서 격돌했습니다. 이 전쟁은 권력을 향한 집착과 배신, 그리고 사랑이 뒤엉킨 한 편의 대서사시였으며, 승자인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최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로 거듭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기 위한 치열한 수 싸움과 극적인 반전이 가득한 이 기록은 고대 세계의 운명을 바꾼 가장 화려한 마지막 전투를 조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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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1C

[카이사르의 암살]

로마의 종신 독재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원로원에서 암살당하며 로마 전역은 거대한 권력의 공백 상태에 빠집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훗날 악티움에서 맞붙게 될 후계자들 사이의 기나긴 투쟁의 서막이 되었습니다. 공화정 수호라는 명분 뒤에 숨겨진 야망들이 분출되기 시작했습니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등 공화주의자들에 의해 자행된 이 암살은 로마 정치 시스템의 붕괴를 가속화했습니다.
이후 카이사르의 양자로 지명된 옥타비아누스가 정치 무대에 등장하며 안토니우스와의 갈등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옥타비아누스의 입성]

카이사르의 양자이자 후계자로 지명된 어린 옥타비아누스가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 로마에 도착합니다. 그는 안토니우스의 견제 속에서도 카이사르의 병사들을 포섭하며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다지기 시작합니다.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그는 카이사르의 이름으로 거액의 돈을 뿌리며 존재감을 과시했습니다.

당시 18세에 불과했던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유산을 넘겨주지 않자 사재를 털어 카이사르의 약속을 이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카이사르의 베테랑 병사들이 옥타비아누스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세력 균형이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제2차 삼두정치 결성]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가 국가 재건을 명분으로 공식적인 권력 연합체를 구성합니다. 이들은 로마를 분할 통치하며 반대파를 숙청하고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 집중합니다. 불안한 평화가 유지되었으나 내부적으로는 주도권을 잡기 위한 치열한 암투가 계속되었습니다.

티티우스 법(Lex Titia)을 통해 5년 임기의 독재적 권력을 법적으로 보장받았습니다.
숙청 목록에 올랐던 키케로를 포함한 수많은 정적들이 처형되었으며 이는 삼두정의 공포 정치를 상징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공포의 대숙청 단행]

삼두정은 자금 확보와 정적 제거를 위해 대규모 숙청 명단을 발표하고 로마 전역을 공포로 몰아넣습니다. 수많은 원로원 의원과 기사 계급이 재산을 몰수당하고 목숨을 잃으며 삼두정의 지배력은 정점에 달합니다. 이 과정에서 로마의 위대한 웅변가 키케로 역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합니다.

숙청을 통해 확보된 자금은 이후 공화파와의 전쟁을 위한 군비로 사용되었습니다.
키케로의 잘린 손과 머리가 로마 광장에 전시되는 등 반대 세력에 대한 잔혹한 경고가 이어졌습니다.

[필리피 전투의 승리]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연합군이 카이사르를 암살했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군대를 격파합니다. 이 승리로 로마 내 공화주의 세력은 궤멸되었으며 제국은 삼두정의 손안에 완전히 들어옵니다. 전투에서의 활약으로 안토니우스의 군사적 위상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패배 후 자결하였으며 이로써 로마 공화정을 복원하려던 마지막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실질적인 군사적 공적은 안토니우스가 세웠으나 옥타비아누스는 승리의 결과물을 교묘하게 챙겼습니다.

[타르소스의 운명적 만남]

동방을 시찰하던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타르소스에서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이 만남은 단순한 연애를 넘어 로마와 이집트의 거대한 정치적 결탁으로 이어집니다. 안토니우스는 점차 로마인으로서의 정체성보다 이집트의 군주와 같은 삶에 젖어들기 시작합니다.

클레오파트라는 금으로 장식된 배를 타고 나타나 안토니우스를 매료시켰다고 전해집니다.
이 결합은 훗날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를 외국 여왕에게 홀린 반역자로 몰아세우는 결정적인 선전 도구가 되었습니다.

[페루시아 전쟁의 발발]

안토니우스의 아내 풀비아와 동생 루키우스가 이탈리아에서 옥타비아누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킵니다. 안토니우스가 부재한 사이 벌어진 이 내전은 삼두정 내부의 균열을 극명하게 드러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무력으로 이들을 진압하며 이탈리아 내에서의 지배력을 강화합니다.

풀비아는 안토니우스의 관심을 끌고 옥타비아누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했으나 결국 실패했습니다.
이 사건은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사이의 외교적 긴장을 최고조로 끌어올렸습니다.

[브룬디시움 협정 체결]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사이의 내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로마 영토를 동서로 나누는 협정을 체결합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서방을, 안토니우스는 동방을 통치하기로 합의하며 다시 한번 동맹을 확인합니다. 관계 개선의 증표로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누나인 옥타비아와 결혼합니다.

안토니우스는 동방의 부유한 속주들을 차지했으며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본토를 포함한 서방을 통치하며 내실을 다졌습니다.
옥타비아와의 정략결혼은 두 사람 사이의 마지막 평화적 연결 고리 역할을 했습니다.

[미세눔 협정과 일시 정전]

해상을 장악하고 로마의 식량 보급을 차단하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삼두정이 협상을 맺습니다. 이 협정으로 섹스투스는 시칠리아와 사르데냐의 지배권을 인정받고 해상 봉쇄를 풀기로 약속합니다. 하지만 이 평화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며 오래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옛 적수였던 폼페이우스 대왕의 아들로 해상 세력의 중심이었습니다.
이 협정은 로마의 식량난을 잠시 해결해주었으나 옥타비아누스는 섹스투스를 제거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벤티디우스의 파르티아 승리]

안토니우스의 부장 벤티디우스가 로마를 침공했던 파르티아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둡니다. 이 승리로 동방 속주의 안정이 회복되었으며 안토니우스의 권위는 동방에서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이는 카이사르 이후 파르티아에 거둔 가장 큰 군사적 성과 중 하나였습니다.

파르티아의 왕자 파코루스가 전투 중에 전사하며 파르티아의 서방 진출 야욕은 꺾였습니다.
안토니우스는 이 공적을 바탕으로 파르티아 본토에 대한 대규모 원정을 꿈꾸게 됩니다.

[타렌툼 협정과 권력 연장]

삼두정의 임기가 만료되자 두 세력은 타렌툼에서 만나 권력을 다시 5년 더 연장하기로 합의합니다. 옥타비아누스는 해적 소탕을 위한 함대를,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 원정을 위한 병력을 서로 교환하기로 약속합니다. 하지만 서로에 대한 의구심은 더욱 깊어져만 갔습니다.

이 협정은 삼두정의 합법성을 유지하기 위한 마지막 공식적인 협력이었습니다.
안토니우스는 함선을 빌려주었으나 옥타비아누스는 약속한 보병 병력을 제대로 보내지 않아 갈등의 골이 깊어졌습니다.

[안토니우스와 여왕의 재결합]

안토니우스가 파르티아 원정을 준비하며 안티오크에서 클레오파트라와 다시 만나 긴밀한 관계를 이어갑니다. 그는 정식 아내인 옥타비아를 로마로 돌려보내고 클레오파트라와 사실상의 부부 생활을 시작합니다. 이 소식은 로마인들에게 안토니우스가 외국 세력과 결탁했다는 증거로 비춰졌습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경제적 지원이 절실했으나 이 선택은 정치적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안토니우스의 도덕적 타락과 국가 배신으로 규정하여 비난을 쏟아냈습니다.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대패]

야심 차게 준비했던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이 엄청난 손실을 입으며 참담한 실패로 끝납니다. 그는 후퇴 과정에서 수만 명의 병사를 잃었으며 군사적 명성에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 이 실패로 안토니우스는 군사적 재기를 위해 클레오파트라의 지원에 더욱 의존하게 됩니다.

혹독한 겨울 날씨와 파르티아 기병대의 끊임없는 습격으로 안토니우스군은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습니다.
로마에서는 이 패배를 안토니우스의 무능함으로 비난하며 옥타비아누스의 입지를 강화하는 기회로 활용했습니다.

[레피두스의 실각과 축출]

섹스투스 소탕 후 자신의 지분을 요구하며 반기를 들었던 레피두스가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권력을 박탈당합니다. 옥타비아누스는 레피두스의 병사들을 회유하여 그를 고립시켰으며 삼두정 중 한 축을 완전히 제거합니다. 이제 로마의 권력은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라는 두 거두의 대결로 압축되었습니다.

레피두스는 목숨은 건졌으나 모든 정치적 권한을 잃고 은둔 생활에 들어갔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레피두스가 통치하던 아프리카 지역을 흡수하며 서방의 절대 강자로 우뚝 섰습니다.

[나울로쿠스 해전의 승리]

옥타비아누스의 오른팔 아그리파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해적 함대를 격파하고 지중해 서부의 제해권을 장악합니다. 이 승리로 옥타비아누스는 이탈리아의 식량 공급망을 안정시키고 대중적 인기를 한몸에 받게 됩니다. 해전에서 승리하는 법을 터득한 아그리파의 군사적 역량이 빛을 발했습니다.

아그리파는 하르팍스라는 갈고리 투척기를 사용하여 적선을 끌어당겨 백병전을 벌이는 전술로 승리했습니다.
이후 섹스투스는 동방으로 도주했으나 결국 처형당하며 폼페이우스 가문의 저항은 끝이 났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증여]

안토니우스가 아르메니아 원정 승리 후 알렉산드리아에서 화려한 개선식을 거행하며 로마 영토를 클레오파트라와 그 자녀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그는 카이사르의 아들이라고 주장되는 카이사리온을 진정한 후계자로 선포하며 옥타비아누스를 정면으로 도발합니다. 이 사건은 로마 여론을 극도로 악화시키는 결정타가 되었습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왕 중의 여왕으로 선포하고 자신들의 자녀들에게 동방의 주요 속주 통치권을 분배했습니다.
원로원은 이를 로마의 주권을 타국에 양도하는 반역 행위로 간주하며 격분했습니다.

[제2차 삼두정치 공식 종료]

삼두정의 법적 임기가 종료되었으나 안토니우스는 여전히 동방에서 절대 권력을 행사하며 로마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더 이상 안토니우스를 동료가 아닌 제거해야 할 적수로 규정하고 공격적인 행보를 보입니다. 양측의 외교적 수사들은 이제 전쟁을 예고하는 비난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삼두정의 임기가 끝났음을 선포하며 공화정 체제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위선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실제로는 안토니우스에 대한 대중의 불신을 조장하며 독자적인 전쟁 명분을 쌓아갔습니다.

[안토니우스의 공식 이혼]

안토니우스가 마침내 옥타비아누스의 누나인 옥타비아에게 공식적으로 이혼을 통보하며 로마와의 마지막 끈을 끊어버립니다. 이는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으며 두 남자 사이의 개인적인 감정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됩니다. 안토니우스는 이제 이집트의 왕으로서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옥타비아는 로마에서 현숙한 아내의 표상으로 칭송받고 있었기에 그녀를 버린 안토니우스의 행위는 공분을 샀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누나의 굴욕을 정치적으로 교묘하게 이용하여 안토니우스의 파렴치함을 공격했습니다.

[비밀 유언장의 공개]

옥타비아누스가 베스타 신전에 보관되어 있던 안토니우스의 비밀 유언장을 강제로 탈취하여 민회에서 공개합니다. 유언장에는 자신이 죽으면 알렉산드리아에 묻히고 싶다는 내용과 클레오파트라의 자식들에게 로마 영토를 상속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로마 시민들은 안토니우스가 로마를 배신했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신성한 베스타 신전을 침범하는 것은 금기였으나 옥타비아누스는 국가의 안위를 명분으로 이를 강행했습니다.
이 사건은 안토니우스의 지지자들마저 등을 돌리게 만든 결정적인 심리전의 승리였습니다.

[이집트에 대한 전쟁 선포]

로마 원로원은 안토니우스가 아닌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여왕에게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합니다. 이는 로마인끼리의 내전이라는 비판을 피하고 외국 세력에 대항하는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명분을 얻기 위한 옥타비아누스의 전략이었습니다. 안토니우스는 여왕을 돕는 로마의 반역자로 규정되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고대 의식에 따라 전쟁을 선포하며 전쟁의 신성함을 강조했습니다.
이로써 안토니우스를 따르는 로마 병사들은 조국 로마와 맞서 싸워야 하는 윤리적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아그리파의 선제 공격]

옥타비아누스의 제독 아그리파가 안토니우스의 해상 보급 기지인 메토네를 전격 습격하여 점령합니다. 이 기습으로 안토니우스의 보급선은 위협받기 시작했고 지중해의 제해권이 서서히 옥타비아누스 측으로 기울기 시작합니다. 아그리파는 뛰어난 전략으로 안토니우스의 함대를 고립시키는 작전을 펼칩니다.

메토네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단의 핵심 요충지로, 이집트에서 오는 보급품이 거쳐 가는 곳이었습니다.
아그리파의 과감한 해상 기동은 안토니우스 함대의 기동 범위를 극도로 제한시켰습니다.

[옥타비아누스의 상륙과 대치]

옥타비아누스가 주력 부대를 이끌고 그리스 서해안에 상륙하여 악티움 북쪽에 진을 칩니다. 이에 맞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도 악티움 곶에 거대한 요새와 함대를 집결시키며 팽팽한 대치 상태에 돌입합니다. 고대 세계의 운명을 결정지을 두 거대한 군대가 드디어 한곳에서 마주 보게 되었습니다.

안토니우스군은 숫적으로 우세했으나 아그리파의 해상 봉쇄로 인해 점차 식량과 물자 부족에 시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안토니우스군을 압박하며 실수를 유도했습니다.

[안토니우스 진영의 악재]

무더운 여름이 시작되자 안토니우스의 캠프에 전염병이 창궐하고 식수 공급에 차질이 생깁니다. 보급로가 차단된 상태에서 병사들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졌고 장교들 사이에서는 옥타비아누스 측으로의 전향자가 속출합니다. 안토니우스는 내부적인 붕괴 위기에 직면하며 초조해지기 시작합니다.

말라리아와 이질 등으로 수천 명의 병사가 사망했으며 로마 출신의 원로원 의원들까지 옥타비아누스 진영으로 탈출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의 참견에 불문을 품은 로마 지휘관들의 반발은 안토니우스의 지휘권을 약화시켰습니다.

[델리우스의 배신]

안토니우스의 핵심 참모였던 퀸투스 델리우스가 옥타비아누스 진영으로 투항하며 안토니우스의 최종 작전 계획을 폭로합니다. 이로 인해 안토니우스가 준비했던 기습적인 돌파 전략은 사전에 탄로 났고 옥타비아누스는 이에 완벽히 대비할 수 있게 됩니다. 정보의 우위를 점한 옥타비아누스는 승기를 잡습니다.

델리우스는 안토니우스가 해상을 통해 탈출을 시도하려 한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전달했습니다.
이후 델리우스는 역사의 변절자로 불리게 되었으나 그의 배신은 전투의 향방을 가른 결정적 사건이었습니다.

[안토니우스의 최후 작전 회의]

육상 전투가 불리하다고 판단한 클레오파트라는 함대를 이끌고 포위망을 돌파하여 이집트로 퇴각할 것을 강력히 권고합니다. 안토니우스는 로마 장군으로서의 자존심을 버리고 여왕의 의견을 따라 해전을 통한 돌파를 결정합니다. 그는 함선에 보물을 가득 싣고 결전의 날을 기다립니다.

많은 로마 지휘관들이 육상에서 싸울 것을 간청했으나 안토니우스는 이를 묵살했습니다.
이 결정은 사실상 승리보다는 함대를 보존하여 후퇴하기 위한 고육지책에 가까웠습니다.

[한낮의 대격돌 시작]

정오 무렵 바닷바람이 바뀌자 안토니우스의 함대가 전진하며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됩니다. 아그리파는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를 넓게 펼쳐 안토니우스의 거대 함선을 외곽으로 유인합니다. 바다 위는 수천 척의 배들이 내뿜는 함성과 노 젓는 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거대한 5단 노선(Quinquereme)들이 가진 충격력을 믿고 정면 돌파를 시도했습니다.
반면 아그리파는 빠른 리부르나(Liburna) 함선을 이용해 적의 측면을 공략하며 포위망을 형성했습니다.

[아그리파의 우회 기동]

아그리파가 지휘하는 옥타비아누스군의 북익이 안토니우스군의 대형을 무너뜨리기 위해 크게 우회합니다. 이를 막기 위해 안토니우스군의 지휘관 푸블리콜라가 대열을 넓히자 중앙에 치명적인 틈이 발생합니다. 이 순간의 전술적 선택이 전체 전투의 흐름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아그리파는 뛰어난 해상 지휘 능력을 바탕으로 적의 대열을 강제로 늘어뜨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로 인해 안토니우스의 중앙 함대는 지원을 받지 못한 채 고립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화공과 백병전의 전개]

옥타비아누스의 소형 함선들이 안토니우스의 거대 전함들에 접근하여 불화살과 투석기를 퍼붓습니다. 안토니우스의 병사들은 높은 선상에서 방어에 주력하지만 민첩한 적들의 파상 공세에 고전합니다. 바다 곳곳에서 함선들이 불길에 휩싸이며 비명이 울려 퍼졌습니다.

안토니우스의 배들은 성벽처럼 높고 견고했으나 기동력이 부족하여 아그리파의 잽싼 함선들을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옥타비아누스군은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면서 원거리 화공으로 적의 상부 구조물을 파괴하는 전술을 구사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의 돌발 탈출]

전투가 한창이던 오후, 후방에 대기하던 클레오파트라의 이집트 함선 60척이 갑자기 돛을 올리고 전장을 이탈합니다. 그녀는 전투의 승패를 기다리지 않고 미리 계획된 대로 남쪽을 향해 전속력으로 도주했습니다. 이 예상치 못한 행동은 아군 함대 전체에 엄청난 심리적 충격을 주었습니다.

바람이 남풍으로 바뀌는 순간을 포착한 클레오파트라는 금을 가득 실은 자신의 함대를 이끌고 포위망의 틈을 뚫었습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것이 패배를 예견한 도주였다고 기록하지만 함대를 보존하기 위한 전략적 후퇴였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안토니우스의 비극적 선택]

클레오파트라의 배가 멀어지는 것을 본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함대를 버리고 작은 배로 갈아타 그녀의 뒤를 쫓습니다. 사령관이 전장을 이탈했다는 소식은 남아 싸우던 병사들에게 배신감과 절망을 안겨주었습니다. 한때 위대한 장군이었던 자가 사랑과 생존을 위해 명예를 저버린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함이 여전히 전투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여왕을 따라가기 위해 전장을 떠났습니다.
이후 그는 클레오파트라의 배에 올랐으나 며칠 동안 아무와도 말하지 않고 고뇌에 빠졌다고 전해집니다.

[남겨진 함대의 저항]

지휘관들이 사라진 후에도 안토니우스의 함대 일부는 저녁 늦게까지 완강히 버티며 싸움을 이어갑니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군이 사용한 화공으로 인해 많은 배가 소실되고 저항 동력을 잃게 됩니다. 결국 해가 지면서 격렬했던 바다 위의 학살은 옥타비아누스의 완승으로 기웁니다.

안토니우스의 병사들은 자신들의 장군이 도망쳤다는 사실을 한동안 믿지 못하고 사력을 다해 싸웠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항복을 권유했으나 많은 이집트 및 로마 연합군 병사들이 배와 함께 수몰되었습니다.

[해상 잔존 세력의 항복]

전투 다음 날 아침, 포위망에 갇혀 있던 안토니우스의 함대 300여 척이 옥타비아누스에게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합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승리를 선언하고 항복한 병사들을 자신의 군단으로 흡수하며 세력을 더욱 키웁니다. 이로써 안토니우스의 해상 전력은 완전히 소멸되었습니다.

항복한 함선들 중 상태가 좋은 것들은 옥타비아누스의 함대에 편입되었고 나머지는 불태워졌습니다.
이 승리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지중해 전체에 대한 통제권을 선사했습니다.

[육상 군단의 전원 투항]

해전의 결과를 지켜보던 안토니우스의 육상 지휘관 카니디우스 크라수스가 부대를 버리고 도주하자 19개 군단이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합니다. 안토니우스가 공들여 키운 최정예 육군마저 사라지면서 전쟁의 승패는 사실상 완전히 결정되었습니다. 이제 옥타비아누스를 가로막을 군사 세력은 이탈리아 근처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병사들은 일주일 동안 안토니우스의 복귀를 기다렸으나 소식이 없자 옥타비아누스에게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이로써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역사상 전무후무한 규모의 대군을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옥타비아누스의 이집트 진격]

그리스에서 전열을 정비한 옥타비아누스가 마침내 최후의 보루인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향해 진군합니다. 안토니우스는 남은 병력을 모아 방어를 시도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운 상태였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육로와 해로 양방향에서 압박을 가하며 적의 숨통을 조여갔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동방 속주들을 차례로 평정하며 안토니우스의 자금줄과 인력 보급을 차단했습니다.
이집트 내부에서도 옥타비아누스에게 협력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안토니우스의 비극적 자결]

알렉산드리아 외곽 전투에서 패배하고 클레오파트라가 죽었다는 거짓 소식을 들은 안토니우스가 자신의 칼로 자결을 시도합니다. 그는 치명상을 입은 상태에서 클레오파트라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의 은신처로 옮겨져 그녀의 품 안에서 숨을 거둡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의 참담하고도 슬픈 최후였습니다.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노예 에로스에게 죽여달라고 부탁했으나 에로스가 대신 자결하자 스스로 배에 칼을 꽂았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옥타비아누스의 유일한 라이벌이 공식적으로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클레오파트라의 마지막 저항]

옥타비아누스의 포로가 되어 로마의 개선식에 끌려갈 위기에 처하자 클레오파트라 여왕이 자결을 선택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그녀는 독사에 물려 죽음을 맞이했으며 이는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그녀의 죽음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이집트라는 거대한 부를 온전히 선사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녀를 살려 개선식의 전리품으로 활용하려 했으나 여왕의 자존심을 꺾지 못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과 함께 고대 이집트의 마지막 파라오 시대가 막을 내렸습니다.

[카이사리온의 처형]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친아들이라고 주장되던 카이사리온을 찾아내어 처형합니다. 그는 카이사르가 너무 많아도 좋지 않다는 냉혹한 판단 아래 자신의 잠재적 정적을 완전히 제거했습니다. 이로써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유일하고 독점적인 후계자 지위를 확립합니다.

카이사리온은 인도로 도피하려 했으나 옥타비아누스의 군대에 잡혀 돌아온 뒤 살해되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 사이의 자녀들은 옥타비아누스의 누나인 옥타비아의 손에서 키워졌습니다.

[이집트의 속주화]

이집트가 로마의 직할 속주로 편입되면서 옥타비아누스의 개인 자산과 같은 지위를 갖게 됩니다. 이집트의 막대한 곡물과 금은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내 지배력을 강화하고 시민들을 선무하는 데 핵심적인 자원이 되었습니다. 로마 경제는 이집트의 합병으로 유례없는 풍요를 맞이합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 의원들이 자신의 허가 없이 이집트에 발을 들이는 것을 금지하며 철저히 통제했습니다.
이집트에서 쏟아져 들어온 금은 로마의 이자율을 낮추고 부동산 가치를 폭등시켰습니다.

[야누스 신전의 문 폐쇄]

로마 원로원이 평화가 찾아왔음을 상징하기 위해 야누스 신전의 문을 닫도록 명령합니다. 이는 로마 건국 이래 단 세 번밖에 없었던 희귀한 사건으로 옥타비아누스가 긴 내전을 끝내고 평화를 가져왔음을 공식화한 것입니다. 로마 시민들은 지긋지긋한 전쟁의 종식에 열광했습니다.

야누스의 문은 전쟁 중에는 열려 있고 평화 시에만 닫히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통해 자신이 단순한 정복자가 아닌 평화의 수호자임을 대대적으로 홍보했습니다.

[사흘간의 위대한 개선식]

로마로 귀환한 옥타비아누스가 일리리아, 악티움, 그리고 이집트에서의 승리를 축하하는 화려한 개선식을 거행합니다. 그는 로마 최고의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사실상 국가의 유일한 지배자임을 만천하에 드러냅니다. 거리마다 황금과 전리품이 넘쳐났고 축제는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클레오파트라 여왕은 이미 죽었기에 그녀의 모형이 수레에 실려 행진에 등장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병사들에게 엄청난 보너스를 지급하고 시민들에게 곡물을 무상으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원로원 정화와 질서 재건]

옥타비아누스가 감찰관 권한을 사용하여 원로원 의원 수를 줄이고 부적격자들을 축출합니다. 그는 전쟁 중에 어지러워진 로마의 위계질서를 바로잡고 자신에게 충성하는 인물들로 원로원을 재구성합니다. 이는 공화정의 외양을 갖추면서도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는 약 190명의 의원을 사퇴시켰으며 원로원의 품격을 높인다는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제1인자(Princeps)로서의 권위를 확고히 다졌습니다.

[권력 이양과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가 원로원에서 모든 비상 권한을 반납하고 공화정으로의 복귀를 선언하는 정치적 쇼를 연출합니다. 감동한 원로원은 그에게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헌정하며 사실상 종신 지배권을 부여합니다. 이 날은 로마 제국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날로 기록됩니다.

그는 형식적으로는 로마의 전통적인 관직을 수행했으나 실질적으로는 군대와 재정을 모두 장악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은 그가 인간을 넘어 신성한 존재에 가까워졌음을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승리 기념 도시 니코폴리스]

아우구스투스가 악티움 해전의 현장 근처에 승리를 기념하는 도시 니코폴리스를 건설합니다. 그는 자신이 진을 쳤던 곳에 거대한 기념비를 세우고 5년마다 열리는 대규모 경기를 개최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승리의 기억을 영원히 각인시키기 위한 도시 계획이었습니다.

니코폴리스는 승리의 도시라는 뜻으로 그리스 북서부의 핵심 거점으로 육성되었습니다.
해전에서 포획한 적선들의 구리 선수(Ram)들이 기념탑 전면에 장식되었습니다.

[최고 제사장 취임]

오랜 라이벌이었던 레피두스가 사망하자 아우구스투스가 로마 최고의 종교적 직위인 폰티펙스 막시무스에 오릅니다. 이로써 그는 군사, 정치에 이어 종교적 권위까지 한 손에 거머쥔 완전한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국가의 모든 신성한 의식은 이제 그를 중심으로 거행되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옛 종교 전통을 복원하고 도덕성을 강조하는 사회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자신을 카이사르의 아들이자 신들의 보호를 받는 자로 위치시켰습니다.

[국부(Pater Patriae) 칭호]

원로원과 로마 인민이 아우구스투스에게 국가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공식 헌정합니다. 이는 그의 오랜 통치가 가져온 평화와 안정을 찬양하는 절정의 순간이었으며 그의 권위가 절대적임을 상징했습니다. 악티움의 승리자가 로마의 수호자로 완전히 각인된 것입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칭호를 자신의 생애 중 가장 영광스러운 업적으로 꼽았습니다.
로마는 이제 내전의 공포를 잊고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 시대로 진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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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의 죽음과 유산]

로마 제국의 기틀을 닦은 아우구스투스가 75세의 나이로 평온하게 숨을 거둡니다. 그는 임종 직전 진흙으로 된 로마를 받아 대리석의 로마로 남겼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으며 그의 사후 로마는 안정적인 황제 계승 체제를 유지합니다. 악티움 해전에서 시작된 그의 야망은 거대한 제국이라는 결실을 맺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양자 티베리우스를 후계자로 지명하여 평화적인 권력 이양을 실현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의 통치 방식은 이후 수백 년간 지속될 로마 제국의 표준 모델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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