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제퍼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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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제퍼슨
정치인, 건국의 아버지, 대통령, 학자, 건축가 + 카테고리

- 미국 건국의 아버지이자 제3대 대통령. - 독립선언서 기초자로 공화주의와 시민의 자유를 주창. - 루이지애나 매입으로 영토를 두 배 확장하는 위업 달성. - 버지니아 대학교 설립 등 교육에 깊이 헌신. - 법률 건축 과학 등 다방면에 능통한 르네상스적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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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743

[토머스 제퍼슨 탄생]

버지니아주의 명망 높은 가문에서 여덟 남매 중 셋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외조부와 아버지 모두 지역의 명사였다.

1757

[아버지 사망 및 유산 상속]

14살에 아버지 피터 제퍼슨이 사망하며 5,000 에이커의 토지와 30명의 노예를 상속받았다.

상속받은 땅에 집을 지었고, 훗날 이 집은 몬티첼로로 불리게 된다.

1760

[윌리엄 앤 메리대 입학]

16세에 윌리엄 앤 메리 대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수학, 철학, 형이상학 등을 공부했다.

프랜시스 베이컨, 존 로크, 아이작 뉴턴을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았다.

1767

[버지니아주 변호사 활동]

윌리엄 앤 메리 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조지 위트 아래서 법학을 배웠고, 버지니아주 법정에서 변호사 활동을 시작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1769

[버지니아 자치의회 의원]

버지니아주 자치의회에서 알버마를 군을 대표하는 의원이 되어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1772

[마사 스켈턴과 결혼]

23세의 젊은 과부 마사 웨일스 스켈턴과 결혼하여 6명의 자녀를 두었다.

부인은 1782년에 사망했으며, 이후 재혼하지 않았다.

1774

[급진적 독립사상 제시]

영국의 '참을 수 없는 법'에 반대하며 식민지인의 자연권과 자치권을 주장하는 급진적 팜플렛 《영국령 아메리카의 권리에 대한 요약》을 출판했다.

이는 미국 독립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1775

[제2차 대륙회의 위원]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한 직후 제2차 대륙회의 위원으로 재직하며 독립 운동에 참여했다.

1776

[미국 독립선언서 기초자]

5인 위원회의 일원으로 미국 독립 선언서 초안을 작성, 대륙회의의 승인을 이끌어냈다.

인권을 수호하는 논리적인 머리말은 그의 주요 업적으로 기록된다.

제퍼슨은 계몽 사상을 바탕으로 초안을 작성했으며, 버지니아 헌법 초안과 조지 매이슨의 버지니아 인권 선언 등을 참고했다. 당시 논쟁 대상이었던 노예 무역 조항은 삭제되었다.

[버지니아 하원의원 활동]

버지니아주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어 사법 제도 개혁, 장자 상속권 폐지, 버지니아 종교자유령 제정 등 민주적인 주를 만들기 위한 126개 법안을 작성했다.

1778

[교육법안 최초 도입]

미국 최초로 대학 선택과목제를 도입하는 "더 많은 지식의 보급을 위한 법안"을 작성하며 교육 제도 개혁을 시도했다.

(세계 최초).

1779

[버지니아 주지사 취임]

버지니아 주지사로 취임하여 리치먼드로 주도 이전을 감독하고 윌리엄 앤드 메리 대학의 교육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임기 중 영국군의 침략을 받아 도피하면서 공공에 실망감을 주었다.

조지 위트를 미국 대학 최초의 법학 교수로 임명했다. 1781년 영국군의 급습을 피해 도망쳐 주지사 직분에 대한 비판을 받았고, 재선에 실패했다.

1782

[부인 마사 사망]

부인 마사 웨일스 스켈턴 제퍼슨이 사망했다.

그는 아내와의 편지들을 불태우고 다시는 재혼하지 않았다.

1784

[프랑스 공사 재직]

벤저민 프랭클린의 후임으로 프랑스 공사에 임명되어 샹젤리제 공관에서 거주하며 프랑스 문화와 정치에 대한 식견을 넓혔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을 열렬히 지지했다.

1787년 미국 제헌회의에는 참석할 수 없었으나 제임스 매디슨과 연락하며 권리장전 추가를 주장했다. 당시 기혼 여성인 마리아 코스웨이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다는 논란이 있다.

1789

[초대 국무장관 역임]

조지 워싱턴 대통령 아래 초대 국무장관으로 취임했다.

알렉산더 해밀턴과 재정 정책, 중앙은행 설립 등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했으며, 프랑스를 강력히 지지했다.

(미국 최초).

해밀턴과의 협상으로 연방 수도를 워싱턴 D.C.로 이전하는 대신 주들의 빚을 똑같이 나누어 갚는 법안에 동의했다. 미국 제1은행 설립에는 헌법 위배를 주장하며 반대했으나 워싱턴 대통령은 해밀턴의 손을 들어주었다.

1793

[국무장관 사임]

국무장관직을 사임하고 몬티첼로로 돌아가 워싱턴과 해밀턴에 대한 정치적 대립을 막후에서 지휘했다.

1796

[제2대 부통령 당선]

1796년 대통령 선거에서 존 애덤스에게 패배했으나, 당시 선거 방식에 따라 차점자가 부통령이 되면서 제2대 미국 부통령으로 취임했다.

부통령으로서 애덤스 대통령의 정책을 방해하고 반대하며 의회 의사 절차를 작성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798

['외국인 규제법' 비판]

애덤스 행정부의 비민주적인 '외국인 규제법'을 비판하고, 연방 정부가 주의 권한을 침해할 수 없다는 내용을 담은 '버지니아-켄터키 결의안'을 제임스 매디슨과 함께 작성했다.

이 법안은 이민자들의 미국 체류 기간을 늘리고 프랑스에 대한 간첩 행위를 막는다는 명분이었으나, 실제로는 민주공화당을 겨냥한 정치적 탄압으로 간주되었다. 결의안은 주의 권한을 보장하는 첫 문장으로, 훗날 주권 우위설과 연방법 거부설의 원동력이 되었다.

1800

[1800년 대선 혼란과 당선]

1800년 대통령 선거에서 에런 버와 선거인단 득표수가 동률을 이루어 하원 결정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알렉산더 해밀턴의 지지 덕분에 버를 제치고 당선될 수 있었다.

1801

[제3대 미국 대통령 취임]

하원의 결정으로 미국의 제3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는 미국 역사상 최초의 정권 교체로, 해밀턴의 지지 덕분에 에런 버를 제치고 대통령직에 올랐다.

(8년 임기 동안 거부권 미행사한 유일한 대통령).

취임 후 제임스 매디슨을 국무장관에, 앨버트 갤러틴을 재무장관에 임명하며 민주공화당 인사로 내각을 구성했다.

[지중해 해적 소탕 지시]

바르바리 해적 국가들에 대한 조공 부담을 끝내기 위해 미국 해군과 해병대를 트리폴리로 파견하여 소탕 작전을 지시했다.

(미국의 첫 해외 원정).

1802

[미국 육군사관학교 설립]

군 장교의 통제력 강화를 위해 육군공병사령부와 함께 웨스트포인트에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설립했다.

1803

[루이지애나 매입 성공]

나폴레옹으로부터 1,500만 달러에 루이지애나 영토를 매입하여 미국의 영토를 하루아침에 두 배로 확장하는 세계사적 위업을 달성했다.

(미국 역사상 최대 영토 확장).

뉴올리언스 항구 이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된 협상이었으나, 나폴레옹의 군자금 필요로 인해 루이지애나 전체 매입으로 이어졌다. 영토 매입의 법적 권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상원의 승인을 받아냈다.

[오하이오 주 연방 가입]

대통령 재임 기간 중 오하이오 주가 미국의 연방에 공식적으로 가입했다.

[루이지애나 매입 공표]

루이지애나 매입을 공식적으로 공표하고, 메리웨서 루이스와 윌리엄 클라크를 대장으로 하는 서부 탐험대를 파견하여 새로운 영토 탐험을 시작했다.

1804

[대통령 재선 성공]

180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찰스 핑크니를 압도적으로 물리치고 대통령으로 재선에 성공했다.

[해밀턴-버 결투 발생]

전 부통령 에런 버가 알렉산더 해밀턴과의 결투에서 해밀턴을 사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제퍼슨은 크게 분노했다.

제퍼슨은 버의 행동에 격분하여 1804년 대선에서 버를 러닝메이트에서 제외시키고 조지 클린턴을 지명했다.

1805

[바르바리 전쟁 승리]

4년간 지속된 제1차 바르바리 전쟁에서 승리하며 트리폴리와 평화 조약을 맺어 해적들에게 조공을 바치지 않게 되었다.

(미국의 첫 해외 원정 승리).

1806

[에런 버 반역 음모]

전 부통령 에런 버가 루이지애나를 빼앗아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던 음모가 발각되어 연방군에 체포되었다.

1807

[출항금지법 서명]

영국과 프랑스에게 미국의 중립성을 존중하도록 요구하며, 두 나라와의 모든 무역을 금지하는 출항금지법에 서명했다.

이 법은 경제에 타격을 주어 지지도를 하락시켰다.

1808

[노예 무역 금지 협상]

노예 무역 금지 법안의 만료 후, 노예 무역을 금지하는 협상이 타결되었다.

하지만 연방 정부는 노예 제재에서 손을 떼고 각 주가 잡혀온 노예들을 경매로 팔도록 허용, 노예 제도 자체를 폐지하지는 못했다.

1809

[대통령 퇴임]

미국의 제3대 대통령직에서 퇴임했다.

퇴임 후 버지니아의 몬티첼로로 돌아가 민주적 교육의 보급에 힘썼다.

1815

[의회도서관에 장서 기증]

미영 전쟁으로 소실된 의회도서관 재건을 위해 평생 수집한 6,487권의 책을 국가에 헌납하여 국립도서관의 기틀을 마련했다.

오늘날 의회도서관의 검색 도우미 이름이 '토머스'인 것은 그를 기리기 위함이다.

1819

[버지니아 대학교 설립]

교회의 영향 없이 높은 수준의 교육을 제공하고자 버지니아 대학교를 설립했다.

1825년 정식 개교했으며, 미국 최초로 학생들에게 선택과목 수강을 허락한 대학이다.

제퍼슨이 직접 대학 건축과 운영 계획을 세웠으며, 도서관을 중요시하고 종교적 학문을 배제했다. 그의 교육 이념을 반영한 '더 런'이라는 교정 디자인은 미국 건축학 역사상 가장 중요한 작업으로 칭송된다.

1826

[미국 독립기념일 서거]

미국 독립기념일이자 독립 선언서 50주년이 되는 날,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같은 날, 정적이었던 존 애덤스도 몇 시간 뒤 사망했다.

(묘비에 대통령 사실을 제외해달라 유언).

재산 문제로 빚에 시달렸으며, 유서에 몬티첼로를 정부에 헌납하고 해군 장교 자녀들을 위한 학교로 쓰기를 희망했다. 묘비문에는 독립 선언서 기초자, 버지니아 종교 자유법 제안자, 버지니아 대학교의 아버지로 기록해 달라고 유언했다.

1998

[샐리 헤밍스 사생아 논란]

흑인 노예 샐리 헤밍스와의 사생아 논란이 DNA 유전자 검사로 다시 불거졌다.

검사 결과, 그녀의 막내아들 이스턴 헤밍스가 제퍼슨의 아들로 판명되었다.

제퍼슨의 반대파 정치인, 노예 제도 폐지론자들, 비판적인 영국 등에서 계속 제기되었던 논란으로, 매디슨 헤밍스 등 다른 자녀들도 제퍼슨 가의 후손으로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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