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니발
군사 지도자, 장군, 전략가, 카르타고 인물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8- 10:39:27
고대 카르타고의 전설적인 군사 지도자.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위협하며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 전략가로 평가받는다. 트레비아, 트라시메네, 칸나에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패배 후 망명하다 로마에 잡히지 않기 위해 자결했다. '전략의 아버지'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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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3C
[한니발 탄생]
카르타고의 장군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카르타고의 명문가였으며, 아버지 하밀카르는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에 맞섰던 인물이다.
카르타고의 장군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로 태어났다. ('바르카'는 페니키아어로 '천둥'을 뜻한다.) 여러 명의 누이와 2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형제의 이름은 하스드루발과 마고였다. 매형으로는 카르타고의 집정관을 지낸 보밀카르, 공정한 하스드루발과 누미디아의 왕자인 나라바스가 있었다. 그의 집안은 카르타고에서도 해외 식민지 경영을 중요시하는 해외파에 속하는 명문 가였으며 아버지 역시 1차 포에니 전쟁 때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마지막까지 로마에 맞섰던 인물이었다.
[로마 타도를 맹세]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카르타고의 신 타니트에게 로마를 쳐부술 것을 맹세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는 그의 일생에 걸친 로마와의 대립을 예고하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의하면 9살에 로마를 쳐부술 것을 카르타고의 신 타니트에게 맹세했다고 한다.
[사군툼 공성전 발발]
이베리아 반도의 사군툼을 정복하여 로마와의 전쟁을 촉발시켰다. 이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사건으로, 카르타고와 로마 간의 지중해 패권 다툼이 다시 불붙게 되었다.
로마공화정과 카르타고는 지중해 패권을 놓고 전쟁을 벌인 국가였으므로, 로마공화정은 카르타고의 힘을 매우 두려워하였다. 결국 기원전 219년 사군툼을 한니발이 정복함으로써 전쟁이 일어난다.
[알프스 산맥 횡단 (세계 최초)]
제2차 포에니 전쟁 발발 직후 28세의 나이로 10만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이베리아반도를 출발, 피레네와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본토로 진입했다. 겨울에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은 세계 최초의 기록적인 행군이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일어난 기원전 218년 여름, 고작 28살에 불과한 젊은 장군인 한니발은 10만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에스파냐를 출발, 피레네산맥과 알프스산맥을 넘었다. 그러나 그때 군사는 보병 2만, 기병 6천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당시 로마 공화정에서는 한니발의 군대가 해안가를 따라 행군할 것이라 예상하여 마르세유 지역에 집결하고 있었다. 마르세유에서 로마군과 싸우는 것은 한니발에게 불리하였는데, 그 이유는 마르세유 일대는 로마공화정이 식민화를 함으로써 로마군의 육군은 충분한 보급을 받을 수 있었고 또한 그 지역의 갈리아 민족은 로마군에게 우호적이였으므로 한니발이 우군으로 삼을 만한 세력이 많지 않았다. 한니발은 북이탈리아에서 싸우고 싶어했는데 북이탈리아의 갈리아 족은 로마군의 식민화에 거세게 저항하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로마공화정이라는 공동의 적이 있는 동지인 한니발의 강력한 동맹 세력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였다. 이러한 장단점을 면밀히 검토해 보고 로마군의 허를 찌르기 위해 한니발은 겨울에 알프스 산맥을 넘는다. 훗날 알프스 산맥을 넘는 것은 그의 동생인 하스드루발과 먼 훗날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재현되나 후대의 두사람이 여름에 산맥을 넘은 역사에 비해 한니발은 겨울에 넘었다. 또한 하스드루발이나 나폴레옹에겐 한니발이라는 선례가 있었으나, 한니발 이전엔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은 군대는 없었기 때문에 한니발의 행군이 훨씬 더 어려웠음은 자명하다.
[티키누스 및 트레비아강 전투 승리]
알프스 횡단 후 북이탈리아에 진입한 한니발은 추격해온 로마 집정관 스키피오를 티키누스 전투에서 이기고, 다른 집정관 샘프로니우스의 군대를 트레비아 강가에서 대파하며 이탈리아 북부에서 로마 세력을 완전히 몰아냈다.
알프스를 넘어 북이탈리아에 진입한 한니발은 그를 추격해 온 집정관 스키피오를 티키누스 전투에서 이긴다. 그리고 다른 집정관인 샘프로니우스의 군대를 트레비아강가에서 대파한다. 이로써 한니발은 이탈리아 북부에서 로마 세력을 완전히 몰아낸다.
[늪지대 행군 중 실명]
이탈리아 중부로 진입하기 위해 수백 킬로미터에 걸친 늪지대를 3일 밤낮 쉬지 않고 행군했다. 이 혹독한 행군 도중 한니발은 눈병에 걸려 한쪽 눈을 잃었으나, 병사들은 그의 리더십에 감복하며 기적적인 행군을 이어나갔다.
다음해인 기원전 217년에 한니발은 이탈리아 중부로 싸움터를 옮기기로 결정한다. 남하하는 두 가도를 새로 선출된 집정관인 게미니우스와 플라미니우스가 봉쇄하고 있었는데 한니발은 그들의 허를 찌르기 위해 가운데에 있는 늪지대를 통과한다. 이 늪지대는 수백킬로미터에 걸쳐 무릎까지 차는 물이 고여있었고 따라서 막사를 지어 병사들이 숙영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한니발은 이 늪지대를 3일 밤낮 쉬지 않고 행군을 하였고, 이런 혹사로 인해 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는다. 또한 행군 도중 한니발 역시 눈병에 걸려 한쪽 눈을 잃는다.
[트라시메네호 전투 대승]
늪지대 행군 후 이탈리아 중부에 진입한 한니발은 추격해온 집정관 플라미니우스를 트라시메네 호숫가로 유인하여 매복 공격으로 대승을 거두었다. 로마군 2만 7천 명을 학살하고 플라미니우스를 전사시켰다.
위의 혹독한 행군으로 이탈리아 중부에 진입한 한니발은 서둘러 추격해온 집정관 플라미니우스를 도발하여 매복하고 있었던 트라시메노 호숫가로 유인하는데 성공, 트라시메네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서 2만 7천 명의 로마 군인과 집정관 플라미니우스를 학살한다. 플라미니우스가 사망한 이후 독재관으로 선출된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지구전법을 통해 한니발의 회전을 피하고 그의 보급을 차단하는데 주력한다. 이 전략으로 인해 이탈리아 중부에서의 싸움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이에 따라 한니발은 이탈리아 남부로 이동한다.
[칸나이 전투 역사상 가장 위대한 포위섬멸전]
8만 7천 명의 로마 대군에 5만 명으로 맞선 칸나이 전투에서 '초승달 전법'으로 대승을 거두었다. 로마군 7만 명을 살해하고 1만 명을 포로로 잡으며 단 6천 명의 손실만을 입어, 로마를 최대의 위기에 빠뜨렸다. 이 전투는 오늘날까지도 포위 섬멸전의 가장 뛰어난 사례로 평가받는다.
다음해에 새로 선출된 바로와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조속히 전쟁을 마무리 짓기를 원했던 로마 시민들의 희망에 따라 8만 7천명의 대군을 조직한 뒤 한니발이 머물고 있던 칸나이로 향한다. 한니발은 바로와 아이밀리우스가 지휘하는 8만 7천 명의 대군에 겨우 5만 명으로 맞붙게 되었는데, 이 칸나이 전투에서 중앙에 약한 군을 배치하고 나머지 왼측과 오른쪽에 강한 군대를 배치하는 초승달 전법으로 카르타고 군은 겨우 6,000명을 잃으면서 로마군을 7만이나 죽이고 1만을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두어 로마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이 전쟁의 여파로 인해 이탈리아 중부의 대도시인 카푸아가 로마를 배신하고 한니발에게 붙는다. 그러자 로마에게 이탈하려는 움직임이 많은 도시에서 일어났고 남부 이탈리아의 타렌툼,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와 같은 도시는 한니발의 도움을 받아 성공적으로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을 쫓아내고 한니발 편에 서게 된다. 그 결과 로마는 중부 이탈리아의 일부, 남부 이탈리아의 대부분, 북부 이탈리아의 전부를 잃었으며 또한 시칠리아섬에마저 적을 두게 된다. 칸나이 전투는 오늘날까지도 포위 섬멸전의 가장 뛰어난 사례로 남아 전쟁사를 다루면 반드시 빠지지 않고 다뤄지는 전투로 남았다.
[스키피오의 아프리카 침략]
이탈리아에서 한니발이 고립되는 동안, 로마의 젊은 총사령관 스키피오가 카르타고 본토인 아프리카를 침략했다. 이는 한니발에게 본국 방어를 위해 귀환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기원전 204년 겨우 31세에 불과한 젊은 총사령관 스키피오가 아프리카를 침략하자 결국 기원전 203년 아프리카의 본국으로 돌아왔다.
[카르타고 본국으로 귀환]
스키피오의 아프리카 침략으로 인해 15년간 이탈리아에서 로마를 압박하던 한니발은 카르타고 본토 방어를 위해 아프리카로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전쟁의 전세가 역전되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기원전 204년 겨우 31세에 불과한 젊은 총사령관 스키피오가 아프리카를 침략하자 결국 기원전 203년 아프리카의 본국으로 돌아왔다. 본국에 돌아온 한나발은 스키피오 총사령관과, 카르타고 군을 대표하여 교섭을 하여 시칠리아 등의 카르타고 왕국의 식민지를 양도하겠다고 말했지만, 스키피오는 카르타고가 항복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우종묵 외, 《이야기 세계사1》, 청아출판사) 당연히 교섭은 실패하였고, 전쟁으로 이어졌다.
[자마 전투에서의 패배]
카르타고로 귀환한 한니발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자마 전투에서 맞붙어 완패했다. 이 전투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종언을 고하며, 카르타고는 로마에게 지중해 패권을 넘겨주게 된 결정적인 패배였다.
본국에 돌아온 한나발은 스키피오 총사령관과, 카르타고 군을 대표하여 교섭을 하여 시칠리아 등의 카르타고 왕국의 식민지를 양도하겠다고 말했지만, 스키피오는 카르타고가 항복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우종묵 외, 《이야기 세계사1》, 청아출판사) 당연히 교섭은 실패하였고, 전쟁으로 이어졌다. 마치 노동조합과 사용자가 교섭을 했고, 노동위원회에서도 중재를 하였으나 결렬하여, 노동조합이 파업, 준법투쟁, 태업등과 같은 노동쟁의를 할 수 있는 권리를 손에 넣은 꼴이었다. 어느새 한니발의 전략을 더욱 우수하게 습득한, 로마의 젊은 장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자마 전투에서 싸워 완패했다. 당시 카르타고 육군의 젊은 기병들은 한나발과 달리 전쟁 경험이 부족하여,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 육군의 노련한 전술에 휘둘려 전사하는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우종묵 외, 《이야기 세계사1》, 청아출판사) 마치 젊은 프로복서가 한국권투위원회에서 실시하는 프로복싱 경기대회인 신인왕전 결승에서 우승이나 준우승을 하여 권투 실력을 선보인 뒤, 첫 경기에서 노련한 상대 선수의 권투기술을 경기모습을 담은 영상이나 글을 보고, 미리 학습을 하여 판정 문제판정승이나 케이오로써 이긴 셈이다. 이 전투로 인해 주로 신병이었던 군인들이 전사하였고, 제 2차 포에니 전쟁은 종언을 맞으며, 카르타고는 로마에게 지중해 세계의 자치권을 넘겨주게 된다.
[판관으로서 개혁 주도 및 망명]
제2차 포에니 전쟁 패배 후 카르타고의 판관으로서 로마에 대한 전쟁배상금 등 정치·재정적 개혁을 주도했다. 그러나 기득권층의 반발로 인해 카르타고를 떠나 자발적 망명을 선택해야 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카르타고의 패배로 끝난 이후 한니발은 판관으로서 로마에 대한 전쟁배상금을 비롯한 여러 정치적 재정적 문제에 대한 개혁을 주도했다. 그러나 한니발의 개혁은 기득권을 침해 당했다고 생각한 카르타고의 귀족들의 심기를 거슬렀고, 한니발은 자발적 망명이라는 형태로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다.
[안티오쿠스 3세의 군사 고문]
카르타고에서 망명한 후 셀레우코스 제국으로 건너가 로마와의 전쟁을 준비하던 안티오쿠스 3세의 군사 고문관이 되었다. 하지만 발언권이 미미했고, 안티오쿠스가 로마에게 패배하자 다시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셀레우코스 제국으로 가서 로마와의 전쟁을 준비하던 안티오쿠스 3세의 군사 고문관이 되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고문에 불과했던 한니발은 별 발언권도 없었으며 안티오쿠스가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로마에게 패배하자 한니발은 다시 도망자 신세가 되었고 결국 고대 아르메니아 왕국아르메니아까지 도망쳤다.
BC 2C
[비티니아 해전 승리 및 음독 자살]
비티니아에서 생애 마지막으로 지휘권을 부여받아 페르가몬 해군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로마에게 넘겨질 위기에 처하자,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음을 알고 몸에 지니고 다니던 독을 마셔 자살했다. 향년 64세 또는 66세였다.
결국 한니발은 도피를 거듭하다가 비티니아까지 가게 되는데 이때 생애 마지막으로 지휘권을 부여받아 비티니아 해군을 이끌고 페르가몬 해군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 뒤 한니발은 로마에게 팔아넘겨지게 되었고,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어진 한니발은 음독 자살했다. 이때 그는 향년 64세 또는 66세였다 (기원전 183년). 한니발의 아내, 시밀케와 그의 아들, 그리고 에스파냐에서 총독으로 근무하던 동생, 하스드루발과 또다른 동생 마고는 로마와의 전쟁 중에 죽었으며, 자신도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소아시아로 도망쳤다가 수년 후 공을 세우고 싶어한 한 로마인 백인대장이 자신을 찾는것을 알자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던 독을 마셔 자살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