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
연표
BC 1C
[아우구스투스 탄생]
기원전 63년 9월 23일, 로마의 팔라티누스 언덕 근처에서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기사 가문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조카딸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사망 후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랐으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관심을 받으며 성장했다.
[아버지 사망]
옥타비아누스가 네 살 때 아버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가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는 시리아 총독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와 재혼했다.
그는 외할머니 율리아 카이사리스의 손에서 자라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영향권에 들어섰다.
[외할머니 장례식 추모사]
외할머니 율리아 카이사리스가 사망하자, 옥타비아누스는 장례식에서 추모사를 낭독하며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를 계기로 어머니와 계부가 그를 적극적으로 단련시키기 시작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과 후계자 지명]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날, 옥타비아누스는 유언에 따라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어 그의 재산 2/3를 상속받고 정치적 후계자가 되었다.
이로써 그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며 로마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된다.
카이사르가 살아있는 적자가 없었기에 그의 양자 지명은 옥타비아누스에게 로마 최고 권력을 향한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로마 귀환과 안토니우스 대립]
카이사르의 죽음 소식을 들은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로 돌아와 양부의 유산을 요구하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그는 카이사르의 병사들과 노병들의 지지를 얻으며 빠르게 군사력을 키워나갔고, 안토니우스를 로마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제2차 삼두 정치 결성 (세계최초)]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의 지원을 받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격파하고 기원전 43년 8월 19일, 불과 19세의 나이로 로마의 최고 관직인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그 해 10월, 그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제2차 삼두 정치'를 결성했다.
이는 로마 역사상 전례 없는 공식적인 군사 독재 체제로, 평민들의 지지를 받아 법적인 효력을 가진 세계최초의 삼두 정치였다.
이들은 카이사르 암살자들과 대립하는 한편, 300명의 원로원 의원과 2천 명의 기사 계급을 숙청하는 등 피의 혁명을 단행하여 로마의 정치 지형을 완전히 뒤바꾸었다.
로마법에 따른 공식적인 군사 독재 체제는 제2차 삼두 정치가 세계 최초이며, 이는 기존의 비공식적인 제1차 삼두 정치와는 다르다. 이들은 자신들의 병사들에게 월급을 주기 위해 숙청을 감행하고 재산을 몰수했으며, 특히 키케로와 같은 공화파 인사들도 희생되었다. 이 사건은 훗날 '로마 혁명'이라 불리며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새로운 정치 세력 구축의 기반이 되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신격화]
로마 원로원이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신으로 선포하며 '신성한 율리우스'라 칭했다.
양자인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을 '신의 아들'(Divi filius)이라 칭하며 자신의 권력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고, 대중의 지지를 얻는 데 활용했다.
[필리피 전투 승리]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마케도니아 필리피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주범인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군대와 격돌했다.
두 차례의 전투 끝에 삼두 정치 세력이 승리했으며,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자살했다.
이 승리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제국 내의 반대파를 숙청하고 권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
[페루시아 전쟁과 정치적 숙청]
옥타비아누스의 퇴역병 정착 계획에 대한 불만으로 안토니우스의 동생 루키우스 안토니우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옥타비아누스는 페루시아에서 이들을 진압하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기일인 3월 15일에 루키우스에게 충성했던 300명의 원로원 의원과 기사 계급 인사를 처형하며 강력한 경고를 보냈다.
이 잔인한 숙청은 그의 정치 인생에 오점을 남겼다.
또한 그는 정략적으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의 동맹을 위해 스크리보니아와 결혼했다.
[브룬디시움 조약 체결]
안토니우스의 부인 풀비아의 죽음과 백인대장들의 항명으로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잠정적으로 화해했다.
그들은 브룬디시움 조약을 통해 로마 영토를 레피두스는 아프리카, 옥타비아누스는 서방, 안토니우스는 동방으로 분할하여 통치하기로 합의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더 확고한 동맹을 맺기 위해 자신의 친누나 소 옥타비아를 안토니우스에게 시집보내며 정치적 유대를 강화했다.
[리비아 드루실라와 재혼]
옥타비아누스는 딸 율리아를 낳은 스크리보니아와 이혼하고, 훗날 로마 제국의 초대 황후가 될 리비아 드루실라와 재혼했다.
이 재혼은 정치적 균형에 영향을 미쳤으며, 옥타비아누스의 개인 생활과 정치적 행보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타렌툼 협정으로 삼두 정치 연장]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공격하기 위해 안토니우스의 지지가 필요했던 옥타비아누스는 타렌툼 협정을 통해 삼두 정치 체제를 5년 더 연장하기로 합의했다.
이로써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로부터 전함 120척을 지원받는 대가로 2만 명의 군사를 파르티아 원정에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으나, 실제로는 약속 병력의 1/10만 보내주어 훗날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제압 및 레피두스 몰락]
옥타비아누스는 아그리파의 활약으로 나우로쿠스 해전에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함대를 거의 완파하며 해상 위협을 제거했다.
이 승리 후 레피두스가 시칠리아 통치권을 주장하며 옥타비아누스에게 대항했으나, 그의 군대가 옥타비아누스에게 투항하면서 레피두스는 삼두 정치에서 축출되고 유배되었다.
이로써 로마의 통치권은 서방의 옥타비아누스와 동방의 안토니우스 두 사람에게로 양분되었다.
[안토니우스와의 최종 대결 전운]
안토니우스가 파르티아 원정 실패 후 클레오파트라에게 의존하고 로마인 배우자인 옥타비아를 돌려보내자,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로마의 가치를 부정하는 행위로 선전하며 안토니우스의 인기를 추락시켰다.
안토니우스가 아르메니아를 점령하고 클레오파트라에게 '왕들의 여왕' 칭호를 하사하는 등 로마의 권력을 약화시키려 한다는 비난을 쏟아냈다.
결국 기원전 32년 말, 원로원은 안토니우스의 집정관 권한을 박탈하고 클레오파트라의 이집트에 선전 포고하며 최후의 내전이 임박했음을 알렸다.
[악티움 해전 승리]
기원전 31년 9월 2일, 옥타비아누스는 아그리파의 함대를 앞세워 악티움만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는 로마 내전의 종지부를 찍는 결정적인 전투였다.
패배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이듬해 알렉산드리아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패배한 후 자살하며 로마 공화정 시대의 막을 내렸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아들 카이사리온을 처형하고, '두 명의 카이사르는 필요 없다'고 선언하며 유일한 최고 권력자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악티움 해전은 로마 역사상 가장 중요한 해전 중 하나로,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로 부상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전투의 승리는 로마 공화정 시대의 종말과 로마 제정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존엄자 '아우구스투스' 칭호 수여]
내전 종결 후,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과 시민에게 비정규적 특권을 반납하겠다고 선언하며 로마 공화정 체제로의 회귀를 시사했다.
이에 감격한 원로원은 그에게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이 칭호는 정치적 의미보다 종교적인 색채가 강했으며, 그를 로마의 제2의 건국자이자 평화의 시대를 가져온 인물로 상징했다.
이로써 옥타비아누스는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로 불리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프린켑스'(국가 제1시민) 칭호를 받아 로마 최고 책임자로서의 위상을 확립했다. 그는 겉으로는 공화정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금화, 은화 발행권, 막대한 부, 그리고 군대의 압도적인 지지를 통해 로마의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그의 통치 기간에 로마는 평화와 번영을 누리는 '팍스 로마나' 시대를 맞이했다.
[호민관 특권 및 상급 군사 명령권 확보]
중병을 앓은 아우구스투스는 후계자 선정과 권력 구조에 대한 로마인들의 우려를 잠재우기 위해 집정관직에서 사임했다.
그러나 그는 원로원령 속주의 명령권보다 우위에 있는 '상급 임페리움'(maius imperium)과, 죽을 때까지 행사할 수 있는 '호민관 특권'(tribunitia potestas)을 부여받아 사실상 황제로서의 권력을 더욱 강화했다.
이로써 그는 법무관 선거 관리, 거부권 행사, 인구 조사, 원로원 의원 결정 등 광범위한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대규모 공공사업 추진]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시의 재개발과 인프라 확충에 힘썼다.
그는 도로 건설과 유지보수에 직접 나서고, 막대한 개인 재산을 공공기금에 기부하여 '진흙 로마를 대리석 로마로 만들었다'는 말을 남겼다.
마르스 광장에는 평화의 제단과 같은 기념비적인 건물들을 세웠고, 판테온 건설 등 다양한 공공사업을 장려하며 로마의 위상을 높였다.
[칸타브리아 반란 진압]
히스파니아 북부 칸타브리아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기원전 19년에 최종적으로 진압하고, 이 지역을 로마 속주로 편입시켰다.
이로써 이 지역의 풍부한 광물 자원이 로마 제국의 군자금 원천이 되었으며, 제국의 국경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
[최고 제사장 취임]
아우구스투스는 최고 제사장이었던 레피두스가 사망한 후 그 자리에 취임하며 로마 종교의 최고 권위자가 되었다.
이 직책은 종신제였으며 단 한 명만 가질 수 있는 자리로, 그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
[국부 '파테르 파트리아이' 칭호 수여]
원로원과 로마 시민으로부터 '국부'(pater patriae)라는 칭호를 수여받으며, 국가의 아버지이자 수호자로 인정받았다.
이는 그의 통치에 대한 대중의 신뢰와 존경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9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 대패]
서기 9년, 게르마니아 총독 바루스가 이끄는 3개 로마 군단이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게르만족에게 전멸당하는 대참패를 겪었다.
이 사건은 아우구스투스가 평생에 걸쳐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었으며, 로마 제국의 동방 확장 정책에 큰 제약을 가져왔다.
이후 로마군은 라인강과 도나우강을 주 방어선으로 삼게 된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패배 후 '바루스, 내 군단을 돌려다오!'라고 외쳤다고 전해지며, 이는 그의 군사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정복 사업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 전투는 게르만족의 자율성을 지켜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4
[아우구스투스 사망]
서기 14년 8월 19일, 아우구스투스는 놀라에서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사망 직전 후계자인 티베리우스를 소환해 밀담을 나누었으며, 황후 리비아의 품에 안겨 평온하게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해는 마르스 광장에서 화장되었고, 아우구스투스 마우솔레움에 안치되었다.
원로원은 그를 신격화하며 로마 제국의 첫 번째 황제로서 그의 업적을 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