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휘소
이론물리학자, 입자물리학자, 교수, 한국계 미국인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7- 20:25:04
이휘소는 한국계 미국인 이론물리학자로, 20세기 후반 입자물리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자발적으로 대칭성이 깨진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 문제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맵시 쿼크의 질량을 정확히 예측하여 그 발견에 기여했습니다. 스티븐 와인버그와 함께 가벼운 암흑물질의 리-와인버그 경계를 계산했고, 한국의 민주주의 원칙을 강조하며 독재 정권 하 한국 방문을 거부하는 등 소신을 지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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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
일제 강점기 조선 경성부 원정(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에서 아버지 이봉춘과 어머니 박순희의 3남 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모친은 자혜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했고, 부친 또한 의사 면허가 있었으나 개업 활동은 하지 않았다.
1941
[경성사범학교 부속제1국민학교 입학]
7세에 경성사범학교 부속제1국민학교에 시험을 통해 입학했으며, 당시 학교에는 조선인이 두 명 정도 재학 중이었다.
일곱 살이 되던 해, 1941년에 경성사범학교 부속제1국민학교에 시험을 치러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원칙적으로 일본인만 입학할 수 있었지만, 당시 이휘소가 재학할 때에는 조선인이 두 명쯤 재학하고 있었다. 이 무렵 가족은 신설정으로 이사했고, 모친은 이곳에서 소아과와 산부인과 전문 자애의원을 개업했다.
1947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국민학교 졸업 및 경기중학교 진학]
광복 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국민학교 소속으로 졸업하고 경기중학교에 진학했다. 중학교 시절 화학반에서 활동했다.
국민학교 4학년 재학 중에 광복을 맞이했으며, 광복과 함께 경성사범학교가 폐지되어 1947년 졸업할 무렵에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국민학교 소속이었다. 그 해 경기중학교에 진학하여 중학교 시절 화학반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1950
이휘소가 중학교 4학년 때인 1950년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휘소 일가는 잠시 서울 근교 광릉의 친척 집으로 옮겨 지내다가 9.28 서울 수복 이후 다시 집에 돌아갔지만, 1·4 후퇴 때 다시금 충청남도 공주시에 있는 부친의 옛 고향 집으로 피난을 갔다. 이후 경상남도 마산시로 옮겼다.
1951
부친 이봉춘은 창원보건소장으로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마산과 창원은 출퇴근 거리가 아니었기에 창원보건소에서 주로 지내다가 주말에 마산의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1951년 12월, 직장 생활 1년여 만에 귀가 중 개울 둑에서 발을 헛디뎌 사망하였다.
1952
이휘소는 검정고시를 치러 대학 입학 자격을 얻은 후, 입학시험을 통해 1952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하였다. 당시 서울대학교는 전시연합대학 체제 하에 부산 서구 대신동의 가건물에 위치해 있었다. 이휘소는 한 학기 수업 후 물리학에 흥미를 느껴 문리과대학 물리학과로의 전과를 여러 차례 시도했다.
1955
[미국 유학길에 오르다]
서울대학교에서 물리학 전과가 좌절되자, 한국전 참전 미군 장교 부인회의 유학장학생에 선발되어 미국 마이애미 대학교 물리학과로 편입하기 위해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했다.
서울대학교에서 공과대학에서 문리과대학 물리학과로의 전과를 허락하지 않자 독학으로 물리학을 공부하며 실망하던 중, 한국전 참전 미군 장교 부인회의 후원을 받는 유학장학생에 선발됐다. 1955년 1월 26일 아침,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하여 도쿄,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시카고를 경유해 1월 31일 마이애미 대학교에 도착했다.
1956
[마이애미 대학교 물리학과 최우등 졸업]
미국으로 건너온 지 1년 반 만에 마이애미 대학교 물리학과를 최우등(summa cum laude)으로 졸업하고, 피츠버그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했다.
1955년 1월에 오하이오주 마이애미 대학교 물리학과에 편입하여 서울대학교 성적을 인정받아 3학년 과정에 진학했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생활을 반복한 끝에, 미국으로 건너온 지 1년 반 만인 1956년 6월 물리학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학과장 추천으로 피츠버그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피츠버그 대학교 대학원 생활 및 전공 선택]
피츠버그 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조교와 연구조교를 겸하며 원자핵 이론 강의를 듣고 입자이론물리학, 특히 양자장론을 전공하기로 결심했다.
여름방학을 끝낸 1956년 8월부터 피츠버그 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조교(TA) 장학생으로 공학과와 의예과 학생들의 물리학 실험 TA를 담당했다. 이듬해 가을학기부터 연구조교(RA)와 TA를 겸하며 정식 강의를 배정받았다. 원자핵 이론 강의를 담당했던 시드니 메슈코프의 영향으로 입자이론물리학, 정확히는 양자장론을 전공으로 희망했다.
1958
[물리학 석사학위 취득]
피츠버그 대학교 박사 학위 자격시험 수석 합격 후, 한 달여 만에 석사 학위 논문 〈산란행렬의 해석적 특성과 그 응용〉을 완성하여 1958년에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피츠버그 대학교 박사 학위 자격시험에서 차점 합격자와 총점이 20점 이상 벌어지는 높은 점수로 수석 합격했다. 이후 기관지염으로 고생하다 몸을 추스른 후 석사 학위 논문 〈산란행렬의 해석적 특성과 그 응용〉을 한 달여 만에 완성하여 1958년에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 논문은 그해 12월 《피지컬 리뷰》에 기고되었다.
1960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박사 학위 취득]
피츠버그 대학교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에이브러햄 클라인 교수 지도를 받으며 25세에 물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피츠버그 대학교 박사 진급을 앞두고 있던 이휘소는 시드니 메슈코프 교수의 추천으로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에이브러햄 클라인 교수에게 갔다. 클라인 교수는 이휘소의 재능을 인정하여 박사 학위 예비시험을 면제하고 해리슨 연구장학금을 주선해주었다. 클라인 교수와 공동 연구를 수행하여 1960년 11월, 〈K⁺ 중간자와 핵자 산란 현상의 이중 분산 관계〉로 25세에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공식적인 박사 학위증은 1961년 2월 4일에 수여됐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박사후 연구원 및 전임 강사 임용]
박사 논문 디펜스가 끝난 후부터 이듬해 8월까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박사후 연구원 및 전임 강사로 임용되어 활동했다.
박사 논문 디펜스가 끝난 1960년 11월부터 1961년 8월까지, 이휘소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박사후 연구원 및 전임 강사로 임용되어 연구와 강의 활동을 수행했다.
1961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연구회원 초빙 및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조교수 임용]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연구회원으로 초빙되었으며, 동시에 클라인 교수의 배려로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조교수로 임용되어 안정적인 연구 환경을 확보했다.
이휘소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연구회원으로 초빙됐는데 임기는 1년이었다. 클라인 교수의 배려 덕분에 1961년부터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조교수로 임용되어,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임기가 끝난 후의 직장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프린스턴으로 떠나기 전, 동료들과 군론을 아원자 입자 이론에 응용하는 공동 논문을 집필하여 《리뷰 오브 모던 피직스》에 기고했다.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자연과학부 한국인 최초 연구회원]
한국인 최초로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자연과학부의 연구회원이 되었고, 양-밀스 이론의 양자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밤낮없이 연구에 몰두했다.
1961년 가을, 이휘소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자연과학부의 연구회원이 됐다.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미혼자용 기숙 아파트에 살면서 저녁 식사나 술자리 같은 사적 모임에 거의 참석하지 않고 밤낮없이 연구실에만 붙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무렵, 이휘소는 양-밀스 이론의 양자화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962
[컬럼비아 대학교 교수직 제안 거절 및 약혼]
컬럼비아 대학교의 교수직 제안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복귀 시 부교수 승진 약속으로 거절했으며, 말레이시아 화교 마리안 문 칭 심과 약혼했다.
1962년 2월, 컬럼비아 대학교 주임교수 이지도어 아이작 라비가 이휘소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컬럼비아 대학교 조교수로 채용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이휘소는 클라인 교수와 상의 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복귀 시 부교수로 승진시켜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또한 필라델피아를 떠나 프린스턴으로 올 무렵부터 교제하던 말레이시아 화교 마리안 문 칭 심과 1962년 3월에 약혼했다.
1962년 5월 7일, 이휘소는 워싱턴에서 27세의 나이에 마리안 문 칭 심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녀 사이에 아들 제프리 파운틴 리와 딸 아이린 앤 리를 두었다. 마리안은 여자 의과대학 입학을 준비 중이었으나, 이휘소의 내조에 전념하기 위해 졸업 후 개업의 활동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이론물리학 세미나 참석]
국제 원자력 기구가 주최하는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이론물리학 세미나에 10인의 미국 대표단 일원으로 선출되어 참석했다.
1962년 6월 초, 이휘소는 국제 원자력 기구가 주최하는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이론물리학 세미나에 참석할 10인의 미국 대표단 일원으로 선출됐다. 당시 국적상 미국인이 아니었음에도 선발된 것이었다. 트리에스테 이론물리학 세미나는 1962년 7월 16일부터 8월 25일까지 개최되었다.
1963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부교수 승진]
앨프레드 P. 슬론 재단의 연구회원직을 수행하며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로 복귀했고, 클라인 교수의 약속대로 바로 부교수로 승진했다.
1963년에 이휘소는 앨프레드 P. 슬론 재단의 연구회원직을 수행했다. 이 해에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로 복귀했고, 클라인 교수의 약속대로 바로 부교수로 승진하였다. 당시 그는 세계 각국에서 열리는 중요한 물리학회를 비롯해 여러 대학과 연구소에서 강연 초청이 잦았다.
1964
[자발 대칭 깨짐에 관한 논문 발표]
지도교수 클라인과 함께 자발적인 대칭성 깨짐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여, 기본 입자의 질량 존재를 규명하는 힉스 메커니즘 등장에 기여했다.
1964년에 이휘소는 그의 지도교수 클라인과 '대칭성의 자발적 부서짐은 무질량 입자를 의미하는가?'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며, 기본 입자의 질량의 존재를 규명하는 힉스 메커니즘이 등장하게 하는 데 기여했다. 당시 힉스 보손의 존재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기에 이 논문은 힉스 메커니즘과 같은 이론의 등장을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
1965
1965년에 이휘소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정교수로 승진했다. 이는 비교적 빠른 편이었는데, 1964년에 다시 1년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연구 회원을 지낸 것을 또 다른 경력으로 인정받은 결과였다.
1966
[뉴욕 주립 대학교 스토니브룩 양전닝 이론물리학 연구소 정교수 부임]
양전닝 교수의 권유로 뉴욕 주립 대학교 스토니브룩 양전닝 이론물리학 연구소의 정교수로 부임하여 새로운 연구 환경에 정착했다.
1965년 가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양전닝 교수가 이휘소를 찾아와 자신이 뉴욕 주립 대학교 스토니브룩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석좌교수로 옮겨가게 됐다며 이휘소에게도 함께 가자고 권유했다. 이휘소는 1966년 5월 16일 방문 교수로 초청돼 8월 31일까지 재직했으며, 가을학기가 시작되고 9월 25일부터 양전닝 이론물리학 연구소의 정교수로 부임했다.
1967
[스티븐 와인버그 논문 심사 및 약한 상호 작용 연구]
스티븐 와인버그의 약한 상호 작용에 관한 논문 심사를 의뢰받아, 자발적 대칭성 깨짐을 통해 게이지 입자 질량을 설명하려는 독창적인 시도에 주목했다.
1967년 11월, 스티븐 와인버그는 《피지컬 리뷰 레터》에 약한 상호 작용에 관한 설명을 시도하는 짧은 논문을 발표했고, 이휘소는 논문 게재 심사를 의뢰받아 이를 읽었다. 와인버그는 이 논문에서 게이지 대칭성이 자발적으로 깨져 게이지 입자의 질량을 자연스럽게 얻으려는 독창적인 시도를 하고 있었으나, 재규격화 가능성은 아직 입증되지 않은 상태였다.
1968
1968년에 이휘소는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였다. 이 시민권 취득 심사 때 그의 박사후 연구원이었던 윌리엄 A. 바딘이 이휘소의 인성(人性) 증언을 하기도 했다.
[구겐하임 펠로십 및 시그마 모형 재규격화 연구]
구겐하임 펠로십으로 프랑스에서 연구하며 자발적 대칭성 깨짐과 난부-골드스톤 보손에 관심을 가졌고, 선형 시그마 모형의 재규격화 논문을 집필했다.
이휘소는 미국 시민이 된 직후 이듬해인 1969년까지 구겐하임 펠로십으로 활동했다. 이 기간에 그는 프랑스에서 가족과 함께 휴가를 보내면서 파리 제11대학교에서 세미나를 갖고 프랑스 고등연구실습원에서 자유롭게 연구를 수행했다. 이곳에서 자발적으로 대칭성이 부서지는 현상과 그에 의한 난부-골드스톤 보손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머리 겔만과 모리스 레비가 정립한 선형 시그마 모형의 재규격화에 관한 몇 편의 논문을 집필하였다.
1970
[코르시카 여름학교 강연 및 헤라르뒤스 엇호프트에게 영감 제공]
코르시카 여름학교에서 시그마 모형의 자발적으로 부서진 대칭성과 재규격화에 관해 강연했고, 네덜란드 대학원생 헤라르뒤스 엇호프트가 이 강의에서 양-밀스 이론 재규격화에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회고했다.
1970년 6월, 이휘소는 코르시카의 카르제스 여름학교에 강연자로 초청돼 시그마 모형의 자발적으로 부서진 대칭성과 그 재규격화에 관해 강의하였다. 당시 네덜란드의 젊은 대학원생 헤라르뒤스 엇호프트는 지도교수 마르티뉘스 펠트만과 함께 양-밀스 이론의 재규격화에 관해 연구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이휘소의 강의를 듣고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고 훗날 회고하였다.
[키예프 고에너지 물리학 국제회의 참가]
소비에트 연방 키예프에서 열린 제15회 고에너지 물리학 국제회의에 참가하며 공산권 국가에 발을 들였다.
카르제스 여름학교에서 돌아오고 얼마 안 있어서는 소비에트 연방 키예프에서 열린 제15회 고에너지 물리학 국제회의에 참가하며 공산권 국가에 발을 들이기도 했다. 이 회의는 8월 26일부터 9월 4일까지 개최되었다.
1971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교환 교수 재직]
머리 겔만의 초청으로 로스앤젤레스 근처 패서디나에 있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의 교환 교수로 5개월간 재직했다.
1971년 전반기에 이휘소는 머리 겔만의 초청으로 로스앤젤레스 근처 패서디나에 있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의 교환 교수로 5개월간 재직하였다.
[대한민국 물리학 여름 학교 사업 추진 및 중단]
한국과학원 정근모 부원장과 대한민국 물리학 여름 학교 정기 개최 사업을 추진했으나, 독재 체제 강화에 대한 우려로 사업을 중단하는 편지를 보냈다.
1971년 여름에 이휘소는 당시 한국과학원의 정근모 부원장과 함께 대한민국에서 물리학 여름 학교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사업을 적극 추진하고 있었다. 그의 구상은 상당히 구체적이었지만 대한민국에서 독재체제가 강화되는 것에 큰 우려를 표하면서 모두 없었던 일로 하는 편지를 보내게 됐다. 편지에서 이휘소는 한국 현 정권의 억압 정책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일까 걱정되어 한국 정부의 초청을 수락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1972
[박정희 유신헌법 선포에 대한 비판]
박정희의 유신헌법 선포 후 외국인 동료를 대하기 부끄럽다고 자주 말했으며, 독재가 계속되는 한 한국 방문을 단호히 거절했다.
1972년 10월에 박정희가 자신의 독재를 위한 유신 헌법을 선포하자 이휘소는 외국인 동료를 대하기가 부끄럽다고 가까운 한국인 친구들에게 자주 말하곤 했다. 강경식 전 브라운 대학교 교수가 모국 방문 학술회의나 하계 심포지엄 연사 초청을 권유할 때마다, 이휘소는 박정희가 독재를 계속하고 있는 한은 말도 꺼내지 말라고 단호히 거절하곤 했다.
[엇호프트-펠트만 양-밀스 이론 재규격화 설명 및 확산]
헤라르뒤스 엇호프트와 마르티뉘스 펠트만이 양-밀스 이론 재규격화에 성공했으나 난해했던 이론을 이휘소가 알기 쉽게 풀어쓰고 확장하여 학계에 널리 이해되도록 했다.
헤라르뒤스 엇호프트는 카르제스 여름학교의 이휘소에게서 얻은 아이디어를 이용하여 마르티뉘스 펠트만과 함께 양-밀스 이론의 재규격화에 성공했고, 이를 1972년 여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입자물리학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했다. 하지만 당시 이들의 설계는 일반적인 경우에 모두 적용되지 않았고, 당시 물리학자들이 쉽게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었다. 이휘소가 팔을 걷고 나서 이를 알기 쉽게 풀어쓰고 경로적분 형식 등의 다른 설계까지 확장하여 서술하여 그제서야 많은 물리학자들이 이해할 수 있었다. 엇호프트와 펠트만은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1999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핵무기 개발에 대한 단호한 입장 표명]
제자 강주상 교수와의 대화 중 핵무기는 반드시 없어져야 하며, 특히 독재국가의 핵무기 개발은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이휘소는 미국 시민이 됐지만 대한민국에 대한 관심은 한시도 버리지 않았고 제자 강주상 교수와 함께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제를 자주 이야기하였다. 핵무기에 관한 이야기가 화제가 됐을 때 그는 "핵무기는 언젠가 반드시 없어져야 하며, 특히 독재가 행해지고 있는 개발도상국에서의 핵무기 개발은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말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피력하였다고 강주상은 기억한다.
1973
[페르미 연구소 이론물리학 부장 부임 및 시카고 대학교 교수 겸임]
양전닝과의 상의 끝에 페르미 연구소 이론물리학 부장으로 부임하고, 1974년 4월부터 시카고 대학교 교수도 겸임했다.
이휘소는 1973년 9월에 페르미 연구소의 이론물리학 부장으로 부임했으며, 이 해 9월부터 1975년 8월까지 브룩헤이븐 국립연구소 고에너지 자문 위원을 맡았다.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등 여러 곳에서 스카우트 제안이 있었으나, 양전닝과 상의한 끝에 페르미 연구소로 이직하기로 했다. 페르미 연구소 이론물리학 부장에 취임하면서 1974년 4월부터 시카고 대학교 교수도 겸임하기로 했으며, 시카고 대학교에서는 언제든 전임교수가 될 수 있는 조건을 제시받았다.
1974
[런던 고에너지 물리학 국제회의 연사 및 '와인버그-살람 이론' 명명]
런던 고에너지 물리학 국제회의에서 전체 회의 연사로 초청되어 전약 이론의 발전 상황을 발표했고, 압두스 살람의 공헌을 인정하여 이 이론을 '와인버그-살람 이론'이라 명명했다.
1974년에 이휘소는 영국 런던에서 7월 1일부터 7월 10일까지 개최된 제 17회 고에너지 물리학 국제회의에 참가했다. 그는 전체 회의의 연사로 초청되어 전약 이론의 그 때까지의 발전 상황을 정리하여 발표했다. 당시 전약 이론은 일반적으로 '와인버그 이론'이라고 불렸지만, 이 회의에서 이휘소는 전약 이론에 대한 압두스 살람의 공헌을 인정하고 자신의 발표에서 이 이론을 '와인버그-살람 이론'이라 불렀다. 이후 학계에서는 이휘소의 명명을 존중하여 와인버그-살람 이론이라는 명칭이 널리 쓰이게 됐고, 이 덕에 압두스 살람은 스티븐 와인버그, 셸던 글래쇼와 함께 1979년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하게 됐다.
[맵시 쿼크 질량 예측 논문 발표]
메리 게일러드, 조너선 로즈너와 함께 '참쿼크를 찾아서' 논문을 프리프린트로 공개하며 맵시 쿼크의 질량 범위를 예측, 그 탐색에 결정적인 지침을 제공했다.
아원자 입자의 중성 보존류 연구에서 기묘도를 가진 입자가 베타 붕괴 시 중성 보존류가 없다는 결론이 내려지자, 이를 설명하기 위해 맵시 쿼크의 존재가 가정됐다. 이휘소는 1974년 여름, 메리 K. 게일러드, 조너선 로즈너와 함께 '참쿼크를 찾아서'라는 논문에서 케이온의 섞임과 붕괴에 해당하는 양을 계산하여 맵시 쿼크가 존재한다면 그가 가질 수 있는 질량 범위를 예측하였다. 이 논문은 저널에 실리기 전 프리프린트로 공개되어 맵시 쿼크 탐색 실험의 지침서로 사용되었고, 그해 11월 맵시 쿼크가 간접적으로 확인되었다.
[20여년 만에 대한민국 일시 귀국]
미국 국제개발청 차관에 의한 서울대학교 원조 계획의 미국 측 평가위원 자격으로 20여 년 만에 잠시 귀국했다.
박정희 독재 정권 하의 대한민국 방문에 대한 경계심이 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휘소는 1974년에 미국 국제개발청 차관에 의한 서울대학교 원조 계획의 미국 측 평가위원 자격으로 20여 년 만에 잠깐 귀국을 한다. 평가위원들의 원조 타당성 조사 사업은 그 해 9월 1일부터 10월 2일까지 한 달 동안 진행됐다. 그는 만전을 기하여 신변 보장이 확실한 주한미군 용산기지 옆의 주한 미국 대사관 직원 숙소에 묵었으며,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연락처를 비서에게 일러두었다.
1976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연구회원 재초청 및 미국 예술-과학 아카데미 회원 선출]
1976년에 다시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연구회원으로 초청되었고, 같은 해 미국 예술-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휘소는 1976년에 다시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연구회원으로 초청됐다. 또한 이 해에 미국 예술-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되어 그의 학문적 위상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1977
[스티븐 와인버그와 '리-와인버그 경계' 논문 제출]
스티븐 와인버그와 함께 무거운 뉴트리노 질량의 우주론적 최소 경계치에 대한 논문을 제출, 윔프 질량의 하한선을 제시하여 '리-와인버그 경계'로 불리게 되었다.
1977년 5월 13일에 이휘소는 스티븐 와인버그와 함께 '무거운 뉴트리노 질량의 우주론적 최소 경계치'라는 제목의 논문을 《피지컬 리뷰 레터》에 제출했다. 이 논문에서 그들은 초기 우주 팽창의 흔적으로 남아있는 무겁고 안정적인 입자(윔프)의 상호작용 세기가 최소한 2 GeV일 것이라고 예상하며, 윔프 질량이 특정 값보다 가벼우면 흔적의 밀도가 우주의 스케일을 뛰어넘는다는 계산을 제시했다. 윔프 질량이 더 이상 작아질 수 없는 이 경계를 '리-와인버그 경계'라고 부른다.
[교통사고로 사망]
페르미 연구소 여름 연구 심의회에 참가하기 위해 가족들과 콜로라도주 애스펀으로 향하던 중, 일리노이주 케와니 근방에서 대형 트레일러와의 충돌 사고로 즉사했다.
이휘소는 1977년 6월 16일 오후 1시 22분경, 일리노이주 케와니 근방의 80번 주간 고속도로 상에서 교통사고로 숨졌다. 당시 그는 페르미 연구소의 여름 연구 심의회에 참가하기 위해 가족들과 함께 콜로라도주 애스펀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건너편 차선에서 달리던 대형 트레일러의 타이어가 터지면서 중심을 잃고 중앙분리대를 넘어와 이휘소의 차량 운전석을 덮쳤고, 이 사고로 이휘소는 즉사했다. 가족들은 경미한 부상을 입었다. 경찰 기록 및 전문가 분석에 따르면 의도적인 사고일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유작 논문 출판]
스티븐 와인버그와 함께 제출했던 '무거운 뉴트리노 질량의 우주론적 최소 경계치' 논문이 사망 후 출판되며 그의 유작이 되었다.
1977년 5월 13일에 제출했던 '무거운 뉴트리노 질량의 우주론적 최소 경계치' 논문이 1977년 7월 25일에 《피지컬 리뷰 레터》 제 39권 네 번째 호에 실렸다. 그러나 이휘소는 그해 6월 16일에 교통사고로 숨졌기 때문에 이 논문의 출판을 볼 수 없었고, 이 논문은 사실상 그의 유작이었다.
이휘소는 1977년 10월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에 추서됐으며, 이는 그의 학문적 업적과 국위 선양에 대한 인정을 의미했다.
1994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관련 논란]
소설가 김진명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출판 후, 이휘소의 유족은 저작권 침해 및 명예 훼손을 이유로 출판 및 판매 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으나 기각되었다.
이휘소의 사후, 소설가 김진명에 의하여 이휘소의 생애를 주제로 한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출판됐다. 이에 대해 이휘소의 미망인 등 유족은 소설에서 이휘소 박사의 일기, 편지 등을 무단 전재하거나 인용하여 저작권과 프라이버시가 침해되었고, 교통사고 사망을 미국의 공작에 의한 살해로 묘사하여 고인의 명예가 훼손됐다는 이유로 소설의 출판 및 판매 금지 등 가처분신청이 있었다. 법원에서는 원고의 청구를 기각하였다.
2006
이휘소는 2006년에 한국과학기술한림원에 의해 한국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2005년도 헌정 대상자)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