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근모
물리학자, 원자력 전문가, 과학기술 행정가, 교육자, 정치인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47:20
대한민국 과학기술 교육 및 연구 거버넌스의 초석을 마련한 선구적 과학기술정책가이자 물리학자입니다. 최연소 박사 학위 취득 기록을 보유했으며, 과학기술처 장관을 두 차례 역임하며 국내 기초연구와 원자력 기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한국과학원,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설립을 주도하고 IAEA 총회 의장직을 수행하는 등 폭넓은 활동을 펼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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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
1939년 12월 30일 교육자 집안의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훗날 한국 과학기술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됩니다.
1954
1954년 경기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하며 학업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1955
고등학교를 1년 만에 수료한 후 1955년 서울대학교에 차석으로 입학하며,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학업 능력을 입증했습니다.
1955년 7월 서울고등학교 1년 과정을 수료하며 조기 졸업하는 등 학업적 탁월함을 보였습니다.
1959
1959년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며 자연과학 분야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1960
1960년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하여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에 대한 폭넓은 관심을 보여주었으며, 같은 해 미국 미시간주립대학으로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1963
[대한민국 최연소 박사 학위 취득]
미국 미시간주립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당시 대한민국 최연소 박사 학위 취득 기록(23세 5개월)을 세웠습니다.
1963년 미국 미시간주립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이로써 23세 5개월의 나이로 대한민국 최연소 박사 학위 취득 기록을 수립하며 천재적인 면모를 다시 한번 증명했습니다 (2018년 경신).
1964
1964년부터 1966년까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후(Post-Doc) 과정을 밟으며 물리학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1967
[미국 대학 연구 및 교수 활동]
박사 학위 취득 후 남플로리아대학 조교수, MIT 핵공학과 연구교수, 뉴욕공대 전기물리학과 부교수 등을 역임하며 활발한 연구 및 교육 활동을 펼쳤습니다.
1963년 박사 학위 취득 이후 남플로리아대학 조교수, MIT 핵공학과 연구교수, 뉴욕공대 전기물리학과 부교수로서 미국에서 연구 활동을 지속했으며, 이 시기 하버드행정대학원에서 과학기술정책 과정을 수료하기도 했습니다.
[한국과학원 설립 초석 마련]
MIT 연구 재직 중 하버드행정대학원 과학기술정책 과정을 수료하며 한국과학원 설립의 초석이 된 "후진국에서의 두뇌유출을 막는 정책 수단"이라는 논문을 작성했습니다.
MIT에서 연구 활동을 하던 중 하버드행정대학원(현 케네디스쿨)에서 운영하는 과학기술정책 과정을 수료했으며, 이때 작성한 "후진국에서의 두뇌유출을 막는 정책 수단"이라는 논문이 훗날 한국과학원 설립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1970
1970년, 당시 과학기술처 김기형 장관의 초청을 받아 귀국했습니다. 이는 당시 심각했던 국내 과학기술 인재들의 해외 유출(두뇌유출) 문제를 해결하고 국가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971
[한국과학원 설립 및 초대 부원장 임명]
새로운 이공계 대학원인 한국과학원(현 한국과학기술원) 설립을 주도하고, 초대 부원장으로 임명되어 고급인력 양성을 위한 특수 교육기관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1971년, 국내 두뇌유출 현상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과학기술처 산하의 새로운 이공계 대학원인 한국과학원 설립을 제안하고 그 방향 및 설계를 주도했습니다. 같은 해 한국과학원 초대 부원장으로 임명되어 고급인력 양성을 위한 특수 교육기관의 초석을 다졌습니다.
1975
한국과학원 설립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5년 한국과학원 설립 공로패를 수상했습니다.
1986
국가 과학기술 발전에 대한 기여를 인정받아 1986년 은탑산업훈장을 수상했습니다.
1988
1988년부터 1990년까지 한국과학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하며 국내 과학기술 정책계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1989
1989년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총회 의장직을 수행하며 전 세계 원자력 발전의 안전과 위험 거버넌스 구축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90
[기초연구 육성 및 연구기관 설립 주도]
SRC, ERC 등 우수연구센터 육성 정책을 개발, 추진하고 한국과학기술한림원, 고등과학원 설립에 주도적 역할을 하며 국내 기초연구 강화와 과학기술자의 위상 제고에 힘썼습니다.
1990년대 과학기술처 장관 재임 중 국내 기초연구 및 집단연구를 장려하기 위해 SRC, ERC 등 우수연구센터 육성 정책 이론을 개발하고 추진했습니다. 또한, 한국과학기술한림원과 고등과학원 설립에도 주도적 역할을 하여 과학기술자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1990년 3월 19일 제12대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취임하여 1990년 11월 9일까지 직을 수행하며 국가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1991
국가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1991년 청조근정훈장을 수상했습니다.
1993
[한국형 원전 표준 설계 사업 주도]
한국전력기술주식회사 사장 재직 중 KSNP-OPR-APR로 이어지는 한국형 원전 표준 설계 사업을 주도하여 국내 원자력 발전의 핵심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한국전력기술주식회사(KOPEC) 사장 시절, 훗날 KSNP-OPR-APR로 연결되는 한국형 원전 표준 설계 사업을 주도적으로 추진했습니다. 이 사업의 결과로 12개의 OPR1000 원전이 국내 원자력 발전 사업의 주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1994
1994년 모교인 미시간 주립대학교로부터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습니다.
[제15대 과학기술처 장관 재취임]
제15대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다시 취임하여 국내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정책 추진을 이어갔습니다.
1994년 12월 24일 제15대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다시 취임하여 1996년 8월 7일까지 직을 수행하며 대한민국의 과학기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1995
1995년 미국 Polytechnic대학교로부터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습니다.
1998
[국제 원자력 공로상 수상]
캐나다 원자력협회 국제공로상과 세계원자력한림원상을 수상하며 국제적으로 원자력 분야의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
1998년 캐나다 원자력협회 국제공로상과 세계원자력한림원상을 수상하며 원자력 분야에서의 국제적인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
2001
과학기술 발전에 대한 기여를 인정받아 2001년 장영실과학문화상을 수상했습니다.
2004
2004년 12월 6일 명지대학교 제7대 총장으로 취임하여 2007년 9월 30일까지 대학 운영을 책임졌습니다.
2007
2007년 참주인연합 소속 대선후보로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며 정치 분야에서도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득표율 0.06%로 9위를 기록하며 낙선했습니다.
2009
[아랍에미리트 원전 사업 기획 및 원자력 인재 양성 기여]
한국전력공사 고문으로 활동하며 아랍에미리트 원전 사업을 기획하고 한전국제원자력대학원대학교 설립에 앞장서 국내외 원자력 인재 양성에 기여했습니다.
2009년 한국전력공사 고문이 된 후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사업을 기획하고, 한전국제원자력대학원대학교(KINGS)를 설립하는 데 앞장서 국내외 원자력 인재 양성과 기술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