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연표
1769
[코르시카에서 태어나다]
이탈리아 코르시카 섬의 하급 귀족 가문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그의 이름은 요절한 형의 이름을 따라 '나브리오네'로 지어졌으며, 출생 당시 코르시카는 프랑스 지배하에 놓여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1771
[가문, 프랑스 귀족 되다]
프랑스 측으로 전향한 아버지 카를로 덕분에 보나파르트 가문이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귀족 자격을 얻었다.이는 나폴레옹이 프랑스 사회로 편입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776
[예수회 학교에 입학]
7살 무렵 예수회 학교에 입학하여 기본적인 읽기, 쓰기, 셈법, 라틴어, 고대사 등을 배우며 어린 시절부터 지적 호기심을 보였다.
1778
[프랑스 오탱으로 유학]
9살에 형 조제프와 함께 프랑스로 건너가 오탱에 있는 수도원 부속 종교학교에 입학하여, 4개월간 프랑스어를 배우며 프랑스 문화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1779
[브리엔 군사학교 입학]
오탱에서 프랑스어 학습 후 브리엔 군사학교에 입학했다.가난한 귀족 자제에게 무상 교육을 제공하는 곳으로, 그의 군사적 재능을 키울 기회를 얻었다.
브리엔 군사학교 입학 경쟁률이 높았으나, 당시 코르시카 총독이었던 마르뵈프 백작의 특별한 도움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784
[파리 육군사관학교 진학]
브리엔 군사학교를 거쳐 프랑스 최고의 군사 교육기관인 파리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며 본격적인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785
[11개월 만에 조기 졸업!]
4년 과정의 파리 육군사관학교를 불과 11개월 만에 조기 졸업하고 포병장교 임용시험에 합격, 16세의 나이에 소위로 임관하며 그의 천재성을 드러냈다.
[아버지의 죽음과 결심]
아버지 카를로가 위암으로 사망하며 가세가 기울었다.나폴레옹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자 4년 과정의 사관학교를 조기 졸업하고 일찍 직업군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초임 포병장교로 부임]
16세의 나이에 소위로 임관하여 발랑스에 주둔하고 있던 라페르 연대에 포병장교로 부임했다.군 복무 중 여유 시간을 활용하여 역사, 철학, 포병기술 등 다양한 분야를 독학하며 지적 소양을 넓혔다.
1789
[프랑스 혁명 발발]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자유와 평등 사상이 널리 퍼지며 프랑스 사회와 군대 내부에 큰 혼란을 야기했다.나폴레옹은 혁명(자코뱅주의)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며 격변의 시대에 뛰어들었다.
1793
[툴롱 포위전의 영웅!]
프랑스 혁명 정부군에 합류하여 영국과 스페인군이 점령한 전략 요충지 툴롱 요새 탈환 작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했다.이 공로로 24세의 나이에 준장으로 고속 진급하며 군인으로서 첫 무훈을 세워 이름을 알렸다.
나폴레옹은 초임 장교 시절 내륙에서만 근무했지만, 고향 코르시카에서 4년간 활동하며 항구 주변과 요새 지형을 면밀히 연구한 경험을 툴롱에서 유감없이 발휘했다. 놀랍게도 툴롱의 지형이 고향 아작시오와 유사하여 그의 작전이 더욱 빛을 발했다.
1795
[왕당파 폭동을 진압하다]
파리에서 왕당파의 대규모 무장 폭동이 발생하자, 총재 정부의 요청으로 진압 작전을 맡았다.2만 명의 폭도들을 향해 산탄이 장전된 대포를 쏘는 과감한 전술로 신속하게 폭동을 진압하며 총재 정부의 인정을 받았다.
1796
[이탈리아를 정복하다]
27세의 젊은 나이에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발탁되어 눈보라가 몰아치는 알프스산맥을 넘어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다.이 원정의 대성공으로 나폴레옹 전쟁의 서막을 열었으며, 프랑스 내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조제핀과 운명적 만남]
당시 총재 폴 바라스의 애인이자 귀족 미망인이었던 조제핀 드 보아르네와 결혼했다.이 결혼은 나폴레옹이 프랑스 사교계에 진출하고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797
[오스트리아를 굴복시키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점령하고 캄포포르미오 조약을 체결, 벨기에와 북이탈리아 롬바르디아를 프랑스에 편입시키며 유럽에서의 프랑스 위상을 높였다.
1798
[이집트 원정을 떠나다]
총재 정부의 견제를 받아 이집트 파병 명령을 받고 5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출정했다.피라미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대동한 학자들은 로제타석을 발견하여 고대 이집트 문명 해독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799
[이집트 탈출, 프랑스 복귀]
이집트 원정 중 프랑스 해군이 영국 함대에 전멸하고 프랑스가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명령 없이 이집트 원정군을 클레베르 장군에게 맡기고 프랑스로 귀국했다.
[브뤼메르 쿠데타로 집권]
혼란스러운 정국을 틈타 총재 시예예스와 공모, 군대를 동원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오백인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폐기한 후, 3명의 통령을 두는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며 사실상 프랑스의 실권을 장악했다.
1800
[마렝고 전투에서 승리]
알프스 횡단 후 이탈리아 북부에서 오스트리아군과의 마렝고 전투에서 승리했다.이로써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의 강화 조건을 수용하고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은 붕괴되었다.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
제1통령이 된 후 대불동맹국이 강화를 거절하자,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는 명언과 함께 해발 2,469m의 알프스 산베르나르 고개를 대규모 군대와 함께 넘는 대담한 작전을 감행했다.
과거 한니발 이후 대규모 군사가 이 고개를 넘은 역사가 없어 부관들은 극구 만류했으나, 나폴레옹은 이를 무릅쓰고 돌파하며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프랑스 은행을 설립하다]
내정 개혁의 일환으로 프랑스 은행을 설립하여 국가의 재정 건전성을 확보하고 경제 안정화를 도모했다.이는 혼란스러웠던 혁명기 이후 프랑스 경제 재건에 큰 기여를 했다.
[30세에 제1통령 취임]
국민투표를 통해 통령 정부가 승인되었고, 나폴레옹은 불과 30세의 나이에 10년 임기의 제1통령으로 임명되며 프랑스 정권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1801
[로마 교황청과 화해]
교황 비오 7세와 정교 협약을 맺어 프랑스 대혁명으로 탄압받던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국내의 종교적 대립을 완화시켰다.이는 사회 통합에 크게 기여했다.
1802
[영국과 평화 조약 체결]
오랜 적국이었던 영국과 아미앵 조약을 체결하며 10년 만에 유럽에 평화를 가져왔다.이는 나폴레옹이 내정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레지옹 도뇌르 훈장 창설]
공공 교육법 제정 등 교육 개혁과 함께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창설하여 국가에 공헌한 이들에게 수여하며 국민의 단결을 도모했다.
[종신 통령으로 권력 강화]
자신의 독재권을 한층 더 강화하기 위해 종신 통령으로 취임했다.이는 황제 즉위의 기반을 다지는 중요한 단계였으며, 권력 집중의 정점을 향해 나아갔다.
1803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팔다]
아이티 점령 실패 등으로 서반구 사업에 대한 관심을 잃자, 북미 대륙의 방대한 루이지애나 영토를 미국에 1,500만 달러라는 헐값에 매각했다.이로 인해 미국의 영토는 하룻밤에 두 배로 늘어나게 되었고, 서부 개척시대의 막을 열었다.
1804
[나폴레옹 법전 제정!]
각 지역의 봉건법과 관습법을 통합한 최초의 근대 민법전인 나폴레옹 법전을 제정했다.'만민의 법 앞 평등', '종교의 자유' 등 근대적 가치관을 도입하여 전 세계 민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제1제국 황제 즉위]
국민 투표를 거쳐 프랑스 제1제국 초대 황제로 즉위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로 인해 베토벤은 헌정 예정이던 교향곡 제3번 《보나파르트》의 표지를 찢고 제목을 《영웅》으로 변경했습니다.
1805
[트라팔가 해전 참패]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허레이시오 넬슨이 이끈 영국 해군에게 참패를 당하며 제해권 장악에 실패했다.이는 나폴레옹이 영국 본토 침공 계획을 포기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3황제 회전 대승리!]
황제 즉위 1주년 기념일,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연합군을 상대로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완승을 거두었다.세 명의 황제가 한 전장에 모인 이 전투는 '3황제 회전'으로 불리며 나폴레옹의 군사적 천재성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1806
[대륙 봉쇄령 선포]
영국을 경제적으로 고립시켜 굴복시키기 위해 베를린 칙령을 통해 대륙봉쇄령을 선포했다.영국과의 모든 통상 및 통신을 금지했으나, 이는 유럽 민중의 반프랑스 감정을 고조시키는 역효과를 낳았다.
[1000년 제국 해체시키다]
유럽 대륙 중앙부를 장악한 나폴레옹은 자신의 형제들을 주변국 국왕으로 앉히고 라인 동맹을 발족시켰다.이로써 천 년에 가까운 역사를 가진 신성로마제국이 사실상 해체되었다.
1807
[포르투갈 침공]
대륙봉쇄령을 어기고 영국 선박의 출입을 허용한 포르투갈을 침공했다.포르투갈 왕실은 영국 해군의 호위를 받으며 브라질로 도피했으나, 프랑스군은 점령 통치에 어려움을 겪었다.
[러시아와 틸지트 조약]
러시아군을 격파한 후,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와 틸지트 조약을 체결했다.이 조약으로 프로이센 영토는 크게 축소되었고, 폴란드 지역에는 바르샤바 대공국이 형성되었다.
1808
[스페인 왕위 찬탈]
스페인 왕실의 내분을 이용, 카를로스 4세와 페르난도 7세를 협박하여 왕권을 양도받았다.이후 자신의 친형 조제프를 스페인 국왕으로 임명하며 스페인을 무력으로 정복했고, 이는 스페인 독립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1810
[조제핀과 이혼, 재혼]
후계자를 낳지 못하던 조제핀과 14년간의 결혼 생활을 끝내고 이혼했다.이후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의 딸 마리 루이즈와 재혼하여 이듬해 아들 나폴레옹 2세를 얻었다.
1812
[60만 대군, 러시아 원정!]
대륙봉쇄령을 위반한 러시아를 응징하기 위해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 원정을 강행했다.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원정 중 하나였으나, 혹독한 결과로 이어졌다.
[모스크바 점령과 혹한]
러시아군과의 보로디노 전투에서 승리 후 모스크바를 점령했으나, 러시아군의 청야전술과 혹독한 겨울 추위로 인해 보급이 끊기고 궤멸적인 피해를 입은 채 퇴각해야 했다.
1813
[라이프치히 전투 대패]
러시아 원정 실패 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스웨덴 등 제6차 대프랑스 동맹군에게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포위 공격당해 대패했다.이 전투는 나폴레옹 평생 최대 규모의 전투로, 그의 몰락을 결정지었다.
1814
[프랑스 수도 파리 함락]
동맹군의 총공세에 프랑스 수도 파리가 함락되었다.나폴레옹은 불과 7만 군세로 절망적인 싸움을 강요당하다 결국 수도를 내주었다.
[엘바섬으로 첫 유배]
무조건 퇴위를 강요당하고 퐁텐블로 조약 체결 후, 지중해의 작은 섬 엘바섬의 영주로 추방되었다.이로써 유럽 전역에서 왕정이 복고되기 시작했다.
1815
[세인트헬레나 최종 유배]
워털루 전투 패배 후 미국 망명도 실패하고 영국 군함에 투항했다.남대서양의 외딴 섬 세인트헬레나에 유폐되어 철저한 감시 속에서 마지막 6년을 보냈다.
[워털루 전투, 완전 몰락]
영국과 프로이센 연합군과의 워털루 전투에서 최종적으로 패배하며 나폴레옹의 '백일천하'는 막을 내렸다.이는 그의 군사 경력과 프랑스 제국의 완전한 종말을 의미했다.
[엘바섬 탈출, 백일천하]
전후 유럽 재편을 논의하던 빈 회의의 혼란과 루이 18세 통치에 대한 민중의 불만을 틈타 엘바섬을 탈출, 파리로 돌아와 100일 만에 황제로 복위하는 극적인 사건을 연출했다.
실제 복위 기간은 95일이었다. 나폴레옹은 이 기간 동안 자유주의적인 새 헌법을 발표하며 타협을 시도했으나, 연합국은 그의 강화를 거부하고 다시 전쟁을 선포했다.
1821
[세인트헬레나에서 사망]
세인트헬레나 총독의 괴롭힘과 악화된 건강 속에 위암으로 사망했다.그의 유해는 1840년 프랑스로 반환되어 파리 앵발리드에 안치되었으며, 그의 모발에서 비소 성분이 다량 검출되어 독살설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