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 정치인, 군인, 민권 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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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 정치인, 군인, 민권 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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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제35대 대통령 (1961-1963).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이자 최연소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임기 중 피그스만 침공, 쿠바 미사일 위기, 베를린 장벽 등 국제적 위기와 흑인 민권 운동을 이끌었다. '뉴 프런티어' 정신을 주창하고 평화 봉사단을 창설했으나, 댈러스에서 암살당하며 짧은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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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

[존 F. 케네디 탄생]

미국 매사추세츠주 브루클라인에서 아일랜드계 가톨릭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존 F. 케네디는 1917년 5월 29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브루클라인 빌즈가 83번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19세기 후반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인해 미국으로 이주한 아일랜드계 가톨릭 집안이었다. 그의 아버지 조지프 P. 케네디는 자식 중 한 명의 대통령 탄생을 원했다.

1940

[하버드 대학 졸업 및 해군 복무 시작]

하버드 대학에서 국제관계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태평양 전쟁 중 해군으로 복무하며 국가에 헌신했다.

1940년 하버드 대학에서 국제관계학을 전공하고 쿰 라우데 급의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이후 태평양 전쟁 중 해군으로 복무했으며, PT-109 고속 어뢰정의 해군 장교로 남태평양에서 근무했다.

1948

[하원의원 당선]

민주당 정치인으로 두각을 나타내며 미국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의회 활동을 시작했다.

1948년부터 1953년까지 미국 하원의원으로 재직하며 정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1953

[상원의원 당선]

미국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1960년까지 의정 활동을 이어가며 전국적인 인지도를 높였다.

1953년부터 1960년까지 미국 상원의원으로 활동하며 정치적 입지를 굳혔다.

1960

[미국 대통령 당선]

리처드 닉슨 공화당 후보를 누르고 미국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으로 당선되며 '오하이오 징크스'를 깬 유일한 대통령이 되었다.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리처드 닉슨 공화당 후보를 누르고 미국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유세 도중 소련과의 '미사일 격차' 해소를 강조했으며, 오하이오주에서 패배하고도 당선된 유일한 대통령으로 기록되었다.

1961

[베트남전 고엽제 살포 허용]

남베트남 응오딘지엠 정권 지원을 위해 네이팜 폭탄 투하와 인체에 치명적인 고엽제(에이전트 오렌지) 살포를 공식적으로 허용하며 베트남 전쟁 개입을 심화했다.

1961년 케네디 정부는 남베트남 응오딘지엠 정권을 지지하기 위해 네이팜 폭탄 투하와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와 같은 인체에 치명적으로 해로운 고엽제 살포를 공식적으로 허용했다. 이는 베트남 전쟁 개입 정책의 노골적인 변화를 보여주었다.

[제35대 미국 대통령 취임]

제35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역사적인 취임 연설을 통해 "조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으십시오"라는 명언을 남겼다.

1961년 1월 20일 제35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의 취임 연설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연설과 함께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명연설로 꼽히며, "조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으십시오"라는 구절로 유명하다.

[미국 평화 봉사단 착수]

행정적 명령으로 미국 평화 봉사단을 착수하여 개발도상국에 수천 명의 미국인을 보내 생활 수준 향상을 도왔다.

1961년 3월 행정적 명령에 의하여 미국 평화 봉사단이 착수되었고, 후에 의회에 의하여 공인되었다. 평화 봉사단은 개발도상국들에 수천 명의 미국인들을 보내 그들의 생활 기준들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는 케네디의 가장 성공적인 프로그램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불황 지역 원조 입법 찬성]

입법부 의원들이 경제적으로 불황적인 지역들에 대한 원조를 찬성하여 '뉴 프런티어' 정책의 일환으로 경제 활성화를 추진했다.

1961년 4월, 입법부 의원들은 경제적으로 불황적인 지역들에 원조를 찬성하였다. 이는 케네디 정부의 '뉴 프런티어' 정책의 일환으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지역들에 대한 지원을 통해 국가 전체의 발전을 도모하려는 움직임이었다.

[피그스만 침공 실패]

쿠바 혁명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망명 쿠바인 반란군의 침공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며, 케네디는 이 불행한 사건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였다.

1961년 4월 17일, 망명한 쿠바인 반란군들이 쿠바 혁명으로 수립된 피델 카스트로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자국을 침공했으나, 이 작전은 큰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침투했던 1,500명 중 114명이 전사하고 1,189명이 쿠바 혁명군의 포로로 붙잡혔다. 케네디는 대통령으로서 미국에 의해 계획된 이 불행한 침입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였다.

[시간당 임금 증대 입법 찬성]

의회는 시간당 최저 임금을 1달러에서 1달러 25센트로 증대하는 법안을 찬성했다.

1961년 5월, 의회는 시간당 임금을 1달러에서 1달러 25센트로 증대하는 데 찬성하였다. 이는 근로자들의 생활 수준 향상을 목표로 한 '뉴 프런티어' 정책의 사회 복지 강화 노력이었다.

[베를린 장벽 설치]

동독이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는 시민들을 막기 위해 동·서베를린 사이에 장벽을 세웠고, 케네디는 미국의 군사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예비군을 동원했다.

1961년 8월, 동독은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는 시민들을 막기 위하여 동·서베를린 사이에 장벽을 세웠다. 이에 케네디는 미국의 군사 방어를 강화하기 위하여 주군들과 예비군들을 약 145,000명이나 동원하며 냉전의 긴장에 대응했다.

1962

[베트남군사원조사령부 설치]

베트남 전쟁 개입 정책에 따라 폴 하킨스를 사령관으로 하는 베트남군사원조사령부(MAC-V)를 수도 사이공에 설치했다.

1962년 2월, 케네디는 폴 하킨스를 사령관으로 하는 베트남군사원조사령부 즉 MAC-V를 수도 사이공에 설치했다. 이는 남베트남에 주둔한 미군사고문단의 숫자를 증강시키는 정책의 일환이었으며, 설치 10개월 안에 그 숫자가 2배나 증가할 정도로 베트남 전쟁 개입이 가속화되었다.

[무역 확장 결의서 통과]

의회는 케네디의 무역 확장 결의서를 통과시켜 대통령에게 관세 삭감 권한을 부여하고 유럽 경제 공동체 국가들과의 자유 무역을 가능하게 했다.

1962년 9월, 의회는 케네디의 무역 확장 결의서를 통과시켰다. 이 결의서는 대통령에게 관세를 삭감하는 데 넓은 권력을 주어 미국이 유럽 경제 공동체 국가들과 자유롭게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진전이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발생 및 해결]

소비에트 연방이 쿠바에 미사일을 세우는 것이 발각되자, 케네디는 해군에게 쿠바 봉쇄 명령을 내리고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을 외교적으로 해결하여 핵전쟁을 막았다.

1962년 10월, 소비에트 연방이 쿠바에 미사일을 세우는 것을 미국이 알아내자 심각한 위기가 발생했다. 케네디는 해군에게 쿠바를 봉쇄하는 명령을 내리고, 소비에트 연방의 미사일 배달 선박을 돌려보내도록 했다. 또한 임무 수행을 위해 약 14,000명의 공군 예비병들을 소집했다. 일주일 동안 전쟁 위기가 고조되었으나, 니키타 흐루쇼프 소비에트 연방 총리가 모든 소련 미사일 철수를 명령하면서 위기가 해소되었고, 케네디는 해상봉쇄를 해제했다.

1963

[버밍햄 폭동 진압 및 민권 운동 집행]

버밍햄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케네디는 앨라배마 대학교에 흑백인의 공동 입학을 집행하도록 앨라배마 주군을 연방화하며 흑인 민권 운동을 지지했다.

1963년 5월, 버밍햄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다음 달에 케네디는 앨라배마 대학교에 흑백인의 공동 입학을 집행하도록 앨라배마 주군을 연방화하였다. 이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동등한 권리 주장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시기에 이루어진 중요한 조치였다.

[서베를린 연설 ("나는 베를린 사람입니다")]

서베를린을 방문하여 "나는 베를린 사람입니다"라는 명언으로 공산주의의 실패를 비판하고 자유 세계의 단결을 강조하며 서베를린 시민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1963년 6월 26일 서베를린을 방문하여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연설을 하였다. 베를린 장벽 설치를 공산주의의 실패의 증거로 삼으며 "모든 자유인은 그들이 어디에 있건 베를린 시민이라 할 수 있으므로 저 또한 자유인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베를린 사람입니다(Ich bin ein Berliner.).'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라고 말했다. 서베를린 시민의 5/6이 거리에 나와 열광적으로 환호했다.

[차남 패트릭 부비에 케네디 출생 및 사망]

재클린과의 사이에서 차남 패트릭 부비에 케네디가 태어났으나, 이틀 뒤 안타깝게 조졸했다.

1963년 8월 7일, 존 F. 케네디의 차남 패트릭 부비에 케네디가 태어났다. 그러나 패트릭은 8월 9일 조졸하여 가족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워싱턴 D.C. 자유의 행렬]

200,000명의 사람들이 워싱턴 D.C.에서 "자유의 행렬"을 결성하여 흑인들의 동등한 인권과 경제적 권리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1963년 8월 28일, 워싱턴 D.C.에서 흑인들의 동등한 권리를 위한 요구를 데모하기 위하여 200,000명의 사람들이 "자유의 행렬"을 결성하였다. 이 시위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로 유명하며, 케네디 정부의 민권 법안 통과 압박에 큰 영향을 주었다.

[앨라배마 학교 공동 입학 강제]

앨라배마 주의 세 개 도시에서 학교들의 공동 입학을 보증하기 위해 다시 주군을 연방화하며 인종 차별 철폐 노력을 지속했다.

1963년 9월, 케네디는 앨라배마 주의 3개의 도시들에서 학교들의 공동 입학을 보증하기 위하여 다시 주군을 연방화하였다. 이는 흑인 민권 운동의 요구에 대한 정부의 지속적인 대응이었다.

[존 F. 케네디 암살]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재선 운동 중 리 하비 오스월드에게 암살당하며 향년 47세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는 부인 재클린 부비에르와 린든 B. 존슨 부통령 부부와 함께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자신의 재선을 위한 대통령 선거 운동 전에 민주당 회의에서 갈라짐을 고치기 위하여 방문했다. 리무진에 타고 이동 중 리 하비 오스월드에게 암살당하며 향년 47세로 사망했다.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세계 92개국의 국가원수와 사절단이 참석했다. 대통령직은 부통령이었던 존슨이 승계했다. 뉴욕 아일드와일드 국제공항은 이 사건을 추념하여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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