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인
가수, 영화배우, 군인, 사업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31:23
대한민국 제1호 가수이자 1950년대를 풍미한 대중음악계 거장. 독특한 저음과 비브라토 창법으로 암울했던 한국 전쟁 후 시대에 서민들의 아픔을 달래준 노래로 큰 사랑을 받았다. '신라의 달밤', '굳세어라 금순아'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기며 대중음악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본 문서는 위키백과 현인 문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편집되었으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배포됩니다.
1919
[출생 및 음악과의 첫 만남]
부산에서 아버지 현명근과 어머니 오봉식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일본으로 건너간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일본으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러시아 베이스 가수 표도르 샬리아핀의 독창회를 보고 처음으로 음악을 접하게 됩니다.
부산에서 현명근과 오봉식의 장남으로 출생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양산군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냈으며, 영도와 동래를 오가며 성장했습니다. 이후 석유 회사를 다니던 아버지가 일본 마이니치 신문의 도쿄 지사 기자가 되어 일본으로 떠나자,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러시아 베이스 가수 표도르 샬리아핀의 독창회를 보고 처음으로 음악을 접했습니다.
1931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 입학 및 학창 시절 활동]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영어, 일본어, 음악에 재능을 보였습니다. 1933년에는 학교 배구 대표 선수로 활약했으며, 방과 후 밴드부에서 트럼펫을 연주하며 대중가요와 포크송을 즐겨 불렀습니다.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영어와 일본어, 음악에 재능을 보였습니다. 1933년에는 학교 배구 대표 선수로 활동했으며, 방과 후에는 밴드부에서 일본의 대중가요나 미국의 포크송을 트럼펫으로 즐겨 불렀습니다. 학창 시절 장티푸스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겼고, 어머니가 동생을 낳다가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1938
[도쿄 음악학교 진학 및 음악 활동 시작]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육사 대신 도쿄 음악학교 성악과에 진학하며 본격적인 음악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아버지의 학비 지원이 끊기자 막노동을 하며 학비를 벌었고, 이듬해 NHK 합창단 단원이 되었습니다.
1938년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같은 해 일본 육사에 진학하려 했으나 방향을 바꿔 도쿄 음악학교 성악과에 진학하여 음악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음악학교 진학을 불쾌하게 여겨 학비 지원을 끊자 막노동을 하며 학비를 벌어야 했습니다. 1년 뒤 NHK 합창단의 모집 오디션에 응시하여 단원이 되었습니다. 유학 시절 왕족 출신 아사카 기요코와 연애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1939
[창씨개명 및 악극단 활동]
일본식 이름인 '고토 진'으로 창씨개명했습니다. 훗날 그의 예명이 된 '현인'은 고토라는 성만 현으로 바꾼 것입니다. 1942년 도쿄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성보악극단의 음악 교사로 일했으며, 동료들과 악극단을 구성해 중국 톈진, 베이징, 항저우 등지에서 공연했습니다.
1939년에 '고토 진' (後藤 仁)으로 창씨개명했는데, 훗날 그의 예명이 된 '현인'(玄仁)은 고토라는 성만 현으로 바꾼 것입니다. 1942년 도쿄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성보악극단의 음악 교사로 일했습니다. 1943년에는 동료들과 악극단을 구성해 톈진으로 가서 클럽 신태양의 무대에 올랐으며, 베이징, 항저우 등지로 공연을 다녔습니다.
1945
[패전 후 수감 및 귀국]
일본이 패전한 후 베이징 비밀 형무소에 수감되어 고초를 겪었습니다. 귀국 후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가족들에게 외면당했고, 홀로서기를 시작하며 미군 위문 공연에 뛰어들어 고향경음악단을 조직했습니다.
일본이 패전한 뒤 베이징 비밀 형무소에 수감되어 고초를 겪었으며, 귀국하여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가족들로부터도 철저히 외면당했습니다. 이후 홀로서기를 시작한 현인은 벌이가 좋은 미군 위문 공연에 뛰어들어 탱고를 전문으로 하는 고향경음악단을 조직했습니다.
1947
['신라의 달밤' 대히트 및 데뷔]
29세에 최초의 나이트클럽인 뉴스맨스 클럽 무대에서 활동하며 밤무대에서 이름을 알렸습니다. 같은 해 박시춘이 작곡하고 유호가 작사한 '신라의 달밤'을 발매하여 대히트를 기록하며 '대한민국 제1호 가수'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습니다.
1947년 29세에 최초의 나이트클럽인 뉴스맨스 클럽 무대에서 활동하며 밤무대에서 이름을 알렸습니다. 그해 박시춘이 작곡하고 유호가 작사한 '신라의 달밤'을 발매하여 대히트를 기록했습니다. 해방 이래 앨범을 발표하여 데뷔한 가수는 현인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제1호 가수'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됩니다.
1949
[영화 '푸른 언덕' 주연 및 번안곡 활동]
'신라의 달밤' 인기에 힘입어 해방 후 최초의 음악 영화인 '푸른 언덕'에 주인공으로 선정되었고, 영화 주제가도 직접 불렀습니다. 이 무렵 '베사메 무쵸' 등 세계적인 히트곡을 번안해 부르며 트로트 일변도의 대중음악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었습니다.
1949년 '신라의 달밤' 인기에 힘입어 해방 후 최초의 음악 영화인 '푸른 언덕'에 주인공으로 선정되었고, 영화 주제가도 직접 불렀습니다. 이 무렵 현인은 세계를 풍미하던 '베사메 무쵸'나 '꿈속의 사랑'과 같은 곡을 번안해 노래하여 트로트 일변도의 대중음악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습니다. 1948년에는 '럭키서울', '꿈이여 다시한번', '비 내리는 고모령' 등을 발표했습니다.
1950
['굳세어라 금순아' 등 히트, 시대의 위로가 되다]
'고향 만리', '굳세어라 금순아' 등을 잇달아 히트시키며 1950년대 가장 빛나는 대중 예술가 중 한 명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의 노래는 한국 현대사를 반영하며 우울한 시대에 서민들의 아픔을 달래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1950년대 초 현인은 '고향 만리', '굳세어라 금순아'(1950년), '인도의 향불'(1950년), '전우야 잘자라'(1950년) 등을 잇달아 히트시키며 1950년대에 가장 빛나는 대중 예술가의 한 사람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현인의 노래는 고단했던 한국 현대사를 반영하고, 우울한 시대에 서민의 아픔을 달래 주었습니다. 한국 전쟁이 터지자 군부대 위문 공연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부산 동아 극장에서 은방울악극단의 '은방울쇼'에 당대 스타들과 함께 연예 활동을 하였습니다.
1951
부민관에서 '손목인과 그 악단'의 공연에 특별 출연하였습니다.
동아 극장에서 '현인과 그 악단'을 만들어 '멍기의 노래'로 무대에 올랐습니다.
1952
[샹송 붐 조성 및 대중음악 다양화]
에디트 피아프와 이브 몽탕의 히트곡 '장미 빛 인생' 등을 번안하여 불러 한국에 샹송 붐을 일으키며 대중음악의 지평을 넓혔습니다.
에디트 피아프와 이브 몽탕의 히트곡 '장미 빛 인생' 등을 불러 한국에 샹송 붐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이외에도 '체리핑크 맘보' 등을 번안했습니다.
신청년극단의 가극 '성웅 이순신'에 출연하기도 하였습니다.
1954
한국 전쟁이 끝난 후 서울로 돌아간 현인은 박시춘의 은방울쇼단에 합류하면서 다시 큰 인기를 모았습니다.
1957
두 번째로 결혼한 아내 박정혜와 이혼하였습니다.
1958
'아리랑 맘보'를 발표했습니다.
1959
봉봉쇼단이 재정난으로 6개월 만에 파산하였습니다.
1974
[뉴욕 이민 및 사업 실패]
56세의 나이에 뉴욕 시티로 이민을 떠나 세 번째 결혼을 하고 사업을 시작했으나, 부진을 면치 못했습니다.
1974년 56세에 뉴욕 시티로 이민을 떠나 그곳에서 세 번째로 결혼하고 사업을 시작했으나 부진을 면치 못했습니다.
1981
뉴욕에서의 사업 부진을 면치 못하고 귀국하였습니다. 1981년 중반부터 1999년까지 10여 년 동안《가요무대》를 비롯한 여러 방송에 출연하며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1999
지병인 당뇨가 악화되어 활동을 중단하였습니다.
2002
[영면하다]
당뇨 합병증으로 서울아산병원에서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해방 이래 앨범을 발표하여 데뷔한 최초의 가수로서 '대한민국 제1호 가수'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당뇨 합병증으로 인해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에서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해방 이래 앨범을 발표하여 데뷔한 가수는 현인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제1호 가수'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