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F. 케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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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F. 케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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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변호사 + 카테고리
로버트 F. 케네디(Robert F. Kennedy)는 미국의 저명한 정치인이자 변호사로, 현대 미국 자유주의를 상징하는 핵심 인물입니다. 그는 형인 존 F. 케네디의 성공적인 선거 캠페인을 이끌었으며, 존 F. 케네디 행정부에서 제64대 미국 법무장관으로 임명되어 민권 운동 지지와 조직범죄 소탕에 헌신했습니다. 형의 암살 이후 뉴욕주 연방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어 빈곤 퇴치와 인권 보호를 위한 다양한 입법 활동을 펼쳤습니다. 1968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서 흑인, 히스패닉, 청년층 등 소외 계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유력한 대선 주자로 떠올랐으나, 캘리포니아 프라이머리 승리 직후 불의의 총격으로 암살당하며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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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925

[로버트 F. 케네디 출생]

로버트 프랜시스 케네디는 미국 매사추세츠주 브루클라인에서 조지프 P. 케네디 시니어와 로즈 피츠제럴드 케네디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9명의 자녀 중 일곱째로, 정치와 공공 문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던 아일랜드계 미국인 명문가에서 성장했습니다.

1943

[미국 해군 예비역 입대]

그의 18세 생일이 되기 6주 전,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기에 미국 해군 예비역에 수병(seaman apprentice)으로 입대했습니다. 이후 군 훈련 프로그램(V-12)에 참여하기 위해 잠시 현역에서 해제되기도 했습니다.

1944

[밀턴 아카데미 졸업]

여러 기숙학교를 거친 끝에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근교에 위치한 밀턴 아카데미(Milton Academy)를 졸업했습니다. 그는 학창 시절 조용하고 수줍음이 많았지만, 부족한 점을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학생이었습니다.

[맏형 조지프 P. 케네디 주니어 전사]

자원 작전인 아프로디테 작전에 참여했던 맏형 조지프가 폭격기 폭발 사고로 전사했습니다. 이 사건은 로버트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고, 맏형의 죽음 이후 가족 내에서 그의 위상과 책임감이 더욱 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46

[미국 해군 명예 제대]

전사한 형의 이름을 딴 구축함 USS 조지프 P. 케네디 주니어 함에서 수병으로 카리브해 훈련 항해를 마친 뒤 해군에서 명예 제대했습니다. 제대 이후 형 존 F. 케네디의 하원의원 선거 캠페인에 합류하여 정치 활동에 발을 들였습니다.

1948

[하버드 대학교 졸업]

해군 제대 후 복학한 하버드 대학교에서 정치학 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습니다. 대학 시절 그는 하버드 크림슨 풋볼 팀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며,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경기에 출전해 대표팀 서한(varsity letter)을 받기도 했습니다.

1950

[에델 스카켈과 결혼]

에델 스카켈(Ethel Skakel)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습니다. 이들 부부는 캐슬린, 조지프 2세, 로버트 주니어, 마이클, 케리 등 총 11명의 자녀를 두게 되었습니다.

1951

[버지니아 대학교 로스쿨 졸업]

버지니아 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하며 법학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로스쿨 재학 중에는 학생 법률 포럼의 회장으로 선출되어 윌리엄 O. 더글러스, 조지프 매카시, 존 F. 케네디 등 유명 연사들을 성공적으로 초청하는 활약을 보였습니다.

1952

[존 F. 케네디 상원의원 선거 캠페인 매니저 활동]

법무부 변호사직을 사임하고 형 존 F. 케네디의 미국 상원의원 선거 캠페인 매니저로 합류했습니다. 이 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존은 전국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했고, 로버트 역시 가족의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해냈음을 인정받았습니다.

[상원 위원회 보조 고문 임명]

아버지의 권유로 조지프 매카시 공화당 상원의원이 이끄는 상원 상설조사소위원회의 보조 고문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하지만 매카시의 공격적인 정보 수집 방식에 동의하지 않아 활동에 갈등을 겪게 되었습니다.

1953

[매카시 위원회 사임]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의 공격적인 방식과 위원회 수석 고문 로이 콘과의 극심한 불화 끝에 위원회 보조 고문직을 사임했습니다. 이후 한동안 진로에 대한 고민과 개인적인 침체기를 겪었습니다.

1955

[미국 연방 대법원 변호사 자격 취득]

미국 연방 대법원 앞에서 변호사로 활동할 수 있는 자격을 정식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이는 법조인으로서 그의 전문성이 한 단계 더 높아졌음을 의미하는 사건이었습니다.

1957

[상원 노동폭력위원회 수석 고문 활동 시작]

상원 노동폭력위원회(Labor Rackets Committee)의 수석 고문으로 발탁되어 활동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지미 호파를 비롯한 부패한 노조 지도자들을 공개적으로 소환하고 추궁하며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었습니다.

1960

[존 F. 케네디 대통령 선거 캠페인 매니저 활동]

위원회에서 사임한 뒤, 형 존 F. 케네디의 1960년 대통령 선거 캠페인을 총괄하며 성공적인 선거전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경선 기간 내내 연설에 나서며 자신감을 얻었고 승리를 위해 치열한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1961

[제64대 미국 법무장관 취임]

존 F.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 제64대 미국 법무장관으로 임명되어 35세의 젊은 나이에 내각에 합류했습니다. 경험 부족에 대한 비판도 있었으나, 재임 동안 민권 운동 보호와 마피아 등 조직범죄 소탕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청소년 비행 및 청년 범죄 대통령 위원회 위원장 지명]

청소년 비행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한 존 F. 케네디 행정부에 의해 관련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빈곤 지역을 직접 방문하며 범죄의 원인이 인종 차별과 기회 부족에 있음을 결론짓고 빈곤층의 자립을 돕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1963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가장 가까운 조언자이자 친형이었던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깊은 충격에 빠졌음에도 그는 린든 B. 존슨 대통령 체제 하에서 몇 달간 법무장관직을 유지했습니다.

1964

[미국 법무장관직 사임]

린든 B. 존슨 행정부에서 법무장관직을 계속 수행하다가 뉴욕주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매사추세츠 출신이라는 이유로 '뜨내기(carpetbagger)'라는 비판을 받았으나 선거 운동에 집중했습니다.

1965

[뉴욕주 연방 상원의원 취임]

공화당 현역 의원인 케네스 키팅을 꺾고 뉴욕주를 대표하는 미국 연방 상원의원으로 취임했습니다. 상원에 진출한 그는 베트남 전쟁 개입을 반대하고, 낙후된 지역사회의 민간 기업 투자를 유치하는 등 빈곤 문제 해결에 앞장섰습니다.

1968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출마]

1968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출마를 선언했습니다. 흑인, 히스패닉, 젊은 층 및 빈곤층의 강력한 지지를 이끌어내며 유진 매카시 의원과 함께 경선 레이스의 유력한 주자로 떠올랐습니다.

[캘리포니아 프라이머리 승리 및 피격]

대선 경선의 분수령이었던 캘리포니아 프라이머리에서 승리한 직후 자정 무렵 로스앤젤레스에서 24세의 팔레스타인 청년 서한 서한에게 총격을 당했습니다. 이 피격은 그가 이스라엘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자행된 보복이었습니다.

[로버트 F. 케네디 서거]

치명적인 총격을 받은 지 25시간 만에 42세의 나이로 끝내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시신은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으며, 그의 죽음은 형 존 F. 케네디의 암살과 더불어 많은 음모론과 분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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