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
연표
1787
[명사회 소집]
빵 품귀와 물가 폭등으로 민중의 불안이 커지자, 루이 16세가 재정 위기를 논의하기 위해 144명의 귀족과 성직자로 구성된 명사회를 소집합니다.
재무총감 칼론은 세제 개혁과 특권 계급 과세를 제안했지만, 대다수 특권층의 반대로 무산됩니다.
1788
[삼부회 소집 결정]
국가 재정 파탄으로 민중의 불만이 극에 달하고 폭동이 빈발하자, 국왕은 175년 만에 삼부회를 소집하기로 결정합니다.
평민 대표 인원을 두 배로 늘리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지면서, 혁명 전야의 정치적 분위기가 고조됩니다.
1789
[삼부회 개회]
루이 16세가 베르사유 궁전에서 175년 만에 삼부회를 열었습니다.
성직자, 귀족, 평민 대표들이 참석했지만, 초반부터 '머릿수 표결'과 '신분별 표결' 방식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며 난항이 거듭되었습니다.
[국민의회 결성]
삼부회에서 표결 방식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자, 평민 대표들은 자신들이 국민의 98%를 대표한다는 명분으로 독자적인 '국민의회'를 결성했습니다.
이들은 동의 없이 세금을 징수할 수 없다고 선언하며 국왕에 대한 불복종을 표명했습니다.
[테니스 코트 서약]
루이 16세가 국민의회 회의장을 폐쇄하자, 평민 대표들은 테니스 코트로 이동해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해산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이 서약은 제3신분의 강력한 결의를 보여주며 혁명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
왕당파의 무력 탄압 소식에 파리 민중들이 혁명에 필요한 무기를 탈취하기 위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습니다.
이 사건의 성공은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고, 이후 혁명의 여파가 지방으로 확산되며 국왕의 권위가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봉건제 폐지 선언]
농민 반란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폭력적인 양상을 띠자, 제헌의회(국민의회)는 무질서를 해결하기 위해 봉건제 폐지를 선언했습니다.
이는 영주제와 농노제 폐지, 소득 비례 세금 납부 등을 포함하며 구체제 해체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프랑스 인권 선언 발표]
제헌의회는 혁명의 이념을 세우기 위해 '인권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주권재민, 사상의 자유, 법 앞의 평등, 재산권의 신성 등 새로운 사회 질서의 원칙을 제시하며 혁명의 정의를 명확히 했습니다.
미국의 독립 혁명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베르사유 여성 행진]
파리 시민들의 빵값 폭등과 궁핍한 생활, 그리고 왕실 연회 소식에 대한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7천여 명의 여성들이 "빵을 달라"고 외치며 베르사유 궁전으로 행진했고, 국왕 일가는 파리로 돌아와 시민의 감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1790
[성직자 기본법 제정]
재정 적자 해결을 위해 성직자 재산을 국유화하고, 성직자들을 국가 공무원화하여 월급을 지급하는 '성직자 기본법'이 제정되었습니다.
이는 교황의 서임권을 국가가 행사하는 것으로, 교회 내 반발과 교황 비난을 초래하며 양국의 외교 단절로 이어졌습니다.
1791
[루이 16세의 바렌 사건]
과격한 혁명을 반대하던 루이 16세 일가가 오스트리아로 피신하려다 국경 근처 바렌에서 민중에게 발각되어 파리로 되돌아왔습니다.
이 사건으로 루이 16세의 반혁명 의도가 명확히 드러나 프랑스 국민들에게 큰 충격과 배신감을 안겨주었습니다.
[샹 드 마르스의 학살]
바렌 사건 후 루이 16세의 왕권 복위에 반발하여 공화정을 주장하는 민중들이 파리에서 국왕 폐위와 재판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국민방위대가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하여 수십 명이 사망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아이티 노예 대봉기]
카리브해 프랑스 식민지 산도밍고(아이티)에서 50만 흑인 노예와 혼혈인들이 프랑스 혁명 이념에 고취되어 '자유, 평등, 우애'를 요구하며 무력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부두교 성직자 투생 루베르튀르가 주도한 이 봉기는 흑인들의 승리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산도밍고는 설탕, 커피 등 생산으로 프랑스에 막대한 이익을 제공하던 식민지였습니다. 봉기 후 한 달간의 혈전으로 백인 1천명, 흑인 1만명 이상이 사망하고 많은 농장이 파괴되었습니다. 이 승리는 전 식민지로 확대되어 결국 프랑스 국민공회의 노예제 폐지 결정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1791년 헌법 공포]
제한 선거와 입헌 군주제를 골자로 한 새로운 헌법이 공포되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그해 10월 첫 선거가 실시되어 절대군주제가 폐지되고 의회주의와 입헌군주제가 채택된 '입법의회'가 구성되었습니다.
1792
[오스트리아 선전포고]
프랑스 혁명 사상 전파를 우려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압박에 맞서, 프랑스 혁명 정부는 루이 16세의 제의에 따라 오스트리아에 대한 선전포고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이는 프랑스 혁명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8월 10일 사건]
프로이센군의 침입과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협박성 선언에 분노한 파리 시민과 의용군이 왕실의 외국 내통 의심 속에 튀틀리 궁을 공격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루이 16세는 유폐되고 군주제가 몰락하며 공화정이 시작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9월 학살]
프로이센군의 파리 침공 위협이 고조되자, 파리 시민들은 수감된 반혁명주의자들이 탈옥하여 가족을 학살할 것이라는 풍문에 휩싸였습니다.
이에 9월 초부터 반혁명 용의자들을 즉결심판을 거쳐 잔인하게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대략 최대 1만 2천명이 살해된 것으로 추산됩니다.
[발미 전투 승리]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파리를 목표로 이동하다가 뒤무리에와 켈레르만 장군이 지휘하는 프랑스 의용군과 발미에서 조우했습니다.
프랑스군이 승리하며 프로이센군을 퇴각시키면서, 공화정의 출발에 큰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프랑스 제1공화국 수립]
'9월 학살'과 상퀼로트의 활동으로 혼란스러운 가운데 치러진 선거를 통해 국민공회가 구성되었습니다.
국민공회는 군주제를 폐지하고 다음 날인 9월 22일 공화정을 선포하여 프랑스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습니다.
1793
[루이 16세 처형]
혁명 재판에 회부된 루이 16세는 전쟁 중 프랑스 정부와 국민을 배신했다는 증거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국민 공회의 사형 의결 후 파리의 혁명 광장(현재 콩코드 광장)에서 단두대에 처형되었습니다.
이는 유럽 군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대불동맹 전쟁 시작]
루이 16세 처형에 충격받은 유럽 11개국이 영국 주도로 프랑스 혁명 정부를 적대시하며 대불동맹을 결성했습니다.
이에 프랑스 혁명 정부는 영국과 네덜란드에 선전포고하며 제1차 대불동맹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방데 반란 발발]
“30만명 모병” 선포에 반발한 왕당파가 방데 지역에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반란은 전국으로 확대되며 혁명 정부에 큰 위협이 되었고, 가톨릭 교회의 반혁명 선동과도 연관되어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습니다.
[자코뱅파 권력 장악]
지롱드파가 하층민의 식량 위기에 대한 정책을 취하지 않자, 하층민의 지지를 받던 자코뱅파가 국민 공회에서 지롱드파를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이는 혁명의 급진화를 가져왔습니다.
1794
[식민지 노예제 폐지]
프랑스 국민공회는 산도밍고(아이티) 흑인 봉기의 영향을 받아 '푸뤼비오즈 16일 법'을 통과시켜 서구 세계 최초로 식민지를 포함한 전반적인 노예제 폐지를 결의했습니다.
이로써 광대한 지역의 흑인 노예들이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테르미도르 반동]
로베스피에르의 공포 정치가 계속되자, 국민공회 내 반대파들이 로베스피에르를 탄핵하고 체포 결의를 통과시켰습니다.
다음 날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측근들이 단두대에서 처형당하며 공포 정치가 종식되고 혁명은 온건화되는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1795
[총재정부 수립]
로베스피에르 처형 후 국민공회는 '공화력 3년 헌법'을 제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5명의 총재가 행정권을 갖는 '총재정부'를 수립했습니다.
하지만 총재정부는 출범 초부터 반대파의 반란에 직면하며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1799
[브뤼메르 18일 쿠데타]
이탈리아 원정과 이집트 원정을 통해 국민 영웅으로 부상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당시 민심을 잃고 불안정했던 총재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이로써 '통령정부'를 수립하고 나폴레옹이 제1 통령의 자리에 오르며 프랑스 혁명은 사실상 막을 내렸습니다.
1804
[아이티 독립 선언]
산도밍고(아이티)의 흑인 노예 봉기가 성공한 후, 나폴레옹의 재탈환 시도에도 불구하고 아이티는 프랑스군을 몰아내고 정식으로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이는 세계 최초의 흑인 공화국이자 아메리카 대륙에서 미국 다음으로 두 번째로 독립한 국가가 되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아이티는 노예제 폐지를 법령화한 최초의 북아메리카 국가가 되었으며,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아 시작된 아이티 혁명과 독립은 미국과 영국의 식민지 노예 반란, 중남미의 탈식민지와 노예제도 폐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